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련)님과 같이 쓴 글이에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뭐 해?”
“어라? 아직까지 안 가고 뭐하고 있었어?”
오늘의 기분은 이상하다고 표현 할 수 밖엔 없는, 그런 기분이었다. 피아노를 치면 좀 나아질까. 그렇게 생각하며 음악실의 딱딱한 의자에 앉아 꼬리뼈가 아파 올 때 까지 하얀 건반을 마구 두들겼건만, 그래도 이 이상한 기분은 떨어지지 않고 내 마음을 괴롭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노을이 뉘엿뉘엿 떨어지는 저녁. 그래서 ‘그냥 집에 가자.’ 라고 생각 하며 밖으로 나왔는데..
왜? 어째서? 이 학교를 졸업한 네가 그 하얀 피부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여기 있는 거야?
“그냥.. 뭐..”
“아, 알겠다. 이 니코님하고 더 이상 학교에서 못 본다고 생각하니 울적해져서 여기 남아있었던 거구나?”
내 기분, 울적 한 걸까? 니코가 졸업하는 건 아주 당연한 건데, 그것 때문에 울적하다고?
“그런 거 아니야! 바보 같긴..여하튼, 졸업까지 한 사람이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비밀로 하고 싶었는데,.. 좋아. 마키니까 특별히, 아주 솔직하게 말해줄게.
.. 타임캡슐을 여기에다 묻어두고 왔어.“
“무슨.. 애도 아니고, 고등학생씩이나 돼서.. 타임캡슐?”
네 입에서 저런 말이 나와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네 눈은 언제나 뒤를 돌아보지 않았으니까. 앞을 향했었으니까.
그래서 네가 졸업장을 받고 방실방실 웃고 있을 때. ‘이제는, 정말로 이별이구나.’ 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건데..
“애가 아닐 때 묻어두는 거니까 의미가 있는 거야, 어릴 때 타임캡슐을 묻어봤자 잡동사니나 10년 뒤의 나에게 쓰는 편지 같은 가식적인 것 말고 또 뭘 묻을 수 있겠어?”
“타임캡슐은 원래 그런 용도 아니야..?”
“마키는 아직도 어린애구나~?”
“뭐?”
“내가 타임캡슐에 묻어 둔건 잡동사니도, 10년 뒤의 나에게 쓰는 편지도 아니야. 나는 여기에.. 내 이정표를 묻어두고 왔어.”
항상 자신 만만하던 얼굴에 약간이지만 그림자가 드리웠다. 니코가 이런 얼굴도 했었나?
“이제 나는, 계속해서 달릴 거거든,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지도는 너무 불친절하고, 내 손엔 나침판 같은 것도 없어. 그래도.. 멈춰 서서는 안 되니까. 그래서 여기에 내 이정표를 묻어 두고 온 거야. 길을 잃지도, 잊지도 않게.”
그 말을 끝으로 니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고 싶었지만 수많은 감정과 생각은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수십 번도 더 입만 뻥끗 거렸을 무렵, 니코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리고, 내 이정표에는 너도 있어. 내가 가는 길에는 마키, 너도 있어야 돼. 하지만.. 기다려 주진 않을 거야.”
그 말을 듣고 가슴 속에 있던 무언가가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내 기분은 이상한 것도, 울적한 것도 아니었다.
니코가 가는 길에 내가 없을까봐.. 두려워했던 거야. 니시키노 마키라는 인간이 솔직하지 않은 인간이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로 솔직하지 못할 줄은 몰랐네. 자신한테도 거짓말을 할 줄이야.
“누가 누굴 기다려준다는 거야? 그 짧은 다리로 열심히 달려. 금방 따라 잡을 테니까.”
니코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는 어느 순간 사라졌고, 그 무엇보다도 후련한 미소가 니코의 얼굴을 가득 채웠다.
지금 내 얼굴도 저런 얼굴일까?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2(@ )
오후 여섯 시. 해가 천천히 저물어가는 시간.
"오랜만이네."
니시키노 마키는 차에서 내렸다.
