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 싸움이 끝나면 고백하려고.”

“커흡.”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제 옆에 있는 청년이 뜬금없이 내뱉은 한 마디에 놀란 나머지 마시던 포도주를 허공에 흩뿌렸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이 10년동안 지났음에도 청년이 감정을 내비친 적이 얼마 없기 때문이었다.

그 10년이 그냥 10년이던가?

예언에 따라 무려 수백 년간 끊긴 적 없었던 마물과 인류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용자로 간택되어, 끊임 없이 사투를 벌여야 했던 10년이다.

그런데도 이 청년, 용사는 얼굴에 별 다른 감정 한번 내비친 적 없었다.

마왕을 보필하던 사천왕을 차례차례 쓰러트렸을 때도, 한 번도 함락된 적 없는 마계의 요새를 공략하고 인류 처음으로 마계에 발을 내딛었을 때도 용사는 건조한 목소리로 다음 목적지는 어디냐는 질문만 남겼었다.

그나마 감정을 내비쳤을 때라고 한다면...

 

“왜 그래? 영감. 내가 못할 말이라도 했어?”

 

퉁명스러운 용사의 목소리에 노인의 상념이 끊겼다.

 

“아니… 좀 놀라워서 말일세. 마물들을 도륙내는 것 말곤 만사에 관심이 없었던 자네가 사랑 얘기를 꺼낸다는 게.”

“남들이 들으면 내가 무슨 미친 놈인줄 알겠네. 대현자 멀린 나으리께서 시키는 대로 한 것 뿐인데.”

“자네가 언제 내 말을 들었다고? 하여튼 이럴때만…”

 

멀린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다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사랑 얘기에 이어서 농담까지 해? 자네, 갑자기 왜 그러나?”

“내일로 이 개고생도 끝이어서 그런가? 기분이 좀 싱숭생숭 하네.”

 

용사는 시선을 돌려 저 멀리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세워진 한 고성을 바라보았다.

시선에 담는 것 조차 허용하지 않는 불길함을 품고 있는, 모든 마물들의 정점인 마왕이 기거하는 마왕성을.

 

“저기 앉아있는 새끼만 족치면, 이 싸움도 끝나는 거잖아.”

“그게 그렇게 간단히 말할 일이 아닌…”

 

사실 그 점은 용사도 잘 알고 있겠지, 지난 10년간 마물들과의 사투에서 최선두에서 싸웠으니.

멀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고백이라니? 누구한테?”

 

용사는 멋쩍은 듯 목덜미를 긁적이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 아이린한테.”

“아이린이라면… 자네가 말한 적 있던 그 처자 말인가?”

 

방금 전 용사의 말 때문에 끊겼던 상념이 자연스레 이어졌다.

용사가 감정을 내비친 몇 안되는 때 중 하나가, 제 고향에서 소꿉친구로 지냈던 아이린에 대해 이야기 했었을 때니까.

분명, 용사가 어렸을 적 친구들과 야산을 쏘다니다 들개 때의 습격을 받았을 때 처음으로 잠재된 힘을 개방하고 들개들을 물리쳤더니 ‘괴이한 힘을 쓴다’는 이유로 마녀의 아들 취급 받아 화형 당하기 직전까지 몰렸다가…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서 목숨을 구해줬다던 그?”

“지나가듯이 한 얘긴데 기억하고 있네?”

 

용사에게 있어선 분명 끔찍한 기억일텐데도, 용사의 눈은 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광기 어린 목소리로 저를 불태우라고 말하던 어른들의 모습보단, 아래턱을 벌벌 떨며 필사적으로 소리치던 아이린의 뒷모습이 더 기억에 남아있었으니까.

 

“사실, 용사같은 거 하기 싫었거든. 내가 인류의 희망이라느니, 예언 속의 용사라느니 뭐니 해봤자 별 실감도 안 나고.”

“그런 것 치곤, 되게 순순히 따라오지 않았나?”

 

용사는 멋쩍다는 듯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건… 아이린 때문에 그런거고.”

“음?”

“마왕같은게 설치고 다니면, 그 녀석이 불안해 할 거 아니야.”

“......”

 

멀린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니까, 오직 한 소녀만을 위해 이토록 먼 길을 나섰다는 것 아닌가? 참으로 지고지순한 사랑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 음유시인이 있었다면 곧바로 창작욕이 불타올라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집필할 정도로.

 

“허어…”

 

그 때문에, 멀린은 탄식을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왜 갑자기 한숨이야?”

“그게…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하루 이틀 같이 다녀보나. 할 말 있으면 그냥 하지?”

“...내 말을 듣고 귀향길에 오르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말함세.”

“뭔… 탈주할거면 진즉 했지, 사람을 뭘로 보고 그딴 소리를 하는거야? 대체 뭔 말을 하려고?”

“하아…”

 

이대로 두었다간 마왕과 싸우기 직전까지 들들 볶을 기세였기에, 멀린은 한숨으로 삼켰던 말을 어렵게 토해냈다.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이네만, 출정하기 전에 그 처자한테 무슨 말이라도 해둔 게 있나?”

“뭔 말?”

“내가 이 싸움을 끝내고 오면 결혼하자거나, 뭐 그런 약속 같은 것 말이야.”

“어떻게 그래? 내가 마왕을 언제 족칠 줄 알고?”

“그렇구만…”

 

멀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꿉친구를 위해 마왕을 쓰러트린다는 말도 안 되는 일을 실행에 옮긴 순정남이 ‘내가 언제 돌아올 진 모르겠지만 돌아오면 나랑 사귀어 줄래?’ 같은 잔인한 말을 할 리 없지 않나.

 

“내가 끌고와 놓고서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자네가 나를 따라온 이유가 순전히 그 처자 때문이라면… 오히려, 그 처자 옆에 붙어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음?”

 

용사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멀린은 그 반응에 답답함을 못이기고 미간을 매만졌다.

 

“자네가 싸워온 세월이 자그마치 10년일세.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그 처자는 자네와 동갑 아니었던가?”

“그렇지?”

“그럼 25살이라는 이야긴데, 그 나이까지 짝을 안 찾았을 리 없지 않나!”

 

25살이라면 애가 있어도 이상할 나이가 아니다.

특히, 용사가 살던 곳은 시골이었으니 왕도권에서 사는 처자들보다 더욱 빨리 결혼했을 확률이 높았다.

일거리라도 구해서 홀몸을 부지할 수 있는 도시와는 다르게, 시골엔 그런 일거리 자체가 별로 없으니 말이다.

그 때문에 멀린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지만, 용사는 그 말을 듣고도 코웃음 칠 뿐이었다.

 

“참나, 난 또 뭐라고. 고작 그런 얘기였어?”

“고작 그런 얘기라니, 나는 진지하게…”

 

멀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끊었다.

만인의 동경을 받는 용사라지만, 고작 25살.

게다가, 그 중 10년을 온전히 싸우는 데에만 바쳤으니, 용사는 몸만 컸지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이런 얘기를 하느니, 차라리 그 환상을 지켜주는 게 맞지 않을까.

 

“참나, 진짜 어이가 없어서…”

 

멀린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용사는 소년같이 쾌활한 웃음으로 노인을 비웃었다.

 

‘그 주근깨 쌈닭이 뭐? 짝을 찾아?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

 

“오늘 밤, 영광스러운 구원의 이야기를 들어 보시겠습니까?”

 

음유시인은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한껏 목청을 높여 노래를 불렀다. 보름 전, 용사가 마왕을 쓰러트린 신화적인 싸움을 재현하는 노래였다.

시인의 노랫말이 길어질수록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많아졌다.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전란, 그 와중 혜성같이 등장하여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용사의 이야기엔 그만한 힘이 있었으니까.

그 뿐만이라면 이 정도로 관심을 사진 못했겠지만, 현재 음유시인이 노래를 부르는 곳은 다름 아닌 용사의 고향이었다.

옆집 사는 개똥이가 제국의 말단 관리가 되었다더라 하는 조그마한 소식에도 온 마을이 잔치를 벌일 정도로 열광할 정도의 시골인데, 어찌 자랑스러운 동향 사람의 영웅담을 귀담아 듣지 않을 수 있을까.

 

“아아, 친구여. 앞으로 더 얼마나 많은 피가 흘러야 폭력이 사라질까. 오로지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네…”

 

음유시인의 노래는 슬슬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 노랫말 속의 용사는 마계군 제일의 강장이라 불리는 ‘희망의 파괴자’ 아룬도와의 결전을 앞에 두고 그동안 사랑을 나누었던 대륙 제일의 미녀, 미들랜드 왕가의 성녀와 헤어졌다. 죽음과 가장 가까운 자신에게 사랑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더 좋은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그리고, 용사는 전장에서 아룬도와 만나 특공을 벌인다. 약 이틀에 걸친 혈투의 여파로 산이 깎이고 대지가 신음했다.

감수성 좋은 몇몇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콧물을 훔치거나 눈가의 물기를 훔치곤 했다.

그러던 와중.

 

“그게 뭔 개소리…!”

 

울분이 잔뜩 섞인 고성이 음유시인의 노래를 끊었다. 노랫말에 몰입하고 있던 군중은 눈에 불을 켜고 고성방가를 한 무뢰한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좆될 뻔했네.’

 

무뢰한의 정체는 바로, 인식저해 마법을 몇 겹이나 걸어둔 용사였으니까.

귀향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여러모로 피곤해 질 게 뻔하니까 걸어둔 건데,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사실 그냥 소리를 안 질렀으면 되는 일이었지만…’

 

하지만 용사에게 있어 이는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노랫말의 시작부터 끝까지 거짓부렁이었으니 말이다.

사람들이 그토록 열광하던 하이라이트, 아룬도와 벌인 혈투와 성녀와의 사랑 이야기는 특히!

 

‘아룬도, 그 새끼는 좋겠네. 개좆밥인 새끼가 이런 호사도 누리고.’

 

세간 사람들은 아룬도를 두고 희망의 파괴자라 하지만, 용사는 그 이명을 ‘코찔찔이’로 바꿔야 한다고 파티원들에게 강력하게 주장했다.

싸우려고 찾아가면 제 부하도 버리고 튀는 바람에 이틀이나 시간을 허비하게 한 새끼한텐 그런 이명이 딱 어울렸으니까.

그리고, 성녀와의 사랑 이야기는…

 

‘걔가 대륙 제일의 미녀라니. 참나.’

 

뭐, 이쁘긴 했다. 피부는 투명할 정도로 하얗고, 커다란 눈은 흑요석을 박아넣은 듯 검게 빛났었으니까. 그런 점에선 제법 아이린이랑 닮기도 했고.

하지만 그 뿐이었다. 용사의 눈에는 아이린이 미세하게 더 이뻤다. 그 녀석의 얼굴에선 누구한테도 볼 수 없는 생기가 넘쳐흘렀으니까. 멀린은 눈이 삐었냐며 자신을 타박했지만, 미적 감각은 사람마다 다른 것 아닌가?

아무튼, 그걸 이유 삼아 차버렸다.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곱게 말해봤자 들어주질 않으니 일종의 극약처방인 샘이었다.

그랬더니 돌아온 답이…

 

-”아~ 그러니까 제가, 깡촌 촌ㄴ… 아니, 당신 소꿉친구보다 못생겨서 고백을 받아줄 수 없다 이거죠?”

-”드디어 말이 통하네.”

-”하하하… 핑계를 대도 말이 되는 걸 대던가. 그딴, 무성의한…”

-”핑계 아니고, 진짜 걔보다는 덜 이쁘다니까.”

-”죽여버리겠어.”

-”뭐?”

-”씨발 널 죽여버리겠다고!!!”

 

이젠 오래된 얘기임에도, 용사의 꿈엔 아직까지 허리에 맨 철퇴를 휘두르며 표독스러운 성녀의 모습이 나타나곤 했었다. 대륙을 돌아다니며 온갖 못 볼 꼴을 다 본 용사라지만, 항상 나긋한 모습만 보여주던 성녀가 보여주는 살의는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리 심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저런 반응이 튀어나온건지, 용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딜 가든 ‘대륙 제일의 미녀’라는 말을 들으니까 공주병이라도 생긴 것일까.

 

“으으.”

 

용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상념을 날렸다. 잡생각을 했기 때문인지 방금전에 느꼈던 분노도 슬슬 사그러들었다.

그래, 멀린이 말하지 않았었나. 앞으로 제국은 ‘마왕을 잡았다’는 치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자신을 우상화할 것이라고. 네가 생각하기엔 별 것 아닌 일도 수십, 수백배 부풀려 대중들에게 전파할 것이라며.

 

-”자네가 그런 공치사를 싫어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왠만하면 참게. 뭣도 모르는 이들의 말에 휘둘릴 필요는 없지 않나.”

 

멀린의 말을 떠올린 용사는 음유시인을 뒤로 하고 군중 사이를 빠져나왔다. 걸음을 옮길수록 사람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낯익으면서도 생소한 거리를 대신 채웠다.

 

“참… 많이 발전했네.”

 

돌부리 가득한 흙길엔 돌바닥이 깔려있고, 원래 밭이 있었던 곳엔 처음 보는 잡화점이랑 여관이 생겼다. 가게라고 해봤자 식당 하나밖에 없었던 깡촌이 이렇게나 발전한 것이다.

그럼에도, 용사의 고향은 옛 정취를 어느정도 간직하고 있었다. 고아를 키워주는 거니 감사한 줄 알라며 지독하게 자신을 부려먹었던 촌장의 이층 주택이나, 싸가지 없는 쌍둥이가 살았던 허름한 집.

그리고 거기서 시선을 조금 돌려보면, 아이린과 함께 뛰놀던 삐죽삐죽한 나무가 무성한 숲과 마을광장이랍시고 만들어 놓은 공터가 눈에 보인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이 마을의 유일한 식당인 ‘더스크’가 있다.

왜 식당 이름이 더스크냐면, 운영하는 부부의 성씨가 더스크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땐 진짜 커보였는데.’

 

다시 보니까 초라해보이기까지 한다. 나무로 만든 벽은 세월의 풍파를 못이긴건지 갈라진데다가 곳곳에 구멍이 뚫려있었고, 기억하는 것과는 달리 참으로 비좁았다. 이 정도면 작은 테이블 네 다섯개쯤 들어가면 다행인 수준이었다.

용사라는 직책을 가지고 온 대륙의 고급 식당을 가본 그에게 있어, 이 식당은 폐가나 다를바 없었다.

그럼에도 이 식당을 온 이유는 하나였다.

아이린의 성씨 또한 ‘더스크’였기 때문이다. 즉, 이 식당은 아이린의 집이기도 했다. 아이린을 찾으려면 여기만한 데가 없다는 뜻이었다.

 

‘매일같이 식당 일을 돕는 녀석이었으니까, 분명 여기 있을거야.’

 

용사는 문고리를 잡았다. 이대로 손잡이를 돌리면 문이 열릴것이다. 그런데…

 

‘뭐라고 이렇게 긴장되냐.’

 

차마 문을 열 수가 없었다. 이 허름한 나무 문이 마왕성의 정문보다도 무겁게 느껴졌다. 지난 10년간 쌓아온 연심의 무게.

용사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어차피 귀향했으니, 이 비좁은 마을에서 아이린을 수없이 마주칠 것 아닌가. 꼭 지금, 그것도 아이린의 집에서 봐야하나? 좀 더 자연스럽게 만나는 방법이 있을…

 

‘아니지.’

 

용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차일피일 미루다가는 ‘좀 더 자연스러운’ 기회가 찾아와봤자 쑥스러움을 못이겨 녀석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할 게 분명했으니까. 그러면 더 어색해질 뿐이라고, 멀린이 조언해주지 않았었나.

 

‘...아니, 그딴 것 보다는.’

 

그냥, 이 문 너머에 있을 아이린이 보고 싶었다. 이 순수한 감정을 타산적인 이유로 덧칠하고 싶지 않았다.

용사는 두 눈 딱 감고 손잡이를 돌렸다. 낡은 경첩 특유의 불쾌한 소리가 실내에 울렸다.

생경하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것은 이와 동시였다.

 

“손님. 정말, 정말로 죄송하지만 한 시간 뒤에 와주시겠어요? 준비해둔 스튜가 다 떨어져서 끓이는 중이거든요! 대신, 다시 오실 때 서비스 해드릴게요!”

“아……”

 

용사는 얼빵한 탄성을 내뱉었다.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왔다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멍청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그리워했던 풍경을 직접 마주한 용사에게 있어 그딴 것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더스크 아줌마가 만든 수제 향신료를 끓였을 때 나는 구수하고도 독특한 향기, 비좁은 면적 때문에 옹기종기 붙어 있는 원형 테이블과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그리고, 아이린.

 

‘.....10년이 지났는데 얼굴이 그대로네.’

 

노을을 품은 듯한 붉은 머릿결, 보석을 박아넣은 듯 한 커다란 눈, 우유를 연상케하는 하얀 피부.

그리고 콧등 주변에 희미한 주근깨가 박힌 것 까지, 용사가 기억하는 아이린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나마 다른 점을 찾자면 젖살이 빠져 얼굴형이 더 갸름해졌다는 것일까.

 

“저, 손님? 죄송하지만 한 시간 뒤에…”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답답한 것인지, 아이린은 했던 말을 반복하며 답을 재촉했다. 그 모습에 용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를 못 알아보나?’

 

처음엔 아이린을 만났다는 기쁨에 의아함을 못 느꼈지만, 곱씹어 보니 이상한 상황이었다.

어렸을 때 그토록 부대끼던 친구가, 10년 동안 사지에서 구르다 돌아왔는데 ‘손님’이라니? 마치 자신을 새빨간 타인 대하듯 하고 있지 않나!

예전처럼 장난을 치는 건가 싶었지만, 진심으로 답답해하는 저 태도를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얼굴에 흉터가 좀 생기긴 했어도, 못 알아볼 정돈가? 아니면 혹시, 내 얼굴을 까먹기라도 한 걸까? 10년이 지났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그래도 알아봐 주길 바랐는데…

 

“아.”

 

수많은 생각과 실망 끝에, 용사는 한 가지 정답에 도달했다.

그리고,몇 겹으로 둘러싼 인식저해 마법을 전부 해제했다.

너무나도 긴장했던 나머지, 마법을 걸고 있었다는 걸 잊어버렸던 것이다.

 

“... 어?”

 

즉각 반응이 터져나왔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낯선 외지인을 바라보던 아이린의 눈빛에 여러 감정이 담기기 시작한 것이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와 재회했다는 반가움, 사투를 벌이고 돌아온 전사를 향한 걱정, 그리고 마왕을 해치웠다는 용사에 대한 동경까지.

 

“너, 너너, 너, 너…!!!”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방금 전까지 능숙한 식당 주인의 아우라를 풍기던 아이린은, 고장난 골렘마냥 삐그덕거리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 모습을 본 용사는 피식 웃었다. 방금 전까지 긴장하고 있었던게 바보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덕분일까, 굳어서 잘 움직이지 않던 입이 자연스레 움직였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냐? 쌈닭.”

“...나를 쌈닭이라고 하는 거 보니까 진짜 너 맞네.”

 

용사의 퉁명스러운 말 때문일까, 아니면 오랜 세월 잊고 살았던 별명이 생각났기 때문일까?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이린이 질문을 퍼부었다.

 

“돌아오는건 이틀 뒤라고 들었는데 왜 벌써… 그리고, 방금 전엔 뭔 짓을 한 거야? 다른 사람 얼굴이었다가 갑자기…”

“거, 정신 사나운데 하나씩 물어보지?”

“...하여튼, 싸가지는 여전하네.”

 

아이린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25살이라곤 믿기지 않는 악동같은 웃음이었다.

 

“그러면, 제일 먼저 물어봤어야 했던 걸 물어볼게. 넌 잘 지냈어?”

“아…”

 

용사의 입에서 또다시 멍청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밝은 태양빛을 등지고 악동같이 웃는 저 모습이, 그에겐 너무나도 찬란하게 다가왔으니까.

 

“뭐, 잘 지냈…”

 

짧게 대답하려던 순간, 용사의 두뇌가 미친듯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마왕과의 전투에서 그러했듯이.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도 더.

 

‘이건… 어쩌면 기회 아닌가?’

 

자신이 인식저해 마법까지 써가며, 남들 몰래 아이린을 찾은 이유가 무엇인가?

지난 10년간 키워온사랑을 고백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용사가 세상을 떠돌면서 그동안 지켜본 바로는 고백이란 게 대뜸 내지른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나름의 분위기도 조성해야 하고, 그동안 쌓아온 감정도 있어야 했으니까. 정리하자면, 나름의 설계가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멀린도 그랬지, 고백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의례같은 거라고.’

