잡동사니

호노마키,조각글] 네가 행복하길 바랬어.

비좀 2015. 11. 30. 21:50

"갑자기 왜이러는건데?!"

손목을 잡혔다. 얼마나 쎄게 잡혔는지 손목이 부러질 것 같았다. 그렇게 쎄게 잡힌 손목보다 등 뒤에서 꽃히는 시선이, 내 귀에 꽃힌 목소리가 더 아팠다. 나는 천천히 몸을 뒤로 돌렸다. 그곳엔 눈 끝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있는 마키가 있었다.

"갑자기 그런말을 툭 내뱉으면 '아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왜.. 왜그러는거냐고? 내가 싫어졌어? 이젠 내가 질려? 대체 뭔데?!"

고통스럽지만 말해야겠지. 나는 한번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네가 행복해지길 바래서 그랬어.

"......"

입을 열었으나 이상하게 말은 나오지 않았다. 목이 잠긴걸까, 헛기침을 한번 해 보고 다시 입을 열어보았다. 네가 행복하길 바래서 그랬어. 또박또박 발음한 것 같은데, 입 밖으론 숨소리 빼고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사실.. 알고 있지? 너도."

"...!!"

투명했던 마키의 눈물은 피눈물이되어 마키의 볼을 따라 흐르고 있었으며, 이쁜 자주색 눈동자는 검게 물들었다. 마키의 입은 한기를 내뿜었고, 마키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손목을 뿌리치려 했지만 마키의 손은 내 손목을 잡은채로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거짓말하지 마, 사실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손목을 잡고 있던 마키의 손이 점점 위로 올라왔다. 뒷걸음질 치고 싶었으나 마키가 온 몸에서 내뿜는 한기 까닭일까,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었다.

"나는 너의 솔직함을 보고 반한거란말이야. 자. 빨리 말해, 말하라고..!! 나의 행복따윈 안중에도 없었다고..!!!!"

"칵..카흑..!!"

슬금슬금 올라오던 마키의 손이 내 목을 졸랐다. 아니야, 아니야 마키. 나는 네 앞에서 언제나 솔직했어, 네 앞에서 말한건 전부, 전부 진심이었단 말이야. 마음속으로 수백, 수천번을 외쳣으나 마키한텐 닿지 않은 듯 했다. 목을 조여오는 힘은 점점 더 강해졌고, 내 눈 앞은 점점 캄캄해졌다.

-

"칵..카흑..!! 커헉.. 컥..컥..허억..헉.."

목을 만져보았다. 내 목을 조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벌벌 떨리는 턱을 진정시키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흐린 걸 제외한다면 언제나와 똑같은 풍경이었다. 역시, 방금전의 그건 꿈이였구나. 다행이다.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상체를 일으켰다. 숨을 전부 가다듬고 나니 옷이 축축하게 젖어 몸에 들러붙은게 느껴졌다. 셔츠 속으로 손을 넣어 배를 살짝 쓸어보았다,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수건으로 몸이라도 닦을 생각으로 침대에서 일어 난 순간..

"어, 어?"

다리가 한번 휘청거리더니 나는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빨갛게 달아오른 무릎을 쓰다듬고 있었는데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위를 올려다보니 나를 내려다보는 유키호가 보였다.

"언니, 무슨일이야?"

"아, 그게.. 수건을 가지러 내려가려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런건 날 부려먹으면 되잖아, 평소엔 잘만 부려먹더니.. 수건, 가져다 줄게. 다친덴 없지?"

"응."

유키호는 방을 나가려다가 멈칫하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언니, 그런데 병원 갈 생각 진짜 없는거야? 일주일이나 앓았잖아. 단순한 감기는 아닌 거 같은데."

"아. 아니야. 괜찮아지고 있어, 정말인데.."

"괜찮아지고 있다는 사람이 걷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서 넘어져? .. 안 되겠다. 몸 닦고 옷 갈아입어. 병원, 데려다줄게."