이곳은 오토노키자카 학원. 마키의 모교이자, 그녀의 추억이 담겨 있는 곳이었다. 몇 년 만이었을까. 의사가 된 이후로는 시간이 없어 한 번도 오지 못했었다.
"하아."
마키는 답답한 마음에 숨을 들이켰다. 찬 기운이 가슴 속을 시리게 자극한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교문 안으로 들어간다. 이내 들어오는 익숙한 풍경에, 마키는 왠지 모를 아릿해짐을 느꼈다.
'니코 쨩….'
마키가 병원의 TV에서 본 것은 그녀, 야자와 니코였다. 사실 평소에도 니코의 모습은 TV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이제 모르는 사람이 더 드문 톱 아이돌이었으니까.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제까지는 그랬다. 병원에서 본 것은 아이돌의 과거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니코의 학창시절을 소개하는 코너에서,
「소중한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절 따라잡을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 거예요.」
마키는 그 말을 듣고선, 병원까지 조퇴한 채로 정신없이 뛰쳐나온 것이었다.
'나도 참, 멍청하지.'
생각해보면 녹화방송일게 분명했고, 니코가 여기에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렇지만 마키는 이곳에 왔다. 올 수밖에 없었다. 무엇에 이끌렸던 것일까. 그녀가, 야자와 니코가 그리웠던 것일까.
천천히 발걸음을 운동장으로 옮겼다.
"어?"
마키는 저도 모르게 짧은 신음소리를 냈다.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본다. 있을 리 없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작은 형체에, 마키는 홀린 듯 천천히 걸어갔다. 천천히. 아니, 좀 더 빠르게.
"니코…쨩?"
마키의 머릿속에 순간 데자뷰가 스쳤다. 흙투성이 손으로 타임캡슐을 묻었다고 말하던 그녀의 모습. 그날 역시 해가 막 저물어가던 저녁이었고, 노을에 젖어 살짝 빛나는 검은 양 갈래 머리를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응?"
그녀, 니코가 뒤돌아본다. 그 붉은색 눈동자와 눈을 마주친 순간, 마키는 무언가가 가슴을 꿰뚫고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마키 쨩?"
니코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이야, 마키 쨩."
"저, 저기, 그, 오랜…만이야."
마키는 얼굴을 살짝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돌렸다.
"안 된다구, 마키 쨩. 아직도 못 고쳤네. 진짜 말 안 듣는다니까."
니코는 그렇게 말하며 마키의 손을 붙잡았다.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따, 딱히. 니코 쨩이 신경 쓸 일은 아닌 걸."
마키는 손을 내리며 말했다. 니코는 그런 마키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만난 니코는 너무나도 성숙해져 있었다.
"혹시, 방송 본 거야?"
"……응."
"마키 쨩 바보. 녹방일 게 뻔하잖아."
"니, 니코 쨩 때문에 온 게 아니라, 오랜만에 모교를 보고 싶었을 뿐이라구."
마키는 고개를 돌린 채, 손가락으로 머리를 꼬며 말했다.
"푸흡, 푸하하하하."
"뭐, 뭐야, 정말. 웃지 말라고."
"아, 미안, 푸흡, 마키 쨩."
니코는 한참을 그렇게 웃었다. 마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탁 하고 내뱉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있잖아, 마키 쨩."
"응."
"우리가 졸업한 지 벌써 8년이 지났어."
"그렇네."
"시간이 참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약속했던 10년은 아직이네."
니코는 그렇게 말하며 구둣발로 땅을 그었다. 지익, 지익, 하는 소리가 저녁 공기를 타고 조용히 울려 퍼진다.
"난 지금까지 계속해서 달려왔어. 그리고, 니코니의 달리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니코 쨩…."
"마키 쨩, 잘 따라오고 있어? 뭐, 대은하 넘버원 아이돌 니코니를 따라오려면 조금 힘들겠지만, 힘내라구."