 

그런데 10년 동안 떨어져 지내온 친구가 대뜸 좋아한다고 해봤자, 아이린이 이걸 받아줄 리가 있나! 적어도, 설계를 위한 최소한의 시간은 벌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근황 이야기는 시간을 벌어다 줄 묘수였다. 당장, 음유시인들이 경전처럼 떠받들어 모시며 반나절을 읊는 것이 바로 ‘용사의 근황 이야기’ 아닌가.

몇 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 생각을 마친 용사는 말을 주워담았다.

 

“음… 그, 그게.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고 해야하나, 워낙 많은 일이 있어서. 뭐, 잘 지냈냐고 하면 잘 지냈고 아니라면 아닌데…”

 

용사는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말재간을 저주했다. 분명 고심을 거듭해서 내뱉는 말인데도 참으로 어설프게만 느껴지니 말이다. 자신조차도 이렇게 느낄진데, 아이린은 뭐라고 생각할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하지만, 이미 말을 내뱉었으니 끝은 맺어야 할 것 아닌가. 용사는 기나긴 중언부언 끝에 하고 싶은 말을 토해냈다.

 

“그, 러니까. 시간 좀 내줄 수 있냐 이말이지. 간만에 만났는데, 얘기 좀 하자.”

“......”

 

이를 이상하게 쳐다보던 아이린은 피식 웃었다.

 

“뭐 얼마나 대단한 얘길 하려고… 알겠어. 근데 당장은 식당 일이 있어서 좀 그런데.”

“그러면 뭐, 내일이라도…”

“굳이 그럴 필요 있어? 식당 문 닫고 나서 들어줄게. 그럼 됐지?”

 

용사는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

 

노을이 산등성이 너머로 넘어가고 슬슬 하늘이 어둑해지는 시간.

그동안 하염없이 마을 한 귀퉁이에서 시간을 죽이던 용사가 식당 더스크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왔어?”

 

용사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스튜와 맥주 한 잔을 대령해놓고, 촛불 하나를 킨 채 턱을 괴고 자신을 쳐다보는 아이린의 모습은 차마 마주하기 힘든 자극이었으니 말이다.

마치, 바깥 일 하다 돌아온 남편을 위해 저녁을 차려놓은 아내의 모습 아닌가. 용사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러다가, 이대로 있으면 어색해질 거란 생각에 입을 열었다. 지금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했다.

 

“그, 뭐. 뭐 이런 것 까지 준비하고 그러냐.”

 

용사는 곧바로 자신의 생각을 후회했다.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라 하였는데 지금 상황에 딱 들어맞는 말 아닌가.

이런 호구 등신 새끼. 나를 위해 상까지 차려준 친구한테 이게 할 말이냐? 분명, 머릿속에선 이것보다 더 멋있는 말들이 많이 생각났는데 왜 이딴 말 밖에 안 나오는거지?

 

“뭐, 용사님한테 듣는 모험담이잖아? 맨입으로 듣기엔 좀 미안해서.”

 

다행히 그리 기분이 상하진 않은 건지, 아이린은 털털하게 수저를 내밀었다.

 

“한입 해.”

“뭐, 그런거라면야…”

 

용사는 붉은 스튜를 입에 가져갔다. 어딘지 모르게 몸이 후끈해지는 맛, 비강에서 터져나오는 특제 향신료의 향기… 10년 동안 그리워했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서 그런 것일까. 어딘지 모르게 부족하게 느껴졌다. 분명, 10년 전에 먹었던 스튜가 맞는데?

 

“맛이 좀 이상한가봐?”

“아니, 뭐 그런건 아닌데.”

“아니긴, 얼굴에 다 써져있구만. 맛 없다고.”

 

아이린은 수저로 스튜를 휘저었다. 그 손짓 하나에서 그리움이 절절하게 묻어나왔다.

 

“참 이상하단 말이야. 엄마가 하던 그대로 따라하는데 왜 그 맛이 안날까?”

“물어보지 그러냐, 너, 예전엔 아주머니한테 요리 가르쳐달라고 그렇게 귀찮게 굴었잖아.”

“그러고 싶은데, 이젠 그럴 수가 없네.”

 

용사는 아이린의 손짓에 담긴 그리움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야 깨달았다.

 

“혹시…”

“돌아가셨어. 5년 전에.”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나니, 아빠도 두달 뒤에 눈을 감았고.

그렇게 금술이 좋더니, 저승까지 같이 갈 건 또 뭐냐며, 아이린은 쓰게 웃었다.

 

“왜? 그렇게 건강하셨는데, 무슨 일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두분 다 나이가 좀 있었잖아? 그래서 뭐…”

“그, 미안하다.”

“뭐가?”

“그런 것도 모르고, 이상한 소릴…”

“에이, 뭐, 너무 그러지 마. 네가 어떻게 알았겠어? 마계에 들어가서 싸웠는데. 그리고, 이렇게 혼란스러웠던 시대에서 평화롭게 살다가 가셨으니… 호상이지 뭐.”

 

아이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으나, 목소리엔 미약한 쓸쓸함이 담겨있었다. 용사는 그 분위기에 눌려 입을 열지 못했다. 무슨 말이라도 실례가 될 것 같았으니까.

이 침묵을 깨는 건 아이린의 몫이었다.

 

“아무튼, 얘기할 게 많다며? 어디 한 번 들어보자. 사실, 진짜 궁금했거든. 네가… 그, 멀린이라고 했나? 그 이상한 할아버지 한테 끌려가서 어떻게 지냈는지.”

“하루하루가 아주 개지랄맞았지.”

 

아이린이 물꼬를 터주자, 용사의 이야기 보따리가 풀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에 더해, 그녀가 이야기를 듣는 태도도 용사의 입을 풀어주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진짜? 그랬던 거라고? 음유시인 놈들, 새빨간 구라쟁이였네.”

“미친…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와, 용사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 나였으면 바로 도망쳤을거야.”

 

그녀가 내뱉는 풍부한 리액션은 용사에게 있어 마약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렇다보니, 처음엔 담백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던 그의 모습이 점차 변해갔다.

용사는 손짓 발짓을 해가며 자신이 겪었던 난관을 신명나게 해설했고, 그가 그토록 싫어하던 음유시인처럼 이야기에 과장을 붙여가며 모험담을 부풀렸다. 자신의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은 허풍에 더욱 불을 지폈다.

 

“그래가지고 아룬도, 그 새끼가…”

 

한참 신나게 이야기 하던 용사가 입을 다물었다.

아이린 너머로 보이던 창문 너머의 풍경이, 주홍색에서 칠흑으로 물들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어?’

 

고백을 하기 위한 분위기도 조성 못했고, 감정도 전달하지도 못한 채 개폼 잡다가 시간을 이렇게 날려먹은 꼴이라니, 쪽팔리기 그지 없었다.

 

‘여자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게 무용담 얘기하는 용병이라던데.’

 

그게 사실이라면, 고백하기도 전부터 비호감을 잔뜩 쌓은 꼴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조졌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미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뭔가를 해야했다.

 

‘그런데 뭐를?’

 

용사는 머리를 팽팽 굴렸지만 별다른 해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아룬도, 그 자식이 마을 하나를 인질로 잡아서… 그 다음엔 어떻게 됐는데?”

 

심지어, 아이린이 제 마음도 모르고 이야기를 독촉하니 용사로서는 아주 죽을 맛이었다.

이 두 요소가 합쳐져 고장나버린 용사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얼빵한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어… 그런데, 너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응?”

“너무 내 얘기만 한 거 아닌가 싶어서.”

“그게 뭔 소리야? 애초에 네가 썰 풀어준다고 부른 거잖아.”

“아.”

 

대답의 여지가 없는 정론이었다. 용사는 또다시 고장나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건… 그렇긴 하지만, 얘기 하다 보니 네 얘기도 궁금하고, 마을이 발전 된 것도 궁금하고? 그래서…”

“내가 사는 거야 하루하루 똑같지 뭐, 아. 그러고 보니 최근에 이상한 일이 하나 있긴 했다.”

“이상한 일? 뭔데?”

“후드 뒤집어 쓴 여자가 와서 내 얼굴을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내가 저것보다 못생겼다고? 진짜 죽여버릴거야…’ 하면서 부들거리다가 가던데.”

“.......”

 

척봐도 누군지 알 것 같아 현기증이 몰려왔다. 하지만, 아이린한테 후드 쓴 여자의 정체를 알려줘봤자 괜히 불안하기만 할 터.

 

“그런 거 말고, 그냥 네 얘기를 듣고 싶은거야.”

“진짜 재미 없을텐데, 그래도 듣고 싶다면야.”

 

아이린은 맥주를 홀짝이며 목을 축였다. 시큰둥한 대답과는 달리,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할 정비를 마친 것이다.

 

“나야 뭐, 엄마 아빠 도와서 가게 운영하고. 두 분이 돌아가신 뒤론 혼자서 가게 운영하고…이게 쉽게 봤는데 보통 일이 아니더라? 혼자서 식재 사려고 이웃 마을까지 보따리 들고 찾아가랴, 식재 손질하랴… 그래도, 2년 전쯤부턴 사정이 좀 나아졌어.”

“음? 왜?”

“너 덕분이지.”

 

용사의 무용담이 하나씩 늘어갈수록, 이에 비례해 ‘용사의 고향’에 대한 관심도 커져갔다. 관광을 오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고, 왕국 후미진 곳에 있어서 방치되고 있었던 마을에 관리가 오는 일도 늘어났다.

그 덕분에 돌바닥으로 길을 포장하고, 못 보던 가게가 하나 하나 생겨났다는것이 아이린의 얘기였다.

 

“이제 마을에 상단도 들어온다? 덕분에 식재 사려고 빨빨거릴 필요가 없어졌어. 아,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아이린은 주방에 들어가 무언가를 뒤적거리더니, 조그마한 액자를 꺼내 상 위에 올려뒀다.

 

“상단에 그림 그리는 사람이 한 명 있더라고, 방랑 미술가라 했었나? 인연이다 싶어서 나 좀 그려달라 했더니 진짜 예쁘게 그려주더라. 뭐, 돈을 좀 비싸게 받아먹긴 했지만!”

 

아이린은 해맑게 웃으며 용사 앞에 액자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용사의 표정은 이와 정 반대로 썩어들어갔다.

다소곳이 앉아있는 아이린 옆에 왼팔이 잘려나가고, 얼굴 반쪽에 화상 자국이 있는 흉악한 놈팽이가 서있었으니까.

 

“...누구야? 이 사람은.”

 

경계심을 가득 담은채, 남자를 가리킨 용사의 질문에.

 

“내 남편.”

 

아이린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

 

순간, 용사의 모든 움직임이 멈추었다.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차마 다시 한 번 말해달라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또다시 ‘남편’이라는 소리가 아이린의 입에서 나왔다간, 마력 제어에 실패해 이 마을을 통째로 날려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남편… 이라고?’

 

용사는 참담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마른 세수를 했다. 얼굴에 손을 한번 문댈 때 마다 ‘25살이면 짝을 안 찾았을 리 없다’며 호언장담했던 멀린의 말이 귓가를 때렸다.

 

‘아니, 이게 무슨, 이게… 말도 안 되는.’

 

용사는 그 말에 코웃음쳤었다.

누가 자신을 놀린다 싶으면 곧바로 달려가서 코뼈를 아작내고, 또래 친구들을 보며 ‘깡촌이라 그런가, 죄다 꼬맹이들 밖에 없다니까.’ 코웃음을 흘리던 쌈닭 아이린한테 남편이 생기는 것 보단,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게 더 빠를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한동안 절망에서 허우적 거리던 용사는 차츰 총기를 되찾았다.

만약 아이린이 세상에 떠밀려서, 이런 깡촌에서 혼자 사는 게 힘들어서 아무나 붙잡고 결혼한 것이라면… 자신에겐 가능성이 차고 넘쳤다는 계산이 섰기 때문이다.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전란에 종지부를 찍은 예언의 용사만큼, 재력과 권력이 있는 남자가 이런 마을에 있을 리 없을테니까.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너한테 남편도 다 생기고.”

 

용사는 태연을 가장한 채 질문을 퍼부었다.

 

“그런데, 이렇게 생긴 녀석이 우리 마을에 있었나? 한스랑 좀 닮은 것 같긴 한데…”

“야, 내가 미쳤다고 한스같은 코찔찔이랑 결혼하겠어? 벌레 하나 못 잡아서 나한테 잡아달라고 매달리던 놈인데.”

“그러면… 킬리안인가?”

“걔는 이 마을 뜬 지 오래야. 용병이 되겠답시고 떠났는데, 아직 살아 있으려나?”

 

용사는 자연스레 농담을 섞어가며, 이 마을 출신 중 아이린 또래의 남자 이름을 하나 하나 전부 불렀다. 하지만, 그 모든 이름이 나왔음에도 아이린은 한결같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야? 그러면 누군데 대체?”

“이안이야. 이 사람 이름.”

“이안?”

 

이 마을에 이안이라는 놈이 있었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딱히 떠오르는 얼굴은 없었다.

그 아리송한 표정을 읽은 것일까. 아이린이 싱긋 웃었다.

 

“네가 모르는 게 당연하지, 이 사람. 외지인이거든. 4년 전에 이 마을에 온.”

“......”

 

용사의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다. 누군지도 모를 외지인 놈팽이한테 아이린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었다.

거기에 불을 지핀 것이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아이린의 눈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부모님을 잃은 쓸쓸함을 내비치던 눈동자가, ‘남편’이라고 말하자마자 반짝이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감정을 아이린 앞에서 내비칠 순 없는 노릇. 용사는 심호흡을 하며 평정을 유지하려 했다.

 

“왕국군 장교로 일했었는데, 무슨 전쟁에 나갔다가 부상 때문에 전역했다고 하더라. 은퇴하고 농사나 지을까 하고 이 마을에 정착한거고.”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아이린은 생기 가득한 눈동자를 한 채 말을 이어갔다.

 

“왜, 이 사람이 좀… 험악하게 생겼잖아? 처음엔 너무 무서웠거든, 그런데 매일 같이 식당에 찾아오니까 얼굴을 안 볼 수도 없고… 그래서 본 채 만 채 하고 스튜만 내줬었는데.”

“...그런데?”

“한 보름쯤 지나니까, 대뜸 그런 말을 하는거야. 힘들면 좀 쉬는게 어떠냐고. 나, 그 말 듣고 깜짝 놀랐다? 진짜로 힘들긴 했었거든.”

 

그 뒤에 이어진 아이린의 말은 용사의 가슴을 찢어놓았다.

살인적인 노동량이나, 자신을 자빠뜨리려는 생각밖에 없는 놈들의 개수작은 그나마 참아줄 만 했지만, 부모님의 빈자리가 주는 상실감만큼은 시간이 지나도 매워지질 않아서 가끔씩 소리 죽여 울곤 했었다고.

게다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면 남자들의 개수작이 심해질 게 뻔하니 슬픈 내색조차 내지 못한다는게 너무나 서러웠다고.

 

‘내가 있었다면…’

 

아이린한테 수작 부리는 놈들을 반으로 접어줬을 텐데.

참으로 쓸데없는 생각이란 건 용사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마왕을 죽이겠다고 결의한 건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으니까. 하지만, 후회가 남는 건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그렇게, 용사가 회한에 잠겨 자신의 어리석음을 곱씹고 있는 와중에도 아이린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그 사람을 점점 살펴보기 시작한 건. 참 딱해보이더라, 외팔로 서툴게 괭이질 하는게 안쓰러웠어. 그래서 가끔씩 농사를 거들기도 했었고. 그렇게 같이 붙어 있는 시간이 늘어나니까, 안 보이던 부분이 보이더라고.”

 

아이린의 말에 따르자면, 이안이라는 퇴역 장교는 제법 상냥한 사람이었다.

자신을 괴물이라 부르며 돌을 던지는 개구쟁이 아이들에게 장단을 맞춰주며 놀아주거나, 힘 쓸 일이 생기면 솔선수범해서 앞으로 나서는 등. 행적만 보면 자애로운 사제가 따로 없었다.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 점점 친해졌는데, 갑자기 궁금한거야. 내가 힘들어하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그래서, 물어봤지.”

“그랬더니?”

“유심히 살펴보니 힘들어하는게 눈에 보이더라, 이렇게 말했어. 그래서 내가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봤냐고 물어봤거든?”

 

그때를 회상하니 기분이 좋은 것일까, 아이린의 입꼬리가 잔뜩 올라갔다. 용사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천진하면서도 생명력이 넘치는 찬란한 웃음이었다. 그는 아이린의 저 웃음을 사랑했다. 지난 10년간 저 표정 하나 덕분에 싸워나갈 용기를 얻을 정도로.

그런데, 10년의 세월을 지나 저 웃음을 다시 봤을 때 느껴지는 건 입안에서 맴도는 쓴 맛 뿐이었다. 고작, 저 표정이 자신을 향한 것 아니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엄청 쑥스러워 하면서, 아름다워서 저도 모르게 시선이 갔다고. 그렇게 말하는 거 있지 글쎄?! 생긴 건 무슨 생고기 뜯어먹을 상남자처럼 생겨가지곤, 진짜 귀엽지 않아?”

“......”

“그래서, 그럴거면 남 몰래 쳐다보지 말고 사귀자고 했어. 그 뒤로 얼마 안 가서 결혼했고.”

“그러, 냐.”

 

용사의 목소리에 기력이라곤 한 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가슴 속에 자리 잡은 어마어마한 탈력감 때문이었다.

 

‘고작…’

 

일이 힘들면 좀 쉬는 게 어떠냐는 한 마디와, 당신이 아름답다는 한 마디 가지고 아이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나는, 이 녀석을 위해 온갖 사지를 헤집고 다니면서 마왕을 죽였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은 안다. 마왕을 죽이겠다고 결의를 한 것은 다름아닌 그 자신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리고, 그 감정은 곧바로 태도가 되어 나타났다.

 

“그런데, 그렇게 상냥한 사람이 왜 식당엔 코빼기도 안 보이냐? 다 잡은 물고기니까 너한텐 신경 안 써도 된다 이거야?”

“......”

“군인 나부랭이들이 다 그렇지 뭐, 칼 쓰는 것 밖에 몰라서 그런가? 집안에선 아내 윽박지르는 것 밖에 못하는…”

“뭐,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긴 뭐가…!”

“죽었거든, 1년 전에.”

“......”

 

용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토록 반짝이던 아이린의 눈동자가, 죽었다는 한마디를 내뱉은 순간 칙칙하게 물들었으니.

 

“어디서 흘러들어온 건진 모르겠는데, 들개 떼가 마을 밭을 죄다 헤집어 놔서 그 개새끼들 쫓아내겠답시고 칼 한 자루 들고 갔다가… 팔을 물려서 돌아왔는데, 그 뒤로 며칠 시름시름 앓다가 눈을 감더라. 촌장님 말로는 패혈증이라나.”

 

심해를 연상케하는 칙칙한 눈동자에서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그동안 꾹꾹 눌러담아왔던 마음이 눈물의 형태로 아이린의 볼을 타고 내려와, 원탁을 적셨다.

 

“...그러게 남들 도울 시간에 자기 몸부터 챙기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바보 같이.”

“.......”

 

용사는 이번에도 입을 다물었다.

아이린의 부모님 얘기를 들었을 때 처럼 그녀의 분위기에 눌려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이린이 이렇게 슬퍼하는데…’

 

용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아이린을 위로해야 한다는 것도, 제 말실수를 주워담아야 한다는 것도 까먹고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그녀의 남편이 죽어서 ‘다행’이라고.

곧바로 그 생각을 지워버리긴 했지만, 단 한 순간이라도 그녀의 불행에 안도감을 느꼈다는 사실이 용사를 무겁게 짓눌렀다.

 

“하아… 갑자기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했네. 아무튼.”

 

그동안 감정을 억누른 것인지, 물기가 있었던 아이린의 목소리가 다시 건조해졌다.

촉촉했던 눈가도 어느새 메말라있었다.

 

“그 뒤로는 뭐… 남편 묻어주자 마자 별 시덥잖은 놈팽이들이 자기랑 결혼하자고 찾아오더라. 나 혼자 살기는 힘드니까 아무나 붙잡고 결혼할까 싶었는데, 차마 그럴수가 없더라. 누구를 봐도 남편 얼굴이 떠오르는 거 있지?”

 

그러니까, 미안해.

