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제 다 됐나보다!”

띠링- 하는 알람음에 맞춰 코토리는 싱글벙글 웃으며 오븐을 향해 걸어갔다. 오븐의 뚜껑이 열리자 새하얀 김과 함께 온갖 달콤한 향기들이 오븐 안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향기와 함께 - 내 안에 있던 잡생각도 다시 한 번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코토리는 요즘 왜 자꾸 나를 집으로 초대하는 것일까. 코토리에겐 나보다 친한 친구가 있고, 나에게도 코토리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상대인데... “니코, 과자를 좋아한댔지? 나, 예전부터 과자 만들기가 취미였는데! 이제부터 니코한테 시식을 맡기면 되겠네?” 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고작 그런 걸로 나를 주말마다 불러낼 것 같진 않은데.

코토리는, 대체 무슨 생각인걸까.

“자! 오늘은~ 그냥 간단하게, 버터쿠키를 구워봤어!”

잘 구워진 버터쿠키는 갈색 광채를 내뿜으며 달달한 향을 내뿜었다, 그 달달한 향에 코가 막힐 지경이었다. 아니, 이것은 비단 버터쿠키 때문은 아닐 것이다, 분명.. 이 달달함의 반쯤은 코토리의 체취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코토리를 올려다보았다.

“.....”

언제나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앞치마를 했다는 것 즈음일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코토리의 모습은 평소와는 너무나도 달라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 감정은 분명.. 단 둘만 있다는 대서 나오는 감정이겠지.

“응? 왜그래? 니코.”

“어? 아, 아니. 아무것도.”

나는 한 입 크기로 잘 구워진 버터쿠키를 집어먹으며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돌렸다.

코토리와의 사이에 거리감을 두는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내가 코토리를 보는 시선은.. 친구를 보는 그것과는 너무나도 거리감이 있었기에.

“어때?”

“항상 하는 말이지만.. 맛있게 잘 구워졌네. 여기에 넣은 견과류도 어올리고, 딱 적당하게 달고.. 잘 구워졌어. 이정도면 돈 받고 팔아도 되겠는데?”

“정말이야? 고마워!”

“........”

목이 막혔다, 아니, 가슴이 막막했다.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내 마음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내 마음을 전하거나. 둘 중 하나는 해야되는데.. 내 마음을 포기하기엔 내 마음은 너무나도 커져 있었고, 그렇다고 그런 마음을 전하자니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앞으로 가지도, 뒤로 후진하지도 못하는 못난 인간. 그것이 바로 야자와 니코였다.

“...저기, 코토리.”

“응?”

“이거는 - 그냥 아는 사람.. 얘기인데.”

“응? 무슨 이야긴데?”

“...아니, 아니다.”

내가 방금전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한걸까. 순간 가슴이 철렁해졌다. 방금 전에 한 말을 주워 담고 싶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은 활시위를 떠난 활과 똑같아, 무슨 짓을 하건 되돌릴 수 없었다. 내가 방금 전에 생각 없이 쏜 화살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들려줘! 니코!!” 따위의 역풍을 맞으며 내 방정맞은 입에 제대로 꽂혔다.

“안 들려주면 쿠키도 다 압수할거야!!”

“....그러니까, 오해는 하지 말고 들어줘, 그냥.. 아는 사람 얘기인데.”

“응!”

“그러니까, 아는 사람이.. 그.. 어쩌다 보니 친구를 만났는데, 말이야. 그 친구가.. 사랑스러웠데. 애인 사이로 지내고 싶을 정도로.”

“그런데?”

“그런데.. 그친구는..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괜히 마음을 전하면 어색해 질 것 같은데, 그렇다고 가만있자니 너무나도 가슴이 근질거려서. 미쳐 버릴 것 같데. 코토리, 그럴땐.. 어떻게 하는게 맞는걸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코토리는 어느새 내 뒤에서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두피를 통해서 느껴지는 코토리의 피부는 금방 한 식빵처럼 부드러웠고, 포근했으며, 따듯했다. 

“나는, 니코가 고백해도 좋은데, 딱히 니코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도 없구.”