그렇게 말하는 니코의 모습은 8년 전 그대로였다. 마키는 가슴 속에서 무언가 북받쳐 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질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뭐야 그게. 의미를 모르겠어. 다리 좀 길어졌다고 우쭐해지긴. 바짝 따라잡을 테니까, 남은 2년 동안 긴장하라구."
마키는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끝자락만 남은 해가 그녀들을 비추고 있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3(@)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빛은 구름 속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차디찬 겨울바람보다 달빛이 울부짖는 저 소리가 너무나도 시렸다.
아니, 사실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달빛은 그저 구름 속에서 빛나고 있을 뿐 울부짖지는 않는다는 걸, 내 몸이 너무나도 시린 건 차디찬 겨울바람 때문도, 달빛이 내는 은은한 빛 때문에도 아닌.. 나를 바라 봐 주던 사람이 없어 졌기 때문이란 걸.
“기다리지.. 않는다고 했잖아. 왜 아직까지도.. 와주지 않는 거야..”
타임캡슐을 파다 상처 입은 손끝이 아렸다.
“아직도, 여기 있는 거야?”
그러나 손끝의 아림은 곧 멎었다. 내가 나하고 한 약속을 어기게 한 장본인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째진 눈! 한참을 기다렸...”
왠진 모르겠지만 내가 기다리던 사람의 얼굴엔 짙은 어둠이 깔려있었다. 밝게 빛나던 보라색 눈동자도, 노을이 짙게 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 머리도 어둠 너머의 장막에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온 몸이 내뿜는 한기는 내 몸을 더더욱 시리게했다.
“난, 너를 따라가지 않아. 아직도 모르겠어? 10년이 지나고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을 탠데, 넌 아직도 멍청하구나?”
“저, 저기.. 마키?”
“......”
마키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니. 무슨 대답을 하려고 입을 벙긋벙긋 거리긴 했지만 그 대답이 내 귀에 닿지 않았다고 할까. 계속해서 입을 벙긋거리는 마키의 입술에서 나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일어나시라고요!!”
“..엉?”
“다 왔으니까.. 그만 자고 일어나시라구요..”
“..아.”
뻑뻑한 눈을 비비적거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2년 전에도 변함없던 이곳의 풍경은 2년이 지난 지금에도 하나도 변하지 않은 체 나를 맞아주고 있었다. 노을이 학교를 휘감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지 내 마음이 약해져서일까, 학교가 나를 감싸 안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포근하네.. ”
“네?”
“아, 아니, 별거 아니야. 오늘은 이만 퇴근해도 좋아. 수고 했어. 내일 제시간에 나오는 거 잊지 말고.. 알겠지?”
“알겠습니다.”
찌뿌둥한 몸을 뒤틀며 차에서 내린 다음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거리엔 아무도 없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모자도 썼고, 선글라스도 있고, 헤어스타일도 바꿨지만 안심이 안되는 건 어쩔수가 없네..
아니, 알고 있다. 안심이 안 되는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는 걸.
난 대체 왜 그런 꿈을 꾼 걸까? 2년 전에도 내 방송을 보고 이곳으로 뛰어온 아이인데, 왜 나는 그 아이를 못 믿는 거지? 아니야, 아닐거야.
.. 그렇게 내 감정을 부정하는 사이에도 걸음은 어느새 속보(速步)로 바뀌고 속보(速步)는 어느새 구보(驅步)로 바뀌었다.
숨이 턱 끝 즈음까지 차올랐을 때 도착한 약속 장소에는 -
2년 전보다 한층 더 성숙해진 네가 있었다.
향긋한 포도주를 담아 둔 듯 한 붉은 머리. 자수정을 박아놓은 듯 반짝이는 보라색 눈동자. 그것들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뭐야, 늦었잖아.”
“..하악..하악..시끄러워, 누구랑은 달리. 이몸은 항상 바빠서 말이야.”
“나도 조금 있으면 열릴 세미나 준비까지 뒤로하고 온 거거든? 나도 이제 너만큼 바빠, 그리고 의료계에서 종사하는 사람들 한정으론 너보다 인기가 많고.”
