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에리] 벚꽃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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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좋네..”
평소라면 학교에 있을 시간이었으나, 어제 그 ‘학교’를 졸업했으니까. 오늘부터 대학에 입학 할 때 까지는 시간이 너무나도 텅텅 비었다. 그 시간의 공백이 너무나도 커서, 나는 그 공백을 어떻게든 메꾸기 위해 아무런 목적지도 없이, 발걸음 가는대로 정처 없이 아키하바라를 방황했다.
이제 봄인데도 바람이 너무 강하게 불어 옆구리가 시렸다. 아니, 이건 바람이 너무 강하게 부는 탓이 아닐 것이다. 그동안 내 옆에 있던 사람이 이젠 없으니까, 이제야 그 빈자리를 느끼는 거겠지.
“.....”
벚꽃 잎을 휘감은 산들바람이 너무도 아름다워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익숙한 거리였다. 아니, 익숙해 질 수 밖에 없는 거리였다. 그녀와 함께 수십 번을 걸었던 길이고, 어제 그녀와 작별했던 길이었으니까.
- “그럼, 이제 한동안 못 보는 건가?”
- “그릏지 않겠나? 이제 내는 내대로, 에리치는 에리치대로 바쁠탠디.”
- “..그런가.”
어제도 이렇게 벚꽃이 휘날리고 있었지.
“정말, 바보야. 바보 아야세.”
그녀와 나의 관계는 단순한 ‘친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제 이 관계가 어떻게 될 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연락은 점점 끊어지고, 관계도 점점 희미해져서, 몇 년이 지나고 나면 ‘아, 그런 애도 있었지. 정말 친했었는데.’ 같이 희미한, 이어진 듯 이어진 게 아닌 그런 관계가 되겠지.
“하아...”
그녀와는 고등학생 생활 내내 붙어있었다. 말하려고만 했다면 언제든지 말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말하지 못했다. 그녀와의 관계가 그만 깨져버릴까 불안해서, 그녀가 나를 보는 눈이 달라 질 것 같아서.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 산들바람에 벚꽃이 휘날리고 있었다. 꽃으로 된 비가 내렸다. 아니, 어제 만났던 네가 내렸다.
아니.
오늘은 만날 수 없는, 네가 내렸다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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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랜만이네 - ”
실로 오랜만이었다. 아키하바라에 찾아온 건 1년만인가. 매캐한 매연냄새도, 항상 흐릿흐릿한 하늘도,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건물과 지금 당장이라도 태풍에 날아 갈 듯 한 허름한 건물이 공존하는 이 거리가, 너무나도 오랜만이라 웃음이 절로 세어나왔다. 정말로 포근했다.
“포근하다..고.”
이렇게 콘크리트 투성이인 건물 숲에서, 나한테 하나도 관심 없는 인파 속에서, 숨이 턱턱 막히는 매연이 가득 섞인 바람 속에서. 포근함을 느끼다니, 고작 1년 동안 자취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약해진 걸까. 대학생활에 적응 못해서 도망치기나 하고.
“엄마한테 말도 안하고 내려온 건데.. 이제 어쩐다..”
지금 당장 집에 돌아가자니 두려워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 엄마라면 “그래.. 너라면 무슨 이유가 있으니 이렇게 내려온 거겠지.” 하며 이해 해 주실 테지만.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걸.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초조함이 가득 담긴 발걸음을 옮기며 발이 가는 대로 나아갔다.
내 발은 나를 익숙한 곳으로 데려왔다. 벚꽃이 만개한 학교,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마키의 저택.
그리고 -
수많은 계단을 오르고 나서야 겨우겨우 들를 수 있는, 그녀가 있었던 신사.
“반갑습니데이 - !”
그래, 이런 괴상한 사투리로 손님을 맞아주는 그녀가 있던..
“..어?”
“어?”
“..에리치?”
“노..조미?”
추억 속에 잠겨 발걸음을 옮겼건만, 그 추억 속에만 있어야 할 그녀가 지금 내 눈 앞에 멀쩡히 서 있었다. 평소에 입던 정갈한 무녀 복을 입고, 손때 묻은 빗자루로 느긋하게 신사 정원을 쓸었던 그녀, 토죠 노조미가.
“실제로 얼굴 보는 건 정말 오래간만이구마!”
오랜만에 본 그녀는 달라진 곳이 없었다. 윤기가 흐르는 보라색 머리, 에메랄드 같이 반짝이는 눈동자. 그리고. 나를 숨 막히게 하는 달달함까지도.
“응,그,그러게. 정말 오랜만이네.”
“여긴 무슨 일? 힘들지 않았나? 통화 할 때마다 엄청 힘든 것 같았는데.”
“힘들어 보였어?”