 

용사는 갑작스런 사과에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누군가가 등 뒤에서 칼을 겨누고 있는 것 같은,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불안한 감각.

 

“그래서, 네 마음도 받아줄 수 없을 것 같아. 난 그냥, 평생 혼자 살 처지인거야.”

 

그 말과 함께 무언가가 시원하게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실제로 깨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아마 이 소리는 용사의 귀에만 울린 환청일 것이다. 10년 동안 키워온 연심이 깨져버린 소리.

그 뒤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지금 뭔 말을 들은거지?’

 

미안하다. 네 마음도 받아줄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은 고백을 하기도 전에 차여버린 거다.

이를 인지하고 나니 손이 벌벌 떨릴 정도의 거대한 울분이 들끓었다. 그 이안이라는 놈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길레,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이런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건 기회이기도 했다.

 

‘못 알아들은 척, 그게 무슨 소리냐. 공주병이라도 걸렸느냐는 한 마디만 하면.’

 

이 어색한 분위기를 흘려보낼 수 있다. 그러면 아이린은 무안하게 웃겠지. 그래, 내가 잠깐 헤까닥 했나보다. 하는 농담을 하면서.

아이린의 성격으로 유추해보건데, 이건 녀석 나름의 배려가 섞인 거절이었다. 분위기가 더 민망해지기 전, 여기서 이야기를 그만하자는.

그렇다면 그 배려를 받는 게 맞겠지.

그리 생각하고 입을 열려는 찰나.

 

“...언제부터 알았어?”

 

그보다 먼저 가슴속에 있는 말이 튀어나왔다.

용사의 이지는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어했으나, 용사의 본능이 이를 거부한 것이다.

 

“처음부터 뭔가 그래보이더라. 표정이 비장한게. 척 봐도 고백공격 하려는 것 같았어.”

“...그러냐.”

 

용사는 아무 말 없이 맥주를 들이켰다. 커다란 잔에 가득 차있었던 맥주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그는, 이 짧은 문답을 통해 깨달아 버린 것이다.

쓸쓸함만이 자리했던 아이린의 눈에서 그나마 생기가 감돌았던 건, 사별한 남편을 추억할 때 뿐이었다는 걸.

지금도 그녀의 눈가는 메말라있다는 것을.

 

‘고백공격이라.’

 

참으로 정확한 말이었다. 지금의 그녀에게 고백을 하는 건 폭력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 세상에 무한한 것은 없다. 인간의 감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용사라고 칭송받는 자신조차 언젠가부터 동료의 죽음에 눈길을 돌리고, 그 시체를 무덤덤한척 밟고 지나가며 승리로 향하는 길을 걷지 않았던가. 누군가의 죽음을 계속 눈에 세기면, 마왕을 죽이기 전에 마음이 죽어버릴 것 같아서.

다만, 아이린은 한 사람의 죽음을 겪자마자 마음이 죽어버린 것 뿐이다. 필시, 사별한 남편의 자리가 그만큼 거대했던 것이겠지.

그녀에게 고백을 하는 건, 비유하자면 메마른 우물에 두레박을 내리고 물을 퍼올리려고 하는 꼴이었다. 누군가는 물을 줄 수 없음에 고통스러워하고, 누군가는 애타게 갈증을 부르짖을 수 밖에 없는, 파국이 예정된 행위였다.

 

‘그나마, 희망이 있다고 한다면…’

 

시간이 흘러 언젠가 아이린의 마음이 다시 차오르는 날이 오는 것 뿐.

용사는 그 가냘픈 희망을 붙잡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 앞으론 여기서 살 생각이거든.”

“...왜? 너라면 어느 왕국에서건 떵떵거리면서 잘 살 것 같은데.”

“개같긴 해도, 여러 추억이 있는 곳이니까. 그리고, 사람 북적거리는 거 싫기도 하고. 아무튼…”

 

용사는 버릇처럼 잔을 쥐었다가 텅 비어버린 잔을 보고 혀를 찼다. 이런 꼴사나운 말을 하려면 술기운이 더 필요했다. 이런 희멀건 맥주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나. 용사는 마른침을 거듭 삼킨 후에 말을 이어갔다.

 

“만약, 견딜 수 없이 쓸쓸하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 최대한 도와줄테니까. 친구 좋다는 게 뭐냐?”

“걱정해줘서 고마운데, 이젠 괜찮아.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용사가 한도까지 용기를 쥐어 짜낸 제안은 아이린의 털털한 웃음 한 방에 격침되었다.

 

“그리고 너, 그런 말 앵간하면 하지 마. 오해 사기 딱 좋아.”

“...오해?”

“나야, 네 성격 아니까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니라는 거 아는데… ‘시간 지나서 전 남편을 잊게 되면 나한테 와라’ 처럼 들린단 말이야.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놈들이 수두룩 했는데, 그때마다 기분이 엄청 나쁘더라고. 지가 뭔데 그이를 잊으라 마라야? 참나.”

 

끼기긱-

 

용사는 귀가 새빨개진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린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더 이상 있다간, 자신의 추악한 마음이 전부 까발려질 것 같아서.

 

“가게?”

“응.”

“좀 더 있다가 가지, 왜.”

“...이렇게 늦었는데, 슬슬 가야지.”

 

어느새 달이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한 밤중이라는 말보단 새벽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식재를 다듬어야 하는 아이린을 계속 붙잡아 두는 것도 못할 짓이라고, 용사는 그렇게 합리화를 끝마치며 문고리를 잡았다.

 

“...하아.”

 

하지만, 차마 문을 열기가 어려웠다.

이 식당을 나서면 두 번 다신 아이린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 같아, 그렇게 한참 문고리만 매만지던 용사는 중얼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저기, 만약에. 진짜 만약에 말이야.”

“응?”

“내가 마을을 떠나기 전에, 마왕을 잡고 올테니까 너한테 기다려달라고 했으면… 뭔가, 조금이라도 달라졌을까?”

 

눈에 보일 정도로 뚝뚝 흘러내리는 미련.

그 감정을 느낀 것인지, 아이린은 외마디 탄성을 내뱉으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용사와 똑같이 미련이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글쎄, 아마. 그랬을 수도.”

“...그러냐.”

 

그 대답에서 무언가를 느낀 것일까. 용사는 그제야 가게 밖으로 나섰다.

아이린은 앉은 자리에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시간이 지나서 식어버린 스튜를 숟가락으로 휘적였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용사의 모습이 완전히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자, 아이린은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뻔하지 뭐. 마왕 죽이고 올 때 까지 기다려 달라니 양심에 찔렸겠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그 때 만큼은 양심을 접어두고, 기다려달라고 하지 그랬어.

 

“그러면 이렇게 슬플 일도 없었을텐데.”

 

아이린은 하염없이 스튜를 휘적거렸다.

10년의 세월이 지나 식어버린 자신의 감정처럼, 온기를 잃은 스튜를.


Posted by 비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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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중 '꼬마 마법사 레미'를 알지 못하는 분은 그리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한때는 이마트를 비롯한 대형 쇼핑몰 완구점에서 눈만 돌리면 레미 장난감을 볼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레미가 히트한지 거의 30년이 흐른 지금 애청자가 아닌 이상 이 작품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분은 그리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만해도 레미 하면 장난감만 생각났지 무슨 내용인진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간략하게 내용을 축약해 보자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할 용기를 얻고 싶어서' 마녀가 되고 싶어 하던 초등학생 3학년인 도레미가 우연히 '뚜리뚜리 마법의 성(원문: 마키하타야마 리카의 마법당)'이라는 곳에서 장사를 하던 마녀, 마조리카를 만나 수습마녀로서 친구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 정도로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기당 48~51화, 총 4기로 이루어졌으니 편수만 200화가 넘어가는 초 장편 시리즈인데요. 1기가 지날 때마다 1년이 지나가서 첫 등장 시엔 저학년으로 분류되는 초3이었던 도레미 일행이 마지막 시즌에선 초등학교 졸업반이 됩니다. 1년이 52주고 주당 한편 방영된다는 걸 생각해 봤을 때 레미 시리즈를 실시간으로 챙겨본 초등학생들은 제법 몰입할 수 있었겠네요. 아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도 그런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일상 속의 비일상

유감스럽게도 저는 레미가 한창 방영할 땐 디지몬에 푹 빠져있었던 터라 초등학생 때 기억이 가물가물한 지금에 와서야 뒤늦게 레미를 몰아보게 되었는데요, 본 작품을 보고 처음 느낀 건 '특이하다'였습니다.
현생을 살다가 악의 조직 따위가 나타나면 변신해서 싸우는(그리고 싸우는 과정은 대부분 인적이 없는 곳에서 이루어져서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가 뚜렷한) 베리베리 뮤우뮤우, 캐릭캐릭 체인지 등의 여타 마법소녀물과 달리 레미에선 현실과 판타지가 뒤섞여있었거든요.
그리고 마법소녀인 레미와 친구들은 마법을 부려 악역을 쳐부수는 대신,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문제를 해결하지요.
이런 특성 덕분에 레미 시리즈는 여타 아동 애니메이션보다 몰입하기 쉽다는 장점을 가집니다. 입만 열면 거짓말과 허풍을 내뱉는 반친구랑 엮이거나, 슬슬 유치하다고 취급받을 만한 괴수형 장난감에 푹 빠져 반에서 놀림받는 등장인물이 나오는 등 초등학생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거든요.
또한 아동 애니메이션에선 흔히 볼 수 없는 현실적이고 어두운 문제들을 조명해 주었다는 점 또한 이색적인 요소 중 하나였습니다. 이혼 가정 어서 자라는 아이의 슬픔이나, 술집에서 일하는 어머니를 둔 아이의 양가감정, 등교를 거부하는 아이의 트라우마를 비춰주는 등 요즘 매체에서도 보기 힘들 이야기를 따듯한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거든요.
이런 요소들이 합쳐져 200화가 넘는 애니메이션을 시청하는데도 크게 피로감을 못 느꼈습니다. 제가 초등학생일 적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제가 알지 못했던 문제들을 하나하나 짚어주니 빠질 수밖에요. 레미는 아동용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지만, 나이를 먹고 나서 봐도 몰입할 수 있게끔 제작된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마법은 왜 필요할까?"

시즌이 바뀔 때마다 다루는 메인 플룻이 달라지는데다가, 반 친구들의 문제를 다루느라 통일된 주제를 찾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꾸준하게 다루는 이야기는 존재합니다. '마법은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질문은 미성숙한 레미와 친구들은 물론, 마법이 일상에 녹아든 마녀들의 입을 통해 잊을만하면 한번씩 나오는 주제입니다. 주로 모든 것을 손으로 만들어내야하는 인간과, 만사를 마법으로 해결 할 수 있는 마녀들을 대조하며 보여주지요.
그리고 해당 주제가 나오는 에피소드는 제법 무게감 있게 그려집니다. 인간의 힘에 감화되어 마법을 쓰지 않고 나오는 마녀가 나오거나, 마녀임을 포기하고 인간계에서 유랑하는 마녀가 나오는 식으로요.
그래서 저 또한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마법은 정말 필요한걸까?
저는 그 답을 레미 시리즈의 말미에 가서 어렴풋이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마녀를 포기한 마녀

레미 시리즈의 마지막 시즌, 4기의 40화에서 레미는 항상 가던 똑같은 하교길에서 벗어나 낯선 길을 탐험하던 중 유난히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어느 집앞에서 멈춰섭니다.
우연히도, 그 집의 주인은 마녀라는 것을 숨기고 전세계를 유랑하며 유리 공예를 하는 마녀. 미래(미라이)였죠.
레미는 미래와 교감하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가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듣게됩니다. '마녀가 인간계에서 살기 위해선 여러 곳을 떠돌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얘기였죠.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레미 세계관의 마녀는 천년을 훌쩍 넘게 사는 장생종이거든요. 미래는 이 사실을 알려주며 레미에게 넌지시 경고합니다. 마녀가 되면 주변인들을 떠나 보내야 한다고, 그래도 정말 괜찮느냐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오랜 유랑 생활에 외로움을 느낀 것인지, 마녀로서 살아갈 거라면 자신과 함께 다른 나라로 떠나자는 제의도 건넵니다.
레미는 제안에 선뜻 답을 하지 못합니다. 레미에게는 주변인도, 마법도 모두 소중했으니까요. 그렇게 하루 종일을 고민하다가 결국 뒤늦게 미래의 집을 찾아가지만, 미래는 그 집에 없었습니다. 그곳에 남아있는 건 미래와 레미가 함께 만든 유리잔 뿐이었죠.
이 일을 겪은 뒤, 마녀가 될지 인간으로 남을지 고민하던 레미는 마녀를 포기합니다. 좋아하는 남자에게 고백하기 위해 마녀가 되고 싶었지만, 이는 굳이 마법을 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유리

앞의 에피소드에서 '유리'라는 소재는 제법 비중있게 다루어집니다. 에피소드가 진행될 동안 마법은 단 한 번도(!) 쓰지 않는데 비해 유리 공예로 무언가를 만드는 장면은 매우 공들여 묘사할 정도로요. 즉, '꼬마 마법사' 라는 정체성을 포기하면서까지 유리를 보여줘야 할 정도로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뜻이겠지요.
그렇다면 본 에피소드에서 유리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에 대해선 작중의 대사를 빌려 설명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미래는 유리를 두고 "움직이지 않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불변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시간을 들여 관찰하면 천천히 변화하는 것이라는 설명이죠.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들의 일상 또한 이와 비슷하지 않나요? 일상은 언제나 똑같이 흘러가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천천히 변해가니까요.
이렇게 생각해보니, 본 에피소드가 하나의 거대한 질문처럼 느껴졌습니다. '너희들은 일상 속으로 나아갈거야? 아니면 비일상을 향해 떠날거야?'
그리고 레미는 그 질문에 답을 했죠. 마법을 포기하는 식으로요. 즉, '마법이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다' 라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레미 제작진들은 마법에 무슨 의미를 담고 있었기에 이런 답을 내렸을까요?

우리들은 모두 꼬마 마법사였다.

잠시 다른 얘기를 해보자면, 저는 어렸을 때 소닉 시리즈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드넓은 안방 침대를 방방 뛰어다니며 소닉의 점프를 흉내내는 소닉 놀이도 했었죠.
아니, 흉내라는 말은 적절치 않은 말인것 같습니다. 적어도 소닉 놀이를 할 때의 저는 스스로가 소닉이 되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침대 위를 도화지 삼아서 스테이지를 그려나가고, 그 위를 뛰어다니며 에그맨이 만든 로봇들을 점프로 박살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실로 훌륭한 상상력이네요. 아무것도 없는 침대 위를 뛰놀며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니.
그런데, 여러분들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없지는 않을겁니다. 소꿉놀이를 하며 상상속의 가정을 불러오고, 장난감 칼을 휘두르며 스스로 파워레인저가 된 적은 누구에게나 있을테니까요.
우리들에겐 모두 머릿속의 공상을 현실로 끄집어내는 힘, 상상력이 존재했습니다. 실로 마법같은 힘이지요.
레미 시리즈의 제작진들 또한, 어린이들의 상상력이 마법같다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공상을 현실로 끌어오는 마법이 종종 나오는데다가... 마지막 화를 보니 이런 추측이 들 수 밖에 없더라구요.

졸업

레미 시리즈 대망의 마지막 화는 초등학교 졸업식을 그립니다. 이와 동시에 레미는 지난 4년간 함께해왔던 마법과도 작별을 하게되지요.
모든 졸업식이 그렇지만, 초등학교 졸업식은 유달리 떠나보내야 하는 게 많습니다. 저같은 경우엔 어머니가 '이제 초등학생이(어린애가) 아니니까' 라는 이유로 장난감 하나 둘씩 버렸고,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공부해야 하니까' 하며 초등학교 재학 중 쭉 다니던 태권도 학원을 끊어버렸던 기억이 있네요.
하지만 뒤 돌아 생각해보니 이것보다 씁쓸한건, 다름 아닌 상상력과의 작별이었습니다. 저는 어느새 소닉 놀이를 하지 않게됐고, 장난감 칼을 휘두르며 놀게 되지도 않게 됐습니다. 그런 건... 중학생이 하기엔 너무 유치해보이니까요.
그렇기에 레미는 마법을 떠나보내야 했던겁니다. 현대의 마법인 상상력은 보통, 늦어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될 때 즈음을 기점으로 작별하게 되니까요. 이제 우리와 레미를 기다리는 건 상상과 즐거움 따윈 하나 없는 우중충한 현실 뿐...
... 일까요?

일상 속에서 쌓아 올려진 것

레미 시리즈의 후반은 울적하고 씁쓸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영원히 함께 할 것 같았던 친구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거든요.
원래 미국에서 살았던 모모는 아버지의 전근이 끝나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하고, 보라는 연예계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타지역 중학교로 진학을 결정합니다. 사랑이는 부모님이 재결합하며 터를 잡을 부산으로 이사를 가야했죠.
심지어 유치원 때부터 레미와 함께했던 메이마저 바이올리니스트의 꿈을 이루기 위해 레미와는 다른, 음악 중심의 중학교로 가기로 마음을 먹죠.
레미는 그들을 웃으며 보내주었지만 속으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씁쓸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이윽고 졸업식 날 터져버리고 말죠. 마법을 떠나보냈는데, 자신과 함께 마법을 부리던 견습 마녀 일행들은 물론 초등학교 친구들과도 작별을 해야하니까요.
그 때문에 레미는 졸업식 날, 학교를 가지 않고 마법당에 가서 농성합니다. '모두를 떠나보낼 바에야, 졸업 따윈 하지 않겠다'며 말이죠.
그 마음을 보듬어준건 다름 아닌 레미의 초등학교 친구들이었습니다. 견습 마녀 친구들은 물론, 그동안 레미가 마법으로 도와준 아이들이 마법당 앞에 모여 레미에게 말을 걸죠.  "고맙다."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다." 라구요.
우리들 또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을겁니다. 같은 공상을 공유하며 소꿉놀이, 칼싸움 놀이 등을 같이 하던 친구들은 상상력과 작별해도 남는 현실 속의 존재니까요.
결국, 레미의 완결은 이제 레미를 떠나 보내야 하는 '졸업반'들을 위로해주는 이야기라 볼 수 있겠습니다. 지금까지의 너를 구성하는 것들을 떠나보내도, 네가 쌓아 올린 관계가 있으니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따듯하게 말해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

마치며

중언부언 이야기가 길었습니다. 제 글재주가 모자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꼬마 마법사 레미를 감명 깊게 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레미 시리즈는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마저 보듬어주고 위로해주는 따듯한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모쪼록, 여러분도 언젠가 시간이 날때, 꼬마 마법사 레미를 보시며 위로와 감동을 얻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그러했듯이요.

Posted by 비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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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끝이야? 이러고 끝난다고?”

 

  돌아왔다. 『Starry nignt』의 메인화면으로 돌아왔어. 엔딩을 장식하는 노래랑, 스텝 롤이 끝난 다음엔 ‘마리 발렌틴 드 오를레앙’의 뒷 이야기가 한줄이라도 나올 줄 알았는데… 단 한 줄도 안 알려주고 그냥 이렇게 끝내버린다고? 아니야. 이럴 순 없어. 다른 이상한 잡놈들의 후일담은 다 알려줬잖아. 하다 못해 내가 물약을 산 상인의 후일담까지 일러스트랑 같이 보여줬으면서, 마리님이 어떻게 됐는진 안 알려준다고? 

 

“아니… 이게 말이 돼?”

 

 마리님이 죽었으면 또 몰라. 게임에 나오는 모든 선택지를 고르고, 모든 히로인을 공략해서 모든 엔딩을 다 봐서… 마리님이랑 주인공이 어떻게 화해하는 엔딩을 겨우겨우 봤잖아. 여기선 마리님이 사형당하진 않았잖아. 마리님이 어디 감옥에 유폐된것도 아니고, 국외추방으로 끝났는데… 이 뒤로 마리님이 뭔 일을 하는진 안 알려줘? 끝까지 철 없는 악역이었으면 또 몰라, 여기서는 화해 했잖아. 그리고, 이 게임의 얼굴마담을 공략한거니까 아마도 이게 정사일거아니야. ‘제가 이제와서 단 하나의 선행을 했다곤 해도, 그 전에 한 수백가지 악행이 정당화되는것은 아닙니다.’, ‘오를레앙 가의 잘못이라 하면, 저 또한 책임을 져야겠죠. 저는 오를레앙 가의 영애니까요.’ 라는 말을 한 사람의… 개심한 사람의 뒷 이야기를 안 보여줄거라고? 이 스크립트를 쓴 사람은 진짜 사람새낀가?