"아, 아니야! 혼자서도 갈 수 있어."

"정말? 그럼 오늘 갈거야?"

역시, 병원에 가야하려나. 제일 가까운 병원은 마키가 있는 병원이었고, 그 다음으로 가까운 병원은 거기서 한참은 더 가야했다. 역시, 병원에 가기 싫어졌다. 마키를 만날 수도 있었으니까.

"어, 음, 그, 그게..."

"..역시 데려다줘야겠어."

"아, 아니야. 오늘 갈게. 나 혼자서."

하지만, 유키호와 같이 마키를 만날 수도 있다는건 더 싫었다.

-

"......"

진찰실의 문을 열자 만감이 교차했다. 이런것이 운명이라면 하늘에다가 침이라도 뱉고싶은 노릇이었다. 루비와도 같이 빛나는 붉은 곱슬머리, 자수정을 연상케하는 보라색 눈동자, 촉촉한 입술. 너무나도 보고싶었지만 다신 보고싶지 않았던 그녀가, 하얀 가운을 입은채 자리에 앉아있었기 떄문이었다. 어떻게 말해야하나. 그냥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을까? 아니면 오랜만이라도 인사라도 해야할까? 그냥 집에 돌아갈까? 머리는 굴러갔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내 몸을 움직인건 마키의 말 한마디였다.

"어서오세요 환자분, 어디가 불편해서오셨나요?"

"아."

새것처럼 보이는 가죽 의자에 엉덩이를 붙히고, 마키가 한 것 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감기 걸린 것 같아요."

내 얼굴을 보지 않고 종이에 뭔가를 끄적끄적, 모니터를 보며 마우스 휠을 드르륵, 소리나게 몇번 굴리고선 체온계를 집더니 내 귀에 꼽았다. 딸깍, 삐비빅, 삐이 - 마키는 체온계를 보더니 "열이 심하네요." 라고 말하며 다시 한번 종이에 뭔가를 적었다. 드디어 내 얼굴을 마주보나 싶었더니 "환자분, 입 좀 벌려주시겠어요?" 라는 말 한마디만 할 뿐이었다. 나는 조용히 입을 벌렸다. 차가운 쇠막대가 입 안을 조금씩 헤집었다. 동굴탐험하듯 입 안을 조명까지 비추며 쳐다보던 마키는 조명을 몆번 꺼봤다 켜봤다 하더니 다시 몸을 돌려 종이에 뭔가를 적었다.

"목이 심하게 부으셨네요, 언제부터 이랬었던거에요?"

"지난주요."

"약.. 3일치 처방해드릴게요, 수면제랑 해열제 포함된거라 약 드시고 나시면 좀 졸리실거에요, 주사도 처방해드릴테니까 저쪽으로 가서 맞고 가세요. 아, 그리고 약 3일치 다 드시면 경과 봐야되니까 꼭 한번 들러주시구요."

"....."

많은 말을 하고 싶었다. 넌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나? 나는.. 많이 힘들게 지냈어. 먼저 보지 말자고 한건 나인데, 그래도 너를 너무 보고싶더라. 정신이 아프면 몸이 아프다고했나? 평소에는 앓지도 않던 감기 이렇게 심하게 앓아본건 예전에 연습한답시고 몸 막 굴릴때 빼곤 처음이야. 그런데 병원엘 못가겠더라. 우리집 근처에 있는 병원이 이곳이잖아? 여기가 아니면 한참은 더 가야된다구, 그런데 이 병원에 오면 널 마주칠 것 같은거야. 그게 너무 무서웠어. 결국 너무 아파서 이곳에 오긴 했는데.. 이게 무슨 장난질인지, 만약에 널 본다고 해도 병원 복도에서 마주치는 거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너한테서 진찰을 받게 되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두어 시간 더 걸려도 다른 병원으로 갈 걸 그랬어. 어때. 마키? 넌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하지만..

"알겠어요. 의사 선생님."

