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 싸움이 끝나면 고백하려고.”
“커흡.”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제 옆에 있는 청년이 뜬금없이 내뱉은 한 마디에 놀란 나머지 마시던 포도주를 허공에 흩뿌렸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이 10년동안 지났음에도 청년이 감정을 내비친 적이 얼마 없기 때문이었다.
그 10년이 그냥 10년이던가?
예언에 따라 무려 수백 년간 끊긴 적 없었던 마물과 인류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용자로 간택되어, 끊임 없이 사투를 벌여야 했던 10년이다.
그런데도 이 청년, 용사는 얼굴에 별 다른 감정 한번 내비친 적 없었다.
마왕을 보필하던 사천왕을 차례차례 쓰러트렸을 때도, 한 번도 함락된 적 없는 마계의 요새를 공략하고 인류 처음으로 마계에 발을 내딛었을 때도 용사는 건조한 목소리로 다음 목적지는 어디냐는 질문만 남겼었다.
그나마 감정을 내비쳤을 때라고 한다면...
“왜 그래? 영감. 내가 못할 말이라도 했어?”
퉁명스러운 용사의 목소리에 노인의 상념이 끊겼다.
“아니… 좀 놀라워서 말일세. 마물들을 도륙내는 것 말곤 만사에 관심이 없었던 자네가 사랑 얘기를 꺼낸다는 게.”
“남들이 들으면 내가 무슨 미친 놈인줄 알겠네. 대현자 멀린 나으리께서 시키는 대로 한 것 뿐인데.”
“자네가 언제 내 말을 들었다고? 하여튼 이럴때만…”
멀린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다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사랑 얘기에 이어서 농담까지 해? 자네, 갑자기 왜 그러나?”
“내일로 이 개고생도 끝이어서 그런가? 기분이 좀 싱숭생숭 하네.”
용사는 시선을 돌려 저 멀리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세워진 한 고성을 바라보았다.
시선에 담는 것 조차 허용하지 않는 불길함을 품고 있는, 모든 마물들의 정점인 마왕이 기거하는 마왕성을.
“저기 앉아있는 새끼만 족치면, 이 싸움도 끝나는 거잖아.”
“그게 그렇게 간단히 말할 일이 아닌…”
사실 그 점은 용사도 잘 알고 있겠지, 지난 10년간 마물들과의 사투에서 최선두에서 싸웠으니.
멀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고백이라니? 누구한테?”
용사는 멋쩍은 듯 목덜미를 긁적이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 아이린한테.”
“아이린이라면… 자네가 말한 적 있던 그 처자 말인가?”
방금 전 용사의 말 때문에 끊겼던 상념이 자연스레 이어졌다.
용사가 감정을 내비친 몇 안되는 때 중 하나가, 제 고향에서 소꿉친구로 지냈던 아이린에 대해 이야기 했었을 때니까.
분명, 용사가 어렸을 적 친구들과 야산을 쏘다니다 들개 때의 습격을 받았을 때 처음으로 잠재된 힘을 개방하고 들개들을 물리쳤더니 ‘괴이한 힘을 쓴다’는 이유로 마녀의 아들 취급 받아 화형 당하기 직전까지 몰렸다가…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서 목숨을 구해줬다던 그?”
“지나가듯이 한 얘긴데 기억하고 있네?”
용사에게 있어선 분명 끔찍한 기억일텐데도, 용사의 눈은 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광기 어린 목소리로 저를 불태우라고 말하던 어른들의 모습보단, 아래턱을 벌벌 떨며 필사적으로 소리치던 아이린의 뒷모습이 더 기억에 남아있었으니까.
“사실, 용사같은 거 하기 싫었거든. 내가 인류의 희망이라느니, 예언 속의 용사라느니 뭐니 해봤자 별 실감도 안 나고.”
“그런 것 치곤, 되게 순순히 따라오지 않았나?”
용사는 멋쩍다는 듯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건… 아이린 때문에 그런거고.”
“음?”
“마왕같은게 설치고 다니면, 그 녀석이 불안해 할 거 아니야.”
“......”
멀린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니까, 오직 한 소녀만을 위해 이토록 먼 길을 나섰다는 것 아닌가? 참으로 지고지순한 사랑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 음유시인이 있었다면 곧바로 창작욕이 불타올라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집필할 정도로.
“허어…”
그 때문에, 멀린은 탄식을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왜 갑자기 한숨이야?”
“그게…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하루 이틀 같이 다녀보나. 할 말 있으면 그냥 하지?”
“...내 말을 듣고 귀향길에 오르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말함세.”
“뭔… 탈주할거면 진즉 했지, 사람을 뭘로 보고 그딴 소리를 하는거야? 대체 뭔 말을 하려고?”
“하아…”
이대로 두었다간 마왕과 싸우기 직전까지 들들 볶을 기세였기에, 멀린은 한숨으로 삼켰던 말을 어렵게 토해냈다.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이네만, 출정하기 전에 그 처자한테 무슨 말이라도 해둔 게 있나?”
“뭔 말?”
“내가 이 싸움을 끝내고 오면 결혼하자거나, 뭐 그런 약속 같은 것 말이야.”
“어떻게 그래? 내가 마왕을 언제 족칠 줄 알고?”
“그렇구만…”
멀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꿉친구를 위해 마왕을 쓰러트린다는 말도 안 되는 일을 실행에 옮긴 순정남이 ‘내가 언제 돌아올 진 모르겠지만 돌아오면 나랑 사귀어 줄래?’ 같은 잔인한 말을 할 리 없지 않나.
“내가 끌고와 놓고서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자네가 나를 따라온 이유가 순전히 그 처자 때문이라면… 오히려, 그 처자 옆에 붙어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음?”
용사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멀린은 그 반응에 답답함을 못이기고 미간을 매만졌다.
“자네가 싸워온 세월이 자그마치 10년일세.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그 처자는 자네와 동갑 아니었던가?”
“그렇지?”
“그럼 25살이라는 이야긴데, 그 나이까지 짝을 안 찾았을 리 없지 않나!”