 

“이게…”

 

 모니터를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가, 이 모니터가 얼마짜리인지 생각하니 주먹이 나가다가 말았다. 이 분노를 어찌 표출해야하나 하다가, SNS를 켜서 『Starry nignt』가 얼마나 똥 게임인지… 아니, 얼마나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는지 적어내렸다. 글자 제한에 걸려서 글을 끊어 올리며 타래를 네 개 이었을 때, 인터넷 친구가 나한테 해준 말이 생각났다.

 

-”이 게임, 히든 루트가 있거든. 주인공의 설정이…”

 

“... 그래!”

 

 혹시나 모른다. 히든 루트에선 마리님이 주인공과 함께… 아니, 주인공과 함께일 필요도 없어. 그냥 평범하게 잘 살아가는 엔딩이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고 New game을 누르고, 키보드 옆에 놓은 에너지 드링크의 뚜껑을 열었다. 하루 하고도 반나절을 안 자서 눈이 감겼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잠을 자야겠지만 잠 따위가 대수인가? 그리고, 지금 플레이 안하면 또 언제 플레이 할 시간이 날 지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곤, 에너지 드링크를 입 안 가득 머금은 다음 삼켰다. 

 

“어…..”

 

 시야가 흐려졌다. 몇 시간 전에도 이랬으니 졸려서 그런건가 싶었는데, 몇 시간 전하고는 느낌이 달랐다. 손이 저리고, 숨이 가빠왔다. 뭐지? 뭔가 이상한데? 카페인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가? 그러면 잠깐 물이라도 좀 마시고…

 게임을… 할까 했는데... 

 왜 몸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

 

*

 

“마엘?”

“.....”

 

 … 전부 기억났다.

 

“자기소개를 한 뒤엔 사람을 앞에 두고 묵언으로 있으라는게 루에르그 가의 교육 방침인가요? 무례하긴…!”

“아, 아닙니다! 잠시 현기증이 일어서… 본의로 한 행동은 아니었으니, 선처를…”

“... 그렇게 말하니 한번은 용서하겠습니다. 명심하세요.”

“네,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스물 일곱의 회사원이었어. 내가 평소에 꿨던 이상한 꿈은, 사실 이상한 꿈이 아니라 전생의 기억이었던거야. 정말 천운으로 금요일에 야근을 안하게 됐고, 주말에 출근을 안해도 되서 밤 새서 게임을 하다가 카페인 쇼크 때문에 죽은 한심한 회사원…! 

 

“그럼, 안내하세요.”

“네?”

“.....”

“당신이 말했었잖아요? 레오님을 화원 근처에서 봤으니 안내해주겠다고.”

“..... 아, 아!”

 

 갑자기 기억을 되찾아서 혼란스러워서 잊고있었다. 나는, 그러니까 ‘마엘 클레망 드 루에르그’는 후작侯爵가의 영애다. 올해 8살이 되어 8살 생일을 맞은 ‘레오 바스티안 아르투아’님의 생일잔치에서 사교계 데뷔를 하게 됐고, 아버님의 부탁으로 공작 가의 영애와 친분을 쌓기위해 대화하고 있었어. 짤막하게 자기소개를 나눈 다음에, 이 사람이 레오가 어딨는지 아느냐고 물어서 대답하고 있었었지, 그리고 이 사람은 분명...

 

“네, 안내하겠습니다. 마리 발렌틴 드 오를레앙님. 정원까지 가는 길이 복잡하니 주의해주세요.”

“그 말인 즉, 제가 안내인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우자愚子로 보인다는?”

“아, 아니여요! 제가 감히 어찌 그런 생각을…! 저는 그저 마리님이 걱정되어서 이렇게 말한 것이랍니다.”

“... 너무 과한 걱정이라는 말 밖엔 안 나오는군요. 군말말고 안내해주세요.”

 

 마리 발렌틴 드 오를레앙. 오를레앙 가의 공작영애이자…내가 생애 마지막으로 플레이했던 대작 여성향 게임 『Starry nignt』의 악역 영애이며, 그 게임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다. 이름만 같은 다른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장미를 연상케하는 붉은 머리칼이나, 자수정같은 보라색 눈동자로 특정되는 외양이며 목소리나 성격까지 모두 똑같아. 그러고보니, 마엘 클레망 드 루에르그라는 이름도 『Starry nignt』에서 봤었어. 마리의 옆에 붙어있었던 최측근의 이름이었지.

 

“네, 알겠어요. 마리님.”

 

 혼란스럽다. 머릿속에서 아무것도 정리가 안 돼. 나는 게임 속 세계에 들어온건가? 아니면 꿈이라도 꾸고있는건가? 가만히 멈춰서서 정리할 시간을 가지고 싶지만... 일단은, 지금 일어난 일을 수습하는게 먼저다…!

 

*

 

“아버님이나 어머님이 부르는게 아닌 이상,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전해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마엘 아가씨.”

 

 정통적인 메이드복을 입은 하녀가 내 방문을 닫고 나가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 한숨이 무언가의 스위치였는지 온 몸의 힘이 한숨과 함께 쭈욱 빠져버렸다. 사교계라는건 이렇게까지 힘든 공간이었나? 그리고, 밖에선 불편했으니 집에서라도 편해야되는데 집에 돌아와봤자 내 아빠나 엄마라는 사람들도 나를 옥죄기만 할 뿐이잖아. 대체 귀족들은 어떻게 살았던거야? 이렇게 직접 겪고 나니 거지랑 자기 지위를 맞바꾼 왕자 얘기가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였다.

 그래도, 내 방에선 편하게 지낼 수 있으니까 조금 마음 놓이네, 나는 전생의 내가 세명이나 들어가도 여유롭게 공간이 남을 침대에 대자로 퍼진 다음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대체 뭔일이람...”

 

 마엘, 마리, 그리고 제2 황태자라는 ‘레오 바스티안 아르투아’ 까지 전부 『Starry nignt』에 나온 캐릭터였다. 그리고, 오늘 사교계에서 들은 다른 영식令息들의 얘기나, 불 속성 마력에 각성해서 마법 학원에 가야하니 마니 하는 얘기또한 『Starry nignt』의 설정과 겹하는 부분이 있었다. 마법 학원 얘기야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설정이지만, 내가 봤던 캐릭터들이 이렇게 많다는 건 역시…

 

“이게 꿈이 아니라니…”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나는 『Starry nignt』의 세계에 들어온거야. 볼이니 손등이니 허벅지니 꼬집어봐도 아픈걸 봐선 꿈도 아니야. 어떻게 이 세상에 들어온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처음엔 어떻게 돌아가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죽은 사람이 원래 세계에 가봤자 돌아갈 곳이 어디있을까? 그리고 돌아가봤자 또 회사의 소모품으로 갈려나가는 인생이 기다릴 뿐이란 생각이 들어 이 세계에 적응하기로 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푹 자버리고 싶지만, 내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서랍을 열어 공책을 꺼내고, 공책 옆에 있는 깃펜과 잉크를 꺼내 내가 기억하고 있는 『Starry nignt』의 모든 정보를 적어내렸다. 다행이다. 전생의 기억이 돌아왔다고 해서 현생의 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서.

 『Starry nignt』는 여성향 게임으로, 네 명의 공략대상이 있는 게임이다. 그 중에 하나가 방금전에 봤던 레오라는 캐릭터고, 그 캐릭터가 『Starry nignt』의 얼굴 마담이었지. 그리고 유즈리하라는 동방출신의 진지충 캐릭터랑 쟝이라는 알기쉬운 츤데레 캐릭터가 있었고… 아! 그래, 아벨을 빼먹으면 안되지. 드래곤이면서 인간 사회에 섞여 살려고하는 괴짜 캐릭터. 아벨루트는 각별히 짜증났었어. 공략 난이도도 어렵고, 성격도 괴팍하고.공략캐릭터 정리는 이정도면 된 것 같다. 필요한 정보가 생기면 그때 살을 붙히지 뭐.

 

“으음…”

 

 『Starry nignt』가 대작이라고 불릴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여성향 게임치고 잘 짜인 턴제 전투 시스템 덕분. 각자의 캐릭터들이 가진 바람,물,불,흙의 마력 속성이 상성으로 적용하고, 캐릭터들끼리 합체기를 써서 속성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등 전략성이 깊다. 빛이랑 어둠이라는 히든 속성이 있고, 어둠은 빛을 제외한 전 속성에 상성이고 빛은 모든 속성에 상성을 가지지만 그런 속성을 가진 캐릭터를 조작할 수 있는 기회는 희귀했다. 어둠은 마족이나 마족에 조종당하는 캐릭터만 쓸 수 있는 적 캐릭터 전용 속성이었고, 주인공으로 조작하는 캐릭터가 빛 속성을 가지긴 하지만 그 속성으로 각성하는건 게임 후반부 가서니까.

 

“마엘도 마법 학원에 있었으니 마력을 가지고 있을텐데… 무슨 속성이었더라. 뭐, 그건 나중에 알겠지.”

 

 그리고 남은 하나의 이유는… 『Starry nignt』의 주인공의 배경설정을 자신이 설정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다 빛의 마력에 각성해서 주변의 추천으로 인해 마법 학원에 특례입학한 설정이 있고, 몰락한 귀족가에서 자라다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마법 학원에 입학했다 빛의 마력이 있다는걸 선생한테 듣는 설정이 있지. 배경 설정에 따라 어떤 캐릭터는 공략 불가가 되고, 악역이 바뀌고, 대화 스크립트가 굉장히 많이 바뀌는 등 굉장히 공을 들였다는 인상이 있었다. 그래, 중요한 건 이거였다. 주인공의 배경설정을 선택하는 시스템.

 

“......흠.”

 

 주인공의 배경설정에 따라, 마리님이 마지막에 어떻게 되는지가 바뀐다. 제일 끔찍하게 끝나는 건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는 설정에 레오를 공략하다 실패하는 루트였지. 레오의 약혼녀인 마리님이 주인공을 질투하다 주인공을 죽여버리려하고, 주인공은 가사상태에 빠지는 루트. 레오는 마리님한테 깊히 분노해서 오를레앙 가의 부정을 국왕에게 고발하고, 오를레앙 가는 그 죄로 노예로 격하. 마리님도 노예로 팔려간뒤에 어딘가에서 맞아 죽었다는…

 

“진짜, 시나리오 라이터는 어떤 새끼야? 얼굴이나 한번 보고싶네.”

 

 내가 왜 이걸 중요하게 생각하냐면, 마엘이라는 캐릭터는 마리님의 최측근인 만큼 마리님의 최후에 따라 마엘이라는 캐릭터의 거취도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마리님이 노예로 팔려가는 루트에선 마엘의 가문도 부정에 연류되어 있다는게 들통나 마엘도 마리랑 같이 노예가 됐다. 마리님이 사형당하는 루트에선 마엘도 감옥에 투옥되고… 그러니까, 마리님과 나는 지금 운명공동체라고 해도 무방하다.

 

“... 이걸… 이걸, 어쩌지?”

 

 한숨이 나왔다. 마리님이 가장 온건하게 끝나는 최후는 국외추방, 마엘도 평민으로 격하되어 마리를 따라갔었지. 나야 마리님이 옆에 있다면 무슨 삶이건 괜찮을 것 같지만, 마리님은 그게 아닐것이다. 마리님은 태생부터가 귀족이니까. 그렇다면, 마리님이 지금부터라도 평민의 삶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내가 옆에서…

 

“아니? 잠깐만.”

 

 왜 이 생각을 못했지? 마리님이나 나는 지금 8살이다. 그리고 주인공이 캐릭터를 공략해서 마리님의 최후가 결정되는 건 마리님이 16살이 되는 무도회의 날. 그렇다면, 나는 마리님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8년의 시간이 있다는 것 아닌가?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두뇌에 기름칠이라도 된 듯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마리님이 심판받는 악행은 두 가지다. 하나는 ‘평민(혹은 몰락귀족)주제에 빛의 마력을 가졌다고 으시대는게 건방지다’며 주인공한테 행하는 괴롭힘. 이건 크게 문제가 안된다. 내가 옆에서 그런 마인드를 교정하면 되니까.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으음…”

 

 마리님의 가문에 관련된 문제였다. 마리님의 가문인 오를레앙 가문은 부패한 관리들의 뒤를 봐주고 뇌물을 얻은 혐의가 있다. 마리님은 오를레앙 가의 영애니까 연좌죄에 걸려 심판받게 된다. 루트에 따라선 그런 부패한 관리들의 도움을 받아 주인공을 방해하기도 했고…

 

“...흐음.”

 

 게임 스크립트에 따르면, 오를레앙 가가 나서서 부패를 저지르는 가문은 아니었다. 오를레앙 가는 능력있는 관리들을 후원했고, 그 관리들 중 몇몇이 부패했을 뿐. 그리고 그 부패한 관리들에게 엮여 오를레앙 가 또한 부정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그 관리들과 오를레앙 가의 연결을 끊으면 해결 할 수 있는 문제인데… 그런 일을 내가 할 수 있을까? 전생의 기억이 돌아왔지만 지금 내 나이는 8살. 8살짜리 아이가 어떤 놈이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있느니 마느니 해봤자 진지하게 먹힐 리가 없어. 그리고 나는 후작가의 영애니까 공작가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아! 그래.”

 

 나는 방 문을 열고 웅장한 그림들이 걸려있는 복도를 걸었다. 얼마 걷지 않아 바쁘게 움직이는 사용인을 찾을 수 있었다.

 

“저기.”

“아, 네! 아가씨.”

“아벨… 아, 아니, 그러니까. 콘라트 가에 언제 한번 방문 약속을 잡고 싶은데 아버님께 말을 전달해주시겠어요? 콘라트 가 영애에게 손수건을 빌렸었는데, 손수건을 돌려드리는 겸 교우를 다지고 싶거든요. 콘라트 가 영식… 아벨 크리스티안 님과도 한번 얘기를 나눠보고 싶고요. 영특한 분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어..? 알겠습니다. 전달해드릴게요.”

 

 내 힘으론 안된다면, 다른 사람의 힘이라도 빌려서 지키는거야. 기억하자, 『Starry nignt』를 플레이하면서 마리님을 떠나보낼때의 그 안타까움을.

 악역이라서 심판받는다? 그렇다면 마리님이 악역이 아니면 되는 거잖아!

 

*

 

“우와…”

 

 기억을 되찾고 7년. 그 동안 온갖 장관은 다 봐서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왕립 클라리스 마법학원의 정경은 나의 그런 생각을 가볍게 뒤집었다. 장엄함이 느껴지는 마법학원 설립자의 동상, 동상 근처를 꾸미고있는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 이 중 단연 내 시선을 빼앗은 건 학교 옆에 있는 부유성이었다. 상위 성적을 가진 학생들이 저기서 수업을 받는다는 설정이었지. 게임 속에서 수없이 봐서 별 새로울게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게임의 일러스트와 내 눈앞에서 진짜로 펼쳐지고 있는 풍경은 박력감부터 달랐다.

 

“뭐야, 뭘 그렇게 보고있어? 설마 마법학원을 실제로 보니까 진짜 대단하구나~ 같이 촌년같은 감상에 빠진건 아니지?”

“.....”

 

 내 감상을 비집고 들어오는 이 짜증나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 답하려고 몸을 돌리기도 채 전에, 목소리의 주인공은 내 어깨 위로 팔을 두르곤 내 옆으로 삐쭉 튀어나왔다. 날카로운 턱선, 긴 속눈썹이 인상적인 아름다운 눈. 적당히 꼬불거려 잔잔한 파도를 연상케하는 은색 단발… 지난 7년간 지긋지긋하게 본 옆얼굴이었다.

 

“하하… 안녕하세요, 평안하셨는지요? 아벨님.”

“에이, 우리 사이에 뭐 그렇게 딱딱하게 인사해. 평소처럼 대하지 그래. 김유ㅈ-”

 

 대체 몇번을 이걸가지고 놀리는거람. 역시 본명은 알려주지 말걸 그랬어.

 

“아아~! 김! 김이요?! 그 동양의 해초 말이죠? 저도 한번 먹어보고 싶답니다. 식감이 색다르다는 말을 질리도록 들어서~”

“아직 주변에 아무도 없는데? 뭘 그렇게 쫄아서…”

“... 이걸로 수백번째 부탁하는 거 같은데, 제발 좀 조용히좀 해주면 안 돼요?”

“안될걸? 이렇게 놀리는게 워낙 재밌어야지.”

“아니 그… 아니다. 됐어요.”

 

 아벨 크리스티안 드 콘라트. 콘라트가의 장자로,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 한 귀공자같은 얼굴에 5살에 바람속성마력에 각성하고 10살이 되는 시점엔 어지간한 중견 마법사보다 뛰어난 마법 기술을 가진것도 모자라 성인에 비견되는 마법이론과 식견을 가진 완벽 초인…

 이라는 건 아벨이 스스로 부과한 설정이고, 저녀석은 사실 용족이다. 자신의 둥지에서 가만히 처박혀있는 삶이 지루해 인간 사회에 뛰쳐나온 괴인으로, 그렇게 산지 100년이 넘는 녀석이다. 이번에 아벨이라는 귀공자로 변해있는건 아이가 안나와서 걱정이었던 콘라트가에 ‘아들을 연기해줄테니까 내 신분을 보장해 줘’라는 계약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계약한 뒤에 기적적으로 딸이 나오긴 했지만.

 

“말을 할거면 끝까지 하라니까? 너 그러는거 되게 예의없는 행동이야.”

“오~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제가 지금까지 본 사람들 중에 제일 예의없는 아벨 크리스티안 드 콘라트님.”

“너, 해가 넘어가면 넘어갈수록 내 취급이 점점 험해진다? 내가 그동안 도와준거 다 잊었어?”

“... 그 점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니까요.”

 

 게임 내에서 아벨은 어디까지나 주인공의 공략 대상으로, 나… 그러니까 마엘과 엮일 일은 없다. 그렇지만 나는 지난 7년간 아벨과 함께 오를레앙 가의 후원을 받는 부패한 관리들을 잘라내기 위해 공투했다. 어린 아이가 단신으로 해내기엔 너무나도 힘에 겨운 일이어서 도움을 받을 사람이 필요했고, 그나마 제일 현실적으로 나를 도와줄 수 있을 사람(아니면 용이라고 불러야 할까)은 아벨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두가지. 오를레앙 가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어지간한 물리력과 정치력이 필요한데 마엘의 신분으로 만날 수 있는 사람 중에 그런 조건이 맞는 사람이 아벨밖에 없기 때문이었고, 그 다음으론 ‘여기는 게임 속의 세상이고, 나는 그 게임을 즐기던 플레이어였다. 나도 모르는 사정으로 인해 여기에 전생하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미래에 겪을 파멸을 피하기 위해선 당신의 힘이 필요하다’ 라는 설명을 듣고 납득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벨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뭐, 사실 아벨이 저런 설명을 듣고 납득했을 거라곤 생각 안한다. 그냥 순전히 재미있기 때문에 나를 도와준 거겠지.

 

“그러면 좀 더 성의를 표하는게 어때? 이를테면 -”

 

 아벨은 내 턱을 가볍게 들어올리더니, 그 특유의 멋있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이 얼굴엔 적응이 안되네. 이렇게 잘생긴건 반칙 아니야? 멍하니 그 얼굴을 쳐다보다 침이 입 밖으로 흘러 나올뻔했다.

 

“.....저기요, 이제 조금 있으면 모든 학생들이 등원하러 올거거든요.”

 

 나는 슬며시 아벨을 밀어냈다. 나를 도와준거야 너무나도 고마운 일이지만, 이렇게 찐득찐득한 성격은 너무나도 부담됐다. 내가 좋아서 이러는게 아니라 그냥 놀리는게 재밌어서 나한테 이런 짓을 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 더더욱. 도움을 받는 댓가로 이렇게 대시를 받을 줄 알았으면,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좀 더 없을지 생각 해봤을 것 같아.

 

“거기 두사람, 길가 한복판에서 무얼 하고 있는건지요? 이제 곧 모두가 등원할 시간입니다. 어엿히 다 자란 남녀 둘이서 그러고 있으면 추문이 돌지도 모르지요. 아벨, 당신이야 그런 걸 신경 안쓰는 성격이니 상관 없겠지만 마엘은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통행에 방해가 됩니다.”

“아! 마리님!”

“오~ 평안하셨는지요? 마리님.”

“남을 너무 놀리지 말라는 말, 하지 않았었나요? 아벨.”