내 입에선 저 한마디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

오랜만에 먹어본 커피는 매우 썼다. 카페라떼정도는 시럽 없이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픽, 나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왔다. 카페라떼라. 마키와 헤어질때 시킨 커피도 카페라떼였었지 아마? 아니, 잘 기억이 안난다. 프라푸치노였던가? 여하튼 커피잔이 거의 다 비어가는데도 마키는 그림자도 비추지 않았다. 많이 바쁜걸까.

- "네, 약 잘 챙겨 드셨나보네요. 열도 없고. 목 부은것도 많이 가라 앉으셨어요. 그런데.. 환자분, 혹시 7시에 시간 되시나요? 하고싶은 얘기가 있는데요..."

"..하필이면 약속장소를 이곳으로 잡다니, 악취미야. 마키."

마키와 인연이 끊긴, 아니, 인연을 끊은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다. 이 자리에 앉아 커피를 홀짝거리니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과거의 일이 생각났다. 말끔한 정장을 차려 입은 미남, 그리고 그 옆에서 방긋방긋 미소를 짓고 있었던 마키. 그걸 생각하니 커피가 아니라 술을 마시고 싶었다. 벌써 30분이나 지났는데 안 나오는 걸 보면 나올 생각이 없는 건 아닐까? 차라리 편의점에서 술이나 사서 집으로 돌아갈까?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쳐다보는 도중, 문이 열리고, 마키가 들어왔다. 마키와 나는 눈이 마주쳤고, 마키는 조용히 내 앞 자리에 앉았다.

또 한번,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까. '의사 선생님'? 아니면 '니시키노 씨'? 역시 부르던 대로 불러야하나? 눈을 아래로 내려깔며 탁자를 보던 중 자그마한 케이스와 익숙한 목걸이를 내미는게 눈에 들어왔다.

"받아, 호노카."

"응?"

목걸이는 내가 1년을 기념하며 마키에게 준 선물이었지만, 저 케이스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케이스를 손에 올리고 천천히 열어보았다. 눈꽃처럼 세공된 보석, 그리고 눈꽃 가운대엔 반짝거리는 다이아몬드가 박혀있었다.

"..목걸이는 말 안해도 알 거고, 그 귀걸이는.. 너한테 주려고 했던 선물이었어, 처음엔..그냥 내가 쓰려고 했는데, 볼 떄 마다 네 생각이 나는거야. 그래서.."

"..안 돼 마키, 난.. 나는.. 이런 거 받을 수도 없고, 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인걸."

"받지 않으면 버릴 예정이야. 이젠 의미가 없는 것들이니까."

나는 케이스를 닫고 탁자에 내려 놓았다. 마키는 그걸 쓸쓸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왜 불렀을것같아?"

"글쎄.. 잘 모르겠어."

"..그래, 너를 부른 이유가 그거야.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왜 너를 보자고 한건지. 그리고.. 우리가 왜 헤어졌어야만 했는지."

"......"

그 말을 들으니 마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볼 수 없었다. 나는 탁자를 향해 눈을 내리 깔았다.

"우리가 헤어진지 한 달이 지났어, 그런데 아직까지 헤어진 이유조차 알 수 없단말이야. 그게 날 더 힘들게 만들어."

"..나는.. 전부 얘기했어. 그 자리에서."

얼마 전에 꾼 악몽이 생각났다. 내가 그 악몽 속에서 말하려고 했던 건 - 

"나는, 네가 행복해지길 바랬어. 그래서 헤어진거야."

"..아직도 그 말을 하는거야?"

"나는 네 앞에서 언제나 솔직했어. 정말이야. 마키."

"내가 행복하길 바랬다면 그러질 말았어야지. 정말로 그게 다일리가 없잖아..!!!"

..사실, 이 이상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떄문에 마키가 괴로워하고 있었다면 말 해야겠지.

"남자를 봤어."

"뭐?"

"길을 걷다가, 우연히 너를 본거야. 그래서..그래서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네 옆엔 남자가 있었어. 말끔히 차려입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너랑 팔짱을 끼고, 너와 같이 웃는. 남자가."

