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

히마사쿠/조각글] 상처를 낫게하는 법

비좀 2016. 1. 27. 23:34

1

재잘거리는 소리가 귀를 자꾸 찔렀다. 수업 시간일탠데 누가 이렇게 떠드는거야. 나는 엎드린채로 눈을 꿈뻑꿈뻑 뜨며 교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10시 23분, 2교시가 끝난 시간이었다. 어라, 벌써 2교시가 끝난건가.. 그렇다면 조금 더 자도 되겠지?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를 깨우려는듯 햇살이 내 눈꺼풀 위로 아른거렸지만 나는 눈을 더 꾸욱 감고 몸을 뒤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햇살은 내 눈꺼풀 위를 떠나지 않았다. 그것도 짜증나는데 재잘거리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걔 뭐냐 그... 야, 왜 있잖아. 존댓말 쓰고 가식 쩌는 애."
"아, 후루타니?"
"응, 걔 말이야. 진짜 재수없지 않냐?"

히마와리 얘기를 하는건가? 잠깐, 지금 재수없다고? 그래, 히마와리가 재수가 없긴 하지. 시도 때도 없이 잔소리에, 맨날 나를 깔보기나 하고, 항상 어른인 척. 그것도 모자라서 커다란 가슴을 흔들고 다니는 그 꼴이란.

"맞아 걔 진짜 재수없어.. 말하는거 X나 싸가지 없다니까?"
"지가 선생인줄알아 X친년 완장 찼다고 나대는거 진짜 꼴보기 싫어"

히마와리.. 학생회에 들어갔다고 좋아하더니 여기저기 잔소리 하고 다녔던 건가.. 잔소리는 나한테 하는 거로 충분하지 않아? 완장 차고 우리한테 뭐라고 하는건 머리 벗겨진 학생 주임으로도 충분 하잖아. 너까지 학생들한테 잔소리를 할 필욘 없었다구.

"그리고 은근히 잘난척 쩐다니까? 저번애 체육복 입은거 봤냐?"
"아 그거? 난 무슨 체육관에 젖소가 있는가 했다. 괜히 쫄티입고와서 뭘 그렇게 흔드는지 진짜"

..그 체육복은 내가 빌려준 건데, 쫄티라서 미안하게 됐네요. 나는 귀를 닫고 잠을 청하려 했지만 녀석들이 낄낄거리는 소리가 귓 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재잘거리는 걸 계속 듣고 있자니 속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걸 멈출 수 없었고, 그래서 나는 눈을 번쩍 뜨고 상체를 일으켰다.

"야."

눈에 낀 눈꼽을 때고 내 책상 앞에서 재잘거리던 녀석들을 바라봤다. 아, 이녀석들. 저번에 어떤 애들 삥 뜯다가 히마와리한테 걸려서 벌점받은 애들 아니야?

"응?"

녀석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뭐 떄문에 자기들을 부른지도 모르는걸까,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끓어 오던게 폭발했다.

"그렇게 히마와리가 재수 없으면 걔 앞에서 말해, 뒤에서 재잘대지 말고, 시끄러워서 못살겠네 진짜."
"아니 내가 뒷담을 까건 니가 뭔 상관인데?"
"야, 쟤도 학생회 애잖아. 자기 친구 까이니까 저러는거 아니야? 아주 우정이 눈부셔서 빛이 난다 빛이 나."
"그냥 자는거 깨워서 짜증난건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거야.. 걔 재수없는거 맞아. 누가 뭐래? 그런데 왜 자는 사람 앞에서 시끄럽게 떠드냐고."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왼쪽에 있는 녀석을 밀쳤다. 잠깐 주춤하면서 눈이 동그래 지더니 동그래진 눈은 이내 짜증때문에 잔뜩 찌푸려졌다.

"뭔.. 어이가 없네? 야. 교실 니가 전세냈냐? 떠들어도 그냥 자는 애들 많은데 괜히 X랄이야.."
"걔들 책상 앞에서 떠들어 봐. 걔들은 안 그러나. 그것도 남 뒷담이나 까놓고 뻔뻔하게.."

이렇게 말하자 더 할 말이 없었는지, 나한테 밀쳐진 녀석은 나를 밀치려고 손을 뻗었고, 나는 그 손목을 낚아챘다.