25살이라면 애가 있어도 이상할 나이가 아니다.
특히, 용사가 살던 곳은 시골이었으니 왕도권에서 사는 처자들보다 더욱 빨리 결혼했을 확률이 높았다.
일거리라도 구해서 홀몸을 부지할 수 있는 도시와는 다르게, 시골엔 그런 일거리 자체가 별로 없으니 말이다.
그 때문에 멀린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지만, 용사는 그 말을 듣고도 코웃음 칠 뿐이었다.
“참나, 난 또 뭐라고. 고작 그런 얘기였어?”
“고작 그런 얘기라니, 나는 진지하게…”
멀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끊었다.
만인의 동경을 받는 용사라지만, 고작 25살.
게다가, 그 중 10년을 온전히 싸우는 데에만 바쳤으니, 용사는 몸만 컸지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이런 얘기를 하느니, 차라리 그 환상을 지켜주는 게 맞지 않을까.
“참나, 진짜 어이가 없어서…”
멀린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용사는 소년같이 쾌활한 웃음으로 노인을 비웃었다.
‘그 주근깨 쌈닭이 뭐? 짝을 찾아?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
“오늘 밤, 영광스러운 구원의 이야기를 들어 보시겠습니까?”
음유시인은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한껏 목청을 높여 노래를 불렀다. 보름 전, 용사가 마왕을 쓰러트린 신화적인 싸움을 재현하는 노래였다.
시인의 노랫말이 길어질수록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많아졌다.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전란, 그 와중 혜성같이 등장하여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용사의 이야기엔 그만한 힘이 있었으니까.
그 뿐만이라면 이 정도로 관심을 사진 못했겠지만, 현재 음유시인이 노래를 부르는 곳은 다름 아닌 용사의 고향이었다.
옆집 사는 개똥이가 제국의 말단 관리가 되었다더라 하는 조그마한 소식에도 온 마을이 잔치를 벌일 정도로 열광할 정도의 시골인데, 어찌 자랑스러운 동향 사람의 영웅담을 귀담아 듣지 않을 수 있을까.
“아아, 친구여. 앞으로 더 얼마나 많은 피가 흘러야 폭력이 사라질까. 오로지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네…”
음유시인의 노래는 슬슬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 노랫말 속의 용사는 마계군 제일의 강장이라 불리는 ‘희망의 파괴자’ 아룬도와의 결전을 앞에 두고 그동안 사랑을 나누었던 대륙 제일의 미녀, 미들랜드 왕가의 성녀와 헤어졌다. 죽음과 가장 가까운 자신에게 사랑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더 좋은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그리고, 용사는 전장에서 아룬도와 만나 특공을 벌인다. 약 이틀에 걸친 혈투의 여파로 산이 깎이고 대지가 신음했다.
감수성 좋은 몇몇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콧물을 훔치거나 눈가의 물기를 훔치곤 했다.
그러던 와중.
“그게 뭔 개소리…!”
울분이 잔뜩 섞인 고성이 음유시인의 노래를 끊었다. 노랫말에 몰입하고 있던 군중은 눈에 불을 켜고 고성방가를 한 무뢰한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좆될 뻔했네.’
무뢰한의 정체는 바로, 인식저해 마법을 몇 겹이나 걸어둔 용사였으니까.
귀향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여러모로 피곤해 질 게 뻔하니까 걸어둔 건데,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사실 그냥 소리를 안 질렀으면 되는 일이었지만…’
하지만 용사에게 있어 이는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노랫말의 시작부터 끝까지 거짓부렁이었으니 말이다.
사람들이 그토록 열광하던 하이라이트, 아룬도와 벌인 혈투와 성녀와의 사랑 이야기는 특히!
‘아룬도, 그 새끼는 좋겠네. 개좆밥인 새끼가 이런 호사도 누리고.’
세간 사람들은 아룬도를 두고 희망의 파괴자라 하지만, 용사는 그 이명을 ‘코찔찔이’로 바꿔야 한다고 파티원들에게 강력하게 주장했다.
싸우려고 찾아가면 제 부하도 버리고 튀는 바람에 이틀이나 시간을 허비하게 한 새끼한텐 그런 이명이 딱 어울렸으니까.
그리고, 성녀와의 사랑 이야기는…
‘걔가 대륙 제일의 미녀라니. 참나.’
뭐, 이쁘긴 했다. 피부는 투명할 정도로 하얗고, 커다란 눈은 흑요석을 박아넣은 듯 검게 빛났었으니까. 그런 점에선 제법 아이린이랑 닮기도 했고.
하지만 그 뿐이었다. 용사의 눈에는 아이린이 미세하게 더 이뻤다. 그 녀석의 얼굴에선 누구한테도 볼 수 없는 생기가 넘쳐흘렀으니까. 멀린은 눈이 삐었냐며 자신을 타박했지만, 미적 감각은 사람마다 다른 것 아닌가?
아무튼, 그걸 이유 삼아 차버렸다.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곱게 말해봤자 들어주질 않으니 일종의 극약처방인 샘이었다.
그랬더니 돌아온 답이…
-”아~ 그러니까 제가, 깡촌 촌ㄴ… 아니, 당신 소꿉친구보다 못생겨서 고백을 받아줄 수 없다 이거죠?”
-”드디어 말이 통하네.”
-”하하하… 핑계를 대도 말이 되는 걸 대던가. 그딴, 무성의한…”
-”핑계 아니고, 진짜 걔보다는 덜 이쁘다니까.”
-”죽여버리겠어.”
-”뭐?”
-”씨발 널 죽여버리겠다고!!!”
이젠 오래된 얘기임에도, 용사의 꿈엔 아직까지 허리에 맨 철퇴를 휘두르며 표독스러운 성녀의 모습이 나타나곤 했었다. 대륙을 돌아다니며 온갖 못 볼 꼴을 다 본 용사라지만, 항상 나긋한 모습만 보여주던 성녀가 보여주는 살의는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리 심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저런 반응이 튀어나온건지, 용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딜 가든 ‘대륙 제일의 미녀’라는 말을 들으니까 공주병이라도 생긴 것일까.
