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 싸움이 끝나면 고백하려고.”

“커흡.”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제 옆에 있는 청년이 뜬금없이 내뱉은 한 마디에 놀란 나머지 마시던 포도주를 허공에 흩뿌렸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이 10년동안 지났음에도 청년이 감정을 내비친 적이 얼마 없기 때문이었다.

그 10년이 그냥 10년이던가?

예언에 따라 무려 수백 년간 끊긴 적 없었던 마물과 인류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용자로 간택되어, 끊임 없이 사투를 벌여야 했던 10년이다.

그런데도 이 청년, 용사는 얼굴에 별 다른 감정 한번 내비친 적 없었다.

마왕을 보필하던 사천왕을 차례차례 쓰러트렸을 때도, 한 번도 함락된 적 없는 마계의 요새를 공략하고 인류 처음으로 마계에 발을 내딛었을 때도 용사는 건조한 목소리로 다음 목적지는 어디냐는 질문만 남겼었다.

그나마 감정을 내비쳤을 때라고 한다면...

 

“왜 그래? 영감. 내가 못할 말이라도 했어?”

 

퉁명스러운 용사의 목소리에 노인의 상념이 끊겼다.

 

“아니… 좀 놀라워서 말일세. 마물들을 도륙내는 것 말곤 만사에 관심이 없었던 자네가 사랑 얘기를 꺼낸다는 게.”

“남들이 들으면 내가 무슨 미친 놈인줄 알겠네. 대현자 멀린 나으리께서 시키는 대로 한 것 뿐인데.”

“자네가 언제 내 말을 들었다고? 하여튼 이럴때만…”

 

멀린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다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사랑 얘기에 이어서 농담까지 해? 자네, 갑자기 왜 그러나?”

“내일로 이 개고생도 끝이어서 그런가? 기분이 좀 싱숭생숭 하네.”

 

용사는 시선을 돌려 저 멀리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세워진 한 고성을 바라보았다.

시선에 담는 것 조차 허용하지 않는 불길함을 품고 있는, 모든 마물들의 정점인 마왕이 기거하는 마왕성을.

 

“저기 앉아있는 새끼만 족치면, 이 싸움도 끝나는 거잖아.”

“그게 그렇게 간단히 말할 일이 아닌…”

 

사실 그 점은 용사도 잘 알고 있겠지, 지난 10년간 마물들과의 사투에서 최선두에서 싸웠으니.

멀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고백이라니? 누구한테?”

 

용사는 멋쩍은 듯 목덜미를 긁적이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 아이린한테.”

“아이린이라면… 자네가 말한 적 있던 그 처자 말인가?”

 

방금 전 용사의 말 때문에 끊겼던 상념이 자연스레 이어졌다.

용사가 감정을 내비친 몇 안되는 때 중 하나가, 제 고향에서 소꿉친구로 지냈던 아이린에 대해 이야기 했었을 때니까.

분명, 용사가 어렸을 적 친구들과 야산을 쏘다니다 들개 때의 습격을 받았을 때 처음으로 잠재된 힘을 개방하고 들개들을 물리쳤더니 ‘괴이한 힘을 쓴다’는 이유로 마녀의 아들 취급 받아 화형 당하기 직전까지 몰렸다가…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서 목숨을 구해줬다던 그?”

“지나가듯이 한 얘긴데 기억하고 있네?”

 

용사에게 있어선 분명 끔찍한 기억일텐데도, 용사의 눈은 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광기 어린 목소리로 저를 불태우라고 말하던 어른들의 모습보단, 아래턱을 벌벌 떨며 필사적으로 소리치던 아이린의 뒷모습이 더 기억에 남아있었으니까.

 

“사실, 용사같은 거 하기 싫었거든. 내가 인류의 희망이라느니, 예언 속의 용사라느니 뭐니 해봤자 별 실감도 안 나고.”

“그런 것 치곤, 되게 순순히 따라오지 않았나?”

 

용사는 멋쩍다는 듯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건… 아이린 때문에 그런거고.”

“음?”

“마왕같은게 설치고 다니면, 그 녀석이 불안해 할 거 아니야.”

“......”

 

멀린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니까, 오직 한 소녀만을 위해 이토록 먼 길을 나섰다는 것 아닌가? 참으로 지고지순한 사랑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 음유시인이 있었다면 곧바로 창작욕이 불타올라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집필할 정도로.

 

“허어…”

 

그 때문에, 멀린은 탄식을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왜 갑자기 한숨이야?”

“그게…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하루 이틀 같이 다녀보나. 할 말 있으면 그냥 하지?”

“...내 말을 듣고 귀향길에 오르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말함세.”

“뭔… 탈주할거면 진즉 했지, 사람을 뭘로 보고 그딴 소리를 하는거야? 대체 뭔 말을 하려고?”

“하아…”

 

이대로 두었다간 마왕과 싸우기 직전까지 들들 볶을 기세였기에, 멀린은 한숨으로 삼켰던 말을 어렵게 토해냈다.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이네만, 출정하기 전에 그 처자한테 무슨 말이라도 해둔 게 있나?”

“뭔 말?”

“내가 이 싸움을 끝내고 오면 결혼하자거나, 뭐 그런 약속 같은 것 말이야.”

“어떻게 그래? 내가 마왕을 언제 족칠 줄 알고?”

“그렇구만…”

 

멀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꿉친구를 위해 마왕을 쓰러트린다는 말도 안 되는 일을 실행에 옮긴 순정남이 ‘내가 언제 돌아올 진 모르겠지만 돌아오면 나랑 사귀어 줄래?’ 같은 잔인한 말을 할 리 없지 않나.

 

“내가 끌고와 놓고서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자네가 나를 따라온 이유가 순전히 그 처자 때문이라면… 오히려, 그 처자 옆에 붙어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음?”

 

용사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멀린은 그 반응에 답답함을 못이기고 미간을 매만졌다.

 

“자네가 싸워온 세월이 자그마치 10년일세.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그 처자는 자네와 동갑 아니었던가?”

“그렇지?”

“그럼 25살이라는 이야긴데, 그 나이까지 짝을 안 찾았을 리 없지 않나!”

 

25살이라면 애가 있어도 이상할 나이가 아니다.

특히, 용사가 살던 곳은 시골이었으니 왕도권에서 사는 처자들보다 더욱 빨리 결혼했을 확률이 높았다.

일거리라도 구해서 홀몸을 부지할 수 있는 도시와는 다르게, 시골엔 그런 일거리 자체가 별로 없으니 말이다.

그 때문에 멀린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지만, 용사는 그 말을 듣고도 코웃음 칠 뿐이었다.

 

“참나, 난 또 뭐라고. 고작 그런 얘기였어?”

“고작 그런 얘기라니, 나는 진지하게…”

 

멀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끊었다.

만인의 동경을 받는 용사라지만, 고작 25살.

게다가, 그 중 10년을 온전히 싸우는 데에만 바쳤으니, 용사는 몸만 컸지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이런 얘기를 하느니, 차라리 그 환상을 지켜주는 게 맞지 않을까.

 

“참나, 진짜 어이가 없어서…”

 

멀린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용사는 소년같이 쾌활한 웃음으로 노인을 비웃었다.

 

‘그 주근깨 쌈닭이 뭐? 짝을 찾아?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

 

“오늘 밤, 영광스러운 구원의 이야기를 들어 보시겠습니까?”

 

음유시인은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한껏 목청을 높여 노래를 불렀다. 보름 전, 용사가 마왕을 쓰러트린 신화적인 싸움을 재현하는 노래였다.

시인의 노랫말이 길어질수록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많아졌다.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전란, 그 와중 혜성같이 등장하여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용사의 이야기엔 그만한 힘이 있었으니까.

그 뿐만이라면 이 정도로 관심을 사진 못했겠지만, 현재 음유시인이 노래를 부르는 곳은 다름 아닌 용사의 고향이었다.

옆집 사는 개똥이가 제국의 말단 관리가 되었다더라 하는 조그마한 소식에도 온 마을이 잔치를 벌일 정도로 열광할 정도의 시골인데, 어찌 자랑스러운 동향 사람의 영웅담을 귀담아 듣지 않을 수 있을까.

 

“아아, 친구여. 앞으로 더 얼마나 많은 피가 흘러야 폭력이 사라질까. 오로지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네…”

 

음유시인의 노래는 슬슬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 노랫말 속의 용사는 마계군 제일의 강장이라 불리는 ‘희망의 파괴자’ 아룬도와의 결전을 앞에 두고 그동안 사랑을 나누었던 대륙 제일의 미녀, 미들랜드 왕가의 성녀와 헤어졌다. 죽음과 가장 가까운 자신에게 사랑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더 좋은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그리고, 용사는 전장에서 아룬도와 만나 특공을 벌인다. 약 이틀에 걸친 혈투의 여파로 산이 깎이고 대지가 신음했다.

감수성 좋은 몇몇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콧물을 훔치거나 눈가의 물기를 훔치곤 했다.

그러던 와중.

 

“그게 뭔 개소리…!”

 

울분이 잔뜩 섞인 고성이 음유시인의 노래를 끊었다. 노랫말에 몰입하고 있던 군중은 눈에 불을 켜고 고성방가를 한 무뢰한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좆될 뻔했네.’

 

무뢰한의 정체는 바로, 인식저해 마법을 몇 겹이나 걸어둔 용사였으니까.

귀향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여러모로 피곤해 질 게 뻔하니까 걸어둔 건데,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사실 그냥 소리를 안 질렀으면 되는 일이었지만…’

 

하지만 용사에게 있어 이는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노랫말의 시작부터 끝까지 거짓부렁이었으니 말이다.

사람들이 그토록 열광하던 하이라이트, 아룬도와 벌인 혈투와 성녀와의 사랑 이야기는 특히!

 

‘아룬도, 그 새끼는 좋겠네. 개좆밥인 새끼가 이런 호사도 누리고.’

 

세간 사람들은 아룬도를 두고 희망의 파괴자라 하지만, 용사는 그 이명을 ‘코찔찔이’로 바꿔야 한다고 파티원들에게 강력하게 주장했다.

싸우려고 찾아가면 제 부하도 버리고 튀는 바람에 이틀이나 시간을 허비하게 한 새끼한텐 그런 이명이 딱 어울렸으니까.

그리고, 성녀와의 사랑 이야기는…

 

‘걔가 대륙 제일의 미녀라니. 참나.’

 

뭐, 이쁘긴 했다. 피부는 투명할 정도로 하얗고, 커다란 눈은 흑요석을 박아넣은 듯 검게 빛났었으니까. 그런 점에선 제법 아이린이랑 닮기도 했고.

하지만 그 뿐이었다. 용사의 눈에는 아이린이 미세하게 더 이뻤다. 그 녀석의 얼굴에선 누구한테도 볼 수 없는 생기가 넘쳐흘렀으니까. 멀린은 눈이 삐었냐며 자신을 타박했지만, 미적 감각은 사람마다 다른 것 아닌가?

아무튼, 그걸 이유 삼아 차버렸다.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곱게 말해봤자 들어주질 않으니 일종의 극약처방인 샘이었다.

그랬더니 돌아온 답이…

 

-”아~ 그러니까 제가, 깡촌 촌ㄴ… 아니, 당신 소꿉친구보다 못생겨서 고백을 받아줄 수 없다 이거죠?”

-”드디어 말이 통하네.”

-”하하하… 핑계를 대도 말이 되는 걸 대던가. 그딴, 무성의한…”

-”핑계 아니고, 진짜 걔보다는 덜 이쁘다니까.”

-”죽여버리겠어.”

-”뭐?”

-”씨발 널 죽여버리겠다고!!!”

 

이젠 오래된 얘기임에도, 용사의 꿈엔 아직까지 허리에 맨 철퇴를 휘두르며 표독스러운 성녀의 모습이 나타나곤 했었다. 대륙을 돌아다니며 온갖 못 볼 꼴을 다 본 용사라지만, 항상 나긋한 모습만 보여주던 성녀가 보여주는 살의는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리 심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저런 반응이 튀어나온건지, 용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딜 가든 ‘대륙 제일의 미녀’라는 말을 들으니까 공주병이라도 생긴 것일까.

 

“으으.”

 

용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상념을 날렸다. 잡생각을 했기 때문인지 방금전에 느꼈던 분노도 슬슬 사그러들었다.

그래, 멀린이 말하지 않았었나. 앞으로 제국은 ‘마왕을 잡았다’는 치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자신을 우상화할 것이라고. 네가 생각하기엔 별 것 아닌 일도 수십, 수백배 부풀려 대중들에게 전파할 것이라며.

 

-”자네가 그런 공치사를 싫어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왠만하면 참게. 뭣도 모르는 이들의 말에 휘둘릴 필요는 없지 않나.”

 

멀린의 말을 떠올린 용사는 음유시인을 뒤로 하고 군중 사이를 빠져나왔다. 걸음을 옮길수록 사람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낯익으면서도 생소한 거리를 대신 채웠다.

 

“참… 많이 발전했네.”

 

돌부리 가득한 흙길엔 돌바닥이 깔려있고, 원래 밭이 있었던 곳엔 처음 보는 잡화점이랑 여관이 생겼다. 가게라고 해봤자 식당 하나밖에 없었던 깡촌이 이렇게나 발전한 것이다.

그럼에도, 용사의 고향은 옛 정취를 어느정도 간직하고 있었다. 고아를 키워주는 거니 감사한 줄 알라며 지독하게 자신을 부려먹었던 촌장의 이층 주택이나, 싸가지 없는 쌍둥이가 살았던 허름한 집.

그리고 거기서 시선을 조금 돌려보면, 아이린과 함께 뛰놀던 삐죽삐죽한 나무가 무성한 숲과 마을광장이랍시고 만들어 놓은 공터가 눈에 보인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이 마을의 유일한 식당인 ‘더스크’가 있다.

왜 식당 이름이 더스크냐면, 운영하는 부부의 성씨가 더스크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땐 진짜 커보였는데.’

 

다시 보니까 초라해보이기까지 한다. 나무로 만든 벽은 세월의 풍파를 못이긴건지 갈라진데다가 곳곳에 구멍이 뚫려있었고, 기억하는 것과는 달리 참으로 비좁았다. 이 정도면 작은 테이블 네 다섯개쯤 들어가면 다행인 수준이었다.

용사라는 직책을 가지고 온 대륙의 고급 식당을 가본 그에게 있어, 이 식당은 폐가나 다를바 없었다.

그럼에도 이 식당을 온 이유는 하나였다.

아이린의 성씨 또한 ‘더스크’였기 때문이다. 즉, 이 식당은 아이린의 집이기도 했다. 아이린을 찾으려면 여기만한 데가 없다는 뜻이었다.

 

‘매일같이 식당 일을 돕는 녀석이었으니까, 분명 여기 있을거야.’

 

용사는 문고리를 잡았다. 이대로 손잡이를 돌리면 문이 열릴것이다. 그런데…

 

‘뭐라고 이렇게 긴장되냐.’

 

차마 문을 열 수가 없었다. 이 허름한 나무 문이 마왕성의 정문보다도 무겁게 느껴졌다. 지난 10년간 쌓아온 연심의 무게.

용사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어차피 귀향했으니, 이 비좁은 마을에서 아이린을 수없이 마주칠 것 아닌가. 꼭 지금, 그것도 아이린의 집에서 봐야하나? 좀 더 자연스럽게 만나는 방법이 있을…

 

‘아니지.’

 

용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차일피일 미루다가는 ‘좀 더 자연스러운’ 기회가 찾아와봤자 쑥스러움을 못이겨 녀석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할 게 분명했으니까. 그러면 더 어색해질 뿐이라고, 멀린이 조언해주지 않았었나.

 

‘...아니, 그딴 것 보다는.’

 

그냥, 이 문 너머에 있을 아이린이 보고 싶었다. 이 순수한 감정을 타산적인 이유로 덧칠하고 싶지 않았다.

용사는 두 눈 딱 감고 손잡이를 돌렸다. 낡은 경첩 특유의 불쾌한 소리가 실내에 울렸다.

생경하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것은 이와 동시였다.

 

“손님. 정말, 정말로 죄송하지만 한 시간 뒤에 와주시겠어요? 준비해둔 스튜가 다 떨어져서 끓이는 중이거든요! 대신, 다시 오실 때 서비스 해드릴게요!”

“아……”

 

용사는 얼빵한 탄성을 내뱉었다.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왔다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멍청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그리워했던 풍경을 직접 마주한 용사에게 있어 그딴 것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더스크 아줌마가 만든 수제 향신료를 끓였을 때 나는 구수하고도 독특한 향기, 비좁은 면적 때문에 옹기종기 붙어 있는 원형 테이블과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그리고, 아이린.

 

‘.....10년이 지났는데 얼굴이 그대로네.’

 

노을을 품은 듯한 붉은 머릿결, 보석을 박아넣은 듯 한 커다란 눈, 우유를 연상케하는 하얀 피부.

그리고 콧등 주변에 희미한 주근깨가 박힌 것 까지, 용사가 기억하는 아이린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나마 다른 점을 찾자면 젖살이 빠져 얼굴형이 더 갸름해졌다는 것일까.

 

“저, 손님? 죄송하지만 한 시간 뒤에…”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답답한 것인지, 아이린은 했던 말을 반복하며 답을 재촉했다. 그 모습에 용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를 못 알아보나?’

 

처음엔 아이린을 만났다는 기쁨에 의아함을 못 느꼈지만, 곱씹어 보니 이상한 상황이었다.

어렸을 때 그토록 부대끼던 친구가, 10년 동안 사지에서 구르다 돌아왔는데 ‘손님’이라니? 마치 자신을 새빨간 타인 대하듯 하고 있지 않나!

예전처럼 장난을 치는 건가 싶었지만, 진심으로 답답해하는 저 태도를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얼굴에 흉터가 좀 생기긴 했어도, 못 알아볼 정돈가? 아니면 혹시, 내 얼굴을 까먹기라도 한 걸까? 10년이 지났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그래도 알아봐 주길 바랐는데…

 

“아.”

 

수많은 생각과 실망 끝에, 용사는 한 가지 정답에 도달했다.

그리고,몇 겹으로 둘러싼 인식저해 마법을 전부 해제했다.

너무나도 긴장했던 나머지, 마법을 걸고 있었다는 걸 잊어버렸던 것이다.

 

“... 어?”

 

즉각 반응이 터져나왔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낯선 외지인을 바라보던 아이린의 눈빛에 여러 감정이 담기기 시작한 것이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와 재회했다는 반가움, 사투를 벌이고 돌아온 전사를 향한 걱정, 그리고 마왕을 해치웠다는 용사에 대한 동경까지.

 

“너, 너너, 너, 너…!!!”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방금 전까지 능숙한 식당 주인의 아우라를 풍기던 아이린은, 고장난 골렘마냥 삐그덕거리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 모습을 본 용사는 피식 웃었다. 방금 전까지 긴장하고 있었던게 바보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덕분일까, 굳어서 잘 움직이지 않던 입이 자연스레 움직였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냐? 쌈닭.”

“...나를 쌈닭이라고 하는 거 보니까 진짜 너 맞네.”

 

용사의 퉁명스러운 말 때문일까, 아니면 오랜 세월 잊고 살았던 별명이 생각났기 때문일까?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이린이 질문을 퍼부었다.

 

“돌아오는건 이틀 뒤라고 들었는데 왜 벌써… 그리고, 방금 전엔 뭔 짓을 한 거야? 다른 사람 얼굴이었다가 갑자기…”

“거, 정신 사나운데 하나씩 물어보지?”

“...하여튼, 싸가지는 여전하네.”

 

아이린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25살이라곤 믿기지 않는 악동같은 웃음이었다.

 

“그러면, 제일 먼저 물어봤어야 했던 걸 물어볼게. 넌 잘 지냈어?”

“아…”

 

용사의 입에서 또다시 멍청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밝은 태양빛을 등지고 악동같이 웃는 저 모습이, 그에겐 너무나도 찬란하게 다가왔으니까.

 

“뭐, 잘 지냈…”

 

짧게 대답하려던 순간, 용사의 두뇌가 미친듯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마왕과의 전투에서 그러했듯이.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도 더.

 

‘이건… 어쩌면 기회 아닌가?’

 

자신이 인식저해 마법까지 써가며, 남들 몰래 아이린을 찾은 이유가 무엇인가?

지난 10년간 키워온사랑을 고백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용사가 세상을 떠돌면서 그동안 지켜본 바로는 고백이란 게 대뜸 내지른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나름의 분위기도 조성해야 하고, 그동안 쌓아온 감정도 있어야 했으니까. 정리하자면, 나름의 설계가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멀린도 그랬지, 고백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의례같은 거라고.’

 

그런데 10년 동안 떨어져 지내온 친구가 대뜸 좋아한다고 해봤자, 아이린이 이걸 받아줄 리가 있나! 적어도, 설계를 위한 최소한의 시간은 벌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근황 이야기는 시간을 벌어다 줄 묘수였다. 당장, 음유시인들이 경전처럼 떠받들어 모시며 반나절을 읊는 것이 바로 ‘용사의 근황 이야기’ 아닌가.

몇 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 생각을 마친 용사는 말을 주워담았다.

 

“음… 그, 그게.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고 해야하나, 워낙 많은 일이 있어서. 뭐, 잘 지냈냐고 하면 잘 지냈고 아니라면 아닌데…”

 

용사는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말재간을 저주했다. 분명 고심을 거듭해서 내뱉는 말인데도 참으로 어설프게만 느껴지니 말이다. 자신조차도 이렇게 느낄진데, 아이린은 뭐라고 생각할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하지만, 이미 말을 내뱉었으니 끝은 맺어야 할 것 아닌가. 용사는 기나긴 중언부언 끝에 하고 싶은 말을 토해냈다.

 

“그, 러니까. 시간 좀 내줄 수 있냐 이말이지. 간만에 만났는데, 얘기 좀 하자.”

“......”

 

이를 이상하게 쳐다보던 아이린은 피식 웃었다.

 

“뭐 얼마나 대단한 얘길 하려고… 알겠어. 근데 당장은 식당 일이 있어서 좀 그런데.”

“그러면 뭐, 내일이라도…”

“굳이 그럴 필요 있어? 식당 문 닫고 나서 들어줄게. 그럼 됐지?”

 

용사는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

 

노을이 산등성이 너머로 넘어가고 슬슬 하늘이 어둑해지는 시간.

그동안 하염없이 마을 한 귀퉁이에서 시간을 죽이던 용사가 식당 더스크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왔어?”

 

용사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스튜와 맥주 한 잔을 대령해놓고, 촛불 하나를 킨 채 턱을 괴고 자신을 쳐다보는 아이린의 모습은 차마 마주하기 힘든 자극이었으니 말이다.

마치, 바깥 일 하다 돌아온 남편을 위해 저녁을 차려놓은 아내의 모습 아닌가. 용사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러다가, 이대로 있으면 어색해질 거란 생각에 입을 열었다. 지금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했다.

 

“그, 뭐. 뭐 이런 것 까지 준비하고 그러냐.”

 

용사는 곧바로 자신의 생각을 후회했다.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라 하였는데 지금 상황에 딱 들어맞는 말 아닌가.

이런 호구 등신 새끼. 나를 위해 상까지 차려준 친구한테 이게 할 말이냐? 분명, 머릿속에선 이것보다 더 멋있는 말들이 많이 생각났는데 왜 이딴 말 밖에 안 나오는거지?

 

“뭐, 용사님한테 듣는 모험담이잖아? 맨입으로 듣기엔 좀 미안해서.”

 

다행히 그리 기분이 상하진 않은 건지, 아이린은 털털하게 수저를 내밀었다.

 

“한입 해.”

“뭐, 그런거라면야…”

 

용사는 붉은 스튜를 입에 가져갔다. 어딘지 모르게 몸이 후끈해지는 맛, 비강에서 터져나오는 특제 향신료의 향기… 10년 동안 그리워했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서 그런 것일까. 어딘지 모르게 부족하게 느껴졌다. 분명, 10년 전에 먹었던 스튜가 맞는데?

 

“맛이 좀 이상한가봐?”

“아니, 뭐 그런건 아닌데.”

“아니긴, 얼굴에 다 써져있구만. 맛 없다고.”

 

아이린은 수저로 스튜를 휘저었다. 그 손짓 하나에서 그리움이 절절하게 묻어나왔다.

 

“참 이상하단 말이야. 엄마가 하던 그대로 따라하는데 왜 그 맛이 안날까?”

“물어보지 그러냐, 너, 예전엔 아주머니한테 요리 가르쳐달라고 그렇게 귀찮게 굴었잖아.”