"아! 야! 이거 안 놔?!"
"사과 해."
"뭔 사과를 하라는거야 이게 진짜 미쳤나..?!"
"내 잠 깨운거랑, 그리고 덤으로 히마와리한테도."
"이게...!"

끝까지 앵앵대는 목소리로 나한테 욕을 뱉어대는 그 입이 너무나도 짜증났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얼굴에 한 방...

..을 날리려고 했으나 공중에 뜬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주먹을 날리려고 했으나 움직이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내 팔뚝을 잡은 온기가 느껴져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히마와리가 험악한 표정을 짓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교실에 없었던 것 같은데, 화장실이라도 다녀온걸까?

"사쿠라코.. 엄연히 학생회 임원씩이나 되서 이런 주먹다툼이나 하다니.. 이제 당신이 애도 아니지 않습니까!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말로 해결을.."
"시끄러워! 지금 내가 누구떄문에 화를 내고 있는건데..!"

나는 히마와리를 밀쳤다. 끽, 끼익. 마룻바닥에 신발이 거칠게 끌리는 소리가 나다가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사물함을 등진채 눈을 찡그리고 뒷통수를 쓰다듬는 걸 보면 사물함이 머리라도 박은걸까.

"사쿠라코..!"
"아니, 저기, 그게.."

변명, 아니, 최소한의 사과라도 하려 했으나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히마와리의 손이 내 뺨을 때렸기 때문이다. 처음엔 어이가 없었고, 그 다음엔 화가 났다. 지금 내가 누구 때문에 화를 내고 있는건데, 나쁜 건 쟤들인데, 왜 내가 맞아야 돼? 그렇게 생각하자 머릿속이 하얘졌고, 나는 히마와리에게 달려들었다.

-

2

안 닫힌 창문 틈새로 거센 바람이 불자 관자놀이의 상처가 따끔거렸다. "아얏." 하는 신음소리가 새어 나가자 종이 한장 너머로 사쿠라코의 시선이 느껴졌다. 사쿠라코에게 하고 싶은 말은 너무나도 많았지만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최소한 무슨 일때문에 싸우는 거냐고 물어라도 봤어야 했는데, 다짜고짜 사쿠라코를 몰아 새운것도 모자라서 한번 밀쳐졌다고 이성을 잃고 사쿠라코한테 뺨따귀를 날린 꼴이란.. 자신의 행동이 너무 부끄러웠다.

툭,툭, 학생회 부실에선 서류가 쌓이는 소리와 숨소리만 쌓일 뿐이었다. 차라리 선배님들이 있다면 이렇게 분위기가 무겁진 않을탠데 하필이면 선배님들도 자리를 비운 상황이라 정적이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이럴 땐 사쿠라코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어줬었는데, 내가 한 일 때문에 단단히 삐진걸까, 사쿠라코는 자기 혼자 멋대로 삐졌다가 금방 기분을 풀고 혼자 멋대로 다가오는 아이라서 이럴 떈 어떻게 해야하는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럴 땐 역시 먼저 말을 붙이는 게 맞겠지.

"저기, 사쿠라코" / "저기, 히마와리."

서로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말이 튀어나오자 나는 입을 틀어 막았다. 이러면 더 말 걸기 어려운 분위기가 되잖아. 조금 더 빨리말하거나 조금 더 느리게 말할걸.

"머, 먼저 말해. 히마와리."
"아, 아닙니다. 사쿠라코부터 할 말이 있으면 하세요."
"....그게... 으음."
"......"

사쿠라코는 제자리에 앉아 서류 귀퉁이를 만져댈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역시, 내가 먼저 입을 열어야 하려나.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사쿠라코."
"으, 으, 으응?"
"왜 싸운건가요? 저 보고 학생들이랑 트러블을 만들지 말라고 한건 당신이면서."
"......"

뒷 말은 빼는게 나았으려나. 후회했으나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말은 되돌릴 수 없으니 조심하라고 사쿠라코한테 그렇게 신신당부를 한 게 나인데, 내가 말 실수를 할줄이야. 나는 속으로 자기 자신한테 꿀밤을 수십번 먹였다. 바보, 바보, 당신은 바보에요! 히마와리.