“으으.”
용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상념을 날렸다. 잡생각을 했기 때문인지 방금전에 느꼈던 분노도 슬슬 사그러들었다.
그래, 멀린이 말하지 않았었나. 앞으로 제국은 ‘마왕을 잡았다’는 치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자신을 우상화할 것이라고. 네가 생각하기엔 별 것 아닌 일도 수십, 수백배 부풀려 대중들에게 전파할 것이라며.
-”자네가 그런 공치사를 싫어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왠만하면 참게. 뭣도 모르는 이들의 말에 휘둘릴 필요는 없지 않나.”
멀린의 말을 떠올린 용사는 음유시인을 뒤로 하고 군중 사이를 빠져나왔다. 걸음을 옮길수록 사람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낯익으면서도 생소한 거리를 대신 채웠다.
“참… 많이 발전했네.”
돌부리 가득한 흙길엔 돌바닥이 깔려있고, 원래 밭이 있었던 곳엔 처음 보는 잡화점이랑 여관이 생겼다. 가게라고 해봤자 식당 하나밖에 없었던 깡촌이 이렇게나 발전한 것이다.
그럼에도, 용사의 고향은 옛 정취를 어느정도 간직하고 있었다. 고아를 키워주는 거니 감사한 줄 알라며 지독하게 자신을 부려먹었던 촌장의 이층 주택이나, 싸가지 없는 쌍둥이가 살았던 허름한 집.
그리고 거기서 시선을 조금 돌려보면, 아이린과 함께 뛰놀던 삐죽삐죽한 나무가 무성한 숲과 마을광장이랍시고 만들어 놓은 공터가 눈에 보인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이 마을의 유일한 식당인 ‘더스크’가 있다.
왜 식당 이름이 더스크냐면, 운영하는 부부의 성씨가 더스크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땐 진짜 커보였는데.’
다시 보니까 초라해보이기까지 한다. 나무로 만든 벽은 세월의 풍파를 못이긴건지 갈라진데다가 곳곳에 구멍이 뚫려있었고, 기억하는 것과는 달리 참으로 비좁았다. 이 정도면 작은 테이블 네 다섯개쯤 들어가면 다행인 수준이었다.
용사라는 직책을 가지고 온 대륙의 고급 식당을 가본 그에게 있어, 이 식당은 폐가나 다를바 없었다.
그럼에도 이 식당을 온 이유는 하나였다.
아이린의 성씨 또한 ‘더스크’였기 때문이다. 즉, 이 식당은 아이린의 집이기도 했다. 아이린을 찾으려면 여기만한 데가 없다는 뜻이었다.
‘매일같이 식당 일을 돕는 녀석이었으니까, 분명 여기 있을거야.’
용사는 문고리를 잡았다. 이대로 손잡이를 돌리면 문이 열릴것이다. 그런데…
‘뭐라고 이렇게 긴장되냐.’
차마 문을 열 수가 없었다. 이 허름한 나무 문이 마왕성의 정문보다도 무겁게 느껴졌다. 지난 10년간 쌓아온 연심의 무게.
용사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어차피 귀향했으니, 이 비좁은 마을에서 아이린을 수없이 마주칠 것 아닌가. 꼭 지금, 그것도 아이린의 집에서 봐야하나? 좀 더 자연스럽게 만나는 방법이 있을…
‘아니지.’
용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차일피일 미루다가는 ‘좀 더 자연스러운’ 기회가 찾아와봤자 쑥스러움을 못이겨 녀석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할 게 분명했으니까. 그러면 더 어색해질 뿐이라고, 멀린이 조언해주지 않았었나.
‘...아니, 그딴 것 보다는.’
그냥, 이 문 너머에 있을 아이린이 보고 싶었다. 이 순수한 감정을 타산적인 이유로 덧칠하고 싶지 않았다.
용사는 두 눈 딱 감고 손잡이를 돌렸다. 낡은 경첩 특유의 불쾌한 소리가 실내에 울렸다.
생경하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것은 이와 동시였다.
“손님. 정말, 정말로 죄송하지만 한 시간 뒤에 와주시겠어요? 준비해둔 스튜가 다 떨어져서 끓이는 중이거든요! 대신, 다시 오실 때 서비스 해드릴게요!”
“아……”
용사는 얼빵한 탄성을 내뱉었다.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왔다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멍청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그리워했던 풍경을 직접 마주한 용사에게 있어 그딴 것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더스크 아줌마가 만든 수제 향신료를 끓였을 때 나는 구수하고도 독특한 향기, 비좁은 면적 때문에 옹기종기 붙어 있는 원형 테이블과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그리고, 아이린.
‘.....10년이 지났는데 얼굴이 그대로네.’
노을을 품은 듯한 붉은 머릿결, 보석을 박아넣은 듯 한 커다란 눈, 우유를 연상케하는 하얀 피부.
그리고 콧등 주변에 희미한 주근깨가 박힌 것 까지, 용사가 기억하는 아이린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나마 다른 점을 찾자면 젖살이 빠져 얼굴형이 더 갸름해졌다는 것일까.
“저, 손님? 죄송하지만 한 시간 뒤에…”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답답한 것인지, 아이린은 했던 말을 반복하며 답을 재촉했다. 그 모습에 용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를 못 알아보나?’
처음엔 아이린을 만났다는 기쁨에 의아함을 못 느꼈지만, 곱씹어 보니 이상한 상황이었다.
어렸을 때 그토록 부대끼던 친구가, 10년 동안 사지에서 구르다 돌아왔는데 ‘손님’이라니? 마치 자신을 새빨간 타인 대하듯 하고 있지 않나!
예전처럼 장난을 치는 건가 싶었지만, 진심으로 답답해하는 저 태도를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얼굴에 흉터가 좀 생기긴 했어도, 못 알아볼 정돈가? 아니면 혹시, 내 얼굴을 까먹기라도 한 걸까? 10년이 지났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그래도 알아봐 주길 바랐는데…
“아.”