“그거.. 자랑하는 거야?”
“참나, 그, 그런 거 아니거든?”
“뭐, 여하튼.. 안심이네. 이 대 은하 No.1 아이돌 니코니 니코쨩의 뒤를 잘 따라 온 것 같아서.”
“그런 짧은 다리로 달려봤자 금방 따라 잡는다고 말하지 않았나?”
“잘난 척은.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나는 마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마키는 10년 전처럼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법 한 울적한 얼굴도, 2년 전처럼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것이 벅차다는 듯 미간을 찌뿌린 얼굴도 아니었다. 마키는.. 후련하게, 아주 후련하게 웃고 있었다.
어렴풋이 상상만 하고 있었다. 마키랑은.. 이렇게 만났으면 좋겠다고.
다행이야, 이런 식으로 만날 수 있어서. 라는 말을 하려 했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마키를 지나쳐 10년 전에 내가 이정표를 받아 둔 그곳으로 향했다.
“맨 손으로 팔 샘이야?”
“..아차.”
모종삽을 깜빡했구나..!
“..몇 년이 지나도 나 없으면 안 된다니까? 정말.”
“뭐?”
“자, 여기.”
항의를 할 심산으로 마키를 노려다 보았는데, 마키는 그런 내 시선은 신경도 안 쓴다는 듯 모종삽을 건네주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사실, 10년동안 너무 궁금했거든. 그 안에 대체 무슨 대단한 게 들어있을까~ 하고. 자, 빨리 파 봐.”
“그래, 조금만 기다려 봐. 금방 파낼 테니까.. 그렇게 깊게 안 묻었거든!”
삽질을 한 번, 두 번. .. 몇 번 하면 금방 파낼 줄 알았건만 몇 번을 파내도 거무튀튀한 흙이 계속해서 나올 뿐이었다. 이상하다? 나 이렇게 깊게 묻은 기억이 없는데? 혹시 여기가 아닌가? 아니, 10년 동안 오늘 이 날만을 그려왔는데 위치를 착각 할 리가...
“저기, 대체 언제쯤 나오는거야? 도와 줘?”
“아, 아니. 조, 조금만 기다려 보라니까..!”
마키랑 투닥 거리던 와중, 모종삽에 무언가가 [까앙!] 하고 부딪히는 감촉이 뼈를 타고 전해졌다. 나는 바쁘게 손을 놀려 모종삽에 부딪힌 무언가를 파냈다. 흙에 묻혀 광택을 잃었지만 저건 분명..
“찾았다!”
10년만에 다시 본 타임캡슐은 거무튀튀한 흙이 묻어있는 것 빼곤 아주 멀쩡해보였다. 나는 재빨리 타임캡슐을 꺼냈다. 10년지기 친구를 본 것 같은 반가움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올랐다. 하긴, 엄밀히 따지면 애는 10년동안 나의 비밀과 이정표를 지켜준 친구나 다를 바 없지.
“오.. 철제 캡슐이네? 어디서 구했어?”
“잡화점에서 구했었나..? 까먹었어. 여하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마키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사실 조금 더 애태우고 싶긴 하지만.. 이미 10년을 더 기다렸는데 더 애태운다면, 분명 화내겠지? 마키..
“그동안, 나랑 함께 달려와주고, 나와 함께 기다려줘서 고마워. 마키.. 이제.. 열게!”
캡슐은 내가 조금 힘을 주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동안의 침묵이 너무나도 무거웠기 때문일까.
“그래 이제 드디어 뭐가 들어있는지 - ”
아차, 지금 보면 안 되지..! 나는 캡슐 안을 쳐다보려는 마키를 급하게 몸으로 제지했다.
“뭐, 뭐야. 왜그래?”
“이 캡슐은~ 보는 순서가 있거든.”
“하아..? 의미를 모르겠어.”
“보는 순서를 안 지키면 의미가 없어. 나랑 거리를 조금만 둬 줘 마키. 안 그러면 이 타임캡슐은 다시 묻을 거야.”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멋대로 라니까..”