“그러고 싶은데, 이젠 그럴 수가 없네.”

 

용사는 아이린의 손짓에 담긴 그리움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야 깨달았다.

 

“혹시…”

“돌아가셨어. 5년 전에.”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나니, 아빠도 두달 뒤에 눈을 감았고.

그렇게 금술이 좋더니, 저승까지 같이 갈 건 또 뭐냐며, 아이린은 쓰게 웃었다.

 

“왜? 그렇게 건강하셨는데, 무슨 일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두분 다 나이가 좀 있었잖아? 그래서 뭐…”

“그, 미안하다.”

“뭐가?”

“그런 것도 모르고, 이상한 소릴…”

“에이, 뭐, 너무 그러지 마. 네가 어떻게 알았겠어? 마계에 들어가서 싸웠는데. 그리고, 이렇게 혼란스러웠던 시대에서 평화롭게 살다가 가셨으니… 호상이지 뭐.”

 

아이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으나, 목소리엔 미약한 쓸쓸함이 담겨있었다. 용사는 그 분위기에 눌려 입을 열지 못했다. 무슨 말이라도 실례가 될 것 같았으니까.

이 침묵을 깨는 건 아이린의 몫이었다.

 

“아무튼, 얘기할 게 많다며? 어디 한 번 들어보자. 사실, 진짜 궁금했거든. 네가… 그, 멀린이라고 했나? 그 이상한 할아버지 한테 끌려가서 어떻게 지냈는지.”

“하루하루가 아주 개지랄맞았지.”

 

아이린이 물꼬를 터주자, 용사의 이야기 보따리가 풀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에 더해, 그녀가 이야기를 듣는 태도도 용사의 입을 풀어주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진짜? 그랬던 거라고? 음유시인 놈들, 새빨간 구라쟁이였네.”

“미친…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와, 용사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 나였으면 바로 도망쳤을거야.”

 

그녀가 내뱉는 풍부한 리액션은 용사에게 있어 마약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렇다보니, 처음엔 담백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던 그의 모습이 점차 변해갔다.

용사는 손짓 발짓을 해가며 자신이 겪었던 난관을 신명나게 해설했고, 그가 그토록 싫어하던 음유시인처럼 이야기에 과장을 붙여가며 모험담을 부풀렸다. 자신의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은 허풍에 더욱 불을 지폈다.

 

“그래가지고 아룬도, 그 새끼가…”

 

한참 신나게 이야기 하던 용사가 입을 다물었다.

아이린 너머로 보이던 창문 너머의 풍경이, 주홍색에서 칠흑으로 물들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어?’

 

고백을 하기 위한 분위기도 조성 못했고, 감정도 전달하지도 못한 채 개폼 잡다가 시간을 이렇게 날려먹은 꼴이라니, 쪽팔리기 그지 없었다.

 

‘여자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게 무용담 얘기하는 용병이라던데.’

 

그게 사실이라면, 고백하기도 전부터 비호감을 잔뜩 쌓은 꼴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조졌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미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뭔가를 해야했다.

 

‘그런데 뭐를?’

 

용사는 머리를 팽팽 굴렸지만 별다른 해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아룬도, 그 자식이 마을 하나를 인질로 잡아서… 그 다음엔 어떻게 됐는데?”

 

심지어, 아이린이 제 마음도 모르고 이야기를 독촉하니 용사로서는 아주 죽을 맛이었다.

이 두 요소가 합쳐져 고장나버린 용사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얼빵한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어… 그런데, 너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응?”

“너무 내 얘기만 한 거 아닌가 싶어서.”

“그게 뭔 소리야? 애초에 네가 썰 풀어준다고 부른 거잖아.”

“아.”

 

대답의 여지가 없는 정론이었다. 용사는 또다시 고장나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건… 그렇긴 하지만, 얘기 하다 보니 네 얘기도 궁금하고, 마을이 발전 된 것도 궁금하고? 그래서…”

“내가 사는 거야 하루하루 똑같지 뭐, 아. 그러고 보니 최근에 이상한 일이 하나 있긴 했다.”

“이상한 일? 뭔데?”

“후드 뒤집어 쓴 여자가 와서 내 얼굴을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내가 저것보다 못생겼다고? 진짜 죽여버릴거야…’ 하면서 부들거리다가 가던데.”

“.......”

 

척봐도 누군지 알 것 같아 현기증이 몰려왔다. 하지만, 아이린한테 후드 쓴 여자의 정체를 알려줘봤자 괜히 불안하기만 할 터.

 

“그런 거 말고, 그냥 네 얘기를 듣고 싶은거야.”

“진짜 재미 없을텐데, 그래도 듣고 싶다면야.”

 

아이린은 맥주를 홀짝이며 목을 축였다. 시큰둥한 대답과는 달리,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할 정비를 마친 것이다.

 

“나야 뭐, 엄마 아빠 도와서 가게 운영하고. 두 분이 돌아가신 뒤론 혼자서 가게 운영하고…이게 쉽게 봤는데 보통 일이 아니더라? 혼자서 식재 사려고 이웃 마을까지 보따리 들고 찾아가랴, 식재 손질하랴… 그래도, 2년 전쯤부턴 사정이 좀 나아졌어.”

“음? 왜?”

“너 덕분이지.”

 

용사의 무용담이 하나씩 늘어갈수록, 이에 비례해 ‘용사의 고향’에 대한 관심도 커져갔다. 관광을 오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고, 왕국 후미진 곳에 있어서 방치되고 있었던 마을에 관리가 오는 일도 늘어났다.

그 덕분에 돌바닥으로 길을 포장하고, 못 보던 가게가 하나 하나 생겨났다는것이 아이린의 얘기였다.

 

“이제 마을에 상단도 들어온다? 덕분에 식재 사려고 빨빨거릴 필요가 없어졌어. 아,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아이린은 주방에 들어가 무언가를 뒤적거리더니, 조그마한 액자를 꺼내 상 위에 올려뒀다.

 

“상단에 그림 그리는 사람이 한 명 있더라고, 방랑 미술가라 했었나? 인연이다 싶어서 나 좀 그려달라 했더니 진짜 예쁘게 그려주더라. 뭐, 돈을 좀 비싸게 받아먹긴 했지만!”

 

아이린은 해맑게 웃으며 용사 앞에 액자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용사의 표정은 이와 정 반대로 썩어들어갔다.

다소곳이 앉아있는 아이린 옆에 왼팔이 잘려나가고, 얼굴 반쪽에 화상 자국이 있는 흉악한 놈팽이가 서있었으니까.

 

“...누구야? 이 사람은.”

 

경계심을 가득 담은채, 남자를 가리킨 용사의 질문에.

 

“내 남편.”

 

아이린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

 

순간, 용사의 모든 움직임이 멈추었다.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차마 다시 한 번 말해달라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또다시 ‘남편’이라는 소리가 아이린의 입에서 나왔다간, 마력 제어에 실패해 이 마을을 통째로 날려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남편… 이라고?’

 

용사는 참담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마른 세수를 했다. 얼굴에 손을 한번 문댈 때 마다 ‘25살이면 짝을 안 찾았을 리 없다’며 호언장담했던 멀린의 말이 귓가를 때렸다.

 

‘아니, 이게 무슨, 이게… 말도 안 되는.’

 

용사는 그 말에 코웃음쳤었다.

누가 자신을 놀린다 싶으면 곧바로 달려가서 코뼈를 아작내고, 또래 친구들을 보며 ‘깡촌이라 그런가, 죄다 꼬맹이들 밖에 없다니까.’ 코웃음을 흘리던 쌈닭 아이린한테 남편이 생기는 것 보단,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게 더 빠를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한동안 절망에서 허우적 거리던 용사는 차츰 총기를 되찾았다.

만약 아이린이 세상에 떠밀려서, 이런 깡촌에서 혼자 사는 게 힘들어서 아무나 붙잡고 결혼한 것이라면… 자신에겐 가능성이 차고 넘쳤다는 계산이 섰기 때문이다.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전란에 종지부를 찍은 예언의 용사만큼, 재력과 권력이 있는 남자가 이런 마을에 있을 리 없을테니까.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너한테 남편도 다 생기고.”

 

용사는 태연을 가장한 채 질문을 퍼부었다.

 

“그런데, 이렇게 생긴 녀석이 우리 마을에 있었나? 한스랑 좀 닮은 것 같긴 한데…”

“야, 내가 미쳤다고 한스같은 코찔찔이랑 결혼하겠어? 벌레 하나 못 잡아서 나한테 잡아달라고 매달리던 놈인데.”

“그러면… 킬리안인가?”

“걔는 이 마을 뜬 지 오래야. 용병이 되겠답시고 떠났는데, 아직 살아 있으려나?”

 

용사는 자연스레 농담을 섞어가며, 이 마을 출신 중 아이린 또래의 남자 이름을 하나 하나 전부 불렀다. 하지만, 그 모든 이름이 나왔음에도 아이린은 한결같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야? 그러면 누군데 대체?”

“이안이야. 이 사람 이름.”

“이안?”

 

이 마을에 이안이라는 놈이 있었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딱히 떠오르는 얼굴은 없었다.

그 아리송한 표정을 읽은 것일까. 아이린이 싱긋 웃었다.

 

“네가 모르는 게 당연하지, 이 사람. 외지인이거든. 4년 전에 이 마을에 온.”

“......”

 

용사의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다. 누군지도 모를 외지인 놈팽이한테 아이린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었다.

거기에 불을 지핀 것이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아이린의 눈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부모님을 잃은 쓸쓸함을 내비치던 눈동자가, ‘남편’이라고 말하자마자 반짝이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감정을 아이린 앞에서 내비칠 순 없는 노릇. 용사는 심호흡을 하며 평정을 유지하려 했다.

 

“왕국군 장교로 일했었는데, 무슨 전쟁에 나갔다가 부상 때문에 전역했다고 하더라. 은퇴하고 농사나 지을까 하고 이 마을에 정착한거고.”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아이린은 생기 가득한 눈동자를 한 채 말을 이어갔다.

 

“왜, 이 사람이 좀… 험악하게 생겼잖아? 처음엔 너무 무서웠거든, 그런데 매일 같이 식당에 찾아오니까 얼굴을 안 볼 수도 없고… 그래서 본 채 만 채 하고 스튜만 내줬었는데.”

“...그런데?”

“한 보름쯤 지나니까, 대뜸 그런 말을 하는거야. 힘들면 좀 쉬는게 어떠냐고. 나, 그 말 듣고 깜짝 놀랐다? 진짜로 힘들긴 했었거든.”

 

그 뒤에 이어진 아이린의 말은 용사의 가슴을 찢어놓았다.

살인적인 노동량이나, 자신을 자빠뜨리려는 생각밖에 없는 놈들의 개수작은 그나마 참아줄 만 했지만, 부모님의 빈자리가 주는 상실감만큼은 시간이 지나도 매워지질 않아서 가끔씩 소리 죽여 울곤 했었다고.

게다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면 남자들의 개수작이 심해질 게 뻔하니 슬픈 내색조차 내지 못한다는게 너무나 서러웠다고.

 

‘내가 있었다면…’

 

아이린한테 수작 부리는 놈들을 반으로 접어줬을 텐데.

참으로 쓸데없는 생각이란 건 용사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마왕을 죽이겠다고 결의한 건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으니까. 하지만, 후회가 남는 건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그렇게, 용사가 회한에 잠겨 자신의 어리석음을 곱씹고 있는 와중에도 아이린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그 사람을 점점 살펴보기 시작한 건. 참 딱해보이더라, 외팔로 서툴게 괭이질 하는게 안쓰러웠어. 그래서 가끔씩 농사를 거들기도 했었고. 그렇게 같이 붙어 있는 시간이 늘어나니까, 안 보이던 부분이 보이더라고.”

 

아이린의 말에 따르자면, 이안이라는 퇴역 장교는 제법 상냥한 사람이었다.

자신을 괴물이라 부르며 돌을 던지는 개구쟁이 아이들에게 장단을 맞춰주며 놀아주거나, 힘 쓸 일이 생기면 솔선수범해서 앞으로 나서는 등. 행적만 보면 자애로운 사제가 따로 없었다.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 점점 친해졌는데, 갑자기 궁금한거야. 내가 힘들어하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그래서, 물어봤지.”

“그랬더니?”

“유심히 살펴보니 힘들어하는게 눈에 보이더라, 이렇게 말했어. 그래서 내가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봤냐고 물어봤거든?”

 

그때를 회상하니 기분이 좋은 것일까, 아이린의 입꼬리가 잔뜩 올라갔다. 용사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천진하면서도 생명력이 넘치는 찬란한 웃음이었다. 그는 아이린의 저 웃음을 사랑했다. 지난 10년간 저 표정 하나 덕분에 싸워나갈 용기를 얻을 정도로.

그런데, 10년의 세월을 지나 저 웃음을 다시 봤을 때 느껴지는 건 입안에서 맴도는 쓴 맛 뿐이었다. 고작, 저 표정이 자신을 향한 것 아니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엄청 쑥스러워 하면서, 아름다워서 저도 모르게 시선이 갔다고. 그렇게 말하는 거 있지 글쎄?! 생긴 건 무슨 생고기 뜯어먹을 상남자처럼 생겨가지곤, 진짜 귀엽지 않아?”

“......”

“그래서, 그럴거면 남 몰래 쳐다보지 말고 사귀자고 했어. 그 뒤로 얼마 안 가서 결혼했고.”

“그러, 냐.”

 

용사의 목소리에 기력이라곤 한 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가슴 속에 자리 잡은 어마어마한 탈력감 때문이었다.

 

‘고작…’

 

일이 힘들면 좀 쉬는 게 어떠냐는 한 마디와, 당신이 아름답다는 한 마디 가지고 아이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나는, 이 녀석을 위해 온갖 사지를 헤집고 다니면서 마왕을 죽였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은 안다. 마왕을 죽이겠다고 결의를 한 것은 다름아닌 그 자신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리고, 그 감정은 곧바로 태도가 되어 나타났다.

 

“그런데, 그렇게 상냥한 사람이 왜 식당엔 코빼기도 안 보이냐? 다 잡은 물고기니까 너한텐 신경 안 써도 된다 이거야?”

“......”

“군인 나부랭이들이 다 그렇지 뭐, 칼 쓰는 것 밖에 몰라서 그런가? 집안에선 아내 윽박지르는 것 밖에 못하는…”

“뭐,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긴 뭐가…!”

“죽었거든, 1년 전에.”

“......”

 

용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토록 반짝이던 아이린의 눈동자가, 죽었다는 한마디를 내뱉은 순간 칙칙하게 물들었으니.

 

“어디서 흘러들어온 건진 모르겠는데, 들개 떼가 마을 밭을 죄다 헤집어 놔서 그 개새끼들 쫓아내겠답시고 칼 한 자루 들고 갔다가… 팔을 물려서 돌아왔는데, 그 뒤로 며칠 시름시름 앓다가 눈을 감더라. 촌장님 말로는 패혈증이라나.”

 

심해를 연상케하는 칙칙한 눈동자에서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그동안 꾹꾹 눌러담아왔던 마음이 눈물의 형태로 아이린의 볼을 타고 내려와, 원탁을 적셨다.

 

“...그러게 남들 도울 시간에 자기 몸부터 챙기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바보 같이.”

“.......”

 

용사는 이번에도 입을 다물었다.

아이린의 부모님 얘기를 들었을 때 처럼 그녀의 분위기에 눌려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이린이 이렇게 슬퍼하는데…’

 

용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아이린을 위로해야 한다는 것도, 제 말실수를 주워담아야 한다는 것도 까먹고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그녀의 남편이 죽어서 ‘다행’이라고.

곧바로 그 생각을 지워버리긴 했지만, 단 한 순간이라도 그녀의 불행에 안도감을 느꼈다는 사실이 용사를 무겁게 짓눌렀다.

 

“하아… 갑자기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했네. 아무튼.”

 

그동안 감정을 억누른 것인지, 물기가 있었던 아이린의 목소리가 다시 건조해졌다.

촉촉했던 눈가도 어느새 메말라있었다.

 

“그 뒤로는 뭐… 남편 묻어주자 마자 별 시덥잖은 놈팽이들이 자기랑 결혼하자고 찾아오더라. 나 혼자 살기는 힘드니까 아무나 붙잡고 결혼할까 싶었는데, 차마 그럴수가 없더라. 누구를 봐도 남편 얼굴이 떠오르는 거 있지?”

 

그러니까, 미안해.

 

용사는 갑작스런 사과에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누군가가 등 뒤에서 칼을 겨누고 있는 것 같은,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불안한 감각.

 

“그래서, 네 마음도 받아줄 수 없을 것 같아. 난 그냥, 평생 혼자 살 처지인거야.”

 

그 말과 함께 무언가가 시원하게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실제로 깨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아마 이 소리는 용사의 귀에만 울린 환청일 것이다. 10년 동안 키워온 연심이 깨져버린 소리.

그 뒤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지금 뭔 말을 들은거지?’

 

미안하다. 네 마음도 받아줄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은 고백을 하기도 전에 차여버린 거다.

이를 인지하고 나니 손이 벌벌 떨릴 정도의 거대한 울분이 들끓었다. 그 이안이라는 놈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길레,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이런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건 기회이기도 했다.

 

‘못 알아들은 척, 그게 무슨 소리냐. 공주병이라도 걸렸느냐는 한 마디만 하면.’

 

이 어색한 분위기를 흘려보낼 수 있다. 그러면 아이린은 무안하게 웃겠지. 그래, 내가 잠깐 헤까닥 했나보다. 하는 농담을 하면서.

아이린의 성격으로 유추해보건데, 이건 녀석 나름의 배려가 섞인 거절이었다. 분위기가 더 민망해지기 전, 여기서 이야기를 그만하자는.

그렇다면 그 배려를 받는 게 맞겠지.

그리 생각하고 입을 열려는 찰나.

 

“...언제부터 알았어?”

 

그보다 먼저 가슴속에 있는 말이 튀어나왔다.

용사의 이지는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어했으나, 용사의 본능이 이를 거부한 것이다.

 

“처음부터 뭔가 그래보이더라. 표정이 비장한게. 척 봐도 고백공격 하려는 것 같았어.”

“...그러냐.”

 

용사는 아무 말 없이 맥주를 들이켰다. 커다란 잔에 가득 차있었던 맥주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그는, 이 짧은 문답을 통해 깨달아 버린 것이다.

쓸쓸함만이 자리했던 아이린의 눈에서 그나마 생기가 감돌았던 건, 사별한 남편을 추억할 때 뿐이었다는 걸.

지금도 그녀의 눈가는 메말라있다는 것을.

 

‘고백공격이라.’

 

참으로 정확한 말이었다. 지금의 그녀에게 고백을 하는 건 폭력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 세상에 무한한 것은 없다. 인간의 감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용사라고 칭송받는 자신조차 언젠가부터 동료의 죽음에 눈길을 돌리고, 그 시체를 무덤덤한척 밟고 지나가며 승리로 향하는 길을 걷지 않았던가. 누군가의 죽음을 계속 눈에 세기면, 마왕을 죽이기 전에 마음이 죽어버릴 것 같아서.

다만, 아이린은 한 사람의 죽음을 겪자마자 마음이 죽어버린 것 뿐이다. 필시, 사별한 남편의 자리가 그만큼 거대했던 것이겠지.

그녀에게 고백을 하는 건, 비유하자면 메마른 우물에 두레박을 내리고 물을 퍼올리려고 하는 꼴이었다. 누군가는 물을 줄 수 없음에 고통스러워하고, 누군가는 애타게 갈증을 부르짖을 수 밖에 없는, 파국이 예정된 행위였다.

 

‘그나마, 희망이 있다고 한다면…’

 

시간이 흘러 언젠가 아이린의 마음이 다시 차오르는 날이 오는 것 뿐.

용사는 그 가냘픈 희망을 붙잡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 앞으론 여기서 살 생각이거든.”

“...왜? 너라면 어느 왕국에서건 떵떵거리면서 잘 살 것 같은데.”

“개같긴 해도, 여러 추억이 있는 곳이니까. 그리고, 사람 북적거리는 거 싫기도 하고. 아무튼…”

 

용사는 버릇처럼 잔을 쥐었다가 텅 비어버린 잔을 보고 혀를 찼다. 이런 꼴사나운 말을 하려면 술기운이 더 필요했다. 이런 희멀건 맥주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나. 용사는 마른침을 거듭 삼킨 후에 말을 이어갔다.

 

“만약, 견딜 수 없이 쓸쓸하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 최대한 도와줄테니까. 친구 좋다는 게 뭐냐?”

“걱정해줘서 고마운데, 이젠 괜찮아.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용사가 한도까지 용기를 쥐어 짜낸 제안은 아이린의 털털한 웃음 한 방에 격침되었다.

 

“그리고 너, 그런 말 앵간하면 하지 마. 오해 사기 딱 좋아.”

“...오해?”

“나야, 네 성격 아니까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니라는 거 아는데… ‘시간 지나서 전 남편을 잊게 되면 나한테 와라’ 처럼 들린단 말이야.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놈들이 수두룩 했는데, 그때마다 기분이 엄청 나쁘더라고. 지가 뭔데 그이를 잊으라 마라야? 참나.”

 

끼기긱-

 

용사는 귀가 새빨개진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린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더 이상 있다간, 자신의 추악한 마음이 전부 까발려질 것 같아서.

 

“가게?”

“응.”

“좀 더 있다가 가지, 왜.”

“...이렇게 늦었는데, 슬슬 가야지.”

 

어느새 달이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한 밤중이라는 말보단 새벽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식재를 다듬어야 하는 아이린을 계속 붙잡아 두는 것도 못할 짓이라고, 용사는 그렇게 합리화를 끝마치며 문고리를 잡았다.

 

“...하아.”

 

하지만, 차마 문을 열기가 어려웠다.

이 식당을 나서면 두 번 다신 아이린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 같아, 그렇게 한참 문고리만 매만지던 용사는 중얼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저기, 만약에. 진짜 만약에 말이야.”

“응?”

“내가 마을을 떠나기 전에, 마왕을 잡고 올테니까 너한테 기다려달라고 했으면… 뭔가, 조금이라도 달라졌을까?”

 

눈에 보일 정도로 뚝뚝 흘러내리는 미련.

그 감정을 느낀 것인지, 아이린은 외마디 탄성을 내뱉으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용사와 똑같이 미련이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글쎄, 아마. 그랬을 수도.”

“...그러냐.”

 

그 대답에서 무언가를 느낀 것일까. 용사는 그제야 가게 밖으로 나섰다.

아이린은 앉은 자리에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시간이 지나서 식어버린 스튜를 숟가락으로 휘적였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용사의 모습이 완전히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자, 아이린은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뻔하지 뭐. 마왕 죽이고 올 때 까지 기다려 달라니 양심에 찔렸겠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그 때 만큼은 양심을 접어두고, 기다려달라고 하지 그랬어.

 

“그러면 이렇게 슬플 일도 없었을텐데.”

 

아이린은 하염없이 스튜를 휘적거렸다.

10년의 세월이 지나 식어버린 자신의 감정처럼, 온기를 잃은 스튜를.


