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마법사 레미를 보며 : 우리들은 모두 꼬마 마법사였다.
들어가며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중 '꼬마 마법사 레미'를 알지 못하는 분은 그리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한때는 이마트를 비롯한 대형 쇼핑몰 완구점에서 눈만 돌리면 레미 장난감을 볼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레미가 히트한지 거의 30년이 흐른 지금 애청자가 아닌 이상 이 작품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분은 그리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만해도 레미 하면 장난감만 생각났지 무슨 내용인진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간략하게 내용을 축약해 보자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할 용기를 얻고 싶어서' 마녀가 되고 싶어 하던 초등학생 3학년인 도레미가 우연히 '뚜리뚜리 마법의 성(원문: 마키하타야마 리카의 마법당)'이라는 곳에서 장사를 하던 마녀, 마조리카를 만나 수습마녀로서 친구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 정도로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기당 48~51화, 총 4기로 이루어졌으니 편수만 200화가 넘어가는 초 장편 시리즈인데요. 1기가 지날 때마다 1년이 지나가서 첫 등장 시엔 저학년으로 분류되는 초3이었던 도레미 일행이 마지막 시즌에선 초등학교 졸업반이 됩니다. 1년이 52주고 주당 한편 방영된다는 걸 생각해 봤을 때 레미 시리즈를 실시간으로 챙겨본 초등학생들은 제법 몰입할 수 있었겠네요. 아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도 그런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일상 속의 비일상
유감스럽게도 저는 레미가 한창 방영할 땐 디지몬에 푹 빠져있었던 터라 초등학생 때 기억이 가물가물한 지금에 와서야 뒤늦게 레미를 몰아보게 되었는데요, 본 작품을 보고 처음 느낀 건 '특이하다'였습니다.
현생을 살다가 악의 조직 따위가 나타나면 변신해서 싸우는(그리고 싸우는 과정은 대부분 인적이 없는 곳에서 이루어져서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가 뚜렷한) 베리베리 뮤우뮤우, 캐릭캐릭 체인지 등의 여타 마법소녀물과 달리 레미에선 현실과 판타지가 뒤섞여있었거든요.
그리고 마법소녀인 레미와 친구들은 마법을 부려 악역을 쳐부수는 대신,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문제를 해결하지요.
이런 특성 덕분에 레미 시리즈는 여타 아동 애니메이션보다 몰입하기 쉽다는 장점을 가집니다. 입만 열면 거짓말과 허풍을 내뱉는 반친구랑 엮이거나, 슬슬 유치하다고 취급받을 만한 괴수형 장난감에 푹 빠져 반에서 놀림받는 등장인물이 나오는 등 초등학생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거든요.
또한 아동 애니메이션에선 흔히 볼 수 없는 현실적이고 어두운 문제들을 조명해 주었다는 점 또한 이색적인 요소 중 하나였습니다. 이혼 가정 어서 자라는 아이의 슬픔이나, 술집에서 일하는 어머니를 둔 아이의 양가감정, 등교를 거부하는 아이의 트라우마를 비춰주는 등 요즘 매체에서도 보기 힘들 이야기를 따듯한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거든요.
이런 요소들이 합쳐져 200화가 넘는 애니메이션을 시청하는데도 크게 피로감을 못 느꼈습니다. 제가 초등학생일 적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제가 알지 못했던 문제들을 하나하나 짚어주니 빠질 수밖에요. 레미는 아동용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지만, 나이를 먹고 나서 봐도 몰입할 수 있게끔 제작된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마법은 왜 필요할까?"
시즌이 바뀔 때마다 다루는 메인 플룻이 달라지는데다가, 반 친구들의 문제를 다루느라 통일된 주제를 찾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꾸준하게 다루는 이야기는 존재합니다. '마법은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질문은 미성숙한 레미와 친구들은 물론, 마법이 일상에 녹아든 마녀들의 입을 통해 잊을만하면 한번씩 나오는 주제입니다. 주로 모든 것을 손으로 만들어내야하는 인간과, 만사를 마법으로 해결 할 수 있는 마녀들을 대조하며 보여주지요.