수많은 생각과 실망 끝에, 용사는 한 가지 정답에 도달했다.
그리고,몇 겹으로 둘러싼 인식저해 마법을 전부 해제했다.
너무나도 긴장했던 나머지, 마법을 걸고 있었다는 걸 잊어버렸던 것이다.
“... 어?”
즉각 반응이 터져나왔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낯선 외지인을 바라보던 아이린의 눈빛에 여러 감정이 담기기 시작한 것이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와 재회했다는 반가움, 사투를 벌이고 돌아온 전사를 향한 걱정, 그리고 마왕을 해치웠다는 용사에 대한 동경까지.
“너, 너너, 너, 너…!!!”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방금 전까지 능숙한 식당 주인의 아우라를 풍기던 아이린은, 고장난 골렘마냥 삐그덕거리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 모습을 본 용사는 피식 웃었다. 방금 전까지 긴장하고 있었던게 바보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덕분일까, 굳어서 잘 움직이지 않던 입이 자연스레 움직였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냐? 쌈닭.”
“...나를 쌈닭이라고 하는 거 보니까 진짜 너 맞네.”
용사의 퉁명스러운 말 때문일까, 아니면 오랜 세월 잊고 살았던 별명이 생각났기 때문일까?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이린이 질문을 퍼부었다.
“돌아오는건 이틀 뒤라고 들었는데 왜 벌써… 그리고, 방금 전엔 뭔 짓을 한 거야? 다른 사람 얼굴이었다가 갑자기…”
“거, 정신 사나운데 하나씩 물어보지?”
“...하여튼, 싸가지는 여전하네.”
아이린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25살이라곤 믿기지 않는 악동같은 웃음이었다.
“그러면, 제일 먼저 물어봤어야 했던 걸 물어볼게. 넌 잘 지냈어?”
“아…”
용사의 입에서 또다시 멍청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밝은 태양빛을 등지고 악동같이 웃는 저 모습이, 그에겐 너무나도 찬란하게 다가왔으니까.
“뭐, 잘 지냈…”
짧게 대답하려던 순간, 용사의 두뇌가 미친듯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마왕과의 전투에서 그러했듯이.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도 더.
‘이건… 어쩌면 기회 아닌가?’
자신이 인식저해 마법까지 써가며, 남들 몰래 아이린을 찾은 이유가 무엇인가?
지난 10년간 키워온사랑을 고백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용사가 세상을 떠돌면서 그동안 지켜본 바로는 고백이란 게 대뜸 내지른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나름의 분위기도 조성해야 하고, 그동안 쌓아온 감정도 있어야 했으니까. 정리하자면, 나름의 설계가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멀린도 그랬지, 고백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의례같은 거라고.’
그런데 10년 동안 떨어져 지내온 친구가 대뜸 좋아한다고 해봤자, 아이린이 이걸 받아줄 리가 있나! 적어도, 설계를 위한 최소한의 시간은 벌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근황 이야기는 시간을 벌어다 줄 묘수였다. 당장, 음유시인들이 경전처럼 떠받들어 모시며 반나절을 읊는 것이 바로 ‘용사의 근황 이야기’ 아닌가.
몇 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 생각을 마친 용사는 말을 주워담았다.
“음… 그, 그게.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고 해야하나, 워낙 많은 일이 있어서. 뭐, 잘 지냈냐고 하면 잘 지냈고 아니라면 아닌데…”
용사는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말재간을 저주했다. 분명 고심을 거듭해서 내뱉는 말인데도 참으로 어설프게만 느껴지니 말이다. 자신조차도 이렇게 느낄진데, 아이린은 뭐라고 생각할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하지만, 이미 말을 내뱉었으니 끝은 맺어야 할 것 아닌가. 용사는 기나긴 중언부언 끝에 하고 싶은 말을 토해냈다.
“그, 러니까. 시간 좀 내줄 수 있냐 이말이지. 간만에 만났는데, 얘기 좀 하자.”
“......”
이를 이상하게 쳐다보던 아이린은 피식 웃었다.
“뭐 얼마나 대단한 얘길 하려고… 알겠어. 근데 당장은 식당 일이 있어서 좀 그런데.”
“그러면 뭐, 내일이라도…”
“굳이 그럴 필요 있어? 식당 문 닫고 나서 들어줄게. 그럼 됐지?”
용사는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
노을이 산등성이 너머로 넘어가고 슬슬 하늘이 어둑해지는 시간.
그동안 하염없이 마을 한 귀퉁이에서 시간을 죽이던 용사가 식당 더스크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왔어?”
용사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스튜와 맥주 한 잔을 대령해놓고, 촛불 하나를 킨 채 턱을 괴고 자신을 쳐다보는 아이린의 모습은 차마 마주하기 힘든 자극이었으니 말이다.
마치, 바깥 일 하다 돌아온 남편을 위해 저녁을 차려놓은 아내의 모습 아닌가. 용사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러다가, 이대로 있으면 어색해질 거란 생각에 입을 열었다. 지금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했다.
“그, 뭐. 뭐 이런 것 까지 준비하고 그러냐.”
용사는 곧바로 자신의 생각을 후회했다.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라 하였는데 지금 상황에 딱 들어맞는 말 아닌가.
이런 호구 등신 새끼. 나를 위해 상까지 차려준 친구한테 이게 할 말이냐? 분명, 머릿속에선 이것보다 더 멋있는 말들이 많이 생각났는데 왜 이딴 말 밖에 안 나오는거지?
“뭐, 용사님한테 듣는 모험담이잖아? 맨입으로 듣기엔 좀 미안해서.”
다행히 그리 기분이 상하진 않은 건지, 아이린은 털털하게 수저를 내밀었다.
“한입 해.”
“뭐, 그런거라면야…”
용사는 붉은 스튜를 입에 가져갔다. 어딘지 모르게 몸이 후끈해지는 맛, 비강에서 터져나오는 특제 향신료의 향기… 10년 동안 그리워했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서 그런 것일까. 어딘지 모르게 부족하게 느껴졌다. 분명, 10년 전에 먹었던 스튜가 맞는데?