“하여튼, 마리는 농담이라는 걸 모른다니까. 맨날 그렇게 미간에 주름잡고 살면 나중에 그 이쁜 이마에 주름이 자글자글할걸?”

“ㅈ, 제2 황태자님의 약혼녀에게 지금 무슨 망발을…!”

“마엘. 말 했잖아요? 저런 한량한테 일일히 말대꾸 해주지 말라고. 상대하는 것 만으로도 격이 떨어집니다.”

“알겠습니다. 마리님.”

 

 곤란해하고 있던 찰나, 나의 구원자이자 내가 지금 이 세상에서 살고있는 이유인 마리님이 나를 구해주셨다. 아아, 언제봐도 아름다우시다니까!

 마법학원에 등원하는 첫 날이라 그런지, 잔뜩 기합을 넣으신 모습이었다. 기품있는 올림머리, 그리고 마리님의 색조와 잘 어울리는 붉은 드레스. 내가 게임에서 봐왔던 그 모습이었다. 여태까지 본 생머리 스타일의 마리님도 아름다웠지만, 역시 마리님의 모습은 이래야지!

 

“에휴. 너랑 얘기하느니 차라리 벽이랑 얘기하지. 그럼 먼저 가본다. 나는 너희들이랑 달리 부유성에서 수업을 듣거든.”

“참으로 아쉬운 일이죠. 클라리스 마법학원이 철저한 실력주의가 아니여서 평가 항목중에 인성이 있었다면, 당신은 부유성이 아니라 하수구에서 수업을 들었을테니.”

“아니 꼬우면 너도 부유성으로 올라오라고?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금방 들어갈테니 걱정하지 마시죠.”

 

 “불의 마력을 다루면서 말 한마디 한마디는 쌀쌀하기 그지 없다니까.” 라고 말한 아벨은, 마리님이 무어라고 쏘아붙히기 전에 도망치듯 부유성으로 향했다. 마리님은 그 뒷모습을 보곤 이마를 짚으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마엘, 제가 말하지 않았나요? 저런 자와 상대하고 있으면 그 자체만으로 품위가 떨어진다고.”

“무, 물론 마음 속 깊히 세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후작가의 신분으로 공작가의 장자에게 무어라 대꾸하기 어렵다. 맞죠?”

“......”

 

 지난 몇 년간 저 핑계를 대면서 아벨이랑 어울렸으니 이제 내 말을 외우고 있는것도 무리는 아닌가.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드세요 마엘. 당신 뒤에는 제가 있어요. 아벨같은 작자의 수작질에 놀아나게 두진 않을거에요.”

“마리님…!”

 

 가슴 속에서 무언가 왈칵하고 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마리님을 포옹할 뻔 했는데, 다행히도 내 그런 행동을 등 뒤에서 들려오는 잡담이 막아주었다.

 

“당신도 들었나요?”

“뭘요?”

“특대생이 입학한다고…”

“음… 네, 들었던 것 같아요. 평민 특대생이 들어온다고.”

“이런 걸 보니 클라리스 마법학원이 국내 제 일이라는것도 옛말인가 싶어 슬프네요. 요즘 아무리 실적이 밀린다고 해도 그렇지 평민따위를…”

“그러니까 말이에요…”

 

 들려오는 목소리는 생경했지만, 너무나도 익숙한 대화 내용이었다. 주인공이 평민인 루트로 게임을 시작하면 나오는 대화가 딱 저런 대화였으니까. 저 대화만 열번을 넘게 봐서 눈이랑 귀에 박혔어. 원래는 빛의 속성이니 어쩌구니하는 얘기도 했었는데… 게임이랑 지금 있는 세계가 100% 똑같은 것도 아니니까.

 아무튼, 저 대화가 들린다는건 아마 쟤들 뒤를 따라오는 사람이...

 

“......”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너무나도 익숙한 외형의 사람이 내 눈 앞을 지나갔다. 목까지 내려오는 웨이브진 백금발, 하늘을 박아놓은 것 같은 아름다운 하늘색 눈동자. 그리고 가슴팍에 달려있는 푸른 리본이 인상적인 하얀 원피스.

 『Starry nignt』를 몇번이고 반복플레이하면서 지긋지긋하게 본 모습이었다.

 

“엠마 코르데…”

 

 나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이 입 밖으로 나왔다. 『Starry nignt』의 주인공, 엠마 코르데. 무슨 선지를 고르느냐에 따라 달라지지만 기본적으로 성녀를 연상케하는 다정함과 포옹력을 가진 캐릭터 였지.

 

“마엘?”

“ㄴ, 네?”

“누군가요? 그 엠마 코르데라는 사람은.”

 

 나를 혼내는 듯 한 마리님의 목소리를 듣자 정신이 퍼뜩 들어서 곁눈질로 엠마를 쳐다보았다. 엠마는 우리 대화를 듣고 있었던건지, 아니면 자신의 이름이 들려 저도 모르게 우리를 쳐다보는 거였는지 엠마 또한 나를 보고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엠마는 급하게 고개를 돌리고 빠른걸음으로 학원을 향해 나아갔다.

 

“아, 아아… 그, 올해 입학하는 평민 특대생의 이름이에요. 방금 전에 그 대화를 듣고 있자니, 저도 신경쓰여서.”

“그런가요.”

 

 마리님은 내 말을 듣고 별다른 감상없이 교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도 아무 말 없이 마리님의 뒤를 쫓았다.

 아, 그래. 여태껏 확인을 해 봤지만, 지금 다시 한번 확인을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이런 화제를 꺼내도 부자연스러워보이진 않을테고.

 

“저, 마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어떻게 생각하냐는건?”

“왜, 평민 특대생에 대한 얘기요. 클라리스 마법학원이 실적에 밀려서 평민따위를 입학시켰다고 말이 많잖아요.”

“어떻게 생각하고 말고 할 문제인가요? 실력이 있으니까 이 학원에 들어온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

“지금 이 학원이 욕을 먹어야 되는 건 평민 특대생을 입학시킨 게 아니라, 아벨같은 작자한테 특례랍시고 입학하자마자 부유성에서 수업을 듣게 해준거에요. 그리고 그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죠. 이 학원은 철저하게 실력만을 보고 사람을 뽑는다는걸.”

 

 정말 다행이다. 오늘까지도 마리님이 엠마를 보고 무어라고 생각할지 걱정했는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니… 지난 7년간 ‘귀족이나 평문이나 똑같은 사람’ 이라고 사고를 유도한게 통하고 있어. 마리님이 평민에 대해 선민의식을 가지게 된 건 오를레앙 가에 들락거리는 부패한 관리가 마리님을 교육시키겠답시고 이상한 사고를 주입시킨데다, 레오한테 선물받은 엠블렘을 평민한테 도둑맞았기 때문이니까... 부패한 관리를 잘라내고 엠블렘 도난을 사전에 방지했으니 이렇게 되는게 맞지. 그리고 내가 옆에서 수백번이라고 해도 모자를 만큼 평민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걸! 지난 7년간의 고생이 한순간에 보답받는 느낌이었다.

 

“마엘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저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긴, 당연하겠네요. 당신은 저의…”

 

 뒷 말을 기다렸지만 마리님은 말을 잇지 않았다.

 

“네?”

“...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네에? 알려주시면 안되나요?”

“그럼 직접 한번 생각해보지그래요? 당신이라면 이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저는 아벨따위보다 당신이 훨씬 똑똑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데.”

“......”

 

 마리님,  그렇게 세상에 둘도 없는 미소를 지으며 저를 높히 평가주는건 너무나도 고맙지만 제가 가끔씩 똑똑하게 보이는 이유는 제가 이 세상에 오기전에 이 게임을 몇십번이고 플레이했기 때문이에요…

 언젠가 이 오해를 풀어야하는데, 어떻게 풀어내야 하나. 마법학원에 등원하는 첫 날, 나는 그것만을 고민하며 마리님의 뒤를 따라 마법학원에 들어갔다.

 

*

 

“......”

 

 피를 깎고 뼈를 토하는 괴로움이었지만 나는 점심을 같이 먹자는 마리님의 권유를 속이 안좋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주인공을 보고 난 이후 지금 상황을 심도깊이 정리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복도에 앉아 옆구리에 끼고 있던 공책을 펼쳤다. 지난 7년간 나한테 닥친 상황을 정리한 그 공책이었다. 이 공책을 핀게 2년 만인가? 오를레앙가의 주변을 정리하고 나선 딱히 이런 메모를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오, 예쁘네.”

 

 그냥 적당히 의자가 보여서 앉은건데  창 밖을 내다보니 예쁘게 장식된 정원이 보였다. 그런데 이 정원…왜 이렇게 익숙하지? 기분 탓인가? 하긴, 귀족들 취향의 정원이라는게 언뜻 보기엔 다 거기서 거기니까. 분수대가 있고, 주변에 여러 작은꽃들이 있는…

 

“아니,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만년필을 쥐어 지금까지 안 사실을 메모했다. 오늘 아침에 들은 대화를 비롯해서, 교장 선생의 소개사도 그렇고… 지금 여기 있는 엠마 코르데는 평민이라는 설정의 엠마 코르데였다. 평민이라면… 유즈리하와는 이어지지 않지. 유즈리하의 집안은 핏줄을 끔찍히도 생각하는 설정이었으니까. 그렇다면 공책에 있는 엠마와 유즈리하가 사랑에 빠졌을 때 마리님이 어떻게 파멸하는지 적어둔 부분은 찢어도 되겠어. 그렇다면 남는게…

 

“레오랑 쟝, 그리고 아벨인가…?”

 

 엠마가 저 사람들 말고 다른 사람과 눈이 맞아서 사귄다… 라는 선택지가 있을 줄 알았던 시기가 나한테도 있었다. 그렇지만 지난 7년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그런 일은 없다고 단언 할 수 있다. 이 세상은 내가 개입하지 않는 이상 ‘게임대로’...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개발자가 공인한 설정대로’ 흘러갔다.  마리님이 레오와 처음 만나는 건 레오의 8살 생일잔치날. 그때 만들어둔 인연으로 마리님은 레오와 약혼을 따낸다. 그 뒤에 마리님이 10살 됐을 때, 오를레앙가는 동방제국과 연결점을 만들려고 동방귀족이자 외교관인 유즈리하 가문에 접촉한다. 그 때 유즈리하와 마리님은 처음으로 만난다. 그 뒤에도 물론 거의 모든 일이 개발자가 설정한대로 흘러갔다. 다른점이 있었다면 마리님과 아벨이 만나는 시기가 엄청나게 앞당겨졌다는 건데, 그건 내가 아벨에게 개입했기 때문이었지.

 

“... 누구랑 사귀는게 그나마 나으려나?”

 

 그리고 경험으로 알게 된 것 두번째. ‘중요한 설정일수록 바꾸기 힘들다.’ 마리님의 식성이나 기호등은 비교적 쉽게 바꿀 수 있었으나, 마리님에게 있는 선민의식이나 오를레앙가에 박혀있는 부패 관리들을 축출하는데엔 수많은 시간이 들었다. 선민의식을 바꾸기 위해 지난 7년간 마리님과 얘기한 시간이 과장을 안섞고 백시간은 족히 넘을거다. 그리고 관리들을 축출하는데엔 5년이나 되는 준비기한이 필요했고… 이런걸 보면 이 세계엔 게임처럼 흘러가려는 강제력이 있는건가 의심 될 정도다.

 그러니까 엠마가 공략 캐릭터들 말고 다른 사람과 눈을 맞게한다… 라는 건 현실적으로 힘든 일일거야. 결국, 저 셋중 한명이랑 사귀도록 유도를 하는 게 그나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책.

 

“일단… 레오는 안돼.”

 

 레오랑 엠마가 사랑에 빠지는 경우는 혹여라도 잘못되어 게임대로 흘러갈 때 마리님이 가장 비참하게 최후를 맞게 되는 경우다. 그리고, 레오가 엠마를 사랑하게 될 경우 게임대로 흘러갈 가능성이 가장 높다. 황태자비의 자리를 얻기 위해 한 약혼이라지만 레오와 마리님은 엄연히 약혼한 사이다. 자신의 약혼자를 평민한테 뺏겼다는 생각이 들면 마리님의 분노가 어디까지 갈지 몰라. 혹여 게임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약혼자를 빼앗겨서 괴로워하는 마리님의 모습은 보고싶지 않아. 마리님과 레오의 사이가 계산으로 이루어진 사이긴 하지만, 마리님이 레오를 싫어하는건 아니니까.

 

“그럼…”

 

 아벨이 엠마한테 흥미를 느껴 사랑에 빠진다면… 그건 나한테는 고마운 일이지만 엠마한테는 상당히 불쌍한 일이다. 적어도 나는 아벨 루트를 공략할 때 아벨한테 설렘과 두근거림을 느끼기보다는 화나는 일이 더 많았어. 엠마를 지 멋대로 휘두른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아마 지금도 비슷하겠지, 아벨의 성격을 바꾸려고 내가 뭘 한 건 없으니까.

 그렇다면 쟝이 제일 최선인가? 내가 어떻게 개입을 해야 그 둘을 자연스럽게...

 

“꺄악!”

 

 창 밖에서 들린 비명소리 때문에 깜짝 놀랐다. 놀라서 힘이 너무 들어갔는지 공책 위에서 열심히 춤을추던 만년필이 공책에다 구멍을 내버렸다. 잠깐, 이 목소린… 분명…

 

“제, 제가 잘못한게 있나요…?”

“평민 주제에 주제도 모르고 클라리스 마법학원에 입학한게 잘못이지.”

“... 그, 그건.”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 정원, 어디선가 본 거 같다 싶었더니 엠마가 악역들한테 처음으로 괴롭힘 당하는 그 정원이잖아. 그리고, 마리님하고 처음 만나는…

 

“...!”

 

 만약 이 세계에 무슨 강제력같은게 있다면? 그래서 게임 진행에 있어서 중요한 일일수록 무조건 게임같이 흘러가는 세계라면? 엠마가 자신을 괴롭히는 마리님을 처음 보는 이벤트는 중요 이벤트다. 이 게임의 주된 악역이 누구인지 알기 쉽게 보여주는 장면이니까. 그렇다면 설마… 저 자리에 마리님이 있을수도…?!

 나는 화들짝 놀라 창밖을 쳐다보았다. 정원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의자를 앞에두고 땅바닥에 가녀린 모습으로 쓰러져있는 엠마, 그리고 딱봐도 표독하게 생긴 여자 두 명. 분명, 이 장면에서 엠마를 괴롭히는 사람은 세명이었지. 마리님이 맨 중앙에 있고, 마리님 뒤에 측근 두명이 있는…

 

“.....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자리에 마리님은 없다. 하긴, 이런 일을 생기지 않게 하려고 내가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데... 괜한 걱정을 했어. 

 

“거기, 지금 무슨 일을 하고있는거죠?”

“누구… 어?”

 

 안심하고 의자에 다시 앉으려는 찰나, 마리님의 목소리가 들려 다시 창 밖을 쳐다봤다. 잘못 들은건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마리님은 그 표독한 여자 두 명 뒤에 서서 그 둘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 어머… 마리 발렌틴 드 오를레앙님. 그, 평안하셨는지요?”

“평안했죠. 적어도 당신들이 클라리스 마법학원의 격을 떨어뜨리는 짓을 하고 있는걸 확인하기 전 까지는.”

“아, 혹여 오해가 있는 것 같아 말씀드리건데, 이 아이는 평민주제에 클라리스 마법학원에 입학한 천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교육을…”

“아망딘 스테판 드 블루아… 맞죠? 그것 참, 이상한 일이네요. 블루아 가는 저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만 블루아 가가 이런 교육을 하는 곳이라곤 듣지 못했는데요.”

“......”

 

 살얼음길 위를 맨발로 걷는 듯 한 한기가 내 몸을 에워쌌다. 그냥 훔쳐듣기만 하는데도 이정도로 무서운데, 이 말을 직접 듣고있는 저 둘은 얼마나 무서울까…! 그래, 이거지. 이게 내가 사랑한 마리님의 카리스마지…!

 

“마리 발렌틴 드 오를레앙님. 이상하지 않습니까? 고작해야 평민이, 그것도 특대생으로 클라리스 마법학원에 입학하였다는게.”

 

 이런 카리스마를 보고도 질리지도 않는 것인지, 아망딘의 옆에 있는 여자가 입을 열었다. 한껏 가다듬은 목소리였지만, 말 사이사이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

“클라리스 마법학원은 국내 제 1의 마법학원. 이 학원의 졸업장이 있다면 마법이 필요한 곳 어디서건 일 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래서요?”

“그렇다면… 평민 가족이 가족의 영달을 위해 클라리스 마법학원의 입학권리를 사서 부정입학했다. 라는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아…”

 

 마리님은 이마를 짚더니 조용히 탄식했다.

 그리고, 엄청난 열기가 창문 너머로 느껴졌다. 꼬불꼬불 또아리를 친 뱀의 형상을 한 불꽃이 창문 너머에서 불타고 있었다. 이 마법은… 샐러맨더를 소환하는 마법…! 레벨이 30은 되야 배울 수 있는 마법인데, 마리님은 이 시점에 벌써 이런 마술을 쓸 줄 안다고? 게임에서도 초창기 스테이터스가 사기적이긴 했지만, 이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러니까… 오를레앙 가문의 영애와 제2 황태자인 레오님이 입학한 이 학원에서, 고작 평민 가족따위가 낼 수 있는 푼돈에 눈이 멀어 실력이 부족한 평민을 부정입학시켰다? 그리고 저는 부정입학자한테 밀려서 특대생 자리도 따내지 못하는 부족한 사람이고?”

“마, 마리님…! 그, 그런뜻이 아니오라…!”

“그렇다면? 그 말을 달리 무슨 뜻으로 해석해야 된다는거죠? 저는 여러분이 말씀한 대로, 부정입학자한테도 밀리는 부족한 사람이라 여러분의 가르침이 필요한 것 같은데.”

“.....그, 그게.”

 

 몇 년 처럼 느껴지는 몇 초가 흘렀다. 신나게 엠마를 괴롭히던 둘은 아무런 말 없이 마리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평소라면 지금쯤 심장이 부정맥이라도 온것마냥 쿵쾅대면서 디스코 파티를 하고 있을 시간인데… 왜 두근거리지 않지?

 

“어머, 말을 하는법을 까먹으셨나요? 평소라면 제가 가르쳐드리겠지만… 저를 부족하게 여기는 사람들한테 말을 가르치기엔 힘들 것 같네요. 언어학 교수님을 불러오면 만족 할 수 있으실까요?”

“ㅈ… 죄,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사오니, 한번만 선처를…”

“그렇게 말씀하시니 한번은 용서하겠습니다. 명심하세요. 저는 말을 두번 하는걸 싫어하거든요.”

“네, 네…!”

 

 샐러맨더가 사라지자 그것을 본 두 여자는 귀족 영애라곤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재빠르고 경박한 몸놀림으로 정원 밖으로 사라졌다. 그걸 본 마리님은 손을 뻗어 엠마를 일으켜 세웠다. 엠마는 그 손을 잡고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괜찮나요?”

“..... 아, 네. 감사합니다.”

“감사할 필욘 없어요. 저 둘한테 겁을 주기 위해서라지만, 당신한테 심한 말을 했는걸요.”

“네? 무슨 심한말을 하셨다고…”

“평민가족 따위, 라고 했잖아요. 당신이 듣기에 너무 안좋은 말을 했어요.”

“아, 아니요! 괜찮아요! 실제로 그런 말을 들어도 아무 할 말이 없기도 하고… 대단한 분들만이 입학하는 학원인데, 평민인 제가 그런 말을 듣는건 당연한걸요.”

“......”

 

 마리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좀 앉아서 얘기좀 할까요? 점심시간이 끝나기까지 남은 시간이 있으니까요.”

“아, 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엠마는 잠깐의 주저함도 없이 마리님의 옆에 앉았다. 내가 딱히 마리님이랑 무슨 사이는 아니지만 괜히 질투나네… 보통 저럴땐 예의상 한번은 거절하는게 보통 아니야? 엠마라는 캐릭터는 사실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잔망스러운 캐릭터였나?

 

“... 평민 가족 따위라고 말한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받아들일진 모르겠지만요, 그런 말을 듣는건 하나도 당연하지 않아요.”

“.....네?”