그리고 해당 주제가 나오는 에피소드는 제법 무게감 있게 그려집니다. 인간의 힘에 감화되어 마법을 쓰지 않고 나오는 마녀가 나오거나, 마녀임을 포기하고 인간계에서 유랑하는 마녀가 나오는 식으로요.
그래서 저 또한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마법은 정말 필요한걸까?
저는 그 답을 레미 시리즈의 말미에 가서 어렴풋이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마녀를 포기한 마녀
레미 시리즈의 마지막 시즌, 4기의 40화에서 레미는 항상 가던 똑같은 하교길에서 벗어나 낯선 길을 탐험하던 중 유난히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어느 집앞에서 멈춰섭니다.
우연히도, 그 집의 주인은 마녀라는 것을 숨기고 전세계를 유랑하며 유리 공예를 하는 마녀. 미래(미라이)였죠.
레미는 미래와 교감하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가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듣게됩니다. '마녀가 인간계에서 살기 위해선 여러 곳을 떠돌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얘기였죠.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레미 세계관의 마녀는 천년을 훌쩍 넘게 사는 장생종이거든요. 미래는 이 사실을 알려주며 레미에게 넌지시 경고합니다. 마녀가 되면 주변인들을 떠나 보내야 한다고, 그래도 정말 괜찮느냐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오랜 유랑 생활에 외로움을 느낀 것인지, 마녀로서 살아갈 거라면 자신과 함께 다른 나라로 떠나자는 제의도 건넵니다.
레미는 제안에 선뜻 답을 하지 못합니다. 레미에게는 주변인도, 마법도 모두 소중했으니까요. 그렇게 하루 종일을 고민하다가 결국 뒤늦게 미래의 집을 찾아가지만, 미래는 그 집에 없었습니다. 그곳에 남아있는 건 미래와 레미가 함께 만든 유리잔 뿐이었죠.
이 일을 겪은 뒤, 마녀가 될지 인간으로 남을지 고민하던 레미는 마녀를 포기합니다. 좋아하는 남자에게 고백하기 위해 마녀가 되고 싶었지만, 이는 굳이 마법을 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유리
앞의 에피소드에서 '유리'라는 소재는 제법 비중있게 다루어집니다. 에피소드가 진행될 동안 마법은 단 한 번도(!) 쓰지 않는데 비해 유리 공예로 무언가를 만드는 장면은 매우 공들여 묘사할 정도로요. 즉, '꼬마 마법사' 라는 정체성을 포기하면서까지 유리를 보여줘야 할 정도로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뜻이겠지요.
그렇다면 본 에피소드에서 유리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에 대해선 작중의 대사를 빌려 설명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미래는 유리를 두고 "움직이지 않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불변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시간을 들여 관찰하면 천천히 변화하는 것이라는 설명이죠.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들의 일상 또한 이와 비슷하지 않나요? 일상은 언제나 똑같이 흘러가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천천히 변해가니까요.
이렇게 생각해보니, 본 에피소드가 하나의 거대한 질문처럼 느껴졌습니다. '너희들은 일상 속으로 나아갈거야? 아니면 비일상을 향해 떠날거야?'
그리고 레미는 그 질문에 답을 했죠. 마법을 포기하는 식으로요. 즉, '마법이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다' 라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레미 제작진들은 마법에 무슨 의미를 담고 있었기에 이런 답을 내렸을까요?
우리들은 모두 꼬마 마법사였다.
잠시 다른 얘기를 해보자면, 저는 어렸을 때 소닉 시리즈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드넓은 안방 침대를 방방 뛰어다니며 소닉의 점프를 흉내내는 소닉 놀이도 했었죠.
아니, 흉내라는 말은 적절치 않은 말인것 같습니다. 적어도 소닉 놀이를 할 때의 저는 스스로가 소닉이 되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침대 위를 도화지 삼아서 스테이지를 그려나가고, 그 위를 뛰어다니며 에그맨이 만든 로봇들을 점프로 박살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실로 훌륭한 상상력이네요. 아무것도 없는 침대 위를 뛰놀며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니.