Posted by 비좀
,

들어가며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중 '꼬마 마법사 레미'를 알지 못하는 분은 그리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한때는 이마트를 비롯한 대형 쇼핑몰 완구점에서 눈만 돌리면 레미 장난감을 볼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레미가 히트한지 거의 30년이 흐른 지금 애청자가 아닌 이상 이 작품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분은 그리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만해도 레미 하면 장난감만 생각났지 무슨 내용인진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간략하게 내용을 축약해 보자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할 용기를 얻고 싶어서' 마녀가 되고 싶어 하던 초등학생 3학년인 도레미가 우연히 '뚜리뚜리 마법의 성(원문: 마키하타야마 리카의 마법당)'이라는 곳에서 장사를 하던 마녀, 마조리카를 만나 수습마녀로서 친구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 정도로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기당 48~51화, 총 4기로 이루어졌으니 편수만 200화가 넘어가는 초 장편 시리즈인데요. 1기가 지날 때마다 1년이 지나가서 첫 등장 시엔 저학년으로 분류되는 초3이었던 도레미 일행이 마지막 시즌에선 초등학교 졸업반이 됩니다. 1년이 52주고 주당 한편 방영된다는 걸 생각해 봤을 때 레미 시리즈를 실시간으로 챙겨본 초등학생들은 제법 몰입할 수 있었겠네요. 아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도 그런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일상 속의 비일상

유감스럽게도 저는 레미가 한창 방영할 땐 디지몬에 푹 빠져있었던 터라 초등학생 때 기억이 가물가물한 지금에 와서야 뒤늦게 레미를 몰아보게 되었는데요, 본 작품을 보고 처음 느낀 건 '특이하다'였습니다.
현생을 살다가 악의 조직 따위가 나타나면 변신해서 싸우는(그리고 싸우는 과정은 대부분 인적이 없는 곳에서 이루어져서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가 뚜렷한) 베리베리 뮤우뮤우, 캐릭캐릭 체인지 등의 여타 마법소녀물과 달리 레미에선 현실과 판타지가 뒤섞여있었거든요.
그리고 마법소녀인 레미와 친구들은 마법을 부려 악역을 쳐부수는 대신,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문제를 해결하지요.
이런 특성 덕분에 레미 시리즈는 여타 아동 애니메이션보다 몰입하기 쉽다는 장점을 가집니다. 입만 열면 거짓말과 허풍을 내뱉는 반친구랑 엮이거나, 슬슬 유치하다고 취급받을 만한 괴수형 장난감에 푹 빠져 반에서 놀림받는 등장인물이 나오는 등 초등학생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거든요.
또한 아동 애니메이션에선 흔히 볼 수 없는 현실적이고 어두운 문제들을 조명해 주었다는 점 또한 이색적인 요소 중 하나였습니다. 이혼 가정 어서 자라는 아이의 슬픔이나, 술집에서 일하는 어머니를 둔 아이의 양가감정, 등교를 거부하는 아이의 트라우마를 비춰주는 등 요즘 매체에서도 보기 힘들 이야기를 따듯한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거든요.
이런 요소들이 합쳐져 200화가 넘는 애니메이션을 시청하는데도 크게 피로감을 못 느꼈습니다. 제가 초등학생일 적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제가 알지 못했던 문제들을 하나하나 짚어주니 빠질 수밖에요. 레미는 아동용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지만, 나이를 먹고 나서 봐도 몰입할 수 있게끔 제작된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마법은 왜 필요할까?"

시즌이 바뀔 때마다 다루는 메인 플룻이 달라지는데다가, 반 친구들의 문제를 다루느라 통일된 주제를 찾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꾸준하게 다루는 이야기는 존재합니다. '마법은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질문은 미성숙한 레미와 친구들은 물론, 마법이 일상에 녹아든 마녀들의 입을 통해 잊을만하면 한번씩 나오는 주제입니다. 주로 모든 것을 손으로 만들어내야하는 인간과, 만사를 마법으로 해결 할 수 있는 마녀들을 대조하며 보여주지요.
그리고 해당 주제가 나오는 에피소드는 제법 무게감 있게 그려집니다. 인간의 힘에 감화되어 마법을 쓰지 않고 나오는 마녀가 나오거나, 마녀임을 포기하고 인간계에서 유랑하는 마녀가 나오는 식으로요.
그래서 저 또한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마법은 정말 필요한걸까?
저는 그 답을 레미 시리즈의 말미에 가서 어렴풋이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마녀를 포기한 마녀

레미 시리즈의 마지막 시즌, 4기의 40화에서 레미는 항상 가던 똑같은 하교길에서 벗어나 낯선 길을 탐험하던 중 유난히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어느 집앞에서 멈춰섭니다.
우연히도, 그 집의 주인은 마녀라는 것을 숨기고 전세계를 유랑하며 유리 공예를 하는 마녀. 미래(미라이)였죠.
레미는 미래와 교감하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가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듣게됩니다. '마녀가 인간계에서 살기 위해선 여러 곳을 떠돌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얘기였죠.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레미 세계관의 마녀는 천년을 훌쩍 넘게 사는 장생종이거든요. 미래는 이 사실을 알려주며 레미에게 넌지시 경고합니다. 마녀가 되면 주변인들을 떠나 보내야 한다고, 그래도 정말 괜찮느냐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오랜 유랑 생활에 외로움을 느낀 것인지, 마녀로서 살아갈 거라면 자신과 함께 다른 나라로 떠나자는 제의도 건넵니다.
레미는 제안에 선뜻 답을 하지 못합니다. 레미에게는 주변인도, 마법도 모두 소중했으니까요. 그렇게 하루 종일을 고민하다가 결국 뒤늦게 미래의 집을 찾아가지만, 미래는 그 집에 없었습니다. 그곳에 남아있는 건 미래와 레미가 함께 만든 유리잔 뿐이었죠.
이 일을 겪은 뒤, 마녀가 될지 인간으로 남을지 고민하던 레미는 마녀를 포기합니다. 좋아하는 남자에게 고백하기 위해 마녀가 되고 싶었지만, 이는 굳이 마법을 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유리

앞의 에피소드에서 '유리'라는 소재는 제법 비중있게 다루어집니다. 에피소드가 진행될 동안 마법은 단 한 번도(!) 쓰지 않는데 비해 유리 공예로 무언가를 만드는 장면은 매우 공들여 묘사할 정도로요. 즉, '꼬마 마법사' 라는 정체성을 포기하면서까지 유리를 보여줘야 할 정도로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뜻이겠지요.
그렇다면 본 에피소드에서 유리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에 대해선 작중의 대사를 빌려 설명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미래는 유리를 두고 "움직이지 않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불변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시간을 들여 관찰하면 천천히 변화하는 것이라는 설명이죠.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들의 일상 또한 이와 비슷하지 않나요? 일상은 언제나 똑같이 흘러가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천천히 변해가니까요.
이렇게 생각해보니, 본 에피소드가 하나의 거대한 질문처럼 느껴졌습니다. '너희들은 일상 속으로 나아갈거야? 아니면 비일상을 향해 떠날거야?'
그리고 레미는 그 질문에 답을 했죠. 마법을 포기하는 식으로요. 즉, '마법이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다' 라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레미 제작진들은 마법에 무슨 의미를 담고 있었기에 이런 답을 내렸을까요?

우리들은 모두 꼬마 마법사였다.

잠시 다른 얘기를 해보자면, 저는 어렸을 때 소닉 시리즈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드넓은 안방 침대를 방방 뛰어다니며 소닉의 점프를 흉내내는 소닉 놀이도 했었죠.
아니, 흉내라는 말은 적절치 않은 말인것 같습니다. 적어도 소닉 놀이를 할 때의 저는 스스로가 소닉이 되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침대 위를 도화지 삼아서 스테이지를 그려나가고, 그 위를 뛰어다니며 에그맨이 만든 로봇들을 점프로 박살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실로 훌륭한 상상력이네요. 아무것도 없는 침대 위를 뛰놀며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니.
그런데, 여러분들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없지는 않을겁니다. 소꿉놀이를 하며 상상속의 가정을 불러오고, 장난감 칼을 휘두르며 스스로 파워레인저가 된 적은 누구에게나 있을테니까요.
우리들에겐 모두 머릿속의 공상을 현실로 끄집어내는 힘, 상상력이 존재했습니다. 실로 마법같은 힘이지요.
레미 시리즈의 제작진들 또한, 어린이들의 상상력이 마법같다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공상을 현실로 끌어오는 마법이 종종 나오는데다가... 마지막 화를 보니 이런 추측이 들 수 밖에 없더라구요.

졸업

레미 시리즈 대망의 마지막 화는 초등학교 졸업식을 그립니다. 이와 동시에 레미는 지난 4년간 함께해왔던 마법과도 작별을 하게되지요.
모든 졸업식이 그렇지만, 초등학교 졸업식은 유달리 떠나보내야 하는 게 많습니다. 저같은 경우엔 어머니가 '이제 초등학생이(어린애가) 아니니까' 라는 이유로 장난감 하나 둘씩 버렸고,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공부해야 하니까' 하며 초등학교 재학 중 쭉 다니던 태권도 학원을 끊어버렸던 기억이 있네요.
하지만 뒤 돌아 생각해보니 이것보다 씁쓸한건, 다름 아닌 상상력과의 작별이었습니다. 저는 어느새 소닉 놀이를 하지 않게됐고, 장난감 칼을 휘두르며 놀게 되지도 않게 됐습니다. 그런 건... 중학생이 하기엔 너무 유치해보이니까요.
그렇기에 레미는 마법을 떠나보내야 했던겁니다. 현대의 마법인 상상력은 보통, 늦어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될 때 즈음을 기점으로 작별하게 되니까요. 이제 우리와 레미를 기다리는 건 상상과 즐거움 따윈 하나 없는 우중충한 현실 뿐...
... 일까요?

일상 속에서 쌓아 올려진 것

레미 시리즈의 후반은 울적하고 씁쓸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영원히 함께 할 것 같았던 친구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거든요.
원래 미국에서 살았던 모모는 아버지의 전근이 끝나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하고, 보라는 연예계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타지역 중학교로 진학을 결정합니다. 사랑이는 부모님이 재결합하며 터를 잡을 부산으로 이사를 가야했죠.
심지어 유치원 때부터 레미와 함께했던 메이마저 바이올리니스트의 꿈을 이루기 위해 레미와는 다른, 음악 중심의 중학교로 가기로 마음을 먹죠.
레미는 그들을 웃으며 보내주었지만 속으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씁쓸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이윽고 졸업식 날 터져버리고 말죠. 마법을 떠나보냈는데, 자신과 함께 마법을 부리던 견습 마녀 일행들은 물론 초등학교 친구들과도 작별을 해야하니까요.
그 때문에 레미는 졸업식 날, 학교를 가지 않고 마법당에 가서 농성합니다. '모두를 떠나보낼 바에야, 졸업 따윈 하지 않겠다'며 말이죠.
그 마음을 보듬어준건 다름 아닌 레미의 초등학교 친구들이었습니다. 견습 마녀 친구들은 물론, 그동안 레미가 마법으로 도와준 아이들이 마법당 앞에 모여 레미에게 말을 걸죠.  "고맙다."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다." 라구요.
우리들 또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을겁니다. 같은 공상을 공유하며 소꿉놀이, 칼싸움 놀이 등을 같이 하던 친구들은 상상력과 작별해도 남는 현실 속의 존재니까요.
결국, 레미의 완결은 이제 레미를 떠나 보내야 하는 '졸업반'들을 위로해주는 이야기라 볼 수 있겠습니다. 지금까지의 너를 구성하는 것들을 떠나보내도, 네가 쌓아 올린 관계가 있으니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따듯하게 말해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

마치며

중언부언 이야기가 길었습니다. 제 글재주가 모자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꼬마 마법사 레미를 감명 깊게 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레미 시리즈는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마저 보듬어주고 위로해주는 따듯한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모쪼록, 여러분도 언젠가 시간이 날때, 꼬마 마법사 레미를 보시며 위로와 감동을 얻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그러했듯이요.

Posted by 비좀
,

취조실


 

 그는, 언젠가 영화에서 보았던 취조실을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최근에 어떤 드라마에서 보았던 취조실도 생각해보았다. 드라마에서 형사가 말했던게 생각났다. "취조실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맨날 이상한 상상을 한다니까… 증언이 필요해서 부른거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라며 주인공을 안심시켰던가. 그가 보고 있는 취조실은 옛날에 만들어진 영화보다 요즘 만들어진 드라마에 더 가까운 취조실이었다. 아마, 3:7정도의 비율로 섞으면 딱 맞는 취조실의 풍경이리라.

 

“아, 미안해요. 학생. 많이 기다렸죠?”

 

 이런 쓸모없는 생각을 하는 와중, 그는 녹슨 철이 움직이는 불쾌한 소리에 화들짝 놀라 문을 쳐다보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방금 전에 그가 작성한 진술서를 보고 몇가지 조정할 부분이 있다며 잠시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한 뒤 나간 형사였다. 형사는, 자신의 직책에 맞지 않게 제법 후덕한 인상이어서 그는 그것을 참으로 어색하게 느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 앞에 있는 형사가 후덕한 인상의 남성이라 하더라도, 그가 느끼는 긴장감은 별로 줄어들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있는 곳이 취조실이기 때문이리라. 그가 딱히 잘못한 것은 없지만 취조실이라는 장소가 주는 압박은 그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대단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괜히 고개를 꾸벅, 숙이며 공손하게 인사했던 것이다.

 

“진술서라는것도 나름 어떻게 적어야 하는지 양식이 있다보니까… 거기에 맞춰서 써야되거든요. 그래서 그런 부분을 좀 고치느라.”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잘 몰라서…”

“에이, 이런건 잘 몰라도 돼요. 모르고 사는게 좋지.”

 

 형사는,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웃었다. 그는 형사가 가볍게 웃는것을 보고 나서야 그것이 농인줄 알았다. 그래서 그 또한 가볍게 웃었다. 

 

“그러면 저희가 고친 부분도 있으니까… 한번 확인해보시고 진술서 아래 쪽에 서명좀 해주시겠어요? 귀찮겠지만 부탁해요. 이런거 절차 안지키면 피곤해져서…”

“아, 알겠습니다.”

 

 그는 형사가 건넨 조서를 받들어 모시듯 조심히 받고, 아래에서 위까지 차근차근 읽기 시작했다. [피해자 홍길동은 지난 2020년 3월 19일 22시 13분, 어해란로 사거리에서 신호를 위반한 차량에 동행인 김영희와 같이...] 확실히 정돈되고, 딱딱한 어조의 글이었다. 공문서라는건 이렇게 써야하는 거구나. 공문서라곤 18년을 살면서 한번도 본 적 없는 그에게 있어선 이것이 참 신기하게 다가왔다. 그런 신비로움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피고인 장길산은 사고 현장에서 도주해…] 라는 문장을 보고, 그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저, 형사님. 뺑소니범을 찾았나요?”

“예? 아아, 네.”

 

 그는 방금 전까지 따듯한 어조로 분명하게 말하던 형사의 말투가, 약간 어눌해 진 것을 눈치챘다.

 

“그… 뺑소니 당하고 나서 처음에 말했었던 것 같거든요. 차량번호표는 정확하게 못 보았지만 저희를 치고 창 밖으로 고개를 잠깐 내민 사람이 길죽한 귀를 가지고 있었다… 고.”

“.....”

“아무리 봐도 인간이 아니라 엘프였던 것 같은데… 엘프들은 이런 이름 안쓰지 않나요?”

“저기, 학생.”

 

 형사는 자신이 쓰고 있는 둥그런 무테안경을 벗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방금 전까지 그렇게나 호인같아보이고 개미 한마리도 못 죽일만큼 온화하게 생긴 사람이 눈빛 하나만으로 인상이 저렇게 날카로워 질 수 있는지 이제야 알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 하던 말을 멈추었다. 날카롭게 그를 쳐다보는 형사에겐, 그리고 찬 공기가 가득한 취조실에는 그만큼의 강제력이 있었다.

 

“... 서명, 할거죠?”

“......”

 

 자신을 부른 뒤에 있었던 잠시간의 침묵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다소 어두운 학창시절을 보낸 경력이 있어 눈치만큼은 빠른 그가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오래걸리지 않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 했지만, 영희 앞에서 했었던 말들이 떠올라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아무리 취조실이어도 그렇지, 요즘이 어느 시대인데 형사라는 사람이 피해자인 자신을 어떻게 하진 않을것이라는 얄팍한 계산을 다음에서야 말이다.

 

“저… 저기, 아무리 한반도 인이 3등급 시민이어도 그렇지… 지, 지금 사건 묻으려고 하시는…”

 

 그는 말을 채 끝마치지도 못했다.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형사의 커다란 주먹이 그의 볼을 강타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일어난 일은 그의 몸이 옆으로 엎어진 일이었다. 그가 자신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한 건, 그가 채 몸을 일으켜 세우기 전에 형사가 그에게 다가와 머리채를 잡은 이후였다.

 

“하여튼, 요즘 새끼들 머리에 똥만차선...  야, 그따위로 말하는 말버릇은 누구한테 배웠냐?”

 

 형사는 머리채를 붙잡고 그의 머리를 바닥에 쳐 박았다. 그서슬에 그는, 별로 마렵지도 않았던 소변을 찔끔 지려버리고 말았다.

 

“어..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하, 할게요. 서명 할게요. 죄송합니다.”

“누구 인생 조질일 있나 이 개새끼가… 엘프 님들 입장에선 그냥 무시해도 될 사건, 적당히 피고인 만들어서 합의금 주는게 얼마나 큰 선처인데.... 너 이 씨발새끼. 엘프님들 천리안에 엘프한테 뺑소니를 당했네~ 하면서 뻘 짓 하는거 걸리기만 해봐. 그때 우리 다시보는거야. 알겠어? 

“네. 네. 알겠습니다…”

 

 객기를 부린 결과, 그에게 남은건 바닥에 처박힌 이마의 상처, 그리고 퍼렇게 멍이 든 볼 뿐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서명을 하고 형사에게 조서를 건넸다.

 

“진즉 이러면 얼마나 좋아… 야, 이제 가 봐. 아. 혹시 몰라서 한마디만 더 하는데, 형사가 나한테 뭘 했네 어쩌구네 이딴 짓거리 해봤자. 그런거 믿어줄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그냥 하지 마라.”

“.....”

“사람이 말을 하면 대답을 해야지…”

“네, 네! 알겠습니다.”

 

 그는 형사와 눈이 마주치지 않게, 시선을 바닥으로 떨군체 비실비실 취조실 밖으로 나갔다. 그가 역사시간에 배우기로는 인간이 우연한 기회에 엘프들의 세계인 라이클란트에 침공하였고, 엘프는 인간들의 침공을 방어하다 침공 과정에서 피폐해진 인간들을 보호하고 품어주었다고, 그 결과 지금같은 태평성대가 온 것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뺑소니를 해도 아무런 벌도 안받을 정도로 위세가 등등한 엘프를 보니 참으로 궁금해졌다. 인간들은 대체 무엇을 믿고 엘프들의 세계에 침공을 가한것인가?

 

“..... 찝찝해.”

 

 그가 가진 궁금증은, 축축한 속옷때문에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인간이 공포를 느끼면 진짜로 소변을 지리게 되는구나. 미디어에서 과장되게 묘사를 한 게 아니었구나. 그는, 그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다.

 

편의점


 

 그는 자신의 방 한켠에 처박혀 있는 청바지와 맨투맨 티셔츠, 그리고 가벼운 점퍼하나를 걸치고 방을 나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한번 자신 쪽으로 돌리더니, 다시 무표정하게 뉴스를보는 어머니의 모습이 그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인간 우월주의자 국제 테러단체 ‘BOW’, Brand old world의 징후가 한국에서도 포착되어… 경찰과 엘프 1등급 수사관들이 공조해…]

 

“나갔다올게.”

“그래. 너무 늦게 다니지 말고.”

 

 천근같은 무게가 느껴지던 입을 떼고 나서야, 그는 나갔다온다는 말을 할 수 있었다.어머니는 한숨을 한번 픽, 쉬더니 늦게 다니지 말라는 말을 고개도 안 돌리고 할 뿐이었다. 그는 어머니를 등지고 도망이라도 치는 듯 집 밖을 나섰다.

 

“......”

 

 3층, 2층, 1층. 층을 하나씩 내려갈 때 마다 가슴에 있던 먹먹함은 날아가고, 그가 아파트 밖으로 나오자 남은것은 조그마한 찝찝함 뿐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자신을 보는 시선이 점점 바뀌어가는것을 느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자신의 지격지심때문인지도 모른다. 허나, 그것을 확인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으니, 그는 찝찝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던것이다.

 

 그는 한숨을 쉬며, 주머니에서 담배 한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그리고 밴치에 앉아 담배를 한대 태우며, 자신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생각했다. 그가 집에서 아무것도 안하게 된 지, 그러니까. 조금 더 곱게 말하자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된 지 2년이 넘었다. 자신이 가고 싶은 대학교를 가기엔 그가 가진 실력이 조금 모자랐고, 그렇다고 그 조금을 채우기 위해 1년을 통으로 날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부모님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대학교를 안 가기로 했었다. 아! 지금 돌이켜보자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이었는지. 그는 그것이 참으로 개탄스러웠다. 그와 동갑인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그들은 청춘을 구가하고 있었다. 아마 그들은 지금쯤이면 대학 교수의 수업을 적으며 잘 이해하지 못한 어떤 지식을 노트에 빼곡히 적어놓고 있을 것이다.

 

“하아…”

 

 그들에 비해 자신은 지금 어떠한가. 졸업하고 약 3개월 동안은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고민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다, 자신이 어렸을 때 부터 꾸준히 하던 것은 글짓기밖에 없었다는 생각에 ‘나는 글을 쓰며 살아가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였고, 그런 생각과 동시에 떠오른 의욕도 3개월을 가지 못한채 죽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홍길동이라는 남자는 그 때 죽어버린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아래로 축 늘어진 담뱃재를 털고, 담뱃곽을 열었다. 담뱃곽엔 아무것도 없었다. 아, 그렇지. 어제 담배를 사려다가 깜빡했지… 그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투덜거리며, 집에서 5분거리에 있는 편의점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과자라도 하나 살까, 하던 가벼운 생각은 어느새 방금 전, 자신의 삶이 어떠한지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예전부터 쓰던 소설을 고치고, 고쳐서 요즈음 떠오르고 있다는 웹소설 공모전에 투고했다. 하지만 그는 번번히 고배를 마셨다. 그나마 심사평이라도 들을수 있었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알았을것이지만, 그의 글은 심사평을 들을 수 있을만큼 올라가지도 못했었다. 이것이 그의 의욕이 죽은 원인이었다. 홍길동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타살당한 것이라고,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홍길동이라는 사람의 마음이 죽은 뒤에 일어난 일은, 부모님의 냉대였다. 처음에는 그래도 애가 무슨 생각이 있어서 대학을 안가겠다고 하는 것이겠거니, 하면서 그를 지켜본 부모님은, 계절이 바뀌고 년도가 바뀌어도 집 구석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를 보며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가 느끼기엔 그의 부모님은, 차라리 그가 아무 말 없이 집에서 사라지는 것을 바라는 게 아닐까 싶었다. 1년 전만 해도 “글 쓰러 나갔다올게요.” 라는 말을 하면 어디 갈건지, 언제 돌아올건지 정도는 물어보던 어머니가 이제는 아무 말 없이 나갔다 와도, 너무 늦게 들어가지 않는 이상에야(정확히 말하면 어머니가 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잠이 깨는 시간대가 아닌 이상에야)  그에게 단 한 마디말도 하지 않고, 다녀왔다는 인사에도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처음엔 부모님이 자신에게 익숙해지신 것이겠거니, 했다가 지금의 자신에게 익숙해지는 것이야말로 그에게 할 수 있는 최흉의 학대라는 생각에 잠을 못 이룬 적도 있었다.

 

“어서오세요… 아, 형. 간만이네요.”

“아, 안녕. 대타야?”

“네, 오늘 오후 근무하는 사람이 갑자기 아프다고해서…”

 

 깊은 한숨을 들이쉬며, 그는 편의점에 들어섰다. 그리고 무슨 과자를 먹을지 편의점을 서성이다 딱히 먹고싶은 과자도 없고, 요즈음 살이 찐 것 같다는 생각에  그냥 카운터 앞에 섰다. 카운터를 보고 있는 아르바이트 생은, 취객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을 음료 하나 사주며 위로해준걸 계기로 친해진 아르바이트 생이었다. 이야기를 몇 번 해보니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것 같아. 이 친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자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아서, 아르바이트 생이 그를 친하게 생각하듯, 그 또한 아르바이트 생을 친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 마쎄 하나만..”

“마쎄 팩이죠?”

“응.”

 

 그가 담배 하나를 계산하자, 담배 진열대에서 무언가, 무전기에서 전자파가 튀는 소리가 났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어디서 들어본 적 있었는데… 그는 잠깐 생각해보다가, 아르바이트 생이 하는 말을 듣고 이 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생각해냈다.

 

“아, 형. 저 이번주 까지만 하고 여기 안나와요. 이제.”

“어? 그만 두는거야?”

“짤렸어요. 여기도 이제 물건 진열 자동화 디스펜서 들여놨거든요.”

 

 아, 이 소리는 물견 진열 디스펜서를 들여놓은 마트같은데서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누군가가 물건을 사면, 물건의 빈 자리를 센서가 감지해서 텔레포트 마법으로 빈 자리를 채워넣는다는, 인간의 과학과 엘프의 마법이 만든 마과학 기술 중 하나였지. 그는, 언젠가 뉴스에서 자동화, 무인화를 지향하는 마과학 때문에 일자리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뉴스를 떠올렸다. 이젠 편의점마저 안전하지 않은 시대가 왔구나.

 

“아이고… 진짜? 그래도 카운터 보는 사람은 필요하지 않나?”