“평민이나 귀족이나, 가문만 떼어놓고 보면 똑같은 사람인걸요. 귀족 가문이 이 나라가 세워질 때나, 혹은 나라에 공헌을 해서 귀족이 된 건 맞지만… 이 나라에 공헌을 한 건 귀족 가문의 시조들이지 저렇게 자신의 가문만을 믿고 으시대는 사람이 아니에요.”

“.....”

 

 마리님은 엠마를 쳐다보며 올곧은 목소리로, 내가 7년동안 마리님에게 해왔던 말을 엠마에게 말했다. 실망스러웠다.

 잠깐만, 실망스럽다고? 대체 왜? 내가 그동안 바래왔던 마리님의 모습인데...

 

“그러니까, 자신감을 가지란 얘기에요. 다른 곳도 아니고… 국내 제1의 마법 학원인 이곳에 특대생으로 입학할 정도의 실력을 가진 사람이잖아요?”

“그건… 순전히 운이 좋아서…”

“운이 좋은 것 만으로 특대생이 될 정도로, 이 학원은 만만하지 않아요. 당신의 힘을 믿어요. 당신은, 지금 당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대단한 사람일거에요.”

 

 그 말을 듣고 엠마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엠마는 내 생각보다 심지가 굳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하던 엠마라면 지금쯤 저도 모르게 눈물 한방울을 똑 떨어트렸을텐데.

 

“그렇게 말씀해주시고, 도와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저를 도와주신건가요?”

“지금이야 귀족이나 평민이나 똑같은 사람이라곤 말하고 있지만, 저도 옛날엔 당신을 괴롭히던 저 치들과 똑같았거든요. 평민들은 사람이 아니라 가축이라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저런 모습을 보니… 옛날의 저를 보는 것 같아 화가 난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곤 마리님은 싱긋 웃었다. 사람을 안심시키는 마리님 특유의 웃음이었다.

 

"그리고 아벨 녀석의 콧대를 꺾고 특대생으로 입학한게 통쾌하기도 하구요. 그런 실력을 가진 사람이 부유성이 아니라 본교에서 수업을 듣는게 의아하긴 하지만요… 뭐, 이건 농담조로 하는 얘기니까 흘려들으셔도 무방해요. 하지만 앞서 한 말은 진심입니다. 제가 평민을 가축으로 봤었다는 것도, 그래서 그 사람들이 과거의 저 같았다는 것도."

“저… 정말요?”

“그런데… 제 삐뚤어진 생각을 고쳐준 친구가 있어요. 저는 제 곁에 그런 친구가 있다는 게 평생의 자랑거리랍니다.”

“마리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라면… 엄청 멋있는 친구인가보네요.”

“멋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 그런데 제가 자기 소개를 했었나요?”

“마리님이야 워낙에 유명하시니까 잘 알고있죠! 화염 마법으론 왕궁 마법사정도의 실력을 갖춘 오를레앙가의 영애시잖아요! 그리고 황태자님의 약혼녀이시기도…”

“과찬이에요. 그렇게 들으니까 부끄럽네요. 자기소개도 하지 않은 무례를 저질렀는데도 칭찬밖에 안들으니까 더 그렇고.”

“아! 괜찮아요! 신경쓰지 마셔요.”

 

 그 뒤로 마리님은 엠마에게 내 칭찬을 했다. 가끔은 후작가의 영애가 맞나 싶을정도로 예의를 못지키거나 엉뚱한 일을 저지르지만 세상을 꿰뚫어보는 통찰안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소라면 입이 헤벌쭉 올라갔겠지만… 무언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내가 왜 지금 두근거리지 않는지, 왜 마리님한테 실망을 했는지 알아 차릴 수 있었다.

 내가 사랑하던 악역영애 마리 발렌틴 드 오를레앙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

 

“.....”

 

 마리님한테 멋대로 실망한지 두달이 흘렀다. 그 자리에서 느낀 실망감은 시일이 지날수록 나날이 커져만갔다. 학원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 우주에 둘도 없을 초절 미인처럼 보이던 마리님의 외양이, 이제는 이 학원 제일의 미인으로밖엔 보이지 않는다. 그래, 전세의 기억이 돌아오고나서 지금까지 마리님을 살려야한다는 이념으로 계속해서 달려오느라 중요한점 하나를 깜빡하고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는 하나같이 악역 캐릭터였다는 사실을.

 

“하아…”

 

 그렇지만… 그렇잖아. 세상 모든것을 받아들이고, 나쁜짓을 하나도 안하는 착한 캐릭터한테 어떻게 이입을 하냐고.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자신에게 방해되는걸 치우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역 캐릭터가 백배 천배 몰입하기 쉽지. 대체 착한 캐릭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떤 꽃밭 인생을 살아온거야?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선한 캐릭터를 악하게 물들이려는 영향에도 불구하고 선한 채로 남아있으려는 그 모습이 좋은거라고.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반박하련다. 오, 그래요? 님이랑 저랑은 취향이 다른가보네요. 그냥 서로 갈 길 갑시다.

 

“...님.”

 

 요즘엔 내가 인간쓰레기라는 생각밖엔 들지 않는다. 아무리 마리님을 파멸에서 구해내기 위해서라지만 마리님한텐 아무런 상의도 안하고 마리님의 인생을 내 마음대로 바꿔놓고선, 이제와서 그 바뀐 모습이 마음에 안든다고 제 멋대로 실망하는 꼴이라니. 더 최악인건, 내 심경의 변화를 마리님이 알아 차린 것인지 요 근래에 혹시 자신이 잘못한 게 있느냐고 마리님이 넌지시 돌려돌려 나한테 질문했다는거다. 얼마나 티났으면 사람한테 그런걸 물어보냐.

 

“...님?”

 

 그런데 그런걸 물어보는것도, 그것도 돌려돌려 물어보는 것도 마리님 답지 않아서 그 질문이 너무나도 실망스럽다. 계속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마리님과 내 사이가 어찌할 도리 없이 벌어질 것 같아 나는 마리님과 거리를 두는 방법을 선택했다. 옛날이었다면 어찌할 도리 없이 괴로웠을텐데, 지금은 딱히 아무 생각도 안들어. 얼굴은 여전히 내 취향으로 예뻐서 좋긴 한데... 예전만큼 좋지는 않단 말이지.

 

“... 엘님!”

 

 아, 맞아...  엠마랑 쟝이랑 이어지게 하려면 지금이라도 뭘 해야될텐데. 너무 귀찮아. 대체 이런 사람이 그간은 어떻게 귀찮은걸 참고, 변태 괴짜 용족이랑 같이 다니면서 그 모든 수작질을 다 한거지? 사랑의 힘이라는게 이런건가? 그렇다면 사랑의 힘이 다 떨어진 지금은 어떻게…

 

“마엘님!”

“꺅?!”

 

 내 귓가에서 들린 커다란 소리에 깜짝 놀라 손에 쥐고 있던 바게트를 떨어트릴 뻔 했다가, 손바닥 위에서 두 어번을 통통 튕기고 나서야 바게트를 다시 쥘 수 있었다. 대체 어떤 녀석인가 싶었는데, 엠마였다. 무어라고 화를 낼까 싶었지만 메신저의 귀여운 이모지를 생각나게 하는 햇살같은 웃음에 목젖까지 건드렸던 울화가 도로 가슴 속에 들어갔다.

 

“아… 엠마…”

“괜찮으세요?”

“.....”

 

 괜찮냐고? 지금 누구 때문에 빵을 떨어트릴 뻔 했는데. 이게 병주고 약준다는 그건가?

 

“바게트가 볼로 들어가고 있었는데요.”

“..... 어?”

“바게트를 볼에 밀어넣고 계셨다구요.”

 

 … 왠지 바게트가 입에 안들어온다 싶더니. 괜찮냐고 물어본 건 이것 때문이었구나.

 

“요즘 무슨 일 있으셔요?”

“아… 아니야, 무슨 일은.”

 

 그래, 마리님한테 실망감을 느끼는건 거의가 이녀석이 원인이다. 마리님이 엠마를 구해주고 난 뒤, 엠마는 급속도로 나와 마리님 사이에 녹아들었다. 나는 엠마를 마리님과 나 사이에서 치워야 할 방해물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만, 엠마는 나를 이 학원에서 둘 밖에 없는 친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는 엠마로 수십번의 학원 생활을 해 봤으니까 무의식적으로 엠마의 생각을 읽고 배려한 적이 많은데 아마 그것 때문인 것 같다.

 

“너는? 무슨 일 없지?”

“...아, 요즘엔 좀 잠잠한 것 같아요. 얼마 전에 마리님이 천명하셨잖아요? 자신의 이름을 훔쳐 저를 괴롭히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겠다고. 그 말 때문에 주춤해 진 것 같아요.”

“그래? 다행이네.”

 

 두달 전, 마리님이 엠마를 구해주긴 했지만 그 때 뿐이었다. 엠마를 괴롭히는 움직임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런데, 한달 전 쯤부터 엠마를 괴롭히는 녀석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마리님을 대신해서 엠마를 괴롭힌다고 말하며 엠마를 괴롭혔다. 처음엔 게임과 유사하게 흘러가려는 강제력이 작동한건가 싶었지만 마리님은 두달 전 엠마를 구해줬을때의 그 모습과 똑같았다. 마리님을 실각시키려고 하는 누군가의 지령인가? 혹시 정신 지배 마법을 쓰는 악한이 있는건 아니겠지? 하는 생각은 있지만, 정보가 부족해서 일단 판단은 보류했다.

 옛날이었다면, 내가 사랑하는 마리님의 이름을 도용하다니 용서 못한다며 갈갈히 날뛰며 마리님의 이름을 훔친 잡것들을 추궁해서 왜 그런짓을 했는지 알아냈겠지만… 그런 짓 하는것도 귀찮아. 마리님이 어떻게든 잘 하겠지, 그렇게 똑똑하고 강한 사람인데 내가 안 도와준다고 무슨 일 나겠어?

 

“정말 아무 일 없으신 것 맞아요?”

“응?”

“마리님이 걱정을 많이 하셔요… 요즘 기운이 하나도 없으신 것 같다고. 마엘님 답지 않다면서.”

“......”

 

 저 햇살같은 얼굴 때문에 내 고민을 전부 실토할 뻔 했다. 계속해서 아무 일 없다고 해봤자, 엠마 성격상 내가 대답할 때 까지 계속 물어보겠지.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가야겠다. 

 

“왜, 이제 곧 승급시험을 치루잖아? 부유성에 올라갈지 말지 결정되는 그 시험.”

“아, 네! 그렇죠.”

“마리님 성적이나 실력 상, 부유성에 올라갈게 뻔한데… 나는 마리님을 따라 갈 수 없을 것 같아서.”

“정말 그것때문이에요?”

“남들이 듣기엔 뭐 그런 것 때문에 풀이 죽냐고 하겠지만… 나는 사교계에 데뷔를 하고부터 주욱, 마리님이랑 떨어져있던 적이 없었단말이야. 학원에 있는 사람들도 나를 마리님의 측근 정도로 기억하고있고. 그런데 마리님이랑 떨어지게되면… 어떻게 지내야될지, 상상만해도 쓸쓸해서.”

“......”

 

 이 말을 듣고 엠마는 약간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하여튼, 저렇게 공감능력 뛰어난 것도 병이라니까.

 

“ㄱ, 괜한 고민일거에요! 마엘님의 실력이라면 부유성에는…!”

“마법 이론이 이렇게나 어려운건지 몰랐지… 필기시험에서 떨어질 걸.”

 

 역사학이나 국어같은건 게임을 하다가 줏어들은 걸로 어찌어찌 고득점을 할 수 있지만 마법 이론만큼은 도저히 좋은 성적을 따낼 수 없었다. 어찌어찌 필기시험을 통과하면 실기시험은 쉽게 통과할 수 있을거다. 게임대로 흘러간다면 이번년도 실기시험은 땅 속성의 골렘을 상대하는 시험일테니까. (골렘의 속성을 바꾸는 기믹이 있긴 하지만, 기본 속성은 땅 속성이었다.) 내 물속성 마법이면 땅 속성 골렘쯤이야 가뿐하지. 마법 이론이 어려울 뿐이지 마법을 쓰는건 문제가 없기도 하고.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소용이야? 필기에서 붙어야 실기시험을 칠 수 있는데!

 

“조금 뜬금없는 소리일수도 있겠지만… 혹시, 마엘님이랑 저랑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시나요?”

“.....응? 기억하고 있는데, 그건 왜?”

 

 마리님이 같이 점심을 먹자고 권유해서 이 정원에 왔더니, 엠마가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방긋 웃으면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지… 교사校舍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정원이라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세명이 점심을 먹기엔 딱 알맞은 곳이었다. 정원사의 손길이 잘 안닿는지 여기저기 비죽 튀어나와있는 잡초가 있는게 흠이지만.

 

“마리님이라면 어디서 점심을 먹건 추종자들이 끊이질 않을거에요. 그렇지만 마리님은 굳이 교사에서 떨어진 이곳에서 저희 둘이랑 점심을 드시잖아요. 그정도의 고생이나 수고로움은 기꺼히 감내할 수 있을만큼 저희랑 있는 시간을 방해받고 싶어하지 않는 게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

 

 이런 말을 들으니까, 내 양심이 한층 더 아파왔다.

 

“그… 그러니까! 만에 하나 수업을 듣는 곳이 달라진다 하더라도, 마리님과 마엘님의 유대는 쉽게 끊기지 않을거에요!”

“응,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엠마.”

“그리고, 이번 년도 실기 시험에선 땅 속성 골렘이 나오잖아요? 마리님이 아벨님과 레오님의 뒤를 잇는 마법의 귀재라곤하지만, 불 속성 마나를 가지고 계시니 땅 속성 골렘에겐 힘들지 않을까요?”

“에이… 속성간 상성이라는게 있지만, 지금의 마리님이라면 그런 상성차이 정도는 힘으로…”

 

 어라? 잠깐만.

 엠마가 이걸 어떻게 알고있는…

 

“그럼 그렇지! 너셨어요?”

“.....!”

 

 이상함을 느끼고 엠마와 거리를 벌리려던 찰나, 검은색 연기가 내 목을 조르고 입을 막았다. 숨이 막히는가 싶더니 몸이 의자 위에서 두둥실 떠올랐다. 하얀 원피스 뒤에 뭉개뭉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는 다른 세상에서 온 것 마냥 이질적이었다. 이 이펙트는 분명 어둠 마법 계열의 ‘검은 손’...! 엠마가 어떻게 이 마법을 쓸 수 있는거지? 어둠 속성 계열 마법은 분명 적 전용일텐데…!

 

“그동안 수없이 찾아다녔어요. 나의 마리님을 저렇게 타락시킨 사람이 누군지말이야.”

“커허윽…!”

“에이, 엄살은. 지금 되게 힘 조절하고 있는 거거든? 말도 할수 있고, 숨도 쉴 수 있을거야. 조금은 힘들겠지만요.”

 

 그 말 대로 어느정도 숨을 쉴 수 있었다. 소리지르는 일은 힘들겠지만 말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조금 힘들거라고? 너 임마, 너도 이런 세기로 목 한번 졸려볼래…?!

 

“그, 그게… 무...슨.”

“에이, 여기까지 왔는데 뻔히 보이는 거짓말은 하지 말죠? 너도 전생자잖아요? 전세에 『Starry nignt』를 플레이 한… 그동안 게임의 정보를 가지고 승승장구하는 인생은 즐거우셨어? 아이고! 근데 이걸 어쩌나. 이런 이야기에서는 이제 클리셰가 있거든요. 전생해서 승승장구 하고 있는줄 알았는데, 또다른 전생자가 나오는 전개.”

 

 어떻게 그걸 알고있는거지? 잠깐만… 너'도’?

 

“너… 너 설마…”

“응, 맞아! 나도 『Starry nignt』 플레이어에요. 밤 새서 게임을 플레이하다, 너무 졸려서 편의점에 몬스터를 사러가는길에 그만 트럭에 치였는데… 눈을 뜨고 보니까 엠마 코르데가 된거있죠? 너무 신기하고 기분 좋은 일이었어요. 이게 꿈이라면 두번 다시 깨고싶지 않을 정도로.”

“엠마의 몸으로… 어떻게… 어둠 속성 마법을…?”

“어? 이걸 모른다고?”

 

 엠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봤다. 외모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지만, 전에는 다람쥐같이 귀여워 보이던 저런 표정이 너무나도 오싹하게 다가왔다.

 

“스포일러긴한데… 이 게임은 공략 캐릭터 전원의 호감도를 최하로 내리고 엔딩을 보면 해금되는 히든 루트가 있거든. 그 루트를 해금하면 엠마의 배경설정이 하나 더 추가돼요!”

“......”

 

 그래, 기억난다. 주인공의 배경설정이 바뀌는 히든 루트가 있었다는 거. 그 설정이 뭔지 알려주려고 했던 인터넷 친구의 말을 스포일러 하지 말라고 끊었던 기억까지 나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으면 그것도 들어놓을걸…!

 

“빛의 마력을 지닌 특대생으로 입학하는 평민 루트. 가문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마법학원에 입학하는 몰락귀족 루트.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이 게임에서 어둠 속성 마력을 쓸 수 있는 경우는 하나 뿐이다. 그걸 생각하면 맞추기는 쉬웠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면 얼핏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위화감도 설명이 된다. 이 게임의 시작을 알리는 대화가 달랐던 이유. 엠마의 성격이 본판과 다른 이유. 전부 다…!

 

“뭔진… 몰라도… 마족의 하수인인 루트겠지…”

“정답! 이 히든루트는, 엠마는 천애고아입니다~ 로 시작해요. 고아원에서 온갖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구르다가, 인간으로 변신한 마족한테 엠마가 팔려가지. 그리고 그 마족한테 마법을 배우고… 마법학원에 잠입해 평민의 신분으로 스파이 짓을 하라는 명령을 받고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되는거야. 참, 와다 겐도 어지간히 새디스트 라니까요? 주인공한테 이런 설정을 붙일 생각을 하다니…”

“와다…?”

“어머, 이것도 몰라요? 아는 게 없네. 이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 이름이잖아. 이 게임의 팬이라면 그정도는 알아 둬야죠?”

 

 숨이 부족하다. 어떤 마법이건 써서 이 상황을 탈출하고 싶은데, 마법이 써지질 않아. 게임 상에서 검은 손에 붙어있는 침묵 효과는 한 턴이면 종료됐지만, 모든게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지금 상황에선 검은 손의 침묵 효과는 언제까지 지속되는거지…?

 

“나는 와다 겐을 정말로 좋아해요. 『Starry nignt』를 플레이 한 이유도 와다 겐이 시나리오 라이터라서 플레이한거고.”

 

 엠마는 의자에서 일어나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느긋하고 나긋하게 말을 이어갔다. 너무나도 명랑하고 청아한 목소리였다. 지금의 살벌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귀엽게 느껴서 나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었을만큼.

 

“내가 와다 겐을 좋아하는건 이 사람이 쓰는 작품의 메시지가 확실하기 때문이에요. 무슨 선행을 했건간에,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한다! 선행과 악행은 서로 상쇄되는 개념이 아니다! 라는게 와다 겐의 메시지거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걸 모르더라니까요. 아무튼... 『Starry nignt』에서도 그 메시지는 들어가있어요. 히든 루트의 존재도 모르는 라이트 플레이어지만, 이 대사는 한번 쯤 들어봤겠죠 ? 평민 루트에서 레오를 공략하면 나오는 대사니까. 이게 정사기도 하고.”

 

 엠마. 아니, 엠마의 거죽을 쓴 『Starry nignt』 플레이어는 한번 헛기침을 하고선 나를 등진채로, 고개만 돌려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제가 이제와서 단 하나의 선행을 했다곤 해도, 그 전에 한 수백가지 악행이 정당화되는것은 아닙니다.”

 

 어설프지만 저 목소리는 분명 마리님의 성대모사였다. 나를 쳐다보는 이 구도는 마리님이 국외추방 당하기 전 자신을 배웅해준 엠마를 뒤로하며 말하는 그 구도와 똑같았다.

 

“어때? 비슷했어?”

“개...뿔.”

“이럴 땐 빈말로라도 칭찬해줘야되는거 아니에요? 사람 민망하게~”

 

 목을 조르는 힘이 더 강해졌다. 아, 이렇게 감정 담을 줄 알았으면 제가 혼신의 힘을 다해 발가락이라도 햝았죠.

 

“나는 그래서 『Starry nignt』의 캐릭터 중엔 마리님이 제일 좋아요! 와다 겐의 메시지를 제일 확실하게 전달하는 메신저니까. 생긴것도 너무 예쁘고. 목소리도 그렇고… 내 취향이 아닌게 없어.”