“응! 호노카한테 애먹었을 때 보다 몇 십배정도는 더 힘든 것 같았데이. 그래서 걱정 많이 했는데. 무사 한 것 같아 다행이구마.”
힘든 티 안내려고 노력했는데.. 역시, 너한텐 통하지 않는구나. 나는 애써 웃음 지으며 “에이, 아니야. 힘들긴 무슨, 그러는 노조미야 말로 여긴 무슨일?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라며 화재를 돌렸다.
“아 그게.. 내 말이다, 대학, 휴학했데이.”
“어? 정말? 왜..?”
“약간.. 집중이 안 돼서.. 아, 여튼. 오랜만에 만났으니 차라도 한잔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나?”
“..흐음, 글쎄.”
너와 만나는걸 몇 번이나 머릿속에서 그렸지만,. 이런 상황은 생각 해 보지도 않았는데.
“예전에 다녔던 카페에서 만나자. 지금 신사 일 도와주고있는거지? 언제끝나?”
“아, 금방 끝날탠디.. 잠깐만 기달리봐라. 한 30분정도면 되니께!”
나는 지금, 잘 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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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두 냄새와 함께 맡는 너의 달달한 향기, 실로 오랜만에 맡는 향기였다. 다만 그동안 떨어져 지냈었기 때문일까, 노조미 특유의 편안하고도 포근한 분위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노조미도 우리 사이에 흐르는 이 기류에 먹혀버린 건지, 자신 앞에 놓인 커피만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안 돼, 내가 불러서 온 거잖아. 이런 분위기가 계속 되면 안된다구..! 생각 해 봐 아야세, 지금 여기에 딱 걸맞은 주제를 -
“1년..만인가?”
“졸업 하고서는 둘이 본적도 없다 아이가. 전화 통화만 몇 번 했었제.”
“그렇..지?”
.. 어떻게든 길게 대화를 이끌어 갈 소재를 찾으려고 했지만 입 밖으로 튀어 나온 말은 내가 생각지도 않은 말이었다. 여기서 더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커피 잔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다행스럽게도 노조미가 말을 다시 시작하자마자 멎기는 했지만.
“그런데, 에리치. 학기 시작하지 않았나?”
“어? 으, 응. 시작했지.”
“그런데 왜 여기있는기가? 한창 수업중일 시간인디”
“아, 그게.. 휴학했거든.”
“정말이가? 와 휴학했나?”
“너랑 비슷한 이유일까.. 수업을 못 따라가겠다고 해야 하나? 여하튼 집중이 안 되더라. 그래서 아무한테도 말 안하고 도망 왔어, 집에도 말 안하고 온 건데 이제 어째야 될지 모르겠다. 아하하하..”
“오~ 우등생 에리치가 웬일이가? 드디어 사춘기가 온기가? 낄낄낄.”
“그.. 그런 거 아니야.”
남의 마음도 모르고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웃다니.. 한마디 쏘아 붙이고 싶었으나 너의 웃음을 보자 불만은 눈 녹듯 사라졌다. 그래, 나는 지난 1년 동안 이 웃음을 그렸었다.
“흐음.. 그래, 집에도 말 안하고 왔다 그거제?”
“이제 슬슬 말하러 가야지.. 엄마가 날 혼낼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그럼, 오늘 하루만 미루는 건 어떻나?”
“응? 뭐라고?”
“집에다가 오늘 왔다고 말하는 거, 오늘 하루만 미루는 건 어떻냐는기다. 내는 누구랑 달리 부모님한테 말하고 올라와서 이 근처에 자취방도 구해놨거든. 좋은 생각 아니가?”
“좋은 생각..인가?”
“내일의 일은 내일의 에리치가 알아서 할기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지금 이렇게 헤어지긴 아쉽지 않나?”
“그렇..긴 하지.”
대화가 대충 끝내고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을 때,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나.. 지금 노조미내 집에 초대받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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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누추하지만, 들어오레이.”
“오늘 하루만 신세질게, 노조미.”
노조미의 집은 위치만 바뀌었다 뿐이지 예전이랑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예전 그대로였다. 마치 이곳만 1년 전 그대로 시간이 멈춘 듯..
“집 위치만 바뀌었지 1년 전 그대로네?”
“아.. 그게, 어찌어찌 꾸미다 보니 그렇게 되드마. 나도 처음엔 바꿀까 했다가 다시 꾸미기도 귀찮고.. 그리고, 추억하기도 이게 더 좋으니까 내비뒀다.”
“추억.. 그래, 하긴, 재밌었지. 1년간.”
“아 뭐, 1년은 특히 재밌었지만, 내한텐.. 고등학교에서 다닌 3년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추억이었데이.”
“아, 그, 그렇지. 나도 마찬가지야.”
“일단 앉아 있으레이~ 저녁 차려줄테니께.”
“나도 도와줄게.”