“......?”

잠깐만, 코토리, 뭐라고 한거야? 잘 못들었어. 라고 되묻고 싶었으나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코토리의 달콤한 체취는 점점 더 진해져 내 머리를 머엉 - 하게 만들고, 먹먹했던 내 가슴마저 코토리의 체취가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코토리한테 잠기는 기분이었다.

“니코도 참.. 누가 자기를 싫어하는 건 귀신같이 눈치 채면서 왜 이런 건 지금까지 눈치 못 채는 거야?”

“코토리.....”

“니코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래,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야.”

“난.. 태어 날 때부터 그랬어, 너랑 사귄다고 딱히 달라지진 않을거야. 그런 나라도.. 정말, 괜찮아? 나를 정말로.. 좋아하는거야?”

코토리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곳엔 - 분홍색 마카롱보다도 더 달달해 보이고, 더 진한 색체를 가진 코토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그런 나라도?] 가 아니야, 니코.”

코토리의 입술은 점점 더 나한테 다가오더니, 순식간에 내 이마에 키스 마크를 남겼다.

“ [그런 너니까.] 인거지.”

입 안에 남아있는 버터쿠키는, 오늘따라 유독 달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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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좀
,

@R_RYEON(류련)님과 같이 쓴 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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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E_Beezom)

“뭐 해?”

“어라? 아직까지 안 가고 뭐하고 있었어?”

오늘의 기분은 이상하다고 표현 할 수 밖엔 없는, 그런 기분이었다. 피아노를 치면 좀 나아질까. 그렇게 생각하며 음악실의 딱딱한 의자에 앉아 꼬리뼈가 아파 올 때 까지 하얀 건반을 마구 두들겼건만, 그래도 이 이상한 기분은 떨어지지 않고 내 마음을 괴롭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노을이 뉘엿뉘엿 떨어지는 저녁. 그래서 ‘그냥 집에 가자.’ 라고 생각 하며 밖으로 나왔는데..

왜? 어째서? 이 학교를 졸업한 네가 그 하얀 피부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여기 있는 거야?

“그냥.. 뭐..”

“아, 알겠다. 이 니코님하고 더 이상 학교에서 못 본다고 생각하니 울적해져서 여기 남아있었던 거구나?”

내 기분, 울적 한 걸까? 니코가 졸업하는 건 아주 당연한 건데, 그것 때문에 울적하다고?

“그런 거 아니야! 바보 같긴..여하튼, 졸업까지 한 사람이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비밀로 하고 싶었는데,.. 좋아. 마키니까 특별히, 아주 솔직하게 말해줄게.
.. 타임캡슐을 여기에다 묻어두고 왔어.“

“무슨.. 애도 아니고, 고등학생씩이나 돼서.. 타임캡슐?”

네 입에서 저런 말이 나와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네 눈은 언제나 뒤를 돌아보지 않았으니까. 앞을 향했었으니까. 

그래서 네가 졸업장을 받고 방실방실 웃고 있을 때. ‘이제는, 정말로 이별이구나.’ 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건데.. 

“애가 아닐 때 묻어두는 거니까 의미가 있는 거야, 어릴 때 타임캡슐을 묻어봤자 잡동사니나 10년 뒤의 나에게 쓰는 편지 같은 가식적인 것 말고 또 뭘 묻을 수 있겠어?”

“타임캡슐은 원래 그런 용도 아니야..?”

“마키는 아직도 어린애구나~?”

“뭐?”

“내가 타임캡슐에 묻어 둔건 잡동사니도, 10년 뒤의 나에게 쓰는 편지도 아니야. 나는 여기에.. 내 이정표를 묻어두고 왔어.”

항상 자신 만만하던 얼굴에 약간이지만 그림자가 드리웠다. 니코가 이런 얼굴도 했었나?

“이제 나는, 계속해서 달릴 거거든,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지도는 너무 불친절하고, 내 손엔 나침판 같은 것도 없어. 그래도.. 멈춰 서서는 안 되니까. 그래서 여기에 내 이정표를 묻어 두고 온 거야. 길을 잃지도, 잊지도 않게.”