 

 몇 년만 빨리 날 찾아오지 그랬어? 그럼 둘도 없는 친구가 됐을텐데? 라고 한껏 빈정거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빈정거리면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나는 아무 말 없이 엠마를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마리라는 캐릭터는 엠마를 괴롭히는 걸 시작으로, 결국 엠마에게 감화되어 선행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죗값을 치루는 걸로 완성돼. 그런데 말이지…?”

“커헉…!”

 

 목을 조르는 힘이 점점 더 강해진다. 이제는 숨도 쉬어지지 않아. 폐가 압착당하는 느낌이야. 이러다가 진짜로 죽는거 아니야…?!

 

“부푼 가슴을 안고 처음으로 만난 마리님은 시작부터 망가져있었어. 평민을 구해주는 마리님? 평민도 사람이라고 설파하는 마리님? 구역질이 나오더라. 아니, 과장이 아니라 진짜로 토했어. 나는 살다살다 사람이 하는 말이 역해서 토한적은 전생이랑 현생을 비롯해 지금이 처음이라니까? 지금 그렇게 생각한다손 쳐도말이야… 너랑 만나기 전에 평민을 무릎꿇리던 마리님의 죄도, 뇌물을 받아 처먹은 오를레앙 가의 죄도 사라지는건 아니잖아?”

“사… 살ㄹ…”

“마리님을 이렇게 망친사람이 누굴까! 여기서 추리를 시작했지. 단서가 너무나도 많아서 추리는 금방 끝낼 수 있었어. 마엘 클레망 드 루에르그. 원작에서는 얼굴도 대충 그려진 엑스트라를 마리님이 너무 많이 언급하더라고. 그런데, 혹시 모르잖아? 엄한 추리로 생사람 잡으면 안되니까. 그래서 확인하고 싶었는데, 너랑 단 둘이 있을 시간이 나질 않더라. 너는 항상 마리님 옆에 꼭 붙어있었으니.”

 

 엠마의 말이 끝나자, 다시 숨이 폐로 들어오는게 느껴졌다. 나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산소라는게 이렇게 달콤한 기체였나?

 

“그런데… 네가 요즘 마리님이랑 거리를 두더라고요? 왠진 모르겠지만 나한텐 절호의 기회였지. 그래서 너를 찾아온거에요. 여기까지, 이해 안되는 부분 없죠?"

“허억...헉...허억…”

“이렇게 독대할 기회를 드디어 잡았으니까, 그동안 너무 궁금했던 거 몇개만 물어봐도 괜찮죠? 왜 나의 마리님을 그렇게 망가트린거야?”

“마리님이… 악역이라면… 반드시 파멸할테니까. 그런 게임이니까… 그래서, 마리님을 살리려고…”

“그것 참, 내가 상상해놓고도 ‘에이, 그건 아니겠지’ 싶은 진부하고 하찮은 이유였는데… 이게 진짜네. 그렇다면 두번째 질문…”

 

 지난 7년간, 말 그대로 목숨을 건 수라장을 거쳐와서 생긴 직감이 말한다. 이 문답이 끝나면 나는 죽는다고. 그렇다면…

 

“자, 잠깐…”

 

 시간이라도 끌자. 검은 손의 침묵 시간은 한 턴… 그렇게 길지 않아. 시간을 끌다 보면 내가 마법을 쓸 수 있을지도 몰라. 그게 아니더라도, 혹시 마리님이 이 정원에 와서 나를 구해줄 수도 있고. 아니, 마리님이 아니여도 좋아. 유즈리하, 레오, 쟝, 교수님, 하느님, 부처님, 악마님… 데면데면하게 지냈던 너희들한테 이런 부탁하긴 좀 미안하지만 좀 구해줘! 아니, 쟤들이 아니여도 괜찮아! 아벨이라도 좋으니까 아무나! 제발…! 날 좀 구해 줘!

 

“그러면 대체… 어떻게 특대생으로 입학한거야…? 빛의 마력도 없는데…”

“어둠 마법의 주된 효과중 하나가 정신 조작이잖아요? 마족들이 그러더라. 특대생인게 정보를 캐내기 더 용이하니 무조건 특대생으로 입학하라고. 힘 좀 썼지.”

“정신 조작… 그랬지. 그렇다면 마리님의 이름을 달고 너를 괴롭히던 놈들도…”

“응! 내가 한거에요. 마리님을 어떻게든 되돌려놓기 위한 고육지책이지.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마리님에 대한 평가가 수직으로 하락하는 중이거든. 레오도 내가 생각하던 그 사람이 아닌데~ 하면서 고뇌하고있고. 주변 인간관계를 끊어서 타락시킨다. 창작물에서 많이 쓰이는 레퍼토리잖아? 이게 괜히 많이 쓰이는게 아니거든요. 사람을 타락시키는데 이만한게 별로 없어.”

 

 말을 걸면서 마법을 몇번이고 시전했고, 드디어 그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 급조한 ‘워터볼’ 이라서 위력은 별로 안나오겠지만, 당황하게 할 수는 있을거야. 당황하면 마법도 풀리겠지…!

 최대한 거리를 좁혀서…

 

“......”

“응? 뭐라고? 잘 안들려요.”

“......”

“목을 너무 졸랐나? 뭐라고?”

 

 엠마는 내 코앞까지 다가와서 귀를 내 입에다 가져다 대었다. 만약 높이가 똑같았다면 서로의 숨결까지 느낄 수 있을 거리였다.

 

“옛날부터… 궁금했던 건데… 왜 악역들은 항상 말이 많냐?”

“아~ 그거말이죠?"

 

 전생에서 피구하던 기억을 살려 워터볼을 던지려고 한 순간, 내 손에 있던 워터볼이 갑자기 사라졌다. ‘마력 상쇄’...! 어떤 속성을 가졌건 상관없이 쓸 수 있는 중위급 방어기술…!

 어렵사리 짜낸 비장의 수단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몸에 힘이 쭉 빠졌다. 나, 정말 이대로 죽는거야? 마리님한테 멋대로 실망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못하고…?

 

“지금, 누군가를 불러내려고 이렇게 말을 길게하고 있는거거라서 그래요. 이제 올때가 됐는데~”

“.....”

“어머, 왜 그렇게 넋이 나갔어요? 왜, 빚내서 비트코인에 꼴아박았다가 비트코인이 떡락하기라도 했어? 너가 장난치려는 거 같아서 나도 장난으로 돌려준건데 그렇게 반응하니까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인상 좀 피지?”

 

 끝났어.

 나는 이제 죽는다.

 밤새서 게임하다 카페인 쇼크로 죽었다는걸 자각하고 나서, 이것보다 더 한심한 죽음은 없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보다 더 한심하게 죽게생겼네.

 미안해. 미안해요 마리님. 내 멋대로 기대하고, 내 멋대로 실망해서 미안해. 미안해요. 전생과 현생의 엄마 아빠. 전생이고 현생이고 너무 갑자기 죽어버리네.

 

“..... 미안… 미안해요.”

“아이 참, 다 듣고있으면서 왜이렇게 늦는거람. 이러면 진짜로 죽일 수 밖에 없-”

 

 고개를 떨구고 눈을 감았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렇게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한순간에 증발시키는 뜨거운 열기가 내 얼굴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숨 쉬기가 편해졌다. 대체 무슨일이지?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괜찮나요? 마엘.”

“마…”

 

 눈을 뜨자 맨 처음 보인건 손으로 그리라고 하면 절대로 그리지 못할 것 같은 치렁치렁한 장식이 인상적인 붉은색 치맛자락이었다. 이런 옷을 입는 사람은, 내가 아는 한 단 한사람 뿐이었다.

 

“아! 드디어 왔네. 기다렸어요! 너무 늦으셨다~!”

“마리님…!”

 

 마리 발렌틴 드 오를레앙. 내가 진심으로 좋아해 마지 않았던 악역영애.

 

“여, 여기는 어떻게…”

“... 상스러운 일이지만, 당신한테 도청 마법을 걸어뒀거든요. 요즘 저랑 갑자기 거리를 두니까, 그 이유가 뭔지 너무나 궁금해서. 그런데 들리는 내용이 심상치 않더라고요.”

 

 아무리 힘들어도 항상 기품있던 모습을 보여주던 마리님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숨도 안돌리고 뛰어오셨다는건가? 그러고 보니, 때 하나 안묻게 관리하던 드레스가 여기저기 찢어져있어…

 

“늦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내 뒤로 와요. 마엘.”

“늦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엠마의 뒤에 있던 검은연기가 회색으로 바뀌더니, 공장의 굴뚝을 연상케하며 거센 기세로 뿜어 올랐다. 연기는 끝없이 뻗어나가는 듯 하다 이 정원을 가득 메우고 나서야 멈췄다.

 

“너무 늦었다니까?! 마리님은 항상 그런 식이야. 내 앞에 있어도 그저 마엘, 마엘, 마엘! 그렇게 찌질한 사람의 어디가 좋은거에요?!”

“......”

 

 이 마법의 이펙트도 본 적이 있다. 주인공이 몰락 귀족인 설정으로 게임을하면, 어떻게 게임을 진행하건 쟝이 마족에게 홀려 최종보스로 나온다. 이 마법은 그렇게 최종보스가 된 쟝이 쓰는 마법이다. 어둠 속성 마법을 쓰는걸 들키지 않기 위해 피는 결계역할이었지. 그 말인 즉, 이제부터가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는 말이었다. 방금 전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흉흉한 마나가 느껴졌다.

 

“마족의 앞잡이한테 그런 걸 설명할 의무는 없어요. 왕립 클라리스 마법학원 재학생의 명예를 걸고, 당신은 여기서 제가 쓰러트리겠습니다.”

“하하핫…! 그래요! 얘기가 빨라서 좋네요! 일단, 마리님을 만나면 제 기대를 배신한 죄로 그 도도한 얼굴을 뭉개는 것 부터 시작하려고 했거든요…!”

 

 내 앞에 있는 마리님은 너무나도 든든했지만, 어둠 속성 마법은 빛 속성을 제외한 모든 속성에 상성상 우위. 그리고, 최종 보스가 쓰는 결계같은 것 까지 쓰는 걸 봤을 때… 상성의 문제를 떠나서 스펙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날 거야. 객관적으로 따져 봤을 때 지금 마리님이 엠마를 이길 확률은 0%. 그리고, 어둠 속성 마법으로 학생과 교사의 정신을 지배했다고 하니까... 단순히 쓰러트리면 그 여파가 어마어마할거야…!

 

“자, 그럼 가볍게 시작할게요~! 너무 맥없이 지지는 말라구요!”

 

 검은 연기가 칼날의 형상을 띄며 마리님에게 날아왔다. 마리님은 그것을 보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뱀의 형상을 한 화염이 이글거리며 검은 연기를 막아내었다.

 

“저, 마리님…”

 

 나는 마리님한테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지, 그리고 마리님은 무엇을 해야하는지 귓속말로 설명했다. 긴박한 상황이라 너무 어영부영 설명한 감이 있지만, 마리님은 내 말을 다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나를 앞에두고 둘이서만 담화를 나누는거에요?! 질투나게!”

 

 검은 칼날은 그 수를 늘려 마리님에게 다가왔다. 샐러맨더가 화염장벽을 펼쳐 칼날을 막아냈지만, 그 칼날중 몇몇개는 장벽을 뚫고 샐러맨더의 몸을 찔렀다. 샐러맨더는 어렵사리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흐트러질 듯 그 형상은 위태로웠다.

 

“그러면…무운을 빌게요! 마리님!”

“최대한 빨리 돌아와줘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으니까…!”

 

 나는 마리님한테서 도망가는 엑스트라들보다 훨씬 빠른 몸놀림으로 정원 밖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이 결계가 물리력이 없는 설정의 결계라서 다행이었다. 사람이 오고 가는걸 막는 결계는 아니니까 무언가 방해 공작이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살기등등했던 것 치고는, 의외로 마엘을 쉽게 보내주네요. 괜찮나요? 저렇게 보내줘도.”

“응? 뭐… 보내 줘 봤자 지깟게 어쩔거냐는 생각밖엔 안드는데요? 엠마는 사실 어둠 마법을 쓰는 마족의 하수인이었어요~ 같은 소문이라도 낼건가? 쉽지 않을텐데...? 지금 학원에 있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내가 정신을 지배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빛 속성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이상에야… 누가 나를 상대할 수 있겠어?”

 

 이가 부득부득 갈렸다. 지깟게라고?

 

“저런 것보다 지금은, 내가 사랑하는 마리님과의 독대가 훨씬훨씬 중요한걸요~!”

 

 그 말이 끝나자 마자, 무언가가 터지는 파열음이 들렸다. 그 소리에 잠시 주춤했지만, 내가 가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마리님을 뒤로하고 교사를 향해 달렸다.

 그래, 어디 한번 뼈저리게 느껴봐라. 니가 사람 취급도 안하는 라이트 게이머가 이 게임의 뭘 알고있는지…!

 

*

  검은 칼날이 내 드레스를 찢고, 허벅지를 스쳤다. 그래, 다행으로 생각하자. 이걸로 한결 움직이기 편해졌다고.

 

“점점 제 칼날이 마리님의 몸에 닿는 것 같은데~ 클라리스 마법학원의 명예를 걸고 저를 해치운다는건 허풍이었나요?”

 

 연기를 해치면서 나에게 느릿느릿 다가오는 엠마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마력을 한계까지 쥐어 짜냈기 때문인가? 의식이 흐릿해…

 

“좀 더 대단한 마법은 없어요? ‘테라 플레어’라던가 ‘가우스의 유성’같은… 고위 불의 마법 있잖아요. 그런 마법을 꺼내지 않는 이상에야 승산은 없을걸요? 뭐, 그걸 꺼낸다고 해서 딱히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 아직 배움이 모자란지라, 그런 마법은 쓸 수 없네요.”

 

 비장의 한 수로 꺼낸 고위 불의 정령인 이프리트의 모습도 점점 흐릿해진다. 소환이 해제되는 건 시간문제야. 빨리 마엘이 돌아와야하는데…!

 

“못한다고 한탄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잖아요.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어떻게든 해봐야지.”

“헤헤… 저, 마리님의 그런 모습이 너무 좋아요.”

 

 엠마는 어제와 한 치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귀엽다고만 생각했던 사람이 이제는 그냥 섬뜩하게만 느껴졌다. 그나마 나에게 승산이 있다면, 나를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실력자가 그냥 나를 보고만 있다는 점인가.

 

“자, 그럼 다음 공격 갑니다~ 힘 조절은 하겠지만 잘 받아주셔야돼요? 잘못 받으면 그대로 죽을지도?”

“.....!”

 

 전방에 거대한 마력이 집결되는게 느껴졌다. 선인장의 가시마냥 삐쭉한 형상을 한 수없이 많은 검은 가시들이 모여 거대한 쐐기의 모양이 되었다. 잘못 받으면 그대로 죽는다는 말은 농담이 아닌 것 같다. 엠마의 공격 속도를 봤을때 피하는 건 불가. 그렇다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화력으로 받아내야…!

 

“이프리트 - !”

 

 이프리트는 내 언령에따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격 마법을 펼쳤다. ‘수르트의 검’. 이 마법을 쓰는 댓가로 이프리트의 소환이 강제로 해제되는 최강의 공격…

 이 모든 순간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이프리트가 내 세포 하나하나를 태우고 있는 느낌이야. 그렇지만…!

 

“에이, 이럴땐 공격 마법보다 방어 마법을 쓰는게 더 효율이 좋지. 그렇게 부족한 화력으로 저거랑 상대하려고하면… 죽을걸?”

“당신…?”

 

 내 어깨 위에 살포시 올린 손이 느껴졌다. 그 손을 촉매로, 지금 내가 짜내고 있는 공격 마법의 술식이 하나하나 재설계되고 있었다. 더 경악스러운건, 이 모든걸 해내는 데 내 마력을 쓰지 않고 술자의 마력을 쓰고있다는 점이었다.

 

“어라? 방해꾼인가요?”

 

 내 생애 처음보는 거대한 불꽃의 방패가 내 눈 앞에 나타났다. 저렇게 거대한 어둠의 마력이 방패 앞에서 맥을 못추고 녹아내렸다. 불꽃의 방패도 그 뒤에 사그라들었지만.

 

“아벨…? 어째서 당신만 혼자 온거죠? 마엘은…?”

“엄청 숨을 헐떡거리면서 나한테 도움을 청하더니, 자기는 찾아와야 되는게 있다고 또 엄청 뛰던데? 어지간히 급한가봐. 숨도 안돌리고 헥헥거리면서 뛰는 걸 보면.”

 

 재수없는 목소리, 겉보기엔 말랐지만 엄청난 단련을 쌓았다는게 느껴지는 근육질의 체구. 그리고.. 인정하긴 싫지만 조각상같은 얼굴.

 마엘이 귓속말로 ‘아벨님을 불러올테니 조금만 버텨주세요! 두 사람이 힘을 합쳐서 싸운다면 이길 수 있을거에요!’ 라고 했었지.  이 사람과 공조해야 된다니 속이 비틀리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어머… 마리님, 아벨님은 꼴도 보기 싫다고 말하지 않았었나요? 힘이 달리니까 자기보다 강한사람을 불러온다는 생각? 이건 전혀 마리님같지 않네요. 이것도 마엘의 영향인가?”

“하나하나 시끄럽게…!”

“저런거에 하나하나 대꾸하지 마. 격 떨어진다.”

 

 아벨은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하더니, 내 앞에 우뚝 섰다. 평소에는 작아보이던 그 등이, 지금만큼은 무척 커보였다.

 

“야. 제2의 전생자.”

“.....어머?”

 

 전생자… 엠마가 자기랑 마엘을 일컬어서 전생자라 말했지. 대체 그 전생자라는게 뭐지? 그리고 아벨은 그걸 어떻게 알고있는거지? 마엘이 아벨한테 설명한건가?

 

“아~! 그러네. 이제야 납득이 가네. 그런 찌질이가 어떻게 오를레앙 가문을 정화했나 했더니만…당신의 힘을 빌렸다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잘도 그런 생각을 했네.“

“내가 만약에 처음으로 만난 전생자가 너였다면, 나는 너한테 힘을 빌려줬을수도 있었겠다.”

 

 이 작자…? 지금 무슨 소리를…?

 

“그런데, 이미 도와주기로 약속한 사람이 있어서 말이지. 너도 전생자라면 내 성격 잘 알거아니냐. 나는 약속 깨는 사람을 제일 싫어해. 그래서 내가 약속을 깨는것도 싫어하고.”

“아… 그래요? 좀 아쉽네요. 그래도 뭐 어때요? 지금 당신도 쓰러뜨리고 정신을 지배하면 해결되는 문젠데.”

“쓰러뜨려? 니가? 나를?”

 

 아벨은 그 말을 듣고 천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벨의 실력은 잘 알고있어. 아벨은 마법학원에 갓 입학한 지금에서도 왕궁의 고위 마법사를 웃도는 실력자다. 그렇지만, 상대는 어둠의 마법을 다루는 마법사. 아무리 아벨이라해도 여유부릴 상대는 아닐텐데…

 

“그것 참… 어디서 받은 힘을 가지고 입을 잘도 놀리는데, 내가 무슨 마법을 쓰는지 보면 그 건방진 입이 쏙 들어갈걸.

“글쎄요? 당신도 제 힘을 보면 그런 건방진 말을 할 생각이 쏙 들어갈걸…?!”

 

 방금 전과 같은 힘을 가진 검은 쐐기가 세 방향으로 아벨과 나를 덮쳐왔다. 아벨은 손가락을 한번 튕겼다. 그러자, 방금 전과 같은 불꽃의 방패가 검은 쐐기가 오는 방향과 똑같은 방향으로 우리를 감쌌다. 방금 전에는 내 술식을 응용했으니 이해 되지만… 아벨은 바람 속성의 마력을 가진 마법사가 아니었나? 어떻게 불 속성의 마법을…?

 

“확실히 대단하긴하네. 그것도 전력이 아니지?”

“잘 알고계시네요…!”

 

 성난 해일마냥 몰려오는 검은 쐐기. 아벨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쐐기를 정면에서 받아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자기 말고 모든것을 비웃는 듯한 웃음기가 없는 진지한 얼굴이었다.그 얼굴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아벨이 전력으로 허세를 부리는 거라는 걸.

 

“그래, 아마 내가 너랑 싸우면 질거야. 사대속성을 전부 다룰수 있어도, 그 속성을 전부 이길 수 있는 어둠 속성의 마력을 다루는 놈이랑 싸운다면 뭔 속성을 다루건 의미가 없지.”