“바코드 찍는 거나, 도둑 잡는거는 이미 자동이고… 물건 진열때문에 아르바이트가 필요했던건데, 이제 진열도 자동이니까 뭐… 일하려면 좀 더 일할 순 있었는데, 여기 점장 성격이 진짜 개떡같아서 더 못해먹겠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그만둔다고 했죠.”

“그럼 여기 그만두고 뭐하게?”

“그러게요… 뭐해야 좋냐. 진짜.”

“그러게나 말이다…”

 

 그는 잠깐 얘기하기 위해, 아니.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 위해 아르바이트 생에게 무어라도 사주고 편의점에 조금 더 눌러있을까, 생각하며 커피를 집으러 가다 다른 사람이 편의점 문을 여는 것을 보고 생각을 달리했다. “나중에 보자.” 라는 말을 남기곤, 그는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마치 도망치듯 편의점을 나왔다. 편의점에 들어온 사람이 목에 매고있는 사원증이 그에겐 너무 뾰족하게 다가왔다.

 

전도사


 

 그는 편의점에서 나와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피시방으로 향했다. 이것이 직업도, 할 일도 없는 그의 일과였다. 오후 두시나 세시쯤 느즈막하게 눈을 떠, 샤워를 하고, 옷가지를 대충 주워입고 나와 피시방으로 가서, 12시나 1시쯤 되는 한 밤에 집에 들어가는 것. ‘집에선 글이 잘 안써진다. 집중 안된다.’는 것이 그의 말이지만, 피시방에서도 딱히 집중이 잘 되진 않는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는건 홍길동, 본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버려가면서 피시방에 있는 것은, 밖에서 죽치고 있을 공간이 피시방말고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묵묵히 걸어 피시방이 있는 번화가에 다달았다. 이제 신호등을 두개만 건너면 피시방이었다. 오늘은 반드시 피시방에서 글을 쓰리라,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그는, 그렇게 다짐하며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했다. 그 때였다, 누군가가 앞을 나아가려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대체 누구인지, 그는 불쾌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하이델룬 한양진리회에서 좋은 말씀 전하려고 왔어요. 인상이 선해보이셔서~”

“하…”

 

 그의 팔을 잡은 건, 50대 쯤 되어보이는 아주머님 전도사 둘이었다. 아니, 그의 입장에서 봤을때 그들은 전도사조차 아니었다. 그가 생각하는 전도사에 비하면 그 둘은 너무나도 천해보였으니까. 하이델룬 교라면 지금 한국에선 절반이 넘는 사람이 믿고있는 종교인데, 대체 무얼 전하기 위해 전도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고, 이렇게 무례하게 말을 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아무 말 않고 팔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대체 어디서 나오는 힘인지는 몰라도, 아주머니들의 힘은 너무나 거셌다. 아니, 어쩌면 집구석에만 처박혀 있는 그가 약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 제가 지금 바빠서…”

“진짜 몇분만, 몇분만 이야기 듣고 가세요. 네?”

 

 보아하니 전도사 둘 중 하나는 적극적으로 말을 하는 역할이고, 다른 한명은 전도할 때 미끼 선물같은걸 주는 역인것 같았다. 바구니 안에 든 걸 보니 물티슈일까. 평소라면 공짜 물티슈라며 내심 기뻐하곤, 이야기를 조금 들어줬을지도 모르겠으나 유감스럽게도 오늘 그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저기요. 지금 바쁘다니까요. 약속있어서 가는 사람한테 진짜…”

“에이~ 그러니까 진짜 딱 몇분만. 얼마 안 걸려요, 그냥 수도회 같이 다니자고…”

“그리고, 하이델룬 교면 엘프나 믿어야 될 종교 아닙니까? 라이클란트의 신을 제가 왜 믿어야 해요? 게다가, 하이델룬 교에선 천주이신 용신님을 안믿으면 지옥에 간다고 가르친다는데, 저는 그런 쫌팽이 같은 신 못믿겠습니다.  이제 그만 가도 돼죠?”

 

 그래서, 그는 자신이 평소에 하이델룬 교에 가지고 있었던 불만을 쏟아 부었다. 도대체, ‘나를 믿지 않으면 지옥으로 떨어질지어다’ 같은 말을 하는 신을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신이라는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작자가 그렇게까지 속이 좁아도 되는 일인가? 평소엔 피곤해서 이렇게까진 말하지 않지만, 그는 이런 말로 몇몇 전도사 미달인 자들을 쫓아보낸 경력이 있었다.

 

“아이, 청년도 참. 용신님을 잘 몰라서 하는 말이야…”

 

 하지만 지금 그를 붙잡고 있는 전도사는 그런 전도사들보다 좀 더 공부한 사람인 듯 싶었다. 전도사는 그를 붙잡고 그가 가지고 있는 하이델룬 교에 대한 편견을 하나하나씩 부숴나갔다. 그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이런 낮시간에 길거리에서 속물적인 짓거리(그에게 있어 이런 방식의 전도는 신앙심의 발로가 아니라 교세를 늘리려는 수단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이런 일을 속물적인 일로 보았다) 를 하고 있는 아주머님한테 한 마디도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언제 시간되면, 꼭 수도회 한번 와 봐요. 응?”

“... 네, 알겠습니다.”

 

 결국 그는, 십 분 가까이 길거리에 서서 용신님이 얼마나 자비로운 신이며, 어찌하여 용신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는지(인간이 라이클란트에 큰 죄를 지었으나, 라이클란트의 수호신인 용신이 그 인간들이 가진 원죄마저 사해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수도회에 다니면 무어가 좋은지 설교를 들었다. 그는, 자신이 어줍잖게 말 붙힌 것이 실수였다고, 그런 실수를 했는데도 이정도밖에 시간을 안 뺏긴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손에 공짜 물티슈가 들려있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어쨋건, 돈을 주고 사려면 2천원 상당의 물건 아닌가. 십 여분을 투자해서 2천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싼 값이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반박하려면 얼마든지 반박 할 수 있었으나, 반박했다간 물티슈를 못 받았을 수도 있었다고.

 

 그렇게 한 신호등을 지나고, 다음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할 때였다. 그는, 다시 한번 누군가에게 팔을 붙잡혔다. 오늘은 참으로 재수가 없는 날이구나. 방금 전에 말을 못한 것 까지 다 합쳐서 이 사람에게 쏟아부으리라. 그는 굳건히 다짐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길동아! 너 길동이 맞지? 몇번이나 불렀는데…”

“어…”

 

 그렇지만 그의 팔을 잡은 사람이 너무나도 뜻밖의 사람이었기에,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팔을 붙잡은 사람을 뻔히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곤 연락도 안 되던 동창과,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주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영희야. 오랜만이다.”

 

 그는, 고등학교 동창에게 인사했다.

 

카페


 

 그는 그가 시켰던 청포도 에이드와, 영희가 시킨 따듯한 카페모카를 들고 카페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면서, 왜 카페에 있는 음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비쌀까. 하고 생각했다. 서빙도 안하고, 원가도 별로 안드는데. 카페는 분위기를 사기 위해 가는 곳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분위기의 값이 너무 비싼것 아닌가. 차라리 나도 카페를 하나 차려볼까. 하고 생각하다가 계단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 해서, 그 뒤엔 아무 생각 않고 커피를 나르는데 집중했다.

 

 무사히 계단을 올라간 그는, 영희가 앉은 자리를 찾아 커피를 무사히 나르는데 성공했다. 그는 카페모카를 영희 앞으로 내밀며, 슬쩍 영희를 쳐다보았다. 어느정도 값 나가보이는 블레이저가 눈에 들어왔다. 집에 굴러다니는 후드티를 아무렇게나 뒤집어 쓰고 나온 자신과는 천지차이였다.

 

“우와, 이게 얼마만이야~ 진짜 오랜만이다. 그치.”

“응? 음. 그러게.”

 

 그는, 자기가 입은 옷과 영희가 입은 옷을 보면서 회의감에 빠져들었다. 옛날엔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은 동아리에 들어가, 가끔씩 얘기를 나누는 사이였는데, 지금 복장에서 느껴지는 이 괴리감은 무언가. 그는 고개를 가볍게 젓고 이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 썻지만, 한번 싹튼 생각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오늘은 공강이야?”

“아니 뭐… 대학교는 안다니고, 요즘엔 그냥… 뭐.”

“아, 아~ 그치, 그럴수도 있네. 미안해.”

“너는?”

“나는 기사 쓸게 있어서 취재차 요 근처에 들른거야. 신문사에 취직했거든. 아, 이름은 물어보지 말구~ 들어봤자 모를걸?”

“아, 그래…”

 

 잎새에 부는 바람에 괴로워 하는 사람이 있다. 지금의 그가 그러하다. 그는, 영희가 하는 말 하나하나에 상처를 입고 있었다. 지금 앉아있는 자리가 카페가 아니라 술집이었다면, 그리고 그가 술을 몇잔 마신 상태였다면 괜시리 화를 내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것이었다. 그는, 자신보다 공부도 잘 못하고, 같은 책을 읽어도 저차원적인 이야기를 하던 영희가 자신보다 먼저 번듯한 자리를 구했다는 사실에 속이 끊기는 듯 한 고통을 느꼈다.

 

“그런데… 그러면 지금 일하는 중인거야? 바쁠텐데…”

“우리 회사는 좀 후리(free)해서 조금 쉬는 것 정도는 괜찮아. 내 상사들도 취재 나간다 해놓고 사우나에서 한 두시간씩 자다 오고 막 그래.”

 

 영희가 킥킥, 웃는 소리가 그에게 있어선 칼날 같았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언제 밥이라도 한번 먹자. 너한테 할 얘기 있었는데 연락이 안돼서 못했었거든...” 라는 말에 “혹시 지금은 시간 안돼?” 라고 물어보지 않았을텐데!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애꿏은 빨대만 이빨로 아작아작 씹을 뿐이었다.

 

“그래서 길동이 넌 요즘 뭐하고 지냈어? 전화번호 바꿔서 연락도 안 되고… 친구들한테 물어 봐 봤자 너랑 연락되는 사람 한명도 없고. 내가 너를…”

“영희야. 하고 싶단 얘기가 뭐야?”

 

 더 이상 불쾌한 얘기가 나오기 전에 빨리 이야기를 끝마치고 싶어서, 그는 영희의 말을 끊었다. 말을 해놓고도 너무 예의 없는 행동이었나, 혹시 영희의 기분이 상하진 않았을까 싶어서 흘끔, 눈치를 봤지만 영희는 딱히 화난 것 같진 않아보였다. 그는 옛날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했다. 하긴, 영희는 원래 저런애였지. 은근히 무시하는 행동을 해도 그게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인지 모르는 애였다. 아, 차라리 나도 저런 성격을 가지고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니까…”

 

 영희는 말을 하려다가 핸드백에서 직육면체의 조그마한 기둥 하나를 꺼냈다. 딱 립스틱 정도의 크기였다. 그는, 립스틱이 저렇게 직사각형 케이스에 담겨서도 나오는구나 생각했다가 직육면체 기둥의 틈새가 벌어지며, 틈새론 정체모를 빛이 나오는 것을 보곤 생각을 고쳐먹었다. 보통 저렇게 발광하면서 빛을 뿜는것은 마과학의 부산물이었다. 저것이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마법과는 관련이 있었다. 그렇지만 마법이나 마과학이라는게 개인 단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었나. 어떤 제품이건 그 앞에 마과학이 붙으면 기백만원을 가볍게 호가하지 않던가… 신문 기자가, 그것도 말하면 어디인지도 잘 모를 신문사에 다니는 기자가 손에 넣을 수 있는건가? 

 

“... 길동아, 너 예전에 말했던거 기억해? 동아리에서, 있잖아.”

“..... 내가 뭔 얘길 했었지?”

“인간들이 엘프를 침략했을리가 없다고, 200년전 인류의 기술력으로는 이계로 가는 포탈같은걸 만들 수가 없다고. 그렇게 말했었잖아. 기억나지?”

“아…”

 

 그 말을 듣자 동아리에서 있었던 일들이 새록새록 기었났다. 그래, 한창 저런 말을 하고 다녔던 때가 있었지… 인간 우월주의자이자, 음모론을 좋아하는 한 소설가에게 푹 빠졌을때 말이야. 아! 나는 도대체 왜 그런 사람의 글을 읽었을까, 왜 그런 사람의 글을 진심으로 좋아했을까! 도대체 왜 그런 사람의 글을 주변에 알리려고 노력했을까! 그는, 진심으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싶었다. 그러다가, 왜 이 친구가 그런 소리를 할까 불안해졌다. 아침에 봤던 뉴스가 생각났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아니, 뭐…”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청포도 에이드를 한모금 빨아 마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영희가 방금전에 한 질문보단 요즘 경찰이 어떻게 수사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가득했다. 완전 범죄라는게 없는 세상이 된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엘프들이 가진 마법을 이용해서 천리안,  사이코메트리같은게 수사에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대화가 사이코메트리로 읽힌다면… 그 이상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의 인생은 이미 밑바닥이었다.

 

“이거 말이야.”

“응?”

“사이코메트리 방해장치야. 덧붙여서 다른 사람들은 우리 대화를 잘 못듣게하는 방음 기능까지 있어. 나는, 네 솔직한 생각을 듣고싶었어.”

“..... 무슨 얘기가 하고싶은거야?”

“알겠어,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길동아, 혹시 BOW에 들어올 생각 없니?”

 

 그의 불길한 예감은 정확히 적중했다. 영희의 말을 듣자, 타오르듯 느껴지던 목의 갈증이 가슴을 통과해 위쪽으로 이동한 듯 싶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건지, 아니면 쓰린건지… 그는, 침을 한번 삼키고 이 말을 어떻게 받아야 할 지 고민했다. 농담하지 말라고 말하면 될까? 아, 내 어휘가 이렇게 빈곤할 줄이야..! 그는, 요즈음 게임만 하고 책은 전혀 읽지 않은 자신을 반성했다.

 

“우리 4년전에 뺑소니 당했던거… 혹시, 아직 기억하고있니?”

“아… 기억하고 있지.”

 

 야간 자율학습을 끝마치고 혼자 하교하다 도중에 영희를 만나 같이 하교했던 것을, 그리고 하교길에 서행하던 차에게 치인것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차가 서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친 곳 하나 없었으니 사실 별 것 아닌 일이었으나, 그 사건만큼은 그에게 잊을레야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그는 지구에 얼마나 큰 어둠이 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 그 뺑소니범, 틀림없이 엘프였잖아?”

“... 응.”

 

 가로등 빛도 희미하고, 달빛도 잘 안보이는 어두운 날이었으나 그는 자신을 친 뺑소니범이 엘프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히 알고있었다. 자신을 치고 창을 열어 고개를 스윽 내민 사람의 실루엣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길쭉한 귀를 가진 사람이었다. 뺑소니범은 틀림없이 엘프였다.

 

“나, 취조실에서 한참을 말했어. 나를 친 사람은 틀림없이 엘프라고… 몇 시간동안 그렇게 얘길했는데 들어주질 않더라. 괜히 이상한 사람이 뺑소니범으로 잡혀가고…”

“몇 시간동안…”

“너도 그랬겠지만 말이야.”

 

 … 이 말을 듣고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평소에 인간들은 더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고, 엘프한테 억압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그래서 사건을 대충 묻으려고 하는 경찰에게 소심하게 저항했다가 한 대 맞았다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자신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 물론 이런 말 들어서 당황했을거라는거 알아. 그리고 세상이 너무나 거대한데, 내가 부딫혀봤자 뭐가 달라질까 하는 생각도 들겠지. 그렇지만 길동아. 이건 알아줬으면 해. 세상이 바뀌진 않을지언정, 바뀐 사람들을 보고 생각을 다시 해보는 사람들이 생긴다는 거.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하지 말고, 사람을 바꾼다고 생각해 줘.”

“.....”

“지금 당장 답을 달라는건 아니야. 충분히 고민해보고…”

“아니야.”

“응?”

“아니야, 영희야. 지금 말할 수 있어. 지금 대답할게.”

 

시사 토론


 

 그는 담배 한대를 태우고,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올라가는 발걸음은 참으로 무거웠다. 딱히 별 이유가 있는것은 아니었다.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피시방에서 한 마지막 게임을 무참히 패배한것이 그 이유가 될 수 있겠다. ‘마지막 판은 이기고 가야지’라는 고집을 부리기엔 상당히 늦은시간이었기에, 그는 아쉬움과 ‘결국 오늘도 글은 한 자도 안썻네. 내가 그렇지 뭐’라는 자조를 가슴속에 담은채 귀갓길에 오른 것이다. 

 

“다녀왔습니다.”

“어, 왔어? 오늘은 그래도 좀 일찍왔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처음 밖에 나갔을 때와 똑같은 위치에 똑같은 자세를 잡고 앉아있었다. 그래도, 나갈때완 다르게 들어올 때엔 거실이 조금 정돈된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아마 어머니가 청소기라도 한번 돌린 것이리라… 그는, 예쁘게 한 입 크기로 깎은 사과를 이쑤시개로 찝어 아삭아삭 씹어먹는 어머니의 옆 얼굴을 보았다. 눈가 주변에 저렇게 잔주름이 많았었나… 저 잔주름 하나 하나에 얽힌 세월은 얼마나 무거울까. 같은 생각이 들어, 오늘 아무것도 안한 자신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뭐 보고 있었어요? 하루종일.”

“뭐 집밥 김사부 봤다가… 지금은 뉴스본다.”

 

 그 뒤에 이어진 보면 모르니? 라는 핀잔에, 그는 방금전의 부끄러움을 싹 잊어버리고 말았다. 굳이 저렇게 퉁명스럽게 말해야 할 일인가. 괜히 오늘 하루 고생 많으셨다. 내일은 내가 집안일을 하겠다고 말하려고 한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진것이다. 그는 더이상 살갑게 말을 붙히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말을 붙혀놓고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기에도 애매한 상황이 되어, 그는 어머니가 보는 뉴스를 같이 보게 되었다.

 

[네, 시청자 여러분. 이제 뉴스 데스크 시사토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요즈음, 인간 우월주의자 국제 테러단체인 ‘BOW’의 활동이 늘어나는 추세인데요. 이제 한국 사회에까지 침투한 ‘BOW’. 그들의 주장이 과연 옳은 것인지, 왜 요 근래 이렇게 활동이 늘어나고 있는지 분석해 보는 시간을…]

 

“어우, 대체 무슨 정신머린지 몰라… 애, 길동아. 뉴스 보니까 저기서 젊은 사람들 꼬시는데 엄청 열낸다더라, 너는 저런데 들어가지 마라.”

“...... 아, 네. 알겠어요. 안들어가죠. 물론.”

 

 그는 카페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나 하나 살기도 바빠서, 미안하다. 대신 네가 거기에 들어간건 누구한테도 안 말할게.’ 라고 말했을 때에 영희가 보여준 그 표정은, 4년 전 취조실에서 뜬금없이 경찰이 휘두른 주먹보다 더욱 큰 폭력이었다. 죄책감이 들었지만 거기서 고개를 끄덕이기엔 영희의 말이 너무나도 무겁게 다가왔다. 사람을 바꾸는 활동이라, 나 자신도 못바꾸고 있어 허덕이고 있는데 이런 내가 누구를 바꾼단 말인가…

 

[‘BOW’가 끼치는 가장 큰 악영향이 역사를 날조한다는 겁니다. 게다가 ‘BOW’가 보여주는 역사가, 사람들이 보기엔 되게 매력있는 이야기거든요. 우리들은 아무 잘못없다. 우리는 이유없는 착취를 당하고 있는것이다. 이 얼마나 달콤한 말입니까. 그런데 이런 주장들이…]

 

 인간의 몸으로 엘프들을 위한 열변을 쏟아내는 한 역사 전문가를 보면서, 그는 옛날의 자신을 회상했다. 그리고 다시 부끄러워했다. 인간은 침략자가 아니라 침략 당한자라고 말한것이 부끄러운게 아니었다. 옛날엔 자신의 생각에 열을 담아 말할 수 있었으면서, 지금은 똑같이 생각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안하며, 저 혼자서 가라앉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에휴… 저 잘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씻고 자.”

“아, 그럼. 물론이죠. 지금 씻을 거예요…”

 

 남들 다 가는 대학교도 가지 않은 채, 부모 집에 얹혀사는 무능력자라는 딱지가 주는 먹먹함은 집에서 나가버리면 도피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생각도 말하지 않는 도망자라는 딱지가 주는 이 무게감으로부턴 어떻게 도망칠 수 있을까. 그는 후다닥 씻고 침대에 몸을 뉘였다. 오늘은 정말 괜히 피곤하네, 일찍 자야겠어…

 그는, 몸을 뒤척이며 한숨을 몇번 쉬다가 내일은 정말로 글을 써야지. 라는 다짐을 하며 잠들었다. 

 

 

Posted by 비좀
,

내가 막 성인이 되었을 즈음이었다. 전국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의 단역을 연기하기 위해 지방에 내려갔었다. 그 지역의 이름이 기억나진 않지만 교토 근처였었던 기억은 있다. 왜 이런 걸 기억하냐면 그 지방에 있었던 숙소가 전통 일본 가옥이라고 하면 생각이 나는 그런 방을 가진 숙소였기 때문이었고, 그 교토라고 하면 떠오르는 아이돌과 같이 한 방을 썼었기 때문이었다.

 

코바야카와 사에, 그 때 나와 한 방을 썼던 아이돌의 이름이었다. 나와 같이 교토가 고향인 아이돌이었고, 고향이 똑같은 데도 불구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나의 친구였다. 그리고 -

 

슈코 씨...”

“... 사에 씨.”

 

나의 애인이기도 하였다.

 

슈코 씨의 숨결... 평소보다 더 뜨겁사와요.”

, , 그래? 미안, 사에 씨.”

, 아뇨, 딱히 잘못 됐다는 건 아니고 그냥 제 감상이니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오히려 제가 죄송하여요.”

 

3일간의 촬영이 끝나던 날이었다. “슈코도 이제 성인이니 한 잔 해야지?” 라는 말을 들은 날이었고 나를 핑계로 만들어진 촬영 뒤풀이 자리여서인지 유독 나한테만 술이 쏟아지도록 돌아온 날이었다. 그런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신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내 오른손에 닿은 사에 씨의 허리는 생각보다 말캉말캉했고, 사에 씨의 뒤통수를 감싸듯 잡고 있던 왼손엔 비단결 같은 사에 씨의 머리카락의 감촉이 느껴졌다. 어두운 방 안인데도 불구하고 사에 씨의 눈이 평소보다 더 초롱초롱 해졌다는 것이 느껴졌고, 어두운 방이니까 더더욱 사에 씨의 숨결이 잘 느껴졌고, 사에 씨의 촉촉한 입술 또한 잘 느껴졌다.

 

슈코 씨... 그럼 이제....”

 

그런 말을 하며 사에 씨는 다테마키에 손을 올렸다. 사에 씨가 유카타를 벗은 뒤에 일어날 일을 생각하니 헤롱헤롱 했던 내 정신이 냉수라도 한번 뒤집어 쓴 듯 갑자기 번쩍 들었던 일이 기억에 남았다.

 

, , 사에 씨? 잠깐만.”

“...?”

, 오늘은 여기까지, 라는 걸로. 다음 단계는 다음에 시간이 나면 밟는 게 어떨까?”

? 슈코 씨, 그게 무슨...”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나 같은 것 보다 훨씬 어른스러워서 항상 까먹지만 사에 씨는 나보다 어렸다. 그런 사에 씨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키스 후의 다음 단계를 밟으면 우리가 지금 맺고 있는 관계보다 더더욱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일까, 이것만큼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여하튼 중요한건 내가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사에 씨의 몸에서 손을 뗐다는 것이다.

 

오늘은... 너무 과음을 한 것 같아서 말이야. 몸을 가누고 있는 게 힘드네. 미안 해 사에 씨, 이렇게나 애를 태워놓고 이런 말을 하는 못된 사람이라서. 하지만 사에 씨라면 이해 해줄 거지?”

이런 걸로 미안해 할 필요 없사와요, 고집을 부린 건 저 인걸요. 알겠어요. 슈코 씨. 그렇다면... 다음에.”

“... 고마워, 사에 씨.”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일은 내가 막 성인이 되었을 때 즈음에 있었던 일이다. 이젠 3년이 지난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일을 이렇게나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는 까닭은 나는 사에 씨와 다음 단계를 밟지 않은 채로 헤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사에 씨와 나는 알게 모르게 점점 멀어져갔다. 사에 씨는 사에 씨 나름대로 어색해했고, 나는 나대로 사에 씨를 보는 것이 날이 가면 갈수록 힘들어졌다.