"벼, 별거 아니야. 그냥 자는 사람 앞에서 시끄럽게 떠들길레 그냥 몇마디 한 것 뿐이야."
"......"

나를 똑바로 보지 못하는 눈, 점점 더 빨라지는 서류 귀퉁이에 비비적 거리는 손길.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사쿠라코, 제가 말했잖아요? 당신은 거짓말하면 티가 엄청 나니까, 거짓말은 안하는게 좋다고."
"거,거, 거짓말 같은거 아니야! 진짜라구!"
"그런 일로 싸울리가 없잖아요. 사쿠라코의 잠귀가 어두운건 제가 제일 잘 알아요. 설령 떠드는게 들렸다고 해도 그냥 다시 잤을탠데."

그러다가 문득, 사쿠라코와 싸우고 있던 애들이 생각났다. 그 애들은.. 선생님들은 물론이고 선배님들도 예의주시하고 있던 불량학생들이었지. 그리고 그 예의주시에 걸맞은 언행을 보여주는 아이들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그 아이들이 당신 욕 하는걸 들은건가요?"
"아니. 그건 아니고.."
"그건 아니고? 욕하는걸 들은건 맞다는 건가요?"
"아, 아니. 그. 그게."

사쿠라코의 얼굴이 점점 더 붉어졌다. 

"그렇다면 당신의 친구가 욕을 들었다던지."
"......그, 그러니까. 자, 잠깐만."

저렇게 당황하는 사쿠라코를 보니 갑자기 사쿠라코가 날 밀치면서 한 말이 생각났다. 

-[시끄러워!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화를 내고 있는건데!]. 

"....아."
"자, 잠깐만. 아니야!"

내가 눈치 챘다는 걸 알아 차린걸까, 사쿠라코는 팔을 뻗더니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뭐가 아닌가요."
"그, 그러니까.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런가요, 그렇다면 아침에 누구 때문에 화를 내고 있던건지 알려주시지 않겠어요?"
"가. 갑자기 그 얘기는 왜나와? 히마와리 바보!"
"고마워요, 사쿠라코. 하지만 다음부턴 그런 얘기는 그냥 흘려들으세요. 저는 그런 저급한 이야기에 상처 입지 않으니까요."

부인하기도 지친걸까, 사쿠라코는 고개를 숙인 체 아무말도 안하고 있었다. 꾸깃꾸깃해진 서류 하나가 사쿠라코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쿠라코 옆 자리에 앉았다.

"..미안해요, 당신의 이야기를 먼저 들었어야 했는데. 앞으론 덮어놓고 당신만을 탓하지 않을게요."

부들부들 떨리는 사쿠라코의 등을 두들겼다. 그것이 무언가의 버튼이라도 된 걸까, 고개를 숙였던 사쿠라코가 고개를 들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얼굴에 남았네, 손톱 자국."
"아.. 걱정 마세요, 금방 낫겠죠 뭐."

상처 부근을 살짝살짝 긁었다. 사쿠라코의 손톱에 긁힌 것 치곤 별로 티가 안나기도 했고, 방금 전보다 따끔 거리는것도 덜해졌으니 금방 낫겠지.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해도 사쿠라코는 내 얼굴에서 눈을 때지 않았다.

"저기.. 사쿠라코?"
"......"

점점 더 가까워 지는 시선, 나는 몸을 뒤로 물렀지만 사쿠라코가 내 어깨를 붙잡는 바람에 그것도 못하게 되버렸다. 이내 얼굴과 얼굴이 맞닿았고, 사쿠라코는 입을 벌리더니 - 

내 관자놀이 부근을 햝기 시작하였다.

"자, 잠깐, 아윽. 사쿠라코! 뭐하는 짓인가요..?!"

사쿠라코의 혀는 부드러웠으나 상처때문에 관자놀이 부근이 너무나도 쓰라렸다. 낼름, 낼름, 낼름. 사쿠라코의 혀는 열번 정도 상처를 햝더니 그제서야 떨어졌다.

"맞아, 이런건 침 바르면 금방 낫지! 나도 미안해, 히마와리."

다짜고짜 침을 바르면 어쩌란건가요?! 라는 말을 하려고 했으나 사쿠라코의 미소때문에 그 말은 쏙 들어가버렸다. 

상처의 따끔거림이 방금 전의 잔소리와 함께 가슴으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