“...뭐?”

 

 사대속성을 전부 다룰 수 있다고? 마법사는 한평생에 걸쳐 한 속성을 숙달하는데에 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위 마법 하나 못다루는 마법사가 대부분이다. 두 속성을 다루는 마법사는 왕궁의 마법사장 정도라고 알고있는데… 이런 한량이 사대속성을 전부 다룰 줄 안다고?

 

“그렇지만, 마법이라는게 오묘해서말이야. 속성끼리 혼합하면 새로운 속성이 생겨나기도 하거든. 불과 땅 마법을 같이 쓰면 쇠 속성의 마법이 나오기도 하잖아. 이건 알고있지?”

“그런 기초적인 강의는 이미 다 듣고왔는데요. 하고싶은 말씀이 뭔데?”

“자, 잠깐. 아벨… 지금은 한가롭게 대화를 할 때가…”

 

 엠마는 대화를 하면서 마력을 짜내고 있었다. 엠마의 몸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가, 어딘가로 흐르지 않고 엠마의 위로 모인다는 점에서 알 수 있었다. 검은 연기는 두루뭉술하게 구체를 이루었다. 마치, 언젠가 봤던 일식을 생각나게 하는 불길한 어둠이었다.

 

“그러면… 사대속성을 전부 합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궁금하지 않아?”

“음? 아벨 님도 허풍이란걸 치는 사람이었군요? 그런게 가능할리가.”

 

 엠마는 그렇게 말하면서 팔을 우리쪽으로 뻗더니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커다랬던 검은 연기가 진주 알 정도의 크기로 줄어들었다. 이렇게 방대한 마력을 저렇게 고밀도로 압축되었기 때문인지, 발을 한치도 뗄 수 없었다.

 

“마리. 내가 살다살다 너한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네 도움이 필요해. 내가 사대속성을 전부 다룰줄 안다지만, 사대속성을 전부 합하는건 다른 문제거든. 이런 합체기를 쓰려면 꼭 두 사람 이상은 필요하더라.”

“.....네?”

“지금 병풍처럼 서있는 이프리트의 소환을 해제하고, 네 마력을 전부 나한테 보내. 그러면 그 뒤는 내가 알아서할게. 약속.”

“저도 당신한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당신을 믿을게요. 꼭, 엠마를 쓰러뜨려 주세요.”

 

 나는 아벨의 말에 따라 이프리트의 소환을 해제하고, 아벨의 등 뒤에 손을 얹어 나한테 남은 모든 마력을 아벨에게 보냈다. 이렇게 미약한 마력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이 사람 말마따나 지킬 수 없는 약속은 안하는 사람이니까.

 

“의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잡담은 이제 끝났나요? 만약에 아벨님이랑 마리님이 죽으면 묘비엔 꼭 그렇게 적어드릴게요! 내가 살다살다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라고!”

 

 엠마는 꽉 쥔 주먹에서 검지만 피더니 검지를 까딱하고 아래를 내렸다. 마치 사형선고라도 하는 듯이.

 

“이거 마법 이름이 뭐더라? 아! 맞아. ‘다크 테라 플레어’였지. 너무 과한감이 없지않나 싶은데… 아벨님은 불확정 요소니까. 확실하게 끝내드릴게요~!”

“오~ 무서워라.”

 

 아벨은 하핫, 웃기만 할 뿐이었다. 이렇게 느긋하게 있는 동안에도, 어둠의 구체는 우리를 향해 내려왔다. 

 

“조합 완료… ‘천계의 문’.”

 

 아벨은 손을 뻗었다. 그 뒤에 일어난 일은 경악 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절대속성이라고 알고 있었던 어둠의 마법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채 압도적인 빛에 녹아내리는 장면. 이런 걸 할 수 있는건…

 

“빛의...마법…?”

“…어?”

 

 그 압도적인 빛이 나를 포함한 모두를 감싸안았다. 폭력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섬광이었지만, 그 빛은 따사롭기만 했다.

 

*

 

“하아… 하아…”

 

 풀 한포기도 없이 깔끔하게 타버린 정원, 내 숨소리를 듣고 “이제 왔어~?” 라고 느긋하게 물어보는 아벨과, 나를 걱정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마리님. 그리고 마력 제어 밧줄에 묶여 악에 받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는 엠마. 아무런 설명이 없어도 알 수 있었다. 

 무사히 끝났구나. 다행이야.

 

“마엘!”

 

 마리님은 나를 끌어안았다. “그런 짓을 당한 몸으로 쉴 새 없이 뛰어다니다니… 얼마나 걱정했다구요! 무사한거에요?!” 라는 잔소리는 덤이었다. 지금 걱정을 받아야 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마리님인데…

 

“...저야 목 졸린걸로 끝이었지만, 마리님은 여기저기 다쳤잖아요. 얼굴에도 상처가 나서 어떡하지? 흉은 안지겠죠?”

“지금 그런게 중요한가요…? 마엘은 참… 무슨 상황이건간에 내 걱정부터하고.”

 

 이런 말을 들으니까 더 양심에 찔린다. 조금 전에 목 졸릴때는 진짜로 제 걱정만 했는데요. 양심이 찔려서 그런가? 가슴이 두근두근한데…

 

“아! 지금 딱 이런 분위기구나? 그럼 나도…”

 

 마리님과 내 포옹을 보더니 엉거주춤하게 팔을 올리는 아벨. 필시, 마리님과 나의 감동적인 재회를 망쳐버리려는 것이겠다… 나는 최대한 날카롭게 아벨을 째려봤다. 아벨은 그걸 보고 픽, 코웃음을 치곤 그자리에서 멈췄다. 그래, 저런 눈치라도 있어야 저 밉상이 그나마 덜밉게 보이지.

 

“마리님.”

“네.”

“저, 지금부터 귀족의 격에 매우 안 어울리는 행동을 하고싶은데… 괜찮을까요?”

“언제는 그런걸 허락받고 했었나요. 대충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진 알겠어요. 좋아요. 이 앞으로부터 일어날 일은, 황태자의 약혼녀이자 오를레앙의 영애인 마리 발렌틴 드 오를레앙이 허가할게요.”

 

 나는 싱긋 웃음짓고, 포박되어있는 엠마의 앞에 다가갔다.

 

“하? 뭔가요? 뭐. 패배자를 실컷 비웃어주기라도 하려구요?”

“하? 하아?”

 

 그 말을 듣자 나는…

 

“하! 하하!! 하하하하하하!! 이 꼴좀 보라지! 그렇게 잘난척해놓고 꼴사납게 져버렸네! 나였으면 쪽팔려서 접싯물에 코박고 죽었을걸?! 아! 그런데 그렇게도 못하네! 왜냐? 왜? 어째서? 손 발이 묶여있는데 접시를 어떻게 가져와?! 하!! 하하하하! 꼴 좋다! 치트 쓰고도 못이기는건 대체 어떤 기분이냐? 좀 알려주라. 나는 치트를 써본적이 없어서 너무 궁금해!”

 

 마리님의 한숨소리가 뒤에서 들렸지만, 지금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기분이었다. 그리고, 마리님은 이런 내 모습이라도 이해해 주실거야. 말하긴 부끄럽지만 귀족의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은 수없이 했었으니까.

 … 그게 이정도는 아니었지만.

 

“치트… 치트라고하면 아벨이 쓴 빛의 마법이 더 치트 아니에요?! 아벨이 빛의 마법을 쓴다니. 나는 본적도 없어…!”

“치트 아니거든요~ 엄연히 존재하는 기술이거든요. 이 게임의 팬이라면 알아두지그래? 아벨은 합체기로 빛의 마법을 쓸 수 있다고. 시나리오 라이터 이름 아는 것 보다야 이게 게임 플레이에 천배, 만배는 도움이 될거다!”

“그래요,  실컷 비웃던가. 그래봤자 저한테 진짜 이긴게 아니라는건 아시죠?”

“..... 음.”

 

 그 말을 듣자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 아직 안 끝났지. 오히려 중요한 건 지금부터 일어날 일이야. 내 예상이 맞아야 할텐데.

 

“아… 뭐, 그렇게 웃는 와중에 방해해서 미안한데. 그래서 찾던 거는 찾았어?”

“아, 그게… 죄송해요. 아벨 님. 못찾았어요.”

 

 이 말이 나오자, 이번에는 반대급부로 엠마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하!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너같은 사람들이 생각을 해봤자 거기서 거기죠. 확성 벌레를 찾았던거죠?! 이 학원 식물관에 쳐박혀있는, 확성기의 성격을 가진 벌레! 마리님이 그 벌레때문에 주인공을 괴롭힌다는걸 온 학원에 자백한 꼴이 된 그 편의주의적인 곤충! 그런데 이걸 어째요?! 그 벌레는 제가 다 죽여버렸는데! 제가 학생들한테 건 정신 지배를 해제하기 위해서 노력하신 게 가상하다만? 그 노력이 물거품이 됐네요! 하하하! 그렇게 다 이긴 것처럼 굴었는데 마지막에 뒤집히는건 어떤 기분이세요?! 너무너무 궁금…”

 

 나를 비웃는 엠마 앞에, 곤충 케이지를 슬그머니 들이밀었다. 그녀가 말한 확성 벌레가 들어있는 케이지였다. 아마 지금쯤이면, 엠마의 천박한 목소리가 전 학원에 퍼졌겠지. 고맙다. 엠마. 내가 예상한대로 잘난척을 참지 못하는 말 많은 인간으로 있어줘서.

 

“...라는 농담을 준비했는데, 웃겼나요? 아벨님.”

“농담 자체는 썰렁했는데 엠마가 갑자기 닥치게 된게 웃기니 아슬아슬하게 합격. 그런데, 그 벌레는 대체 왜 필요한거야? 한달 전에 ‘혹시 모르니까’ 라면서 벌레 채집해서 기숙사 구석에 박아놨을 때는 뭔가 싶었다니까.”

“아… 그건, 어둠 마법의 특이성 때문에 그래요. 정신 지배를 풀려면, 정신을 지배당하고 있다는 자각을 심어줘야 하거든요.”

 

 어둠 마법이 게임 내에서건, 이 세상 속에서건 절대적인 위력을 가진 이유는 두가지다. 하나는 빛 속성을 제외한 모든 속성에 상성 우위를 가졌다는 것. 그리고 두번째는 어둠 마법으로 인해 정신을 지배당한 사람을 구해내기 위해선 자신이 정신 지배를 당하고 있다는 자각을 심어줘야 할 것. 만일 정신 지배가 해제가 안됐는데 술자가 죽어버리면, 정신 지배를 정신이 붕괴되어 평생을 폐인으로 살아야 한다.

 

“저런건 잘도 알고 있다니까? 사대속성을 합쳐서 빛 속성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고… 그런데 마법 이론에는 잼병이고, 대체 뭐하는 녀석인지.”

“제 친구의 실력이 어떤가요? 아벨. 당신보다 훨씬 뛰어나죠?”

"그건 인정 안한적이 없었는데? 내가 인정 안했던 건 네가 나보다 뛰어나다는 흰소리 뿐이였고.”

“...뭐라구요?”

 

 뒤에서는 시끌벅적 하지만, 엠마는 고개를 숙이고 침묵할 뿐이었다. 아마, 조금 있으면 확성 벌레의 발신지를 찾아서 이곳으로 온 교직원이 달려오겠지. 그리고 난장판이 된 정원을 보고 사건의 전말을 캐물을거고.

 그 전에 확실하게 해둬야 하는 것이 있었다.

 

“... 죽여요.”

“뭐?”

“죄를 저지르면 벌을 받는다.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와다 켄의 메시지였어요. 메시지를 좋아했는데 그걸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그건 내 성미가 견디지 못해. 그러니, 빨리 죽여요. 교직원이 와서 저를 구속하니 뭐니 하기 전에.”

“... 내가 왜?”

“뭐…?!”

“죽는 걸 원하는 사람을 죽여봐야 그게 벌이겠어? 나는 그것보다 더 끔찍한 방식으로 너한테 벌을 줄거야. 기대해도 좋아.”

*

 

 나는 마리님의 손에 의해 도서관에 끌려왔다. “다음 승급시험엔 꼭 부유성으로 올라오세요. 명령입니다.” 라고 하시더니, 아무래도 나 혼자 힘으로는 해낼 수 있을지 불안하다면서 내 취약 과목인 마법 이론을 철저하게 과외할 셈이었다.

 

“마리님… 마음 써주시는 건 고맙지만 혼자서 할 수 있다니까요. 언제나 그랬듯ㅇ…”

“그 성적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사람의 성적이 아니었어요. 자, 빨리 앉아요. 아! 전에 빌렸던 ‘8살짜리도 알 수 있게 쉽게보는 마법이론’ 대여기한 끝났죠? 자리에 앉기전에 그것부터 반납하도록 하죠.”

 

 그게 어떻게 8살짜리도 쉽게 볼수있는 마법이론이야. 8살짜리의 80먹은 할아버지도 못알아 볼 내용밖에 없는데… 

 나는 한숨을 쉬며 도서관 카운터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엔…

 

“정말 지긋지긋하게 오시네요. 이번엔 확성벌레대신 책벌레라도 수집하시게?”

 

 목에 마력제어구를 단 엠마 코르데가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그녀에게 내릴 수 있는 최고의 벌이었다. 마족의 앞잡이를 처벌할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절대로 탈출이 불가능한 감옥인 암다폴 섬에 가둬버리기, 마력 샘과 다리 힘줄을 적출하고 노예로 격하시키기, 그리고… 사형. 그렇지만 그런 극형들은 엠마가 원하는 종류의 벌이었다. 그녀는 죄엔 엄벌을 가해야만 한다고 신봉하는 인간이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마리님과 아벨님을 설득해 이렇게 벌을 내리자고 했다. 마력을 낼 수 없도록 마력제어구를 달고 이 학원에서 무상으로 봉사를 하게 하자고. 아벨은 재밌다면서 웃었지만, 마리님은 불만인 눈치였다. 그래도, 마리님은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하면서 허락해주었다. 학원의 교수진을 포함한 모든 직원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발했지만 마리님이 자신의 약혼자를 설득하여 권위로 찍어누르니… 어쩌겠어? 왕립학원의 직원인데 황태자의 말을 안들으면 잘려야지. 전생에선 권위주의를 싫어했었는데, 이렇게 되니 권위주의 만만세다.

 

“난들 오고싶어서 오는 줄 아냐?”

“마엘? 오고싶어서 오는게 아니라면요?.”

“... 오고싶어서 온다는 말을 비꼰 거였어요. 마리님.”

“시끄러우니까 콩트는 밖에 나가서 하시구요. 반납 확인했습니다.”

“자, 그럼 자리로 가자구요. 어제는 진도가 좀 부진했으니까 오늘은 식사시간을 좀 줄여서라도 확실히…”

“아, 그전에 잠깐… 엠마랑 얘기좀 하고와도 괜찮을까요?”

“... 5분 줄게요. 빨리 와야돼요?”

 

 마리님은 그렇게 말을 하곤 책장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오늘의 교재를 찾고있는걸까…

 

“무슨 얘기 하려고? 나는 너랑 할 얘기 없는데요.”

“이렇게 사서 생활 한지도 한달이 지났으니까… 좀 어떤가해서.”

“너무나도 미적지근하고 평온한 일상이라 도저히 견딜수가 없네요. 접싯물에 코라도 박고 죽고싶어지는데 그럴수도 없고. 참담하네.”

“.....”

 

 엠마는 그렇게 말하면서 땅만 쳐다봤다. 나랑은 시선을 마주치기도 싫다는 듯.

 

“저기요. 이런다고 내가 정말로 교회 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너무 미적지근한 발상인데. 이 마력 제어구를 벗기는 방법만 알면…”

“아벨님이 힘써서 만든거니까. 벗으려면 시간 꽤나 걸릴거야. 그러니까 시간과의 싸움인거지. 네가 마력 제어구를 푸는게 먼저인지. 내가 너를 교화시키는게 먼저인지. 뭐, 사실 그 전에 아벨님이 새 마력 제어구를 만드는게 먼저겠지만… 되도록이면 그 전에 너를 교화시키고 싶네.”

“교화라는건 자신이 한 죄에 대한 반성이 선행되어야 의미가 있는거에요. 그리고, 고통 없는 반성엔 의미가 없지. 무슨 말인지 이해 했나요?”

“너랑 그런 일이 있고 난 뒤로 많은 생각을 했어. 죄라는 건 꼭 그렇게 벌을 받아야만 없어지는 건지.”

“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너랑 나랑은 가치관이 다른거지요? 이 얘기 더 할거에요?”

 

 엠마 코르데라는 캐릭터의 작은 체구에, 이렇게 툴툴대는 말투가 합쳐지니 사촌 동생 보는 것 같네. 한대 쥐어박고 싶어지는 것 까지 사촌 동생이랑 판박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안해. 고통 없는 반성에 의미가 없는게 아니라, 생각 없는 반성에 의미가 없는거야. 그 사람이 무슨 벌을 받았느냐보다, 그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진정성있게 생각하냐. 그게 반성에 있어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

 

 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내 등 뒤에 사람이 있는 걸 보고 나는 손을 흔들며 엠마한테 인사했다. 엠마는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응대하면서도, 몰래 손을 들어 내 쪽으로 중지를 치켜올렸다. 마력을 쓸 때는 그렇게나 무서웠는데, 힘을 잃었는데도 저러고 있는걸보면 반항적인 햄스터같다.

 코웃음을 한번 치고 카운터를 떠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리님이 앉은 자리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목침보다 두꺼운 책이 네권이 쌓여있었으니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나는 용기를 내어 마리님의 맞은편에 앉았다.

 

“얘기는 잘 하고 왔어요?”

“아직은 제 얘기를 들을 준비가 안됐나봐요.”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요. 당신은 제 세계를 바꾼 사람이니까. 그 사람의 세계도 바꿀 수 있을거에요.”

“언제나 말하는 거지만 과찬이라니까요. 그래도 칭찬해주셔서 감사해요. 마리님.”

 

 그 일이 있고나서 마리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나를 만나기 전의 마리님은 선민의식이 가득했던 전형적인 악역영애였던게 사실이다. 그리고, 오를레앙 가문도 하늘에 우러러 떳떳함이 있을 수 있는 가문이 아니었고. 그렇지만 마리님도, 오를레앙 가문도 지금은 개심하여 잘못을 만회하려 노력하고있다. 조금 자만하는 건가 싶지만, 이 공로중의 일부분은 내 공로라고 봐도 좋겠지.

 그렇기 때문에, 엠마 코르데의 말을 긍정해버리면 지금의 마리님은 물론이거니와, 그간 내가 해왔던 고생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아 긍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유가 아니더라도 나는 엠마를 이해 할 수 없었을거다.『Starry nignt』를 플레이하면서 나오는 엄벌주의에는 이렇게 까지 해야하나? 라는 생각밖엔 안했으니까.

 

“그러면… 이번 진도가… 저기, 마엘?”

 

 그렇지만, 그 일이 있고 나서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역시 이거 아닐까.

 

“마엘? 제 얼굴은 교재가 아닌데요.”

 

 악역만을 좋아하던 나는, 마리님이 악역이 아니게되자 내 멋대로 실망했었다. 하지만, 괴롭힘당하는 엠마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내가 위기에 빠지자 자신이 중요시하던 것들을 내팽겨치고 나를 도와주러 온 마리님을 보곤 생각이 바뀌었다.

 세상의 모든것을 긍정하는 선역은 내가 좋아할수 없지만, 자신의 힘이 닿는데까지 남을 돕고 선을 긍정하려는 선역은 충분히 좋아할수 있다고.

 

“마엘.”

“아, 네?”

“교재를 보라니까요. 혹시, 제 얼굴에 뭐가 묻기라도 했나요?”

 

 내가 사랑하던 악역영애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내가 사랑하는 영애의 모습은, 지금 이 모습이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깐 현기증이 일어서… 그럼, 오늘 해야 할게…”

 

 만일 이게 지금 게임 속의 상황이었다면, 기껏해봐야 1장을 끝낸 정도겠지. 설명하기 힘들어 어영부영 둘러댄 내 정체를 언젠가는 마리님한테 알려야하고, 엠마는 여전히 불안요소로 남아있다. 게다가 게임상에서 흑화하는 쟝이나 레오가 지금 흑화하지 않는다는 보장또한 없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끝나는 1장이라면, 나는 충분히 만족스럽다.

 

Posted by 비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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