“맛이 좀 이상한가봐?”
“아니, 뭐 그런건 아닌데.”
“아니긴, 얼굴에 다 써져있구만. 맛 없다고.”
아이린은 수저로 스튜를 휘저었다. 그 손짓 하나에서 그리움이 절절하게 묻어나왔다.
“참 이상하단 말이야. 엄마가 하던 그대로 따라하는데 왜 그 맛이 안날까?”
“물어보지 그러냐, 너, 예전엔 아주머니한테 요리 가르쳐달라고 그렇게 귀찮게 굴었잖아.”
“그러고 싶은데, 이젠 그럴 수가 없네.”
용사는 아이린의 손짓에 담긴 그리움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야 깨달았다.
“혹시…”
“돌아가셨어. 5년 전에.”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나니, 아빠도 두달 뒤에 눈을 감았고.
그렇게 금술이 좋더니, 저승까지 같이 갈 건 또 뭐냐며, 아이린은 쓰게 웃었다.
“왜? 그렇게 건강하셨는데, 무슨 일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두분 다 나이가 좀 있었잖아? 그래서 뭐…”
“그, 미안하다.”
“뭐가?”
“그런 것도 모르고, 이상한 소릴…”
“에이, 뭐, 너무 그러지 마. 네가 어떻게 알았겠어? 마계에 들어가서 싸웠는데. 그리고, 이렇게 혼란스러웠던 시대에서 평화롭게 살다가 가셨으니… 호상이지 뭐.”
아이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으나, 목소리엔 미약한 쓸쓸함이 담겨있었다. 용사는 그 분위기에 눌려 입을 열지 못했다. 무슨 말이라도 실례가 될 것 같았으니까.
이 침묵을 깨는 건 아이린의 몫이었다.
“아무튼, 얘기할 게 많다며? 어디 한 번 들어보자. 사실, 진짜 궁금했거든. 네가… 그, 멀린이라고 했나? 그 이상한 할아버지 한테 끌려가서 어떻게 지냈는지.”
“하루하루가 아주 개지랄맞았지.”
아이린이 물꼬를 터주자, 용사의 이야기 보따리가 풀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에 더해, 그녀가 이야기를 듣는 태도도 용사의 입을 풀어주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진짜? 그랬던 거라고? 음유시인 놈들, 새빨간 구라쟁이였네.”
“미친…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와, 용사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 나였으면 바로 도망쳤을거야.”
그녀가 내뱉는 풍부한 리액션은 용사에게 있어 마약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렇다보니, 처음엔 담백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던 그의 모습이 점차 변해갔다.
용사는 손짓 발짓을 해가며 자신이 겪었던 난관을 신명나게 해설했고, 그가 그토록 싫어하던 음유시인처럼 이야기에 과장을 붙여가며 모험담을 부풀렸다. 자신의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은 허풍에 더욱 불을 지폈다.
“그래가지고 아룬도, 그 새끼가…”
한참 신나게 이야기 하던 용사가 입을 다물었다.
아이린 너머로 보이던 창문 너머의 풍경이, 주홍색에서 칠흑으로 물들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어?’
고백을 하기 위한 분위기도 조성 못했고, 감정도 전달하지도 못한 채 개폼 잡다가 시간을 이렇게 날려먹은 꼴이라니, 쪽팔리기 그지 없었다.
‘여자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게 무용담 얘기하는 용병이라던데.’
그게 사실이라면, 고백하기도 전부터 비호감을 잔뜩 쌓은 꼴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조졌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미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뭔가를 해야했다.
‘그런데 뭐를?’
용사는 머리를 팽팽 굴렸지만 별다른 해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아룬도, 그 자식이 마을 하나를 인질로 잡아서… 그 다음엔 어떻게 됐는데?”
심지어, 아이린이 제 마음도 모르고 이야기를 독촉하니 용사로서는 아주 죽을 맛이었다.
이 두 요소가 합쳐져 고장나버린 용사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얼빵한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어… 그런데, 너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응?”
“너무 내 얘기만 한 거 아닌가 싶어서.”
“그게 뭔 소리야? 애초에 네가 썰 풀어준다고 부른 거잖아.”
“아.”
대답의 여지가 없는 정론이었다. 용사는 또다시 고장나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건… 그렇긴 하지만, 얘기 하다 보니 네 얘기도 궁금하고, 마을이 발전 된 것도 궁금하고? 그래서…”
“내가 사는 거야 하루하루 똑같지 뭐, 아. 그러고 보니 최근에 이상한 일이 하나 있긴 했다.”
“이상한 일? 뭔데?”
“후드 뒤집어 쓴 여자가 와서 내 얼굴을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내가 저것보다 못생겼다고? 진짜 죽여버릴거야…’ 하면서 부들거리다가 가던데.”
“.......”
척봐도 누군지 알 것 같아 현기증이 몰려왔다. 하지만, 아이린한테 후드 쓴 여자의 정체를 알려줘봤자 괜히 불안하기만 할 터.
“그런 거 말고, 그냥 네 얘기를 듣고 싶은거야.”
“진짜 재미 없을텐데, 그래도 듣고 싶다면야.”
아이린은 맥주를 홀짝이며 목을 축였다. 시큰둥한 대답과는 달리,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할 정비를 마친 것이다.
“나야 뭐, 엄마 아빠 도와서 가게 운영하고. 두 분이 돌아가신 뒤론 혼자서 가게 운영하고…이게 쉽게 봤는데 보통 일이 아니더라? 혼자서 식재 사려고 이웃 마을까지 보따리 들고 찾아가랴, 식재 손질하랴… 그래도, 2년 전쯤부턴 사정이 좀 나아졌어.”
“음? 왜?”
“너 덕분이지.”