 

그래서 나는 일을 그만 두었다.(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이것이 제일 큰 이유였다.) 그 뒤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프로듀서가 화를 냈었는지, 아니면 상심에 젖었었는지, 나와 같이 일을 하던 다른 동료들의 반응은 어땠는지, 다만 집으로 내려가기 전에 사에 씨가 나한테 했었던 말은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있다.

 

언젠가, 시간 날 때 한번 뵈어요. 마침 사는 곳도 똑같으니까. ! 그리고 연락 하는 것도 잊지 않아주셨으면 해요.”

그래, 사에 씨. 아무리 일이 바빠도 매일매일 연락 하는 거다? 시간 나면 우리 가게에 한번 들러. 맛있는 아츠하시 한 접시 정도는 대접 해 줄 테니까.”

 

이런 대화를 나눈 지도 벌써 3년이 지났다. 하지만 사에 씨한테 연락이 온 적도, 사에 씨가 우리 가게에 찾아 온 적도 한번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로 3년 동안 사에 씨한테 연락을 하지도, 사에 씨를 찾아 가지도 않았다. ‘연락을 해볼까?’ 하는 잠깐의 생각도 길거리를 걷다보면 싸악 가셨다. 어딜 가도, 어딜 봐도 사에 씨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 사에 씨는 지금 많이 바쁠 테니까 연락 해봤자 못 보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핸드폰에서 손을 뗀 적이 몇 번일까.

 

알고 있었다. 저런 생각은 그저 핑계라는 걸, 끝나지도, 그렇다고 진행 중인 것도 아닌 애매한 우리 사이의 끝을 보기 싫어서 사에 씨와의 연락에서 도망치고 있다는 걸.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도망쳤다. 화과자 집 카운터에 앉아서 손님을 응대하는 무료한 일상으로.

 

누군가가 말했던가. 도망쳐서 도착 한 곳에 낙원이란 없다고. 나 또한 그러했다. 자기혐오와 자신에 대한 불신만을 안은 채 연락이 오지 않는 핸드폰을 그저 붙들고만 있었다. 애매한 관계와 부(-)의 감정만을 껴안고 도망친 지 벌써 3년이 지났다.

 

───────────────────────────────

 

크게 하품을 하려다가 그 하품을 억지로 삼켰다. 하품을 하려던 순간에 손님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제 곧 폐점시간인데 이런 늦은 시간에 무슨 진수성찬을 먹겠다고 화과자집에 들어오는 건지. 마음속으로나마 혀를 세차게 찼다.

 

어서 오세요.”

 

인사를 한번 하며 지금 들어온 손님을 쳐다보았다. 너무나도 짧은 청색 핫팬츠에 몸에 짝 달라붙는데다 기장이 짧아서 허리를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하얀 티셔츠. 얼굴의 반을 가리는 선글라스와 백금발에 가까울 정도로 채도가 밝은 금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불량해 보이는 여성의 청사진을 꼽으라고 하면 저런 인상착의를 꼽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우리 가게에 들어온 손님은 그렇게 불량 해 보이지가 않았다. 입고 있는 옷이 누군가의 옷을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억지로 빌려 입은 듯 어울리지 안아보였기 때문이었다.

 

저기요.”

 

가게를 둘러보던 문제의 손님은 나를 부르더니 카운터로 뚜벅, 뚜벅 걸어왔다.

 

뭐 찾으시는 거 있으신가요?”

아츠하시 한 접시정돈 대접 해 준다고 해서 왔는데요.”

?”

 

문제의 손님은 정수리에 손을 올리더니 자신의 머리채를 쥐고 그대로 손을 왼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더니 금발도 손을 따라 왼쪽으로 스르륵, 내려갔다. 가발이라는 걸 눈치 챈 건 가발을 벗자마자 비단결 같이 부드러워 보이는 검은머리가 터져 나오듯 나온 후였다.

 

“...?”

후훗, 눈치가 너무 무뎌진 것 아닌가요? 슈코 씨.”

“......”

 

얼굴의 반을 가리던 선글라스 너머에서 나온 부드럽게 쳐진 눈을 보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 너무나도 안 어울리는 차림을 하고 내 눈앞에 섰기 때문이었다.

 

사에 씨?”

오랜만이여요.”

그러게, 오랜만이네.”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을 했지만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사에 씨가? 여기에? ? 지난 3년 동안 아무 일도 없었는데? 어째서? 온갖 질문들이 내 머릿속을 떠다녔지만 아무런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그 안 어울리는 복장은...”

요즘 길거리를 다니면 알아보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만... 이렇게 입고 다니면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편하긴 한데 너무 부끄럽사와요.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옷을 입고 다니는지...”

하긴, 길거리 다니면 사에 씨 얼굴이 안 보이는 데가 없지? 인기 스타는 큰일이겠어.”

 

꼭 입어야 되는 게 아니라면 미니스커트도 제대로 못 입던 사에 씨가 길거리에서 알아보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이런 복장을 하다니, 아무리 뉴스나 연예가 소식에서 떠들어도 실감이 되지 않았던 사에 씨의 성공이 이제야 내 피부에 와 닿았다.

 

심술궂은 말투는 여전하시군요.”

오랜만에 보니까 너무 반가워서 그만, 그래도 사에 씨라면 이해 해 줄거지?”

“... 그런 점도 여전하시네요.”

사람은 쉽게 안변하는 법이잖아? 그래서, 인기 스타가 여기엔 무슨 일로? 정말로 아츠하시 한 접시 얻어먹으려고 온 거야?”

일단... 차 한 잔 마시면서 얘기 하고 싶은데, 혹시 바쁘신가요?”

 

장난스러운 말투로 슬쩍, 사에 씨를 떠 봤으나 사에 씨는 항상 짓고 있는 영업용 미소를 유지하며 나에게 질문 할 뿐이었다. 대체 3년이나 지난 지금, 무엇을 위해 날 찾아 온 걸까, 좋은 쪽으로 생각을 하려 하여도 일을 그만두며 관계도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나에 대한 원망을 토로하러 온 것 아닐까 하는 생각만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바쁘진 않지만... 이 주변에 마땅한 카페나 찻집은 지금쯤이면 문을 다 닫았을걸? 게다가 사에 씨는 유명인이잖아? 제대로 얘기 할 곳이 있을지... 잘 모르겠네.”

으음, 그런가요...”

그러면 - ”

 

그러면, 다음에 시간이 맞을 때 보는 게 어떨까? 라는 말을 하려다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만약에 지금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예전에 있었던 일의 반복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충격과 동시에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서 마저도 그런 일이 반복된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할까.

 

우리 집에 올래? 사에 씨.”

?”

 

그렇게나 도망쳤지만 도망쳤던 만큼 원했던 목표가 내 눈 앞에 있었다. 조금만 용기를 낸다면 내 가슴 안에 응어리 진 모든 것을 풀어낼 수 있는 도달점이 이곳에 있었다. 이것마저 놓쳐버린다면 나는 무엇을 잡을 수 있을까.

 

, 혹시 일정이 있거나 하면 어쩔 수 없지만.”

오늘 밤은 딱히 일정이 있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나 늦은 시간에 실례가 아니올지...”

에이, 인기 스타가 집에 찾아오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우리 가족은 죄다 나랑 똑같아서 그런 거 신경 안 쓰는 사람들이니까 괜찮아.”

“......”

 

사에 씨의 표정은 참으로 미묘했다.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어떤 생각을 하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는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오늘 밤에만 실례를...”

정말? 고마워 사에 씨. 사실 예전부터 사에 씨를 우리 집에 데려오고 싶었거든. 저렇게 예의 바르고 번듯한 아가씨가 너랑 친구라는 게 말이나 되냐면서 우리 부모님이 사에 씨와 내 사이를 통 믿지를 않아서 말이야.”

 

내 농담을 듣자 사에 씨는 예전과 같이 웃어주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예전과는 다르게 다가왔다.

 

────────────────────────────────

 

유카타를 입으니까 마음이 안정되네요.”

내가 예전에 입었던 거 안 버려두길 잘했네. 방 청소를 한 게 꽤 오래전이라 엉망진창이긴 하지만... 어서 와. 사에 씨.”

그러면, 실례 하겠습니다.”

 

옷가지도 제대로 정돈 안 된 내 방에서, 사에 씨와 나는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그만 둔 후 프로덕션엔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사에 씨는 그동안 무슨 일을 해왔는지...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던 우리 둘은 어느 새 냉장고 안에 있던 맥주를 마시며 얘기를 하고 있었고, 대화 주제도 어느 샌가 과거 얘기로 바뀌어 있었다.

 

저기, 슈코 씨. 근데 말이어요.”

“... ?”

 

예전에 슈코 씨가 알아 본 레스토랑이 닫혀있었을 때, 슈코 씨 표정 정말 가관이었던 거 알아요?” 라는 주제로 얘길 하다가 저런 말이 나오는 걸 보니 이젠 정말 올 것이 왔구나, 싶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정말 비밀인데... 사실, 저도 이제 이 일 그만 두려고 해요.”

?”

 

너무 놀라서 손에 쥐고 있었던 맥주 캔을 엎어버릴 뻔 했다. 목소리와 표정은 평정을 가장했지만 이 가면이 얼마만큼 사에 씨한테 먹혔을지.

 

제가 아이돌을 시작 한 건 제가 배운 소양이 세상에 얼마만큼 먹힐지 알아보기 위함이었잖아요? 이젠 충분히 알아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사와요. 그렇다면 이제 이 일을 할 이유가 없는 것 아닐까.. 같은 생각이 들어서. 마침 계약 기간도 이제 곧 끝나거든요.”

으응...”

 

항상 사에 씨가 하던 얘기였다. 자신이 아이돌이 된 건 자신의 소양이 이 세상에 얼마만큼 통하는 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고.

 

다만, 부모님의 얼굴을 보는 게... 조금...”

? 사에 씨의 부모님? ?”

저로서는 이제 어엿한 아이돌이 되었다고 생각을 하지만, 부모님은 어찌 생각하실는지... 무서워요. 슈코 씨도 어찌 보면 저랑 사정이 비슷하잖아요? 여기에 대한 상담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런 것 때문에 찾아 온 건가. 한편으론 안심이 되면서도 어딘가 아쉬웠다.

 

사에 씨는 좀 뻔뻔해질 필요가 있어.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자식을 싫어하는 부모님은 없다고. 나만 해도 가출했다가 몇 년이나 지나고 나서야 돌아왔는데도 부모님이 딱히 싫은 소린 안하셨는걸. 사에 씨 부모님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 해.”

그래도...”

그리고 사에 씨가 살아온 기한 동안 부모님의 말을 들은 기한이 부모님의 말을 안 들은 기한보다 더 많잖아? 하긴, 사에 씨는 이런 식으론 생각하기 힘들려나. 사에 씨랑 나랑은 다른 사람이니까 말이야.”

그렇죠, 슈코 씨는 정말로 저랑은 다른 사람이죠.”

 

사에 씨는 마시고 있던 맥주 캔을 바닥에 내려놓고 나에게 다가왔다. 사에 씨의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땐 사에 씨의 손이 내 뒤통수를 감싸 안은 뒤였다.

 

사에 씨?”

 

사에 씨는 내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내 입에 자신의 입술을 맞출 뿐이었다. 약간 까칠해진 사에 씨의 입술이 그동안의 세월을 반증하는 것 같았다. 사에 씨의 대답을 들은 건 이 잠깐의 입맞춤이 끝난 다음이었다.

 

“... 이렇게 사람 애를 태우는 짓을 해놓고선 다음 단계를 시간이 날 때 밟자는 이상한 얘기를 할 수 있는, 저랑은 정말로 다른 사람이죠.”

“......”

 

뼈가 가득한 한 마디, 한 마디였다. 사에 씨의 말에는 울먹이는 소리가 섞여있었다.

 

슈코 씨가 정말로 싫어요. 이렇게 끝낼 거라면 처음부터 시작도 하지 말았어야죠.”

 

내 뒤통수를 껴안고 있던 손은 어느 샌가 사에 씨가 눈에 고이는 눈물을 훔치는 데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코 씨가 좋았어요. 그래서 그동안 기다렸어요. 하지만 그동안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죠.”

사에 씨, 그건...”

그래서, 오늘은 매듭짓지도 않고, 그렇다고 진행 중인 것도 아닌 우리 사이를 끝내려 찾아왔어요, 그런데... 그런데...!”

 

사에 씨의 어조는 점점 격해졌고, 어조가 격해지는 것만큼 행동도 격해졌다. 눈물만 훔치던 사에 씨가 주먹을 쥐고 내 가슴팍을 마구 쳐댔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런 사에 씨의 말을, 그리고 행동을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나 여린 사람을 상처 입힌 건 다름 아닌 나였으니까.

 

완전 제멋대로에, 애인 앞에서 결혼 따위는 딱 질색이라고 잘라 말할 정도로 눈치도 없고, 책임감이라곤 하나도 없고, 뭐든지 적당 적당히 처리하고, 심지어 우리 관계의 끝이 아닌 끝마저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린 슈코 씨를.... 저는 아직도 좋아해요.”

“.....”

슈코 씨가 무슨 생각으로 제 곁을 떠난 건진 몰라요, 그런데 이렇게 달라붙다니 정말 저도 예의 없고 경우가 없는 사람이죠. 하지만 이렇게 달라붙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 할 정도로, 저는 슈코 씨를 좋아해요. 그러니까 물어 볼게요, 슈코 씨는 저를 어떻게 생각해요? 만약에 슈코 씨는 저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받아들일 테니까, 솔직하게 말해줘요.”

사에 씨.”

 

나는 사에 씨를 껴안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봤자 사에 씨가 지금 전해준 진심엔 실례가 되겠지.

 

“... 오늘 밤엔 딱히 일정이 없다고 했었지?”

말 돌리지 말고 제 말에 대답을 - ”

그러면, 오늘에야 말로 밟아볼까? 3년 전에 했었던 행동의 다음 단계를.”

슈코 씨...!”

 

말로는 전할 수 없으니 행동으로라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에 씨의 다테마키에 손을 올렸다.

 

───────────────────────────────

 

슈코 씨네 집에서 잠까지 자게 될 줄 몰랐는데, 정말 아닌 밤중에 실례를 끼쳤네요. 정말 죄송하여요.”

괜찮다니까. 오히려 아침밥도 못 먹이고 보내니까 내가 미안한걸.”

이렇게 이른 아침에 나가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인걸요, 너무 신경 쓰지 마시와요.”

 

이제 막 동이 터올 이른 아침인데도 사에 씨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게 마음 아팠다. 하지만 사에 씨가 이젠 가야한다는 말을 하니 안 보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아쉽네, 지금 가면 한참 동안 못 볼 탠데.”

사는 곳이 똑같으니 제가 일을 그만두면 많이 볼 수 있을 탠데요 뭘.”

하긴, 그렇겠네. 앞으론 꼭 자주 연락할게. 알겠지? 사에 씨.”

이번엔 꼭! 그 말 지키는 거예요?”

아하하...”

 

끝까지 말에 뼈가 있는 한 마디를 던지고 가는구나, 그 점이 너무나도 사에 씨 다워서 웃음이 나왔다.

 

그러면, 정말로 가볼게요.”

안녕, 사에 씨. 다음에 또 보자.”

 

나는 손을 흔들며 사에 씨에게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사에 씨는 내 인사를 받으며 점점 멀어져갔다. 문득 이 작별 인사야 말로 사에 씨와 나 사이의 다음 단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Posted by 비좀
,

끄응... !”

 

재작년도와 작년 해에 쓴 서류철들을 모아놓은 종이상자를 책장 위에 올렸다. 안 쓸 것 같은 서류들은 전부 생각 없이 이 상자에 담아두었기 때문일까, 고작해야 상자 하나를 책장 위에 올렸을 뿐인데도 내 얼굴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창 밖에서 선선한 바람이 부는 시기인데도 말이다.

 

후우... 후우...”

 

숨을 고르며 얼굴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계절이 한 번 바뀔 때 마다 학생회실도 한 번 정도는 대청소를 해주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티가 하나도 안 나는 건지! 나는 혀를 차며 발을 디디고 있던 의자 위에서 내려왔다.

 

흐음...”

 

사방을 꼼꼼히 둘러보았다. 책장, 선반, 창문, 책상, 바닥에 이르기까지... 오오무로 씨 책상 위에 있는 책 한권 빼고는 어딜 보더라도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하고, 몇 시간 전 까지만 해도 어수선함의 극치였던 물건들이 너무나도 깔끔하게 정리정돈 돼 있었다. 깔끔해진 학생회실을 보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도 이렇게 늦게까지 남아 청소 한 보람이 있네...”

그러게! 아야노가 이렇게 늦게까지 안 남아 있었으면 큰일 날 뻔 했는데 말이야.”

그러니까, 참 큰일... ?”

 

방금 전 까지 학생회실엔 나 혼자였었는데,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 때문에 화들짝 놀라 뒤로 돌았다가 몸의 균형을 잃고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아야야...”

갑자기 그렇게 다이나믹한 몸개그를 보여 줄 줄은... 괜찮아?”

 

욱신거리는 엉덩이를 쓰다듬으면서 나를 놀라게 한 장본인을 쳐다보았다. 봉긋하게 솟아있는 빨간 리본, 어깨까지 내려오는 비단결 같은 금발, 맑은 바다를 연상하게 하는 푸른 눈동자, 오뚝한 코,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토시노 쿄코?! 왜 이 시간 까지 하교 안하고 여기에...?!”

천천히 설명 해 줄게, 그런데 일단 일어나는 게 낫지 않겠어?”

 

쿄코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 하고 나한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보는 것만으로도 얼굴에 열이 올라오는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돌리고 바닥에 손을 짚은 다음 단숨에 일어났다.

 

, 혼자서도 일어날 수 있거든?”

에이, 그래도 손 정도는 잡아 주지. 손 시리단 말이야~”

 

쿄코는 그런 말을 하며 나한테 다가오더니 -

 

, 잠깐만?! 토시노 쿄코?!

~ 아야노 따끈따끈하네, 기분 좋다...”

 

나를 갑자기 껴안고, 볼을 비비적거렸다. 너무 당황스러운 나머지 몸서리치듯 몸을 흔들며 쿄코를 떼어냈다.

 

, , , 뭐하는 거야?!”

요즘 갑자기 날씨가 쌀쌀해졌잖아? 추워서 그만...”

이런 건 최소한 남들 눈에 안 띄는 곳에서 하란 말이야!”

그럼 남들 눈에 안 띄는 곳에선 해도 되?”

 

아차, 말실수를 했다 싶어 잠깐 온 몸이 굳었다.

 

해도 되는거야?”

“..., 뭐 하러 왔어?”

?”

해가 거의 져 가는 이런 늦은 시간에 학생회실에 왔잖아, 이유가 있는 거 아니야?”

.”

 

다행이다. 말 돌리는 데 성공해서.

 

현장학습 어디로 갈 건지 설문조사 하는 프린트, 오늘 까지 내야 되는 거였잖아? 담임한테 내야 되는 걸 깜빡했거든. 이제야 겨우 기억나서 학생회실로 헐레벌떡 뛰어왔지.”

정말, 못 말린다니까... 내 책상 위에 둬. 잘 처리 해 둘 테니까.”

고맙습니다. 아야노 님!”

 

허리를 90도로 숙여서 인사를 하고 내 책상까지 종종걸음으로 뛰어가는 쿄코가 너무 귀여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늘 내가 청소하느라 여기 남아있어서 망정이었지. 아니면 어쩔 뻔 했어? 정말, 조심성이라곤 눈꼽만큼도 - ”

아야노! 아야노! 이 책 뭐야?!”

“......”

 

하긴, 그 토시노 쿄코가 털 끝 만큼의 먼지도 없고 깔끔하게 정리 된 학생회실에서 유일하게 책상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책에 관심을 안 가질 리 없지. 오히려 지금에서야 저 책에 관심을 가진 게 신기할 정도였다.

 

오오무로 씨가 오늘 가져 온 책인데...”

사쿳짱이 최면 같은 거에 관심 있는 줄은 몰랐네...”

 

[바보라도 손쉽게 익힐 수 있는 최면술], 오오무로 씨가 오늘 학생회실에 가져 온 책 이름이었다. 일을 하는 도중에 일만 하는 건 재미없어!“ 라며(정작 일 다운 일은 하지도 않았으면서!) 갑자기 저 책을 불쑥 꺼내 들더니 자신에게 최면술사의 자질이 있는지 시험 해 보겠다며 방방 날뛰는 바람에 고생을 좀 했었는데...

 

재밌겠다! 나도 해볼래 아야노!”

“....아하하하.”

 

오오무로 씨와 그렇게나 닮아있는 토시노 쿄코가 저런 책을 보고 그냥 넘어 갈 리가 없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번 최면에 걸려보고 싶었거든,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서.”

?”

 

최면을 거는 게 아니라 걸려보고 싶었다고?

 

방송 같은데서 자주 나오잖아? 최면 치료 같은 거. 분명 눈을 감고 자고 있는데 맨 정신일땐 기억도 안난다고 하던 일을 술술 털어놓고... 너무 궁금했어. 최면에 걸리면 어떤 느낌일지!”

“...?”

그러니까 - ”

 

토시노 쿄코는 내 자리에 그대로 털썩 앉더니 내 쪽으로 오오무로 씨의 책을 내밀었다.

 

, , .”

“......”

 

토시노 쿄코의 고집을 안 들어주면 쿄코는 저 자리에 몇 십분, 아니, 몇 시간이라도 앉아있겠지. 한숨을 쉬며 쿄코의 옆에 앉았다.

 

일단... 마주 앉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니까...”

알겠어, 이렇게 하란 말이지?”

 

쿄코는 내 쪽으로 의자를 돌렸고, 나도 그에 맞춰서 의자를 쿄코쪽으로 돌렸다.

 

“... 하아.”

에이, 한숨 쉬지 말고 빨리~”

 

책을 펴고 주머니에 있는 조그마한 진자를 꺼냈다.

 

우와, 본격적인데... 사실 아야노도 누군가한테 최면을 걸어보고 싶었던 거야?”

오오무로 씨가 이 진자가지고 워낙 장난을 쳐서 잠깐 압수 한 것뿐이야! 오해하지 말라구!”

알겠습니다.”

 

이 책은 최면을 어떤 식으로 거는지 설명하기 보단 최면에 쉽게 걸릴 법 한 사람들을 설명하고 있었다. [최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건 최면술사가 아니라 최면에 걸리는 대상이 되는 사람이다. 최면술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만이 최면에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뭐야,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거야? 오오무로 씨는 읽어봤자 도움이 안되는 이딴 책을 돈 주고 산건가?

 

그 책에서 뭐라고 해? ? 아야노?”

, 잠깐만, 조용히...”

 

[지시를 어떻게 내리건 큰 상관은 없다. 다만 중요한건 언령의 반복이다.] 라고 적혀있었다. 이 내용 다음엔 최면의 성공적인 예시로 최면 대상자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최면의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좋아, 이걸로 한 번 해볼까.

 

아야노, 빨리 - ”

당신은 피로감을 느낍니다, 피로감이 점점 더해갑니다...”

 

진자를 천천히 흔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안달복달 못하며 몸을 가만히 못 내비두던 쿄코는 내가 진자를 흔들자마자 입을 다물고, 몸도 가만히 둔 채 진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노리개의 끝부분을 빤히 쳐다보는 고양이처럼.

 

당신의 눈꺼풀은 무겁습니다, 아주 무거워요, 당신은 피로감을 느낍니다, 피로감이 점점 더해갑니다...”

 

이 말을 몇 번 반복했을까, 부끄러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아무런 효과도 없을탠데.

 

당신의 눈꺼풀은 아주 무겁습니다. 당신은 깊은 잠에 빠집니... ?”

 

진자 너머에서 느껴지는 눈빛이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눈을 빤히 뜨고 있던 쿄코가 정말로 잠에 빠져버린 것이다. 많이 피곤했나? 라는 생각이 들어 쿄코를 깨우려고 어깨 위에 손을 살짝, 올렸을 때 정말로 최면에 걸린 거라면?’ 라는 생각이 뇌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 밑져야 본전 이랬던가.

 

토시노 쿄코, 여기 오기 전엔 뭐 했어?”

아카리 머리에 경단 부분... 그 부분을 풀어 보려고 치나츠랑 작당했었는데 유이가 방해하는 바람에...”

