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우미] 여느 때와 같은날
“아, 벌써 시간이.. 그럼, 이제 슬슬 일어나볼까요?”
“너랑 있으면 시간이 정말 빨리 가네. 그래, 이제 슬슬 가자.”
에리와 나는 먹은 자리를 대충 정리한 뒤 카페에서 나왔다. 여느 때와 똑같은 데이트 코스였다. 누군가의 집 앞에서 만나서, 영화를 한편 보고, 밥을 한 끼 먹은 뒤 카페에 가서 시시한 잡담을 나눈 뒤에 헤어지는. 그런 데이트 코스.
하지만 오늘은 여느 때와는 달랐다. 우리가 카페를 나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굵은 비가 후두둑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도화지에 회색 물감을 칠한 것 마냥 칙칙한 하늘을 보며 “이제 곧 비가 오려나요?” 라는 말을 하긴 했는데 그 예감이 하필이면 지금 적중할 줄이야. 나는 한숨을 쉬었다.
“어머, 낭패네.”
“그러게요.”
아키하바라 시내를 웃고 떠들며 활보하는 학생들도, 업무에 짓눌려 찌푸린 표정으로 자신이 있을 톱니바퀴 속으로 굴러가는 회사원도, 시내 한복판에 떡하니 누워 한 푼의 동정을 구걸하던 거지들도 갑작스럽게 통곡하는 하늘에 당황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아, 맞다. 오늘 일기예보에서 소나기가 내릴 수도 있다고 그랬어. 그래서 우산 챙길까 말 까 하다가 그냥 말았는데.”
“아, 그, 그런가요..”
[소나기가 내릴 수 있으니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라는 일기예보는 나도 얼핏 들었던 것 같긴 했다. ‘에이, 설마.’ 하는 마음으로 가져오지 않았는데. 이렇게 낭패를 볼 줄이야..
“이 주변에.. 니코가 살지 않았나요? 전화를 한 번 해봐야겠어요.”
“......”
핸드백에서 전화기를 꺼내 니코의 전화번호를 누르는 순간, 에리가 내 손목을 잡았다. 약간 저릿저릿 할 정도로 꽉 쥐어서, 나는 당황한 나머지 손목을 비틀어 빼냈다. 그 서슬에 내 손목을 꽉 쥐려했던 에리는 약간 비틀거리다 겨우겨우 중심을 잡았다.
“에, 에리?”
“...그래, 전화 하건 뭘 하건, 마음대로 해.”
방금 전과는 다르게 날카롭게 날이 선 시선이 내 가슴을 향해 꽂혔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나는 잠시 생각해 봤지만 별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가 무슨 실수를 했더라?
“아, 저, 저기. 미안해요.”
“뭐가?”
“순간 너무 놀라서, 그래서 손을 뿌리 쳤어요.”
“...그게 다야?”
“그리고, 에리의 마음을 눈치 채지 못한 것도.”
“그래, 알면 됐어.”
그래도, 그냥 그렇게 손목을 왈칵 잡는 것 보다는 [조금이라도 너랑 같이 있고 싶어] 라고 말했으면 조금 더 좋았을탠데요, 라는 말은 아껴두기로 했다.
“어. 우미.”
“네? 왜 그러시나요?”
“비, 그쳤다.”
그 말을 듣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더니, 후두둑 떨어지던 비는 어느새 그치고, 매캐한 매연이 뒤덮여있던 하늘의 중심엔 밝은 태양이 나와 에리를 비추고 있었다.
“정말, 변덕스럽네요. 에리처럼.”
“날 이렇게 애태우게 만드는, 네가 나쁜거야.”
“그런가요..”
그렇게 별 영양가 없는 잡담을 하며 우리 둘은 카페를 나섰다. 약간의 불협화음이 있었던 것 빼고는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이었다.
이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이, 여느 때처럼 이어졌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