용사의 무용담이 하나씩 늘어갈수록, 이에 비례해 ‘용사의 고향’에 대한 관심도 커져갔다. 관광을 오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고, 왕국 후미진 곳에 있어서 방치되고 있었던 마을에 관리가 오는 일도 늘어났다.
그 덕분에 돌바닥으로 길을 포장하고, 못 보던 가게가 하나 하나 생겨났다는것이 아이린의 얘기였다.
“이제 마을에 상단도 들어온다? 덕분에 식재 사려고 빨빨거릴 필요가 없어졌어. 아,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아이린은 주방에 들어가 무언가를 뒤적거리더니, 조그마한 액자를 꺼내 상 위에 올려뒀다.
“상단에 그림 그리는 사람이 한 명 있더라고, 방랑 미술가라 했었나? 인연이다 싶어서 나 좀 그려달라 했더니 진짜 예쁘게 그려주더라. 뭐, 돈을 좀 비싸게 받아먹긴 했지만!”
아이린은 해맑게 웃으며 용사 앞에 액자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용사의 표정은 이와 정 반대로 썩어들어갔다.
다소곳이 앉아있는 아이린 옆에 왼팔이 잘려나가고, 얼굴 반쪽에 화상 자국이 있는 흉악한 놈팽이가 서있었으니까.
“...누구야? 이 사람은.”
경계심을 가득 담은채, 남자를 가리킨 용사의 질문에.
“내 남편.”
아이린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
순간, 용사의 모든 움직임이 멈추었다.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차마 다시 한 번 말해달라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또다시 ‘남편’이라는 소리가 아이린의 입에서 나왔다간, 마력 제어에 실패해 이 마을을 통째로 날려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남편… 이라고?’
용사는 참담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마른 세수를 했다. 얼굴에 손을 한번 문댈 때 마다 ‘25살이면 짝을 안 찾았을 리 없다’며 호언장담했던 멀린의 말이 귓가를 때렸다.
‘아니, 이게 무슨, 이게… 말도 안 되는.’
용사는 그 말에 코웃음쳤었다.
누가 자신을 놀린다 싶으면 곧바로 달려가서 코뼈를 아작내고, 또래 친구들을 보며 ‘깡촌이라 그런가, 죄다 꼬맹이들 밖에 없다니까.’ 코웃음을 흘리던 쌈닭 아이린한테 남편이 생기는 것 보단,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게 더 빠를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한동안 절망에서 허우적 거리던 용사는 차츰 총기를 되찾았다.
만약 아이린이 세상에 떠밀려서, 이런 깡촌에서 혼자 사는 게 힘들어서 아무나 붙잡고 결혼한 것이라면… 자신에겐 가능성이 차고 넘쳤다는 계산이 섰기 때문이다.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전란에 종지부를 찍은 예언의 용사만큼, 재력과 권력이 있는 남자가 이런 마을에 있을 리 없을테니까.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너한테 남편도 다 생기고.”
용사는 태연을 가장한 채 질문을 퍼부었다.
“그런데, 이렇게 생긴 녀석이 우리 마을에 있었나? 한스랑 좀 닮은 것 같긴 한데…”
“야, 내가 미쳤다고 한스같은 코찔찔이랑 결혼하겠어? 벌레 하나 못 잡아서 나한테 잡아달라고 매달리던 놈인데.”
“그러면… 킬리안인가?”
“걔는 이 마을 뜬 지 오래야. 용병이 되겠답시고 떠났는데, 아직 살아 있으려나?”
용사는 자연스레 농담을 섞어가며, 이 마을 출신 중 아이린 또래의 남자 이름을 하나 하나 전부 불렀다. 하지만, 그 모든 이름이 나왔음에도 아이린은 한결같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야? 그러면 누군데 대체?”
“이안이야. 이 사람 이름.”
“이안?”
이 마을에 이안이라는 놈이 있었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딱히 떠오르는 얼굴은 없었다.
그 아리송한 표정을 읽은 것일까. 아이린이 싱긋 웃었다.
“네가 모르는 게 당연하지, 이 사람. 외지인이거든. 4년 전에 이 마을에 온.”
“......”
용사의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다. 누군지도 모를 외지인 놈팽이한테 아이린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었다.
거기에 불을 지핀 것이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아이린의 눈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부모님을 잃은 쓸쓸함을 내비치던 눈동자가, ‘남편’이라고 말하자마자 반짝이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감정을 아이린 앞에서 내비칠 순 없는 노릇. 용사는 심호흡을 하며 평정을 유지하려 했다.
“왕국군 장교로 일했었는데, 무슨 전쟁에 나갔다가 부상 때문에 전역했다고 하더라. 은퇴하고 농사나 지을까 하고 이 마을에 정착한거고.”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아이린은 생기 가득한 눈동자를 한 채 말을 이어갔다.
“왜, 이 사람이 좀… 험악하게 생겼잖아? 처음엔 너무 무서웠거든, 그런데 매일 같이 식당에 찾아오니까 얼굴을 안 볼 수도 없고… 그래서 본 채 만 채 하고 스튜만 내줬었는데.”
“...그런데?”
“한 보름쯤 지나니까, 대뜸 그런 말을 하는거야. 힘들면 좀 쉬는게 어떠냐고. 나, 그 말 듣고 깜짝 놀랐다? 진짜로 힘들긴 했었거든.”
그 뒤에 이어진 아이린의 말은 용사의 가슴을 찢어놓았다.
살인적인 노동량이나, 자신을 자빠뜨리려는 생각밖에 없는 놈들의 개수작은 그나마 참아줄 만 했지만, 부모님의 빈자리가 주는 상실감만큼은 시간이 지나도 매워지질 않아서 가끔씩 소리 죽여 울곤 했었다고.
게다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면 남자들의 개수작이 심해질 게 뻔하니 슬픈 내색조차 내지 못한다는게 너무나 서러웠다고.
‘내가 있었다면…’
아이린한테 수작 부리는 놈들을 반으로 접어줬을 텐데.