“...?”

 

너무나도 엉뚱한 이야기가 나와서 장난을 치는 건가 싶었지만 쿄코라면 정말로 이랬을 것 같아 납득했다.

 

그러면 지난주, 지난주 점심 시간엔 뭐 했어?”

프린트 내려고 여기 왔다가 아야노의 푸딩을 먹어버렸어... 참지 못하고 그만....”

 

오오무로 씨가 먹은 줄 알았는데 네가 먹은거야?! 멱살을 쥐고 흔들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이 대답으로 토시노 쿄코가 최면에 걸렸다는 사실은 확실해졌다. 남의 것을 뺏어먹은 범인이 이렇게 순순히 범행을 자백 할 리는 없으니까.

 

그럼 지지난주는?”

지지난주엔.......”

 

이런 식으로 나는 쿄코의 과거를 점점 거슬러 올라갔다. 한 달 전, 반 년 전,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언제 있었던 일을 물어봐도 쿄코는 척척 대답했다. 부끄러울 법한 일 까지...

 

“......”

 

내 질문엔 한 치의 망설임과 거짓도 없이 그대로 대답 해 주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가슴 속에 품었던 조그마한, 하지만 나에게 있어선 너무나도 커다란 연심이 튀어 나왔다.

 

저기, 토시노 쿄코.”

 

절대 잘못 들릴 일 없도록 내 얼굴을 토시노 쿄코의 얼굴 바로 앞에 가져다 대고, 또박또박 천천히 질문했다.

 

... 그러니까 스기우라 아야노라는 사람에 대해, 토시노 쿄코는 어떻게 생각해? 그러니까....”

 

질문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말을 고르던 도중, 차가운 살결이 내 목젖을 쓸고 지나가더니 내 턱을 잡았다.

 

어떻게 대답 해 줬으면 좋겠어?”

“...?”

잘 못 들었어? 어떻게 대답 해 줬으면 좋겠느냐 물어봤는데.”

“......”

 

온 몸이 굳어간다. 나를 쳐다보고 있는 파란 눈동자가 메두사의 눈알이라도 되는 건지, 아니면 내 턱을 잡고 있는 토시노 쿄코의 엄지와 검지가 독사의 송곳니라도 되는 건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그저 온 몸이 굳어갔다.

 

아야노가 원하는 대로 대답 해 줄 테니까. ?”

 

장난기가 섞인 평소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퇴폐적으로까지 느껴지는 목소리, 노을빛과 야릇함이 섞여있는 푸른 눈, 촉촉한 입술. 이런 모습의 토시노 쿄코를 보니 가슴이 너무나도 두근거렸다. 가슴 속에 있는 두근거림이 목 바로 아래까지 올라왔다.

 

이대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시노 쿄코한텐 분명 내 마음을 전하고 싶긴 했지만, 이런 형태, 이런 모습으로는 아니었다.

 

“......”

?”

죄송합니다!”

 

단숨에 일어나 달음박질을 치려했지만 무게 중심이 갑자기 뒤로 쏠린 탓인지 의자가 갑자기 뒤로 넘어갔고, 그 서슬에 내 뒤통수는 재수 없게도 의자 모서리와 아주 강하게 충돌했다. 뒤통수에 강한 충격이 갑자기 왔기 때문일까,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아야노?! 아야노!! 괜찮아?!”

 

내 가슴속에 있던 두근거림과 의식이 사라지기 전에 들은 마지막 목소리는 토시노 쿄코가 나를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Posted by 비좀
,

고층 건물 틈새로 비치는 노을, 바람에 넘실거리는 갈색 말총머리, 반무테 안경 너머로 흔들리는 눈동자, 노을빛 때문인지 불그스름해 보이는 뽀얀 얼굴.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이 아름다운 광경이었으나 아름다운만큼 어색한 광경이었다. 아니, 원래는 그저 아름답다는 감상만으로 끝나야 할 터였다. 이 광경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다연 내 이름을 부르고 그대로 굳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저기.”

, !”

 

차라리 내 이름을 불렀을 때 못 들은 척 가던 길 마저 갈 걸, 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후회 해 봤자 놓친 막차, 엎질러진 물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내가 말을 걸자 내 발꿈치를 쳐다보던 시선이 내 얼굴로 올라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박다연의 시선은 다시 발꿈치로 내려갔다.

 

“... 왜 불렀어?”

, 저기, , 그게...”

 

어디를 봐야 할지 모르는 시선, 흔들리는 눈동자만큼이나 흔들리는 어깨, 맞닿은 검지. 눈치가 어지간히 없는 인간이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박다연은 나한테 -

 

“... 이상하게 듣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 네가 너무 좋아. 친구로서 좋다,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야.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어.”

 

- 고백을 하려고 한다는 걸.

 

“... 나는 여잔데.”

진짜로 사랑한다면 성별 따위는 관계없다는 걸, 너를 보고 깨달았어. 나는... 너를 정말, 정말로 좋아해...! 나랑 연인이 되어 줘!”

 

절로 나오는 한숨을 억지로 삼키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박다연이라는 사람과 나 사이에 무슨 접점이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학교에선 잠밖에 안자고 식사시간엔 구석에 찌그러져 밥을 먹는, 우중충함의 결정체인 나와 성적도 좋고 모든 사람들의 중심에 서있는, 화사함의 결정체인 박다연, 굳이 접점을 찾자면 같은 반에 속해있다는 것 밖에 없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같은 반에 있어서 일어난 일이라곤 체육대회나 조별수업 때 어쩔 수 없이 말을 섞었던 것 뿐, 그런데 나를 정말로 좋아한다고? 대체 왜? 나의 뭘 보고?

 

싫어.”

“..., 어째서?! 어떤 점이 마음이 안 드는 거야? 다 고칠게! , 나는 너를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어! 혹시 내가 여자라서 그러는 거야?!”

너랑 나랑은 별로 잘 안 어울릴 것 같아. 딱히 네가 여자라서 그런 건 아니고, 만약에 네가 남자였어도 똑같이 대답 했을 거야.”

, 아니야, 안 돼. 이러면... 이러면 안 되는데... 그동안 마음속으로,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은 더 오늘만을 그려왔단 말이야... 이런... 이럴 리가...”

 

중얼거리는 박다연을 보자 그동안 내 마음속에 쌓여왔던 박다연 대한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동안 봐 온 바로는 박다연의 이미지는 완벽한 사람' 이라는 이미지였다. 착한 성격, 수려한 용모, 우수한 성적에 운동실력까지 발군인 만화에서나 나올 법 한 그런 사람. 하지만 지금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인 체 중얼거리기만 하는 박다연완벽하게 기분 나쁜 사람이 되었다. 하긴, 완벽한 사람이 완벽하게 무너져 내렸으니 어떤 점에서 보면 완벽하다는 점은 아직 변하지 않은 샘인가.

 

나보다 잘 난 사람은 많고, 너를 좋아 해 주는 친구들도 많으니까 너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저기, 이제 곧 버스 와서 가볼게.”

 

차인 게 그렇게나 충격이었는지 박다연의 기분 나쁜 중얼거림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저렇게 실의에 빠진 상태가 오래가진 않을 테지, 충격에서 어느 정도 헤어나면 또 이런 저런 말을 걸면서 귀찮게 굴 거야, 빨리 이 자리를 떠야해.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이런 상황이라면 상대방을 위로 해 주는 게 맞겠지만 나 같은 건 박다연 같이 대단한 사람을 위로할 그릇이 안 돼.

 

가지... ...”

“.....”

 

자기 합리화를 열심히 하며 발걸음을 옮기려고 애썼으나 퍽퍽하게 메인 목에서 쥐어 짜낸 자그마한 목소리가 내 온몸을 그대로 얼려버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고층 건물 틈새로 비추는 노을, 반무테 너머로 보이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동자, 울상인 얼굴, 떨리는 어깨. 로맨스 만화 영화에나 나올 법 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박다연이 가방에서 꺼낸 물건 하나 때문에 내 앞에 펼쳐져있는 그림은 로맨스가 아닌 스릴러로 바뀌었다.

 

박다연이 가방에서 꺼낸 건 서슬 퍼런 식칼이었다.

 

... 나는... 정말로 노력했단 말이야, 분명... 나를 사랑해 준다고 했잖아... 거짓말쟁이...!”

 

이해 할 수 없는 말과 이해 할 수 없는 행동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오고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기 - ”

됐어, 예전부터 결정한 일인걸. 네가 나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너를 죽이고, 나도 죽을 거야...!!”

아니, 나를 죽이는 건 별로 상관없는데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이해 안 되거든, 하나하나 차근차근 설명해 줄래?”

어째서... 어째서 그렇게 차분 할 수 있는 거야?!”

나도 덩달아서 흥분하면 얘기가 안 끝나잖아?”

... 나는 분명 너를 죽이고... 나도 죽겠다고... 그렇게 까지 말 했는데... 널 죽일 거라고! 죽는 게 무섭지도 않아?!”

 

죽음에 대해선 많은 생각을 했었다. 내가 죽으면 내 주변인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내가 죽은 이후엔 어디로 흘러갈까, 어떤 식으로 죽음을 맞이할까. 기타 등등, ‘세상 흉흉한 건 하루 이틀도 아니니까 어쩌면 길 가다가 노상강도한테 칼 맞아서 죽을 수도 있겠다. 덧없고 멋대가리도 하나 없는 죽음이니 나 같은 년한텐 딱 어울리는 죽음이겠는걸.’ 이라는 생각을 하긴 했었지만, 칼 든 노상강도가 나한테 바라는 게 돈이 아니라 사랑이고, 너를 죽일 건데 죽는 게 무섭지도 않느냐는 상냥한 물음까지 던져 줄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딱히 안 무서운데, 그런데 네가 죽으면 반 애들이 슬퍼하긴 하겠다.”

“...?”

안 무섭다고.”

 

나를 겨누던 칼끝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어째서?”

딱히 삶의 이유를 못 찾아서? 더 이상 살아봤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애초에 사람들한테 왜 사세요?’ 라고 물어보면 죽지 못해 산다라고 대답하는 쪽이 많을걸. 나도 마찬가지로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일 뿐이야, 삶에 대한 의욕이 남들보다 조금 떨어질 뿐이지.”

하지만...”

내가 아직까지 살아있는 건 그냥 남한테 피해 끼치지 않고 나 혼자서 죽을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야. 그런데 네가 나를 죽여준다고 하면 고마운 일이지. 다시 한 번 말할게. 나는 너랑 사귀지 않을 거야. 고백을 받아주지 않으면 나를 찌른다고 했지?”

“..... ... 그게...”

“...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면 이만 가볼게, 오늘 있었던 일은 아무한테도 말 안하겠지만 다음부터 이런 짓은 안 해줬으면 좋겠어.”

... 싫어! 가지 마...!!”

 

세 번 씩이나 가던 길을 막히니 짜증이 파도쳤다. 그냥 가지 말라는 말만 반복하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앵무새냐? 녹음기냐? 인형이냐고!

 

아 내가 가는 게 싫으면 찌르던가! 아니면 그냥 가던가! 둘 중 하나만 해!”

둘 다 할 수 없단 말이야, 나는... 나는 네가 너무 좋아서... 잠깐만, 잠깐만이라도 연인이 될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는데...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하아.”

 

울컥 올라왔던 화가 그릇이라도 깨먹은 어린애 마냥 우물쭈물하는 A양을 보니 어느 정도 내려갔다. 그래, 침착하자. 나까지 덩달아서 흥분하면 얘기가 끝나지 않아. 사랑이라는 감정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잖아? 지금 이 자리를 빠져 나갈 수 있는 최선의 한 마디를 꺼내고 빨리 이 자리를 피하자,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꺼내야 되는 한 마디는 -

 

너는 잠깐만이라도 나랑 애인이 되고 싶다는 거지?”

“....”

좋아, 그러면 잠깐이나마 너랑 어울려줄게, 한 달... 아니, 한 달은 너무 긴 것 같고, 보름 동안, 네 애인이 돼 주면 만족해?”

정말이야?!”

하지만 보름이 지나면 내 소원을 네가 이뤄주는거야. 내가 뭘 원하고 있는 진 방금 전에 한 말로 대충 알겠지?”

 

나는 박다연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 땅바닥을 향하고 있던 칼끝을 손가락으로 올려 내 가슴을 가리켰다. 박다연의 표정은 불만이 한 가득이란 표정이었지만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내가 생각한 대로의 반응을 보이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지금 이 자리를 당장 모면 할 수 있고, 그동안 바래왔던 소망도 이룰 수 있는 한 마디, 내가 꺼낸 말은 지금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꺼낼 수 있는 최선의 한 마디였다.

 

내일부터 나는 네 애인인거야. 알겠지? 더 이상 할 말 없으면 정말로 가볼게,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곧 버스가 오거든.”

 

나는 내일부터 내 애인이 될 사람을 등지고 버스를 향해 뛰어갔다. 보름동안 귀찮아 지겠지만 그 일은 미래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

Posted by 비좀
,

따사로운 햇빛이 창문너머로 나를 비추었고, 좋은 날씨에 새들마저도 기분이 좋은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육상부원이나 야구부원만 쓰던 운동장도 오늘만큼은 시끌벅적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날이었다. 다만 이렇게 아름다운 날씨도 내 책상 위에 아무렇게 쌓여 있는 서류뭉치들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진 못했다.


"일이 안끝나잖아..."


 울고 싶다 -. 는게 솔직한 감상이었다. 그렇다고 누구한테 도와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부 학생회장씩이나 되서 이런 일도 혼자서 처리 못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 지금은 점심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점심 시간마저 학생회 업무를 보라고 하는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 아닌가. 이렇게 반은 고집으로, 반은 의무감으로 시작한 서류정리를 시작한지 20분도 되지 않았는데도 내 집중력은 이미 흐트러 질 대로 흐트러 져 있었다.


"나중에 할까..."


 이건 문예부 예산안, 이건 육상부 실적 보고, 이건 가을에 있을 체험학습 동의서... 돈 주고 섞어놓으라고 해도 이렇게 섞어놓진 못할탠데, 어쩌다가 이렇게 섞여버린 건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냥 점심시간은 쉬고 방과 후에 학생회 부원들을 모아서 처리해야 할려나. 잠시 갈등하다가 '그래! 학생회 부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것도 학생회장이 가져야 할 덕목이니까.' 라는 자기암시를 걸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여어 - 마츠모토."

"니시가키 선생님?"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던 그 순간, 굳게 닫혀있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나나모리 중학교 최고의 괴짜선생님, 니시가키 선생님이었다. 또 뭔가를 터트리고 왔는지 하얀 머리는 그슬린 흔적이 있었고, 하얀 피부, 보라색 원피스, 하얀 가운 너 나 할것 없이숯검정이 묻어있었다. 평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평소에 옆구리에 달고 다니던 학생회장님이 안보인다는 것 뿐인가.


"어라, 여기에도 없나? 어딜 간거람..."

"또 뭘 터트리고 오신 거에요?"

"오, 스기우라!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깜짝 놀랐네."

"처음부터 쭉 여기 있었거든요?"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곤란한 사람이라니까, 어떻게 선생님이 된건지 원... 


"음... 마츠모토는 어디에도 안보이고... 빨리 실험 해 보고 싶은데... 저기, 스기우라. 내 실험 잠깐만 도와주면 안될까?"

"전 지금 바쁘다구요 니시가키 선생님."

"잠깐이면 되니까 조금만 도와주라, 이번 실험은 바쁜 사람을 위한 실험이란 말이야."

"네? 대체 무슨 실험이길레..."


 아차, 나는 입을 꾹 닫았지만 이미 늦었다. 내가 어느정도 호기심을 붙혔다는 걸 알자마자 선생님은 문 앞에서 한달음에 내가 있는 자리까지 다가와 내 손을 붙잡았다.


"분신을 만드는 실험이야."

"...예?"

"일단 가면서 얘기하자고!"

"엑. 자, 잠깐만요!"


 선생님은 내 손목을 붙잡더니 그대로 학생회실 밖으로 나를 질질 끌고갔다. 뿌리 치려고 해봤지만 선생님의 손은 생각보다 억셌다. 최대한 뒷걸음질 치면서 저항했으나 이 역시 헛된 노력일 뿐이었다. 대체 무슨 실험을 하려는 걸까,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걸까, 책상에 있는 서류뭉치들은 언제 다 정리하지? 도와줘! 토시노 쿄코! 도와줘! 치토세...!



 선생님의 손에 질질 끌려서 도착한 곳은 과학실이었다. 과학실에 들어서자 마자 '헉'소리가 절로 나왔다. 과학실 바닥이 전선 투성이였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전선은 사람이 두 어명정도 들어 갈 수 있는 원반에 연결 되 있었는데, 그런 원반 두개가 나란히 놓여져 있었다.


"자, 내 야심작이야. 니시가키 28호."

"에... 이게 뭐하는 건데요?"

"일단 저 원반 위에 올라가볼래?"


 "저게 뭐 하는 거냐니까요?" 라는 질문을 해도 선생님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동안 옆에서 니시가키 선생님을 봐왔던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말을 안들어주면 이 선생님도 내 말을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듣지 않을 거라는 걸. 나는 어쩔 수 없이 거치적 거리는 전선을 해쳐나가 원반 위에 올라 섰다.


"방금 전에 분신을 만드는 실험이라고 말했으니 눈치 챘을 것 같지만, 네가 지금 올라가 있는 니시가키 28호는 분신을 만드는 기계야. 내가 이제 리모컨의 스위치만 올리면 반대쪽 원반에서 분신이 만들어지는 기계지."

"...예?"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자신의 분신을 만드는 기계라고? 그런 기계를 만드는게 가능하긴 한가? 그리고, 그런 기계를 만들 정도로 능력 있는데도 왜 이런 촌구석에서 선생님을 하고 있는거지? 과학실에 틀어박혀서 대체 뭘 만드나 했더니 이런걸 만드는 중이었었나?


"만들어 지는 분신한텐 자의식은 있으나 내가 프로그래밍한 3원칙을 지켜야 해. 첫번째, 분신은 인간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되며, 위험에 처해 있는 인간을 방관해서도 안 된다. 두번째, 첫번째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분신은 자신의 원형이 된 인간에게 복종해야 한다. 세번째, 첫번째와 두번째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분신은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어때?"


 로봇의 3 원칙을 그대로 복사 붙혀넣기 한 거 아닌가요? 라는 말이 턱까지 차올랐으나 그냥 말을 아끼기로 했다. 저렇게나 뿌듯해 하고 있는 선생님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말 해 봤자 선생님의 귀에 들어가지도 않을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네 분신한테 숙제를 하라고 명령 해 놓고 너는 나가서 놀거나, 다른 일을 할 수 있는거지. 한번 쯤 상상해 본 일 아니야?"

"그, 한번 쯤 상상 해 본 일이긴 한데 그게 가능이나 한 -"

"물론!"


 선생님은 가운 주머니에서 500엔짜리 동전 크기만한 스위치를 꺼내더니 꾹 눌렀다.


"...어라."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선생님?"

"아니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됐었는데...? 이상하다."

"그러면 이제 돌아 가 봐도 될까요? 이제 슬슬 시간이..."

"잠깐만 기다려 봐."


 선생님은 원반으로 다가오더니 원반을 힘껏 발로 찼다. 하얀 가운이 무색한 행동이었다. 그렇게 세 번 정도 찼을까. 갑자기 내 발 밑이 새하얗게 빛났다.


"꺄악?! 누, 눈부셔...!"

"오, 역시 기계는 때려야 말을 듣는다니까. 하하하."

"선생님?!"

"걱정하지 마 - ! 제대로 돌아가는 중이니까."


 형광등을 몇백개는 킨 것 같은 반짝임때문에 눈을 차마 뜰 수가 없었다. 원반에선 세탁기 몇백개 정도가 동시에 돌아가는, 아주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 소리는 곧 멈추었고, 눈꺼풀 틈새로 들어오는 새하얀 빛도 어느새 점점 꺼져갔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떳다. 아무것도 변함이 없었다. 위에 아무것도 없었던 맞은편 원반 위에 '스기우라 아야노'가 나와 비슷한 자세로 서있었다는것 빼고.


"...에?"

"음! 좋아, 여기까진 정상이군. 자, 스기우라, 분신 스기우라한테 명령 해볼래?"

"어... 음 그, 그러니까..."

"그럴 필욘 없어."


 내 맞은 편에 있는 스기우라 아야노는 사뿐히 원반에서 내려왔다. 외형, 몸짓, 목소리. 그 무엇 하나 나와 다른 점이 없는 사람이 내 눈 앞에 있으니 참으로 기분이 이상해졌다.


"나도 '스기우라 아야노' 니까, 네가 무슨 생각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 그리고 지금은 그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

"응?"

"어라."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앞에 있는 것은 스기우라 아야노였으나 나와 똑같은 스기우라 아야노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내 맞은 편에 있는 또다른 나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 니시가키 선생님을 보자 확신으로 변했다.


"나는 할게있으니까 이만 실례할게."

"자, 잠깐만!"


 저 스기우라 아야노를 가만히 두면 돌이킬 수 없을 일이 벌어질 거라고 내 예감이 경보를 울리고 있었다. 과학실 밖으로 나가는 스기우라 아야노를 막기 위해 나는 원반에서 내려와서 달리려 했으나 원반 아래에 즐비한 전선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고, 거치적 거리는 전선에서 발을 빼는 사이 내 맞은 편에 있던 스기우라 아야노는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선생님! 대체 뭘 만드신 거에요?!"

"어라? 이상하네? 저런 식의 행동을 보이면 안되는데..."

"그렇게 느긋한 반응을 보일때가 아니잖아요! 속터져 정말!!"


 선생님한테 화풀이를 해봤자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겠지, 나는 스기우라 아야노를 쫓아 과학실 밖으로 나갔다. 스기우라 아야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최대한 빠르게 달려가며 스기우라 아야노의 뒤를 쫓았지만 차이는 좁혀지지 않은체 그저 뒤를 쫓는 것으로 벅찼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더니 왼쪽으로 꺾고, 쭉 가다가 오른쪽으로... 대체 어디로 가는걸까? 라는 의문이 들었고, 그 의문은 내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을 때 즈음 풀렸다. 스기우라 아야노는 교실에 들어갔다. 2학년 5반에.


'우리 반 이잖아...?!'


 내가 있는 반에 또 다른 스기우라 아야노가 들어간다면 일대소동정도론 안끝날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복도 쪽으로 난 창문으로 얼굴을 뺴꼼 내밀어서 교실 안을 들여다 보는것이 전부였다. 다행이도 교실 안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엎드려서 자고 있는 애 한명과 교실 중앙에서 떠들고 있는 토시노 쿄코, 후나미 씨, 그리고 치토세가 교실 안에 있는 인원의 전부였으니까.


 잠깐만, 토시노 쿄코?


"하아... 하아... 다행이다. 여기 있었네. 토시노 쿄코."

"응? 아야노, 무슨 일 있었어? 그렇게 헐떡대면서 들어오다니..."

"저기, 토시노 쿄코. 아니, 쿄코."

"에?"


 자, 잠깐만, 저게 지금 뭔 짓거리를 하는거야...?! 토시노 쿄코를 이름으로만 불러? 토시노 쿄코의 아래 턱을 붙잡아? 뭐, 뭐하는 짓이냐고...?! 평소랑 똑같이 장난스럽게 받아 쳐야지, 왜 가만히 있는거야 토시노 쿄코?! 후나미 씨는 지금 당황해서 표정관리가 제대로 안 되고 있고. 치토세! 너는 이상한 걸 알고 좀 말려줘야 되는거 아니야? 코피나 흘리고 있을때가 아니잖아! 안경 도로 쓰란 말이야!


"5시에, 학교 옥상으로 나와 줘, 할 말이 있어."

"어? 어, 어어... 으, 응. 알겠어..."

"그럼 난 이만,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알겠지? 5시에, 꼭이야!"

"아, 알겠어..."


 스기우라 아야노는 당황한 토시노 쿄코를 남겨두고 천천히 교실 밖으로 나왔다. 내가 밖에서 훔쳐보고 있었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는 듯 교실 밖으로 나오자 마자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싱긋, 웃는것을 보니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할 일, 다 끝냈어. 이제 서류 정리하러 가면 되는거지?"

"아, 아니, 이렇게..."

"할 말이 있으면 빨리 해줬으면 좋겠는데, 아직 정리할 서류가 산더미잖아?"