마키는 불만이 가득 찬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두 걸음 정도의 거리를 벌렸다.
자기 멋대로인 사람이라 미안하네요. 그래도. 어쩔 수 없는걸. 10년을 기다려 왔으니 마지막까지 잘 장식을 해야된단 말이야.
“나는 여기에다.. 세 가지의 이정표를 넣어놨어. 첫 번째는.. 이거야.”
“그건.. 예전에 살던 집 사진인가?”
내가 집어 든 사진은 내가 예전에 살던 집 거실에서 온 가족이 싱글벙글 웃으며 찍은 사진이었다.
“내 첫 번째 이정표는.. 가난이었어. 아키하바라에 살 정도니 그리 가난하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만족 할 수 없었거든. 임대주택은 내 무대랑은 별로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어린애 투정부리는 것 같은 이유지만.. 나는 이 가난이란 놈한테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렸어.”
“......”
“그리고 두 번째로 볼 것도.. 사진인데. 알아 보겠어?”
“이건..”
u’s의 모두와 함께, 연습을 쉬는 도중에 옥상에서 찍은 사진. 사진을 찍을 때 포즈라고는 V밖에 못하는 호노카와 잔뜩 굳은 얼굴을 한 하나요도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는 모두가 녹아 있는 사진이었다.
“뒤에서 나를 밀어주는 것이 있다면 앞에서 나를 끌어 주는 것도 있어야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 너희들, 아니.. 우리들의 사진을 넣어놨지. 너희들과 함께 했던 시간은.. 그때의 나에게 있어서 최고로 빛났었던 시간이었으니까. 그 빛을 따라 갈 수 있다면, 내가 꾸는 꿈이 허황된 꿈은 아닐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근데..사진밖에 안 넣어둔거야?”
의외라는 듯 툴툴거리는 마키, 하긴.. 나 같아도 10년 동안 기다린 끝에 연 타임캡슐에서 사진밖에 없다고.. 그렇게 생각되면 힘이 빠질거야.
“그리고.. 마지막은, 내 최종 목적지를 넣어놨지. 과거의 아픔도. 현재가 가지고 있었던 빛도.. 모두 하나의 과정이었을 뿐이야.”
잠시, 눈을 감았다. 그동안 숨가쁘게 달려온 10년이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것 같았다.
그래 – 그 모든 건..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나는 타임캡슐에 담겨있는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 그동안 묻혀있어서 그런 것일까. 반지 케이스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차가웠고, 보이는 것보다 더 무거웠다.
반지 케이스를 열었다. 싸구려 큐빅이 노을빛을 흡수해 불긋불긋하게 물들었다.
“10년 전에도, 2년 전에도.. 말했을 거야. 잘 따라오라고.”
나는 말을 이어가며 마키한테 다가갔다. 이제 머릿속에 그려오던 대로 마키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면 되는건데..
아, 역시. 그런 낯간지러운 짓은 못하겠어. 나는 반지를 포물선을 그리게 던졌고, 마키는 그것을 잘 받아내었다.
“너와, 함께하고 싶었어. 너와 함께하기엔 나란 인간이 너무 작으니까.. 그렇게 생각해서 달려온 거야. 성장하기 위해서. 그 마음을.. 계속 전하고 싶었는데. 니코도 참 멍청이지. 그렇게 말을 하면 되는걸. 남을 공격하는 방식으로밖에 얘기하지 못해.”
“..니코?”
“이제야.. 너와 마주 칠 수 있는 눈높이가 된 것 같아. 결혼하자.
.. 는 말은 안 할거지만. 적어도. 나와 영원을 함께해주지 않을래?“
“정말, 니코도.. 바보 같아.”
마키는 그렇게 말하더니 싸구려 반지를 아주 조심스럽게 오른 약지에 끼웠다.
어라? 잠깐, 약지?
“나는, 니코를 한번도 [작다]고 생각 해 본 적 없는걸?”
그렇게 말하는 마키의 얼굴은, 노을빛을 머금은 큐빅 반지와 함께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