그런데, 여러분들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없지는 않을겁니다. 소꿉놀이를 하며 상상속의 가정을 불러오고, 장난감 칼을 휘두르며 스스로 파워레인저가 된 적은 누구에게나 있을테니까요.
우리들에겐 모두 머릿속의 공상을 현실로 끄집어내는 힘, 상상력이 존재했습니다. 실로 마법같은 힘이지요.
레미 시리즈의 제작진들 또한, 어린이들의 상상력이 마법같다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공상을 현실로 끌어오는 마법이 종종 나오는데다가... 마지막 화를 보니 이런 추측이 들 수 밖에 없더라구요.
졸업
레미 시리즈 대망의 마지막 화는 초등학교 졸업식을 그립니다. 이와 동시에 레미는 지난 4년간 함께해왔던 마법과도 작별을 하게되지요.
모든 졸업식이 그렇지만, 초등학교 졸업식은 유달리 떠나보내야 하는 게 많습니다. 저같은 경우엔 어머니가 '이제 초등학생이(어린애가) 아니니까' 라는 이유로 장난감 하나 둘씩 버렸고,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공부해야 하니까' 하며 초등학교 재학 중 쭉 다니던 태권도 학원을 끊어버렸던 기억이 있네요.
하지만 뒤 돌아 생각해보니 이것보다 씁쓸한건, 다름 아닌 상상력과의 작별이었습니다. 저는 어느새 소닉 놀이를 하지 않게됐고, 장난감 칼을 휘두르며 놀게 되지도 않게 됐습니다. 그런 건... 중학생이 하기엔 너무 유치해보이니까요.
그렇기에 레미는 마법을 떠나보내야 했던겁니다. 현대의 마법인 상상력은 보통, 늦어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될 때 즈음을 기점으로 작별하게 되니까요. 이제 우리와 레미를 기다리는 건 상상과 즐거움 따윈 하나 없는 우중충한 현실 뿐...
... 일까요?
일상 속에서 쌓아 올려진 것
레미 시리즈의 후반은 울적하고 씁쓸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영원히 함께 할 것 같았던 친구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거든요.
원래 미국에서 살았던 모모는 아버지의 전근이 끝나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하고, 보라는 연예계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타지역 중학교로 진학을 결정합니다. 사랑이는 부모님이 재결합하며 터를 잡을 부산으로 이사를 가야했죠.
심지어 유치원 때부터 레미와 함께했던 메이마저 바이올리니스트의 꿈을 이루기 위해 레미와는 다른, 음악 중심의 중학교로 가기로 마음을 먹죠.
레미는 그들을 웃으며 보내주었지만 속으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씁쓸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이윽고 졸업식 날 터져버리고 말죠. 마법을 떠나보냈는데, 자신과 함께 마법을 부리던 견습 마녀 일행들은 물론 초등학교 친구들과도 작별을 해야하니까요.
그 때문에 레미는 졸업식 날, 학교를 가지 않고 마법당에 가서 농성합니다. '모두를 떠나보낼 바에야, 졸업 따윈 하지 않겠다'며 말이죠.
그 마음을 보듬어준건 다름 아닌 레미의 초등학교 친구들이었습니다. 견습 마녀 친구들은 물론, 그동안 레미가 마법으로 도와준 아이들이 마법당 앞에 모여 레미에게 말을 걸죠. "고맙다."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다." 라구요.
우리들 또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을겁니다. 같은 공상을 공유하며 소꿉놀이, 칼싸움 놀이 등을 같이 하던 친구들은 상상력과 작별해도 남는 현실 속의 존재니까요.
결국, 레미의 완결은 이제 레미를 떠나 보내야 하는 '졸업반'들을 위로해주는 이야기라 볼 수 있겠습니다. 지금까지의 너를 구성하는 것들을 떠나보내도, 네가 쌓아 올린 관계가 있으니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따듯하게 말해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
마치며
중언부언 이야기가 길었습니다. 제 글재주가 모자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꼬마 마법사 레미를 감명 깊게 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레미 시리즈는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마저 보듬어주고 위로해주는 따듯한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모쪼록, 여러분도 언젠가 시간이 날때, 꼬마 마법사 레미를 보시며 위로와 감동을 얻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그러했듯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