 이렇게 감당 안 될 상황을 만들어놓고 그렇게 말하면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내 분신은 매우 착실했다. 내가 수업을 듣는 동안 그 많던 서류를 혼자서 다 정리해버렸으니까. 수업을 마치고 도와주려고 학생회실에 들렀다가 놀라서 탄성이 절로 나왔다. 니시가키 선생님의 기계(니시가키 28호라고 했던가)는 내가 바라던 바를 완벽하게 처리 해 준 샘이다. 그래, 정말로 완벽했다. 사고를 하나, 그것도 대형사고를 하나 터트린 것 만 빼면.


"아 ㅡ 개운하다. 드디어 다 끝냈네! 약속시간 못 맞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끝냈어."

"약속... 이라니, 설마?"

"오늘이야말로 토시노 쿄코, 아니, 쿄코한테 내 마음을 전하는거야."

"마,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


 토시노 쿄코한테 고백한다는 분신의 의지는 아직도 꺾이지 않은 것 같았다. 지금 시각 4시 30분, 30분 안에 이 분신을 설득하고 토시노 쿄코한테 지금 일어난 일을 얼버무려야했다. 니시가키 선생님에게 잠깐이나마 휘둘린 댓가치고는 너무나도 가혹했다.


"말도 안된다니, 왜?"

"왜냐니?! 너도 '스기우라 아야노' 니까 알고 있잖아. 토시노 쿄코한테 고백하는게 얼마나 터무니 없는 일인진...!!"

"너도 '스기우라 아야노' 니까 잘 알고 있잖아? 토시노 쿄코한테 고백하는건 늦으면 늦을수록 안좋을 거란거."

"그, 그건..."


 토시노 쿄코는 언제, 어디서, 누구랑 있건 항상 중심에 있는 사람이였다. 활발하고 붙임성 있는 성격 덕에 인기도 많았고, 항상 농담만 하는 것 같아도 곤경에 처한 반 친구가 있다면 먼저 나서서 도와주는 상냥함도 가지고 있었다. 알고 있다. 토시노 쿄코를 좋아 하는 사람이 나 하나가 아니라는 것 쯤은, 하지만, 그래도...


"...고백에 실패하면, 전부 끝이잖아. 거절당하면 무슨 낯으로 토시노 쿄코랑 같이 있을 수 있겠어?"

"하지만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 쿄코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면? 혹은 쿄코가 다른 곳으로 이사라도 가서 더 이상 못보게 된다면? 이런 시간이 언제까지고 이어질거라고 생각하진 않잖아?"

"그, 그래도...!"

"물론 부끄럽겠지, 하지만 부끄럽다고 도망만 친다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도망친다면 남는 건 후회뿐이야. 그리고 고백할 때 생기는 부끄러움 마저 내가 대신 뒤집어 쓰는데, 왜 이렇게 지레 겁을 먹는거야?"

"겁을 먹은게 아니라...!!"

"그러면? 그러면 뭔데? 응?"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웃음꽃이 만발했던 분신의 얼굴엔 어느새 험악한 표정만 남아있었다. 분신에게서 느껴지는 기백에 질려 주춤, 주춤 몸을 움직이다 중심을 잃고 의자와 함께 쓰러졌다. 신음소리를 내며 엉덩이를 쓰다듬는 나를 보니 분신의 험악한 표정은 어느새 경멸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유약해선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보다 보다 못참겠어서 내가 나온거고."


 토시노 쿄코한테 내 마음을 전하는 건 확실히 겁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분신을 막아서려는건 단순히 그것때문이 아니다. 생각을 좀 더 정리하고 싶지만 이대로 또 다른 나한테 한심한 취급을 받는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땅을 박차고 일어서 학생회실 밖으로 나가려는 분신의 팔을 붙잡았다.


"겁을 먹은게 아니야!"

"똑같은 말만 반복하려고? 듣기 싫어, 놔."

"못 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손의 떨림은 이내 전신의 떨림으로 변했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아랫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째서 눈물이 나오려는걸까, 목이 먹먹해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먹먹함을 침과 함께 내 가슴 깊숙한 곳으로 삼켰다.


"겁을 먹은게 아니라... 내 마음은... 그러니까... 조금 더, 조금 더 정리 한 다음에 말하고 싶단 말이야."

"그게 '저는 겁을 먹어서 고백을 못하겠습니다.' 라는 말이랑 뭐가 다른건지 도저히 모르겠다고, 나는."

"누군가를 이렇게나 좋아 해 본건 처음이야, 그래서, 이 마음을 전할땐 확실하게 전하고 싶어. 나는 왜 너를 좋아하게 됐는지, 그렇게나 좋아하는 너와 함께 무엇을 하고 싶은지. 이렇게 무엇에 쫓기듯이 내 마음을 전달하는건... 싫어!"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다가 누가 고백이라도 해서 쿄코를 채가면?"

"기다릴거야, 토시노 쿄코가 다시 혼자가 될 떄 까지."

"만약에 다른곳으로 이사라도 가서, 영영 못보게 된다면?"

"반드시 찾아갈거야. 어디에 있건간에."

"......"


 방금 전 까지만 해도 거침없이 말하던 분신의 입이 멈추었다. 기나 긴, 너무나도 기나 긴 침묵이었다.


"...네 마음은 잘 알겠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우유부단 한 건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나 봐."

"그, 그럼...!"

"나는 이제 니시가키 선생님한테 가서 지금 일어난 상황을 원래대로 돌려 달라고 할거야, 쿄코한테는 무슨 말을 하건... 알아서 해."

"....."


 안도의 한숨이 절로 쉬어졌다. 그 한숨을 기점으로 온 몸의 힘이 풀려서 나는 털썩,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었다. 분신은 그런 나를 보더니 싱긋, 웃으며 나를 향해 손을 내밀어 주었다.


"5시 5분 전이야, 쿄코, 아니, 토시노 쿄코를 바람 맞힐 생각이 아니라면 서둘러 움직여야 해."

"고, 고마워..."


 힘이 풀린 다리에 다시 힘을 주고,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토시노 쿄코가 기다리고 있을 옥상으로.



 깔끔하게 정리 된 학생회실에 들어올 때 마다 니시가키 선생님이 만든 분신과 보냈던 시간들이 떠오르곤 한다. 선생님은 내 분신이 보여주었던 이상한 태도와 말을 전해듣고선 "기계가 오작동한걸까? 마츠모토랑할땐 멀쩡했었는데." 라는 말만 할 뿐, 어째서 그런 분신이 나왔는지는 잘 모르는 눈치였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생각해 볼 수록 이상했다. 과연 그 분신은 단순히 기계의 오작동때문에 나타난 것이었을까? 어쩌면 도망치고 부끄러워 하는 데 지친, 내 가슴 속 깊은 곳에 숨어있었던 마음이 우연한 기회로 튀어 나온것은 아니었을까?  


"스기우라 아야노~!"

"토, 토시노 쿄코?!"

"에어컨 쐬러 왔지롱~"

"여긴 학생부 부실이거든?! 부외자는 입장 금지야!"

"에이, 우리 사이에 쫀쫀하게 왜그래?"

"다, 달라 붙지마. 덥단 말이야..."


 뭐, 더 이상 내 마음을 숨기거나 하는 일은 없으니 확인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확인 할 수 없는 일에 머리를 굴려봤자 나오는 것도 없으니 그저 부질없는 추측일뿐, 확실한 건 니시가키 선생님이 만들어준 기계 덕에 조금은 더 내 마음에 확실해 질 수 있다는 사실, 그것 하나 뿐이다.

Posted by 비좀
,

여느 떄 처럼 문고리는 매끄럽게 돌아갔으나 문을 열어 젖히는 덴 많은 힘이 들었어요. '할 말이 있으니 저녁을 먹고 자신의 방으로 오라'는 어머님의 말은 해석하자면 '너 혼날 거 있으니까 내 방으로 와!' 라는 말이었으니까요. 문을 천천히 열고 슬쩍, 곁눈질로 방 안을 쳐다봤더니 언제나처럼 엄마, 아니, 어머님이 허리를 핀 채 정자세로 앉아있었어요. 어머님의 눈썹은 미세하지만 八자를 그리고 있었답니다. 너무나도 무서웠어요. 문을 닫고 그대로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들어 오세요, 루비."

"삐,삐깃."


 아차, 어머님은 내가 이런 소릴 내는 걸 싫어하시는데, 더 이상 소리가 세어나오지 않게 입을 틀어 막았어요. 평소라면 나를 째려보며 한 마디 하셨을 탠데 이번만큼은 눈썹이 조금 꿈틀거릴 뿐, 어머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셨어요. 저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며 어머님의 앞에 무릎을 꿇고 허리를 꼿꼿이 핀 채 앉았답니다.


"루비, 오늘부터 일체의 예법은 배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아니, 배우지 못하게 할거에요."

"네?"


 [예법]이라고 퉁쳐서 말하긴 했으나 어머님이 말하는 예법은 그동안 나를 괴롭혀 왔던 여러 수업 ─ 다도, 꽃꽃이, 전통무용, 전통무예 등등의 교양 수업 ─ 을 말하는 거였어요. 저는 항상 예법을 배우는 데에 힘들어 했고, 힘들어 하는 저한테 "쿠로사와 가의 자식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것들이다." 같은 말을 하는게 어머님과 저의 유일한 의사소통 이었는데, 지금, 어머님의 입에서 예법은 배우지 않아도 괜찮다는 얘기가 나와서 저는 매우 놀랐어요, 그리고 잠깐의 놀라움이 가시자 가슴 속에서 온갖 감정이 북 받쳐 올랐답니다. 평소엔 말귀를 도통 못 알아 먹는다고 언니와 어머님한테 자주 혼나는 저라도 어머님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진 알 수 있었거든요.


"어, 엄마! 아, 아니. 어머니! 저, 잘 할 수 있어요. 정말이에요! 더 이상 힘들다고 징징거리지 않을게요, 더 열심히 할테니까 제발 - "

" - 아무리 시간을 들여도 항상 제자리 걸음이라니. 쓸모 없는 것."


 절박함을 담아 말했지만 제 말은 단칼에 잘려버렸답니다. 어머님이 쯧, 하고 혀를 한번 차자 숨이 턱 막혔어요. 어머님이 내뿜는 무거운 분위기가 제 몸을 조이는 느낌이었어요.


"앞으론 어떻게 살던 당신 자유입니다만, 쿠로사와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일이 있다면... 크흠, 이 이상은 말 안해도 알겠지요? 할말은 끝났습니다."

"어... 엄마..."

"나가도 좋아요."


 느낄 수 있었답니다. 지금 어머니가 저를 어떻게 보는 지. 어머니가 저를 바라보는 눈길은 버려진 강아지를 보는 그것과 비슷했어요. 저는 결국 아무 말도 못하고 나갈 수 밖에 없었답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겨우 일으켜서 방을 나왔어요. 문을 닫으니까 한번 더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가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던 저를 무너트려버렸습니다. 저는 어머님이 계신 방 앞에서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답니다.


"루비!"


 그렇게 몇 분을 울었을까, 등 뒤에서 저를 포근하게 끌어 안아주는 사람이 있었어요.


"어, 언니..."


 절 끌어 안아준 사람은 언니였답니다. 언제나 저를 지켜주고, 언제나 저와 함께 웃어주었던, 상냥한, 나만의 언니.


"괜찮아요, 제가 지켜드릴게요, 앞으론 저런 말 들을 필요도 없어요. 괜찮아요, 괜찮아..."

"언니...!!"


 그 날, 평생 흘릴 눈물은 다 쏟아 버린 것 같아요. 이렇게 나를 쳐내버린 어머니가 미웠고, 어머니한테 버려진 저를 끌어 안아주는 언니가 너무나도 고마웠거든요. 시간이 지나고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흐려지면서 이 날은 저한테 아프지만 아름다운 추억이었습니다. 언니가 저를 얼마나 사랑하고, 생각 해 주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최근에 알아버렸어요, 저한테 예법 교육을 시키지말자고 어머님한테 말한 건, 예법을 가르쳐주던 선생님들도, 아버님도 아닌 언니였다는 걸. 언니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었어요. 이런 저런 수업에 점점 지쳐가던 저를 지키기 위함이었겠죠?


 ... 나는 지켜달라고 한 적 없는데 말이야. 결국 언니도 다른 사람들하고 똑같은 인간이었어. 나를 실패작이라고, 쓸모없는 년이라고 생각하겠지. 이제 이런 취급 받는것도 지쳤어. 전부 끝내버릴거야. 내 손으로.


────────────────


"...니, 언니!"

"...으, 으응?"


 피곤함 때문에 뻑뻑해진 눈을 억지로 꿈뻑거렸다. 혹시 늦잠이라도 자서 루비가 깨우러 온건가 - 싶어서 창 밖을 바라보았으나 창 밖은 아직도 어두웠다. "무슨 일 인가요?" 라고 루비한테 질문하려던 순간, 매캐한 냄새가 내 코를 찔렀다.


"루비? 이게 무슨냄샌가요?"

"집에 불이 났거든."

"ㄴ, 네?!"


 당황해서 몸을 일으키려고했는데 몸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내 손목과 발목이 무언가에 쏠리는 느낌을 받았다. 이 촉감은 분명 창고에 있는 밧줄이었다. 자고 있는 사이에 손목하고 발목이 결박 당한건가? 게다가 집에는 불이 났고?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루비?! 이게 무슨 일인가요?!"

"쉬잇."


 나를 더 황당하게 한 건 루비의 태도였다. 이 집에 불이 난다면 제일 당황할 사람은 단연코 루비였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루비는 여지껏 봐 왔던 어느 루비보다도 여유있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저말로 쿠로사와 루비인가 싶을 정도로.


"엄마랑 아빠는 아직 자고 있단 말이야. 그렇게 언성을 높이면 잠에서 깬다고."

"집에 불이 났으면 당연히 다 꺠워서 지금이라도 빨리 나가야죠!"

"언니, 평소엔 눈치가 그렇게나 빠르면서 아직도 눈치 못챈거야? 아직도 잠이 덜 꺤 건가."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고, 루비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루비는 웃고있었다. 언제나처럼 귀여운 얼굴이었지만 왠지 모를 섬뜩함이 느껴져 몸부림쳤다.

 

"자꾸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는건가요?! 이런 긴박한 상황에! 일단 제 몸을 묶고있는 밧줄부터 -"

"왜 언니가 묶여있을까? 왜 집에 불이 났는데도 나는 이 집을 안나가고 있을까? 왜 이런 상황에 나는 엄마랑 아빠를 안꺠운걸까? 응?"

"루비, 당신... 설마..."

"맞아, 이 집이 불타고 있는건 나 때문이야."

"대체 무슨 짓을 - !"


 뺨이 얼얼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거지? 라며 머리를 굴리기도 전에 반대쪽 뺨도 얼얼해졌다. '뺨 맞았다'는 당연한 사실을 인식하는데에는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있잖아, 언니는 점점 엄마를 닮아가는 거 같아.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성말라지고, 목소리가 커져. 그리고 눈빛이 점점 차가워지고있어. 언니는 이런 사실 알고 있었어?"

"루비.. 당신 대체..."

"나는 그래도 - 언니랑 엄마는 다르니까, 라고 생각하면서 이 집에서 살았던 거거든. 나한테 상냥하고, 나와 함께 웃어주는 언니가 마냥 좋았어. 그런데, 얼마 전에 알아버린거있지? 언니건, 엄마건 결국 똑같았다는걸."

"이, 일단 이것 좀 풀어봐요! 풀어보고... 대화!, 대화를..."

"나랑 대화하고 싶었다면 나를 실패작으로 보기 전에, 내가 아직 쿠로사와 가의 딸이었을때 시작했어야지. 이미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어. 나는 언니를 너무나도 좋아했는데, 이젠 언니가 좋았던 만큼 언니가 너무나도 미워."


 말을 끝마치고 나서 루비는 방 문을 열었다. 내가 살아왔던 집이 불에 좀먹히는 소리가 귀에 생생히 박혔고, 뺨을 맞음으로써 반쯤 나가있었던 정신이 몸으로 돌아왔다.


"루비!! 루비!!! 당장 이거 풀어요!!!"

"... 다음번엔 이것보단 더 친하게 지낼 수 있기를. 그래도 언니가 내 언니라서 행복했었어."

"루비!!!!"


 루비는 문 앞에서 나갈 것 처럼 굴더니 스르륵, 쓰러져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매캐한 연기 속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Posted by 비좀
,

1

 

"어쩔거에요, 사쿠라코?"

 

'에이, 사람이 많아서 불꽃 터지는게 하나도 안보이잖아.' 라는 소리를 하며 사쿠라코는 단 몇 분 만에 내 손목을 잡아 사람이 한명도 안 보이는 외진 곳으로 날 끌고 갔다. 여기까진 좋았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딘지 전혀 감이 안 잡힌다는 것이었다. 스기우라 선배님이 우리가 사라진 걸 슬슬 눈치 챌탠데... 지금쯤 불꽃놀이를 보러 온 사람들을 헤집으면서 우릴 찾고 있진 않을까.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에잇! 시끄러워! 가슴 마인. 불꽃놀이 보러 도쿄까지 온 거잖아?! 그럼 최대한 즐겨야지!"

 

사쿠라코는 그런 말을 하며 내 가슴을 꼬집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머나먼 타지까지 왔는데 길을 잃어서 어쩔꺼냐구요. 그렇게 따지고 싶었으나 내 가슴을 꼬집던걸 멈추고 밤하늘을 화려하게 채우는 불꽃 놀이를 보는 사쿠라코를 보니 그런 생각이 싹 가셨다. 그래. 사람들만 가득했던 방금 전 풍경보단 지금 보이는 풍경이 훨씬 나은 건 사실이니까.

 

"... 하아, 그래요, 불꽃놀이 보러 온 거니까. 즐겨야죠."

 

, . 어두 컴컴한 하늘이 불꽃이 한번 터져나갈 때 마다 불꽃의 색으로 물들어갔다. 빨갰던 하늘이 푸르게 빛나다 노란색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저기, 사쿠라코."

"?"

"저희 말이에요, 꼭 불꽃놀이 같네요."

"무슨 헛소리야? 그게."

"하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조금만 더 보다가 돌아가죠. 스기우라 선배님이 걱정하시겠어요."

 

이토록 어둡고, 음침한 저를 밝게 물들여주는건 사쿠라코, 당신 뿐이에요. 라는 말을 하고싶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긴, 언제까지라도 같이 있을테니 이 말은 다음으로 미뤄도 상관 없겠지. 나는 사쿠라코한테 살짝 기대며 밝게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2

 

"히마와리~"

 

벨을 몇번이나 눌렀는데도 문 너머에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돌아다니는 걸 싫어하는 애니까 분명 집 안에 있을탠데. 대체 어디 간 걸까. 전화를 해도 통 받지를 않고.. 집에 직접 찾아가면 그나마 히마와리랑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아무래도 착각 이었던 것 같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선 연락도 뜸해지고 서로 노는 시간도 줄었으니 히마와리랑 연락을 안 하는 것 자체는 그렇게 큰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히마와리가 나한테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가 마음에 걸렸다.

 

- [그래요, 이제 당신한텐 저 같은 건 필요 없겠죠.]

 

무슨 소리냐고 답장을 보냈으나 저 문자를 보낸 이후 히마와리는 내가 보내는 모든 연락을 무시했다. 그래서 직접 히마와리네 집까지 찾아 갔는데 굳게 닫힌 문 너머에선 아무 답도 없다. 정말로 집을 비운 걸까, 아니면 그냥 집에 있는데 날 무시하는 걸까.

 

"히마와리~"

 

역시 나를 무시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슬슬 화가 치밀었다. '저 같은 건 필요 없겠죠.' 라니. 애초에 나를 멀리한 건 네 쪽이잖아. 나는 벨을 누르는 손을 멈췄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쥔다음 할수 있는 한 쎄개 문을 두들겼다.

 

"!! 히마와리!! 할 말 있어서 그러니까 당장 나와!!"

 

손이 아플정도로 문을 두들겼는데도 문 너머에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손이 아픈게 느껴지자 얼굴에 맺힌 땀방울이 흐르는 것도 느껴졌다. 그래, 나를 이렇게 무시하고 문전박대하는 녀석한테 더 이상 뭘 하겠어? 나는 할 만큼 했어. 얼굴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치고 뒤돌아섰다.

 

"..어라?"

"히마와리?"

 

그렇게 열을 낸 것도 무색하게, 나는 뒤돌아 서자 마자 히마와리와 마주쳤다.

 

", 안녕. 사쿠라코 언니."

", 아아. 카에데구나. 안녕."

 

히마와리 치곤 키가 좀 작은 거 아닌가 싶었더니, 카에데였구나. 히마와리랑 정말 똑 닮게 자라서 볼 때마다 흠칫흠칫 놀란다니까. 그런데 언제부터 내 뒤에 있었던거지? 혹시 방금 전에 열내면서 문 쾅쾅 두들기는 것 까지 본 건가? 민망하게..

 

"저기, 카에데. 히마와리 혹시 지금 집에 없니?"

"히마와리 언니는 친구랑 같이 불꽃놀이 간다고 했었는데... 사쿠라코 언니는 히마와리 언니랑 같이 안갔어? 사쿠라코 언니도 가는 것 처럼 말을 했었는데."

"..... ?"

 

확실히 히마와리가 나한테 '7월 말에 불꽃놀이 보러 가지 않을래요?' 라는 말을 하긴 했었지만.. 나는 안 간다고 했었는데?

 

3.

 

"하우으.."

 

옆 사람이 깨지않게 조심스럽게 기지개를 켜며 몸을 뒤틀었다. 푹 잔 것 같아서 창문 너머를 바라보니 푸르른 산만 보일 뿐, '도쿄' 라는 글자가 적힌 표지판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한참은 더 가야하는구나. 쫙 폈던 허리를 다시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도착까진 아직 멀었으니 잠이나 잘까, 싶어서 눈을 감았으나 방금전에 너무 잘 잔 탓일까, 잠이 오지 않았다.

 

"..전 지금 뭘 하고있는 걸까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잘못 한 게 있으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입이 닳도록 사쿠라코한테 말해 놓고선 말을 잘못했다고 사과하긴 커녕, 도망이나 치다니. 자신의 꼴이 너무나도 한심하고 비참했다. 사쿠라코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나를 찾고 있을까. 아니면 나한테 욕을 퍼붓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 모든 생각이 자의식 과잉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사쿠라코는 이제 나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걸.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히마와리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분명 중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는 한몸이나 다름 없이 지냈던 사이였다. 사이가 점점 멀어진건 고등학교 입학할 때 즈음이었지, 이유는 두가지였다. 하나는 의젓해진 사쿠라코 옆에 친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는 거였고, 나머지 하나는 사쿠라코가 나한테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처음에는 '고등학교에 들어 왔으니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려고 하는 것 아닐까.' 라는 생각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한달, 두달이 지나도 자신을 대하는 사쿠라코의 태도는 중학생때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때부터 사쿠라코와 틀어지기 시작했다. '제가 무엇을 잘못했나요?' 라는 질문에 사쿠라코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제가 싫어진건가요?' 라는 질문에도 대답을 안하긴 매한가지였다. 내가 정말 잘못해서, 아니면 내가 정말 싫어져서 대답을 못하는 것이건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이 차마 말을 못할 것이여서 대답을 안하는 것이건 결국 사쿠라코가 나를 예전과 똑같이 생각하지 않는다는점은 똑같았으니까, 나는 사쿠라코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무리해서 예전과 같은 사이로 지내려고 발버둥 쳐 봤자 점점 멀어질 뿐일 테니까.

 

"... 하아."

 

그래도, 그때의 관계가, 가까움이, 사쿠라코가 그리웠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손을 내밀었으나 그 손마저 사쿠라코한테는 닿지 않았다.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저, 딱 한번만 더 빛날수 있으면 그걸로 족할탠데, 그 날 처음으로 봤던 불꽃놀이 처럼.

 

4.

 

"감사합니다 스기우라 선배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 , 오오무로도 좋은 하루 보내, 공부 열심히 하고.

 

, 전화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한숨이 나왔다. 결국 스기우라 선배님도 '불꽃놀이 간다는 말은 들었던거 같은데.' 라는 말만 할 뿐 달리 알고있는 건 없었던 것이다. 하긴, 그렇게나 애지중지하던 카에데한테도 '불꽃놀이 보러 가요.' 정도로 말했다는데 다른사람한테 자기 행선지를 밝혔을 리가 없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어디 간 거야..."