참으로 쓸데없는 생각이란 건 용사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마왕을 죽이겠다고 결의한 건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으니까. 하지만, 후회가 남는 건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그렇게, 용사가 회한에 잠겨 자신의 어리석음을 곱씹고 있는 와중에도 아이린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그 사람을 점점 살펴보기 시작한 건. 참 딱해보이더라, 외팔로 서툴게 괭이질 하는게 안쓰러웠어. 그래서 가끔씩 농사를 거들기도 했었고. 그렇게 같이 붙어 있는 시간이 늘어나니까, 안 보이던 부분이 보이더라고.”
아이린의 말에 따르자면, 이안이라는 퇴역 장교는 제법 상냥한 사람이었다.
자신을 괴물이라 부르며 돌을 던지는 개구쟁이 아이들에게 장단을 맞춰주며 놀아주거나, 힘 쓸 일이 생기면 솔선수범해서 앞으로 나서는 등. 행적만 보면 자애로운 사제가 따로 없었다.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 점점 친해졌는데, 갑자기 궁금한거야. 내가 힘들어하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그래서, 물어봤지.”
“그랬더니?”
“유심히 살펴보니 힘들어하는게 눈에 보이더라, 이렇게 말했어. 그래서 내가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봤냐고 물어봤거든?”
그때를 회상하니 기분이 좋은 것일까, 아이린의 입꼬리가 잔뜩 올라갔다. 용사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천진하면서도 생명력이 넘치는 찬란한 웃음이었다. 그는 아이린의 저 웃음을 사랑했다. 지난 10년간 저 표정 하나 덕분에 싸워나갈 용기를 얻을 정도로.
그런데, 10년의 세월을 지나 저 웃음을 다시 봤을 때 느껴지는 건 입안에서 맴도는 쓴 맛 뿐이었다. 고작, 저 표정이 자신을 향한 것 아니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엄청 쑥스러워 하면서, 아름다워서 저도 모르게 시선이 갔다고. 그렇게 말하는 거 있지 글쎄?! 생긴 건 무슨 생고기 뜯어먹을 상남자처럼 생겨가지곤, 진짜 귀엽지 않아?”
“......”
“그래서, 그럴거면 남 몰래 쳐다보지 말고 사귀자고 했어. 그 뒤로 얼마 안 가서 결혼했고.”
“그러, 냐.”
용사의 목소리에 기력이라곤 한 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가슴 속에 자리 잡은 어마어마한 탈력감 때문이었다.
‘고작…’
일이 힘들면 좀 쉬는 게 어떠냐는 한 마디와, 당신이 아름답다는 한 마디 가지고 아이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나는, 이 녀석을 위해 온갖 사지를 헤집고 다니면서 마왕을 죽였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은 안다. 마왕을 죽이겠다고 결의를 한 것은 다름아닌 그 자신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리고, 그 감정은 곧바로 태도가 되어 나타났다.
“그런데, 그렇게 상냥한 사람이 왜 식당엔 코빼기도 안 보이냐? 다 잡은 물고기니까 너한텐 신경 안 써도 된다 이거야?”
“......”
“군인 나부랭이들이 다 그렇지 뭐, 칼 쓰는 것 밖에 몰라서 그런가? 집안에선 아내 윽박지르는 것 밖에 못하는…”
“뭐,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긴 뭐가…!”
“죽었거든, 1년 전에.”
“......”
용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토록 반짝이던 아이린의 눈동자가, 죽었다는 한마디를 내뱉은 순간 칙칙하게 물들었으니.
“어디서 흘러들어온 건진 모르겠는데, 들개 떼가 마을 밭을 죄다 헤집어 놔서 그 개새끼들 쫓아내겠답시고 칼 한 자루 들고 갔다가… 팔을 물려서 돌아왔는데, 그 뒤로 며칠 시름시름 앓다가 눈을 감더라. 촌장님 말로는 패혈증이라나.”
심해를 연상케하는 칙칙한 눈동자에서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그동안 꾹꾹 눌러담아왔던 마음이 눈물의 형태로 아이린의 볼을 타고 내려와, 원탁을 적셨다.
“...그러게 남들 도울 시간에 자기 몸부터 챙기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바보 같이.”
“.......”
용사는 이번에도 입을 다물었다.
아이린의 부모님 얘기를 들었을 때 처럼 그녀의 분위기에 눌려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이린이 이렇게 슬퍼하는데…’
용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아이린을 위로해야 한다는 것도, 제 말실수를 주워담아야 한다는 것도 까먹고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그녀의 남편이 죽어서 ‘다행’이라고.
곧바로 그 생각을 지워버리긴 했지만, 단 한 순간이라도 그녀의 불행에 안도감을 느꼈다는 사실이 용사를 무겁게 짓눌렀다.
“하아… 갑자기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했네. 아무튼.”
그동안 감정을 억누른 것인지, 물기가 있었던 아이린의 목소리가 다시 건조해졌다.
촉촉했던 눈가도 어느새 메말라있었다.
“그 뒤로는 뭐… 남편 묻어주자 마자 별 시덥잖은 놈팽이들이 자기랑 결혼하자고 찾아오더라. 나 혼자 살기는 힘드니까 아무나 붙잡고 결혼할까 싶었는데, 차마 그럴수가 없더라. 누구를 봐도 남편 얼굴이 떠오르는 거 있지?”
그러니까, 미안해.
용사는 갑작스런 사과에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누군가가 등 뒤에서 칼을 겨누고 있는 것 같은,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불안한 감각.
“그래서, 네 마음도 받아줄 수 없을 것 같아. 난 그냥, 평생 혼자 살 처지인거야.”
그 말과 함께 무언가가 시원하게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실제로 깨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아마 이 소리는 용사의 귀에만 울린 환청일 것이다. 10년 동안 키워온 연심이 깨져버린 소리.
그 뒤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지금 뭔 말을 들은거지?’
미안하다. 네 마음도 받아줄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은 고백을 하기도 전에 차여버린 거다.
이를 인지하고 나니 손이 벌벌 떨릴 정도의 거대한 울분이 들끓었다. 그 이안이라는 놈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길레,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이런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건 기회이기도 했다.