"......"

"네가 바람을 폈네.. 하면서 너를 탓하려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 남자 옆에서 너는 행복해보였고, 그 남자가 손목에 찬 시계를 보면서 생각해봤어.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건 무엇이 있을까, 그 남자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건 무엇이 있을까. 나는.. 나는.. 네가 행복해지길 바랬어. 그래서.. 그래서 그런거야."

"....하아."

무언가에 읊조리듯 말을 끝낸 나는 마키를 힐끔 쳐다보았다. 마키는 곱슬머리를 격렬하게 꼬고있었다.

"그 남자는 원장님.. 아니, 파파의 소개로 안 남자야. 맞아, 그 사람.. 좋은 사람이었어, 똑똑하고, 유머감각 있고, 겸손할 줄 알고, 나를 챙겨주는 좋은 사람이었지. 처음엔 둘 다 만나기를 꺼려했는데, 한번 두번 만나다보니 친해지더라, 그 남자랑 나는.. 잘 맞았던 것 같아."

"그래, 그러니까 나는 - "

"그런데 헤어졌어. 이주 전 쯤인가? 그 남자 눈에선 눈물이 나왔고, 파파한텐 욕을 먹었지. 파파한테 혼날 땐 좀 억울하긴 했지만, 그 남자를 보면선 아무 생각 안들었어. 어차피 헤어질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거든. 널 위해서."

"...뭐?"

"너랑 헤어지고 나선 이 남자와 결혼해버릴까..하는 생각도 하긴 했었지,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잘 안되더라. 그 사람한테서 너의 모습을 찾고 있는 내가 너무 쓰레기같았어. 그래서 그냥 헤어져버렸지. 물건이야 뭐로든 대신 할 수 있는데, 사람을 대신 할 건 아무것도 없더라."

"......"

"이렇게 말을 뱉어놓고 보니 너를 만나고 싶었던 이유를 알것같아. 나는.. 마지막으로 푸념을 하고 싶었던거야. 네가 그렇게 떠나버려서,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마키."

뭐라도 말하고 싶었으나 마키의 말이 내 입을 틀어 막았다.

"참 이상하네. 그렇게나 만나고 싶었던 너였는데, 한번만 더 만나면 내 가슴속에 있던 게 풀릴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쌓여만 가는 것 같아."

"......"

그렇게 말하는 마키의 눈 끝엔,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그 물방울이 탁자에 한방울 떨어지는 것을 시작으로, 마키는 울기 시작했다. 한달 전 그날처럼.

"..이게.. 이게 뭐야...나는.. 나한테는 너만 있으면 됐었단 말이야, 누가..누가 언제 내 생각 해 달랬냐고."

질척질척한 울음소리 속에 섞이는 마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에겐 절규로 들렸다.

"나한테 있어서 너는 나의 전부였어.. 그런데.. 너한테 있어서 나는 뭐였어?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얼마나 힘들었는데,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너를 찾아 헤매. 네 손길이 닿은 물건 하나 하나 볼 떄마다 네 생각이 나.. 이게.. 이게 뭐냐고. 너는 나의 전부였고, 그래서 네가 세상에서 제일 좋았는데..이제는..이제는.. 네가 제일 미워."

그 울음의 무게 앞에서,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고, 목소리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하였다.

"..목걸이랑 귀걸이는..두고 갈거야. 버리던지, 끼고 다니던지. 네 마음대로 해. 그래.. 그래도, 그동안 고마웠어, 네가 행복하길 바랄게."

쏟아지는 눈물을 필사적으로 참으면서 마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 잘 가, 네가 행복하길 바랄게."

마키는 그 말을 듣고 잠시 가만히 서 있더니, 아무 말 안하고 자리를 떳다. 테이블에 남은건 지난 세월의 흔적과 내가 망쳐버린 미래, 그리고 네가 없는 자리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한줄기 폭포가 되어 탁자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