“그냥 앉아 있으레니께.. 내가 초대한 건데 손님 대접은 해줘야하지 않겠나?”
“그렇게 까지 말한다면.. 알겠어.”
머쓱함에 뒷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 앉았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살펴보았지만 정말로 이 집은 1년 전 그대로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책장 안에 ‘오토노키자카 고등학교 졸업앨범‘ 이 꽂혀있다는 점일까. 너도 지난 1년간 나를 그리워하며 살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갑자기 두근거렸다. 부엌에서 요리를 하는 노조미의 뒷모습을 보니 가슴이 두근거리는 소리는 점점 더 커져갔다.
‘진정.. 진정하자, 아야세. 그리워하는 거랑 연심이랑은 다른 거야.’ 라고 수없이 속으로 되뇌어도 가슴은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주방에서 나는 식칼 소리에 맞춰 심장소리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점점 두근거리고, 점점 가슴 속이 근질거리고, 점점 진정이 안되서 – 이 자리에서 터져버릴 것 같았다. 이럴 땐 어떤 방식으로 진정시키는 거지?
“에리치.”
“ㄴ,네,네,네?”
“뭐꼬? 그 반응은, 밥 다 됐다고 부른건디.. 졸았나?”
“아, 아니야, 그..그러니까, 자, 잠깐 딴 생각을 하느라.”
방금 전 내 모습, 어떻게 비췄을까. 부끄러워, 노조미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흐응...”
노조미는 나를 미심쩍게 쳐다보며 쟁반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하얀 쌀밥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된장찌개, 그리고 마른 멸치를 비롯한 각종 찬거리들, 정성이 느껴지는 식탁이었다.
“지난 3년간 이런 반응을 하는 에리치를 본적이 읎었는디.”
“..응?”
“에리치, 혹시 ‘이거’ 생긴 거 아이가?”
장난스럽게 말을 건네며 새끼손가락을 노조미를 보니, 안 그래도 뜨거운 머리에 더더욱 열이 올라왔다. 부끄러움에 아랫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이 뻘겋게 익은게 보기 좋구마, 생겼제? 생긴거제?”
“그, 그런 거 아니야..”
“비밀로 할테니께 좀만 말해주믄 안되나?”
“생긴..건 아니지만, 그런 사이가 됐으면 좋겠다는 사람이 있어.”
“오, 어떤 사람인디?”
머리는 입을 멈추라고 하지만 가슴이 입을 움직였다. 지금 이 순간 말하지 않는다면 영영 너를 놓쳐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고개를 들어 노조미를 마주 보고, 계속해서 입을 움직였다.
“누구보다도 속이 깊고, 성격도 착해 빠져선 남을 배려하지만 자신이 상처 입는 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야, 그래서 한 없이 걱정되는 사람이고.”
“흐응... 그리고?
“그리고.. 남한테 일어나는 일은 귀신같이 눈치를 채지만 정작 자기 일에는 너무나도 눈치가 없는 사람이야.”
“답답허네~ 에리치, 그런 취향이었나?”
“마지막으로, 이상한 사투리를 쓰지만 그 말투마저 너무나 사랑스러운, 그런 사람이야.”
“...에리치?”
“내가 생각하던 사람은.. 너였어, 노조미.”
“......”
그 무엇보다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으나 노조미의 굳게 다문 입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미안하구마.”
“그래...”
그래, 이게.. 정상인거겠지. 그래도, 1년 전하곤 다르게, 오늘은 내 마음을 전했으니까, 그걸로 됐어, 그걸로.. 된거야.
“사실.. 에리치의 마음은, 예전부터.. 어느정도 알고 있었데이.”
“그래? 너무 티냈나..”
“..그리고, 내 마음도.. 에리치랑 비슷했지만, 만약에 내가 잘못 생각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앞서서, 차마 입이 안떨어지드마.”
“..응?”
“에리치가 했던 말은, 내가 먼저 했어야 맞는 거였다..고, 내는 그렇게 생각한데이. 미안하구마, 에리치. 내가 겁쟁이라, 에리치한테 이런 역까지 떠맡겼구마.”
“노조미...”
“오늘부터, 잘 부탁한데이.”
“......”
‘그래’ 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그 말은 갑자기 왈칵 쏟아져 나오는 눈물에 삼켜져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에, 에리치. 내가 뭐 잘못 말했나? 그, 그동안 서운했던기가?”
“아, 아니야.. 그런게 아니고.. 너, 너무 기뻐서..”
고개를 옆으로 돌려 눈물을 훔쳐내었다. 창 밖에서 벚꽃잎 하나가 노을빛에 젖어 천천히, 그리고 아주 고요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벚꽃이 내렸다, 아니, 어제는 못 만났던 네가 내렸다.
아니.
오늘을 함께할 네가 내렸다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