‘못 알아들은 척, 그게 무슨 소리냐. 공주병이라도 걸렸느냐는 한 마디만 하면.’
이 어색한 분위기를 흘려보낼 수 있다. 그러면 아이린은 무안하게 웃겠지. 그래, 내가 잠깐 헤까닥 했나보다. 하는 농담을 하면서.
아이린의 성격으로 유추해보건데, 이건 녀석 나름의 배려가 섞인 거절이었다. 분위기가 더 민망해지기 전, 여기서 이야기를 그만하자는.
그렇다면 그 배려를 받는 게 맞겠지.
그리 생각하고 입을 열려는 찰나.
“...언제부터 알았어?”
그보다 먼저 가슴속에 있는 말이 튀어나왔다.
용사의 이지는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어했으나, 용사의 본능이 이를 거부한 것이다.
“처음부터 뭔가 그래보이더라. 표정이 비장한게. 척 봐도 고백공격 하려는 것 같았어.”
“...그러냐.”
용사는 아무 말 없이 맥주를 들이켰다. 커다란 잔에 가득 차있었던 맥주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그는, 이 짧은 문답을 통해 깨달아 버린 것이다.
쓸쓸함만이 자리했던 아이린의 눈에서 그나마 생기가 감돌았던 건, 사별한 남편을 추억할 때 뿐이었다는 걸.
지금도 그녀의 눈가는 메말라있다는 것을.
‘고백공격이라.’
참으로 정확한 말이었다. 지금의 그녀에게 고백을 하는 건 폭력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 세상에 무한한 것은 없다. 인간의 감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용사라고 칭송받는 자신조차 언젠가부터 동료의 죽음에 눈길을 돌리고, 그 시체를 무덤덤한척 밟고 지나가며 승리로 향하는 길을 걷지 않았던가. 누군가의 죽음을 계속 눈에 세기면, 마왕을 죽이기 전에 마음이 죽어버릴 것 같아서.
다만, 아이린은 한 사람의 죽음을 겪자마자 마음이 죽어버린 것 뿐이다. 필시, 사별한 남편의 자리가 그만큼 거대했던 것이겠지.
그녀에게 고백을 하는 건, 비유하자면 메마른 우물에 두레박을 내리고 물을 퍼올리려고 하는 꼴이었다. 누군가는 물을 줄 수 없음에 고통스러워하고, 누군가는 애타게 갈증을 부르짖을 수 밖에 없는, 파국이 예정된 행위였다.
‘그나마, 희망이 있다고 한다면…’
시간이 흘러 언젠가 아이린의 마음이 다시 차오르는 날이 오는 것 뿐.
용사는 그 가냘픈 희망을 붙잡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 앞으론 여기서 살 생각이거든.”
“...왜? 너라면 어느 왕국에서건 떵떵거리면서 잘 살 것 같은데.”
“개같긴 해도, 여러 추억이 있는 곳이니까. 그리고, 사람 북적거리는 거 싫기도 하고. 아무튼…”
용사는 버릇처럼 잔을 쥐었다가 텅 비어버린 잔을 보고 혀를 찼다. 이런 꼴사나운 말을 하려면 술기운이 더 필요했다. 이런 희멀건 맥주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나. 용사는 마른침을 거듭 삼킨 후에 말을 이어갔다.
“만약, 견딜 수 없이 쓸쓸하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 최대한 도와줄테니까. 친구 좋다는 게 뭐냐?”
“걱정해줘서 고마운데, 이젠 괜찮아.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용사가 한도까지 용기를 쥐어 짜낸 제안은 아이린의 털털한 웃음 한 방에 격침되었다.
“그리고 너, 그런 말 앵간하면 하지 마. 오해 사기 딱 좋아.”
“...오해?”
“나야, 네 성격 아니까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니라는 거 아는데… ‘시간 지나서 전 남편을 잊게 되면 나한테 와라’ 처럼 들린단 말이야.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놈들이 수두룩 했는데, 그때마다 기분이 엄청 나쁘더라고. 지가 뭔데 그이를 잊으라 마라야? 참나.”
끼기긱-
용사는 귀가 새빨개진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린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더 이상 있다간, 자신의 추악한 마음이 전부 까발려질 것 같아서.
“가게?”
“응.”
“좀 더 있다가 가지, 왜.”
“...이렇게 늦었는데, 슬슬 가야지.”
어느새 달이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한 밤중이라는 말보단 새벽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식재를 다듬어야 하는 아이린을 계속 붙잡아 두는 것도 못할 짓이라고, 용사는 그렇게 합리화를 끝마치며 문고리를 잡았다.
“...하아.”
하지만, 차마 문을 열기가 어려웠다.
이 식당을 나서면 두 번 다신 아이린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 같아, 그렇게 한참 문고리만 매만지던 용사는 중얼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저기, 만약에. 진짜 만약에 말이야.”
“응?”
“내가 마을을 떠나기 전에, 마왕을 잡고 올테니까 너한테 기다려달라고 했으면… 뭔가, 조금이라도 달라졌을까?”
눈에 보일 정도로 뚝뚝 흘러내리는 미련.
그 감정을 느낀 것인지, 아이린은 외마디 탄성을 내뱉으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용사와 똑같이 미련이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글쎄, 아마. 그랬을 수도.”
“...그러냐.”
그 대답에서 무언가를 느낀 것일까. 용사는 그제야 가게 밖으로 나섰다.
아이린은 앉은 자리에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시간이 지나서 식어버린 스튜를 숟가락으로 휘적였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용사의 모습이 완전히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자, 아이린은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뻔하지 뭐. 마왕 죽이고 올 때 까지 기다려 달라니 양심에 찔렸겠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그 때 만큼은 양심을 접어두고, 기다려달라고 하지 그랬어.
“그러면 이렇게 슬플 일도 없었을텐데.”
아이린은 하염없이 스튜를 휘적거렸다.
10년의 세월이 지나 식어버린 자신의 감정처럼, 온기를 잃은 스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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