 

혹여라도 메일이라도 왔을까 확인 해 봤지만 히마와리에겐 연락 한 통 오지 않았다. 대체 어디 간 걸까, 거짓말을 하고 가출이라도 한걸까? 아니야, 가출 할 이유도 없을 뿐더러 책임감이 강한 녀석인데 아직 어린 카에데를 두고 집을 뛰쳐나가다니 말도 안되지. 그렇다면 정말 불꽃놀이를 보러 간 걸까? 정말로? 친구랑 같이? 하지만 히마와리에게 친구는 나 뿐일탠데.

 

"... 하아."

 

아침부터 히마와리를 찾아 다녀서 그런걸까, 더 이상 히마와리를 찾을 단서가 없다는 걸 깨닫고 몸에 힘이 쭈욱 빠져서 침대에 몸을 뉘었다. 탈력감, 답답함. 그 외의 여러 감정들이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생각 해 보면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쭉 이런 감정들을 달고 살았다. 이런 감정의 근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자신의 친구, 조금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자신의 반쪽인 [후루타니 히마와리]에게서 비롯한 것이었다.

 

"바보."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걸까,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 까지는 그래도 잘 지냈는데,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 모든게 달라졌다고 해야하나, 히마와리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중학교때의 그것과는 조금씩 달라졌다. 벽을 한 장 정도 두고 대화하는 느낌, 아마도 그때부터 였을것이다. 나도 히마와리를 멀리하기 시작한 건.

 

"멍청이."

 

그러면서 '내가 뭘 잘못했어요?' 라느니 '내가 싫어졌어요?' 라느니... 그런 감정을 먼저 느끼게 한게 누군데? 머리에 피가 솟기 시작했다.

 

"내가 왜 바보 멍청이 출렁출렁 가슴마인때문에 이렇게 짜증나야하는건데?!"

 

침대에 누워서 몸부림을 한껏 쳐봤지만 히마와리가 '짜증난다고 몸부림을 쳐봤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요, 사쿠라코.' 따위의 잔소리를 하는 것만 생각나서 더더욱 짜증났다. 친구도 없어, 돌아다니는 거 싫어해서 아는 곳도 없어, 그런 애가 무슨 불꽃놀이를 가겠다는거야? 불꽃놀이랍시고 가본 곳은 스미다 강 밖에 없으면서 -

 

"어라?"

 

생각해보면 그렇다, '불꽃놀이 보러갈게요.' 라고 주변엔 많이 말 해 놨으니 그것이 거짓말은 아닐것이다. 그리고 히마와리가 가본 곳이 있는 불꽃놀이 장소는 스미다 강 뿐이다. 그렇다면 히마와리는 도쿄로 가지 않았을까?

 

"그치만..."

 

혼자서 도쿄까지 갈 정도로 행동력이 있는 애도 아니고, 같이 갈 상대도 없는데 도쿄까지 가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기도 하지, 불꽃놀이를 엄청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히마와리가 스미다 강으로 가고 있을 거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다가 나는 이 직감에 몸을 실어보기로 했다.

5.

 

, 퍼엉. 어두운 하늘을 형형색색의 불꽃이 수놓았지만 하늘이 화려하면 화려해 질수록 내 마음은 점점 어두워 져만 갔다. 불꽃놀이를 본다고 마법처럼 기분이 나아진다곤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화려한 광경을 보면서 이렇게나 기분이 나빠 질 거라고도 생각 하지 않았었는데.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불꽃놀이를 보는데 고작 옆에 사람 한 명 없다고 이렇게나 기분이 어두워 질 수 있다니.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는 노는 것 하나도 사쿠라코가 곁에 없으면 제대로 못하는 인간이었구나, 새삼 사쿠라코가 내 안에서 얼마나 크나큰 존재인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옛날엔 그 아이가 내게 기댄다고 생각 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 해 보면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아이한테 기대기만 했었다. 도중에라도 알았다면 홀로 서는 연습이라도 해 봤을 탠데, 알량한 자존심과 어느 순간부터 비대해진 자의식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이 꼴이 났다. 놀려고 그 기나긴 시간동안 버스를 타고 왔으나 어떻게 노는지도 몰라서 하하호호 웃는 군중 속에서 한숨이나 푹푹 쉬는 결함인간, 그것이 바로 지금의 나다.

 

보고... 싶네요...”

 

사쿠라코를 보고 싶었다. 언제나 그러했듯 사쿠라코를 품에 꽉 안으며 미안해요라고 사과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한 행동 하나하나가 사쿠라코와 나를 막는 장벽이 되었다. 내 마음을 흔드는 착신음을 듣기 싫어서 핸드폰 전원을 끄고 메시지를 무시한 것이, ‘당신한테 저 같은 건 필요 없겠죠.’ 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내 감정에 거짓말을 한 것이, 사쿠라코를 보며 지레짐작으로 마음에 벽을 펼친 것이... 나에겐 이런 행동들이 만들어 낸 감정의 골들을 넘어가는 방법이 없었다. 항상 골을 만드는 쪽은 나였고, 그리고 그런 골들을 훌쩍 뛰어 넘어 나한테 손을 뻗어 준건 언제나 사쿠라코였다.

 

사쿠라코...”

불렀어?”

?”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며 후닥닥 뒷걸음질을 치다 그만 넘어 질 뻔 했다. 사쿠라코가 재빠르게 내 왼팔을 잡아주지 않았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엉덩방아를 찧었을 것이다.

 

참 나, 혼자서 멀리도 왔네.”

어떻게...”

그냥, 너라면 여기 있을 것 같았어.”

 

찰랑찰랑 파도를 치며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 나를 째려보는 갈색 눈, 퉁명스럽지만 따스한 목소리, 이 모든 것들이 내가 보는 것이 환각이 아니라 진짜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

그냥 니가 여기 있을 것 같아서 여기 와봤다고, 문자도 안 받지, 전화도 안 받아, 집에는 없어. 그러니까 너를 안 찾고 베기겠어?”

그렇지만... 불꽃놀이는 못 오신다고...”

“... 돼서.”

?”

걱정 돼서 찾아왔어. ‘그래요, 이제 당신한테 저 같은 건 필요 없겠죠?’ 라니, 그 문자 받고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단 말이야.”

사쿠라코...”

, 네 질문엔 다 대답했고... 야, 어금니 꽉 깨물어라.”

 

사쿠라코는 랩이라도 하듯 빠르게 말을 끝마치더니 나를 잡아당기더니, 하늘에서 나는 폭음이 묻힐 정도로 강하고 빠르게, 내 따귀를 때렸다. 나는 그 서슬에 풀썩 넘어지고 말았다.

 

당신...!! 이게 뭐 하는..!!!”

너무 한심한 생각을 하고 있어서 한 대 쳤다. 내가 도쿄에 온 건 온전히 너를 찾아서 한 방 먹여주려고 온 거란 말이야. , 불만 있냐?”

당연히 있죠!!! 다짜고짜 따귀를 때리면 누군들 기분 좋겠어요?!”

 

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세워 사쿠라코한테 따귀를 날리려 했으나 사쿠라코는 아주 가볍게 내 손목을 잡아 챘다.

 

그럼 다짜고짜 너 나 싫어하지?’ 라면서 훌쩍 사라져버리는 친구를 보는 내 기분은 퍽이나 좋았겠다? 물론 내 잘못도 있어. 그렇게 느끼게 한 건 내 잘못 맞는데, 적어도 오해를 풀 시간은 줘야 할 거 아니야?! 내 말이 틀려?!”

그래서 말 했잖아요! 내가 싫어졌느냐고, 내가 뭐 잘못한 거 있느냐고!”

그런데 먼저 나한테 일방적으로 거리를 둔 건 너였거든?! 뭘 대답하든 건성건성 대답하고, 무시하고! 그런 입장에서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같은 질문을 받으면 내가 무슨 생각이 들겠어?!”

무슨 소리에요?! 먼저 거리를 벌린 건 사쿠라코거든요? 친구들 사귀면서 나랑 거리를 두면 저는 , 사쿠라코는 내가 부끄러운 친구인가 보구나이런 생각밖엔 안 들거든요?! 그래서 사쿠라코의 바람대로 해줬을 뿐입니다.”

난 너 부끄러워 한 적 없어! 진짜 애가 언젠가부터 베베 꼬여가지고선 그런 생각밖에 안하고... 언제나 자신감을 가지고 생활하라는 건 다름 아닌 너 아니였어?”

“... 하아.”

 

사쿠라코의 말을 들으니 따귀 때문에 머리에 몰렸던 피가 점점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래, 사쿠라코는 내가 거리를 벌렸다고 느꼈단 말이지?

 

“... 그럼 왜 내가 질문했을 때 먼저 거리를 벌린 건 너였어.’ 라는 말을 안했어요?”

그 질문할 때 너 완전 죽을상이었거든? 내가 한 마디만 보태면 그대로 교실에서 뛰어내릴 것 같았다고.”

“... 그랬나요?”

그랬어.”

 

그랬구나, 전부 쓸데없는 걱정이었구나. 사쿠라코는 언제나 똑같이 나를 생각해 주었는데. 나만 혼자서, 바보처럼...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서 입 안에서 맴돌았다. 이 감정은 말로는 표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예전에 했던 말, 표정, 하나하나 다 아시면서 아주 당연한 것 하나를 모르시네요.”

“?”

 

받았으면, 받은만큼 갚아줘야겠지. 나는 왼손을 들어 올려 아주 잽싸게, 사쿠라코의 뺨을 쳤다. 사쿠라코의 살갗이 내는 소리에 맞춰서 붉은 불꽃이 하늘을 수놓았다.

 

제 손은 두개 있거든요.”

이게...!!”

미안해요, 저 때문에 많이 힘들었죠?”

 

당장에라도 주먹으로 날 칠 것 같았던 사쿠라코가 내 말을 듣더니 주먹을 내리고, 잡아챘던 내 손목도 풀어주었다. 방금 전까지 잔뜩 찌푸린 상이었던 사쿠라코의 얼굴에 웃음이 피었다.

 

“... 알면 잘해, 다음에도 이러면 그때는 정말 가만 안 둔다.”

무서워서라도 잘 해야겠네요 죄송합니다. 사쿠라코님.”

“... 푸흡.”

“.., 킥킥.”

 

아무 이유도 없이 터져나온 웃음에 사쿠라코도 웃음으로 회답했다.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눈물이 나올 때 즈음에서야 사쿠라코의 진지한 한 마디가 내 웃음을 멈췄다.

 

사쿠라코, 전에 그랬었죠? 우리가 마치 불꽃놀이 같다고.”

“... 그랬었지.”

우리 둘이 언제까지나 이렇게 불타오를 수 있진 않을 거예요. 저는 당신이라는 불꽃을 한번 잃어버렸다고 생각도 했고요. 하지만 지금에서야 확인했어요. 적어도 지금 만큼은 당신은 제 마음 속에서, 저는 당신의 마음속에서 불타오르고 있다는 걸. 고마워요 사쿠라코, 당신이 제 소꿉친구라서 정말 다행이에요.”

“... 무슨 부끄러운 소리를 하는 거람.”

 

나는 사쿠라코에게 슬며시 기댔다. 사쿠라코와 내 눈 안에선 똑같은 불꽃이 어두운 하늘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Posted by 비좀
,

1


"....."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병아리를 연상케하는 노란색 가디건과, 그 가디건하곤 전혀 어올리지 않는 검은색 표지의 책이었다. 아직 잠이 덜 꺤 탓일까, 시야가 안개라도 낀 듯 흐릿했다. 시야가 맑아진건  눈을 몇번 꿈뻑하고 난 다음이였다.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지만 앳된 느낌이 드는 노란색 가디건, 고급스럽지만 살풍경하다는 느낌을 주는 검은색 표지의 양장본. 


"어라, 요시코. 언제 일어났어유?"


 그리고 노란색 카디건과 양장본의 틈새로 보이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 방금 전엔 안보였던 것들이 뚜렷히 보였다.


"나 언제부터 자고 있었어...?"

"글쎄유, 지도 잘 모르겠구먼유."

"어제 잠을 좀 늦게 잤더니..."


 하나마루의 허벅지를 베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깨닫고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하나마루가 한 손으로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리더니 지긋이 눌렀다. 


"다리 안저려?"

"안 저려유."

"그래? 그럼 조금 더 이러고 있어도 돼?"

"얼마든지유."


 대답이 마음에 들은 건지, 하나마루는 내 머리를 지긋이 누르던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나마루의 손에서, 하나마루의 가디건에서, 하나마루의 허벅지에서 나는 은은하고도 달콤한 향기에 나는 일어나자마자 조금씩 취해갔다. 술은 입에 대본적도 없지만 '취한다'면 틀림없이 이런 느낌일 것이리라. 몸에서 힘이 조금, 조금씩 빠져나가고, 구름 위를 걷는 듯 몽롱 해 지는 느낌. 하나마루의 배가 보이도록 몸을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하나마루의 향이 조금 더 진하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참 대단한 자신감이네유. 요시코 머리가 얼마나 무겁다고 다리 안저리냐는 질문을 하고 그래유?"

"머리는 당연히 무겁잖아."

"든게 있어야 무겁쥬."


 그 말을 듣자 몽롱했던 전신에 다시 피가 돌면서, 구름 위를 걷던 내 의식은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너 지금 나보고..!!"

"농담이었어유~"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하나마루가 손으로 내 머리를 꾹 누르는 바람에 나는 몸을 버둥거릴 뿐이었다. 나는 헛된 몸짓을 멈추고 다시 하나마루의 허벅지에 내 머리를 맡기기로 했다.


"그냥, 요시코의 머리가 그정도로 무겁지는 않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유. 너무 가벼워, 깃털 같아."

"이렇게 말해놓고 또 '역시 머리가 텅텅 비어서 그런거여유, 이상한 책 읽지좀 말고 추천 도서라도 좀 읽어봐유~' 이럴 속셈이지?"


 그렇게 말하며 다시 몸을 돌려 하나마루의 얼굴을 올려다 봤다. 하나마루의 표정은 방금 전과는 달리 사뭇 진지해보였다.


"깃털 같아서, 언젠간 날아갈것같아."


 이렇게 진지하게 말하는 하나마루를 보니 어딘가 열이 올라서. 빠르게 팔을 올려 하나마루의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하나마루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양손으로 꾹, 누르더니 뾰루퉁한 표정으로 입을 열려고 했다. 나는 조용하라는 의미로 하나마루의 입술을 검지로 쓸어내렸다.


"널 두곤 어디에도 안가. 넌 나 없인 못살잖아."

"... 자기도 나 없으면 못살면서, 큰 소리는."


 사뭇 어두웠던 표정이 방금 전과 똑같이 밝은 표정으로 바뀌는걸 보니 내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이렇게 가슴이 간질거리는 건 분명, 방금 전부터 기분 좋게 부는 바람 탓 이겠지. 


"좋아해유."

"응?"


 하나마루의 말을 실은 바람이 내 볼을 스쳤다.


"이런 날씨. 참 좋아한다고유."

"아, 응, 그렇지.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게 참 좋네. 따듯하고."


 그리고 그 말은 바람처럼 내 살갗을 스치고는,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2


"아가씨!"

"ㅇ, ㅇ, 예?"


 눈을 뜨자 마자 보인 건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이 인상적인 중년 남성의 얼굴이었다. 시야가 안개라도 낀 듯 흐릿해서 나는 눈을 몇번 꿈뻑, 꿈뻑 감았다 떳다. 흐릿했던 시야가 점점 선명해졌다. 이마와 머리의 경계가 매우 흐릿한 중년 남성이 보였다. 중년 남성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대체 왜?' 라는 궁금증이 들었으나 그 질문은 내 앞에 있는 중년이 버스 기사 유니폼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니 깨끗이 사라졌다.


"다 왔다니까. 내려요."

"아..."


 대체 언제부터 잤었더라? '누마즈 30km' 라는 이정표를 본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버스 안에서 이렇게 깊이 잠들었던 적이 있던가?


"감사합니다 기사님, 죄송해요!"


 인삿말을 남기고 도망치듯 버스에서 나왔다. 잠들기 전에는 날씨가 조금 흐린 것 말고는 별 문제 없었는데, 잠에서 깨어나니 온 세상이 안개에 잠겨있었다. 찌뿌둥한 몸을 풀기 위해 심호흡을 깊게 하고 기지개를 힘껏 켰다. 심호흡을 하니 내가 누마즈에 왔다는 것이 실감 됐다. 지금 내 주변에 있는 이 안개는 마시기만해도 가슴 속에서부터 탁해지는 것 같은 도쿄의 안개가 아니라, 미세하지만 확실히 짠맛이 나는 누마즈의 안개였다. 누마즈에 살았을 땐 그렇게도 싫어했던 맛이었으나, 도쿄로 나가고 나선 너무나도 그리워하던 그 안개였다. 하지만 - 


"...우읍."


 실제로 이 안개를 마시니까,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이곳에 깔린 안개가 이렇게나 비렸던가. 머리가 핑 돌아 잠시 휘청거리다 겨우 정신을 차렸다. 심호흡을 몇번 하고 나니 구역질이 날 정도로 비렸던 안개의 맛이 차츰 옅어져갔다.


"하아..."


 알고 있었다, 방금전의 구역질은 비린 안개나 차멀미 따위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걸. 버스 안에서 그런 꿈을 꾼 것도, 안개를 마시고 구역질을 한 것도 전부 핸드백 안에 있는 청첩장 탓이라는 걸 너무나도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인정하기 싫었다. 안개에 잠겨 구역질을 한 것도, 도쿄에서 이곳까지 버스를 타고 온 것도, 도쿄에서 청첩장을 받은 것도, 어느것 하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할수만 있다면 여태껏 그래왔던 것 처럼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오랜만이네...."


 가슴 속에서 휘몰아 치는 감정들을 애써 부정하며 몇 분을 걸었을까. 나는 하나마루와 약속장소로 잡았던 카페에 도착했다. 고등학교 다닐 떈 참으로 자주 들렀던 카페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선 두번 다신 오고싶지 않은 카페였다.


"하필이면 이곳을 약속장소로 잡다니, 성격 나쁜건 변함이 없다니까."


 나는 핸드백 안에 있는 청첩장을 만지며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원두 향에 섞여 미세하게 감귤 냄새가 났다. 그 냄새를 맡자 안그래도 혼탁했던 마음에 한층 더 파문이 일었다. 잊고 싶어서 도망쳤던 기억이 스멀스멀 표면으로 올라오기 시작 한 것이다.


3


"아메리카노에 헤이즐 넛 시럽 5바퀴. 맞쥬?"

"고마워."


 고개를 숙이고 커피를 바라보았다. 커피 잔 안에는 참으로 형편없는 표정을 하고 있는 내가 있었다.


"요시코."

"......"


 하나마루가 불렀지만 입이 선뜻 떨어지지 않았다. 하나마루는 언제나와 똑같이 상냥했지만, 나는 나 혼자서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저기유, 요시코 - "

"...화났어?"


 겨우겨우 입을 열어서 대답한다는게 '화났어?' 라니, 나라는 인간은 대체 얼마나 한심한거야. 내 한심함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 한숨을 치워버린건 커피잔을 꽉 쥐고 있는 내 손에 맞닿은 하나마루의 따듯한 손이였다.


"요시코가 아는 지는 이런 일로 화낼 사람인가유? 하나마루라는 사람을 그렇게밖에 안봤다니, 조금 실망이구먼유."

"... 유유마루."


 따듯한 손길 덕에 나는 겨우 고개를 들 수 있었다. 하나마루는 웃고 있었다. 한송이 들 꽃과 같은 밝은 미소, 언제나와 똑같은 표정이다.


"다만 조금 서운할 뿐이여유, 왜 지한테만 말을 안했는지."

"약속 했었는데 내가 약속을 깨버렸으니까, 당연히 화가 많이 났을거라고 생각했거든."

"...풉."


 저 소리를 기점으로 하나마루는 고개를 돌리더니 몇 번이나 웃음소리를 냈다. 나로서는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이런 문제로 고민하고, 슬퍼하고, 죄책감을 가진 내가 이 세상에 둘도 없을 바보처럼 느껴져서 머리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야! 넌 사람이 진지하게 말하는데 - "

"진지하니까 웃긴 거 아니에유? 후우... 실컷 웃었네. 나이를 먹으면 뭐해유, 나이를 먹어도 이렇게 한결같이 애같은데."

"날 애 취급 하는것도 이제 좀 그만 - "

"첫번째로, 영원히 내 곁에 있어준다는 약속을 정말로 제가 단어 그대로 받아 들였을거라 생각한게 애 같고, 두번째로, 몸이 멀어진다고 내 곁에서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그 발상이 너무 애같아유. 이제 알겠어유? 제가 요시코를 왜 애 취급하는지."

"말 좀 그만 잘라먹어!"

"아차! 미안해유. 무례한 짓을 했네유."


 하나마루의 말을 들으니까 귀까지 화끈거렸다. 내가 했던 생각이 그렇게나 애 같았나?


"그래서 좋아하는 거지만유."

"응?"

"좋아해유."

"......"


 들꽃같은 미소가 사라지고 얼굴에 진지함이 서리자, 내 얼굴은 다른 이유로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뭐, 이번엔 뭘 좋아 하시려나, 이 카페의 분위기 같은거?"

"생각 해 보면 지난 3년동안 했어야 하는 말이었는데, 말 한마디 던지는게 무서워서 이런 시기에 이런 말을 하는 지를 용서해줬으면 좋겠지만 - "

"잠깐만, 유유마루."

"마루는 좋아해유. 따듯한 바람도, 카페의 분위기같은것도 아닌 - "

"그만!"

"...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내 선택은 옳은 선택일까, 내가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아닐까, 혹여나 내가 생각하는 말을 하려는건 아니지 않을까. 하지만 말을 내뱉은 이상 끝맺음은 지어야 했다.


"내가 이제 도쿄로 간다는 거, 그걸 알고 오늘 불러낸 거 맞지?"

"...그렇지유."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 둘이 잘 못본다는 것도 알고있겠지?"

"그렇지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 "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은 많잖아."


 눈을 꾹 감고 퍼붓듯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게 아닌데, 왜 내 입은 이런 말만 내뱉는 것일까. 사실은 고맙다고 하고 싶었다. 나를 좋게 봐줘서, 나를 좋아해줘서, 그동안 나와 같이 있어줘서. 그리고 미안하다고 하고 싶었다. 고작 둘 사이의 거리가 멀어진다는 이유 만으로도 우리 둘 사이에 불협화음이 생길까봐, 그래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멀어질까봐 두려워 하며 너를 밀어내는 겁쟁이이라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었다.


 하지만 - 


"지한테 있어서 요시코보다 좋은 사람은 없 - "

"난 이만 가볼게."


 하나마루가 슬퍼하는 얼굴을 보니,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갈수가 없었고, 나는 하나마루의 시선에서, 시선 끝에 방울져있는 눈물에게서 도망쳤다. 


4


 안개가 슬슬 걷혀갈 무렵이었다. 청명한 방울소리가 나 혼자만 있던 카페에 누군가가 들어왔음을 알렸다. 나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와있었네유."

"... 오랜만이네."


 세월이 내 친구만을 비껴간 듯, 밤을 연상케 하는 갈색 머리도, 단풍을 연상케하는 갈색 눈동자도, 들 꽃을 연상하게 하는 따듯한 미소도 하나도 변함이 없었다. 변한 것이라면 옷차림 뿐일까,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라도 되는 듯 항상 입고 다녔던 노란색 가디건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 자리를 검은색 블레이저와 실크 와이셔츠가 대신하고 있었다. 얼굴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고 고작 옷차림만 바뀌었을 뿐인데, 중학생으로밖에 안보이던 녀석이 완연한 어른으로 보였다.


"그러게유, 오랜만이네유 - "

"그동안 잘 지냈어?"

"에휴,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눈 코 뜰 새 없이 바빳시유."


 '그만, 말 하지마.' 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올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다.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인정하기 싫었다.


"결혼식이라는게 그렇게 준비가 많이 필요한건진 몰랐구먼유."

"......"


 하나마루가 누군가의 신부가 된다는 걸, 내 가방안에 있는 청첩장을 하나마루가 보냈다는 걸, 나는 인정할 수 없었다.


"... 결혼식 준비 힘들었겠다."

"장난이 아니었어유, 그 준비들이 내일 모래 결실을 맺는다는게 믿기지가 않네유."

"그런데 말이야, 결혼식이 내일 모래라면 - "


 너무 긴장한 나머지 혀가 굳은 것일까, 발음이 새는 것 같아서 잠시 말을 쉰 다음에 말을 이어 나갔다.


"... 나는 왜 오늘 부른거야?"

Posted by 비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