그 말을 끝으로 니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고 싶었지만 수많은 감정과 생각은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수십 번도 더 입만 뻥끗 거렸을 무렵, 니코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리고, 내 이정표에는 너도 있어. 내가 가는 길에는 마키, 너도 있어야 돼. 하지만.. 기다려 주진 않을 거야.”

그 말을 듣고 가슴 속에 있던 무언가가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내 기분은 이상한 것도, 울적한 것도 아니었다.
니코가 가는 길에 내가 없을까봐.. 두려워했던 거야. 니시키노 마키라는 인간이 솔직하지 않은 인간이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로 솔직하지 못할 줄은 몰랐네. 자신한테도 거짓말을 할 줄이야.

“누가 누굴 기다려준다는 거야? 그 짧은 다리로 열심히 달려. 금방 따라 잡을 테니까.”

니코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는 어느 순간 사라졌고, 그 무엇보다도 후련한 미소가 니코의 얼굴을 가득 채웠다.

지금 내 얼굴도 저런 얼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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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R_RYEON )

오후 여섯 시. 해가 천천히 저물어가는 시간.

"오랜만이네."

니시키노 마키는 차에서 내렸다. 
이곳은 오토노키자카 학원. 마키의 모교이자, 그녀의 추억이 담겨 있는 곳이었다. 몇 년 만이었을까. 의사가 된 이후로는 시간이 없어 한 번도 오지 못했었다.

"하아."

마키는 답답한 마음에 숨을 들이켰다. 찬 기운이 가슴 속을 시리게 자극한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교문 안으로 들어간다. 이내 들어오는 익숙한 풍경에, 마키는 왠지 모를 아릿해짐을 느꼈다.

'니코 쨩….'

마키가 병원의 TV에서 본 것은 그녀, 야자와 니코였다. 사실 평소에도 니코의 모습은 TV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이제 모르는 사람이 더 드문 톱 아이돌이었으니까.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제까지는 그랬다. 병원에서 본 것은 아이돌의 과거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니코의 학창시절을 소개하는 코너에서,

「소중한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절 따라잡을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 거예요.」

마키는 그 말을 듣고선, 병원까지 조퇴한 채로 정신없이 뛰쳐나온 것이었다.

'나도 참, 멍청하지.'

생각해보면 녹화방송일게 분명했고, 니코가 여기에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렇지만 마키는 이곳에 왔다. 올 수밖에 없었다. 무엇에 이끌렸던 것일까. 그녀가, 야자와 니코가 그리웠던 것일까.
천천히 발걸음을 운동장으로 옮겼다.

"어?"

마키는 저도 모르게 짧은 신음소리를 냈다.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본다. 있을 리 없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작은 형체에, 마키는 홀린 듯 천천히 걸어갔다. 천천히. 아니, 좀 더 빠르게.

"니코…쨩?"

마키의 머릿속에 순간 데자뷰가 스쳤다. 흙투성이 손으로 타임캡슐을 묻었다고 말하던 그녀의 모습. 그날 역시 해가 막 저물어가던 저녁이었고, 노을에 젖어 살짝 빛나는 검은 양 갈래 머리를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응?"

그녀, 니코가 뒤돌아본다. 그 붉은색 눈동자와 눈을 마주친 순간, 마키는 무언가가 가슴을 꿰뚫고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마키 쨩?"

니코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이야, 마키 쨩."
"저, 저기, 그, 오랜…만이야."

마키는 얼굴을 살짝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돌렸다.

"안 된다구, 마키 쨩. 아직도 못 고쳤네. 진짜 말 안 듣는다니까."

니코는 그렇게 말하며 마키의 손을 붙잡았다.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따, 딱히. 니코 쨩이 신경 쓸 일은 아닌 걸."

마키는 손을 내리며 말했다. 니코는 그런 마키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만난 니코는 너무나도 성숙해져 있었다.

"혹시, 방송 본 거야?"
"……응."
"마키 쨩 바보. 녹방일 게 뻔하잖아."
"니, 니코 쨩 때문에 온 게 아니라, 오랜만에 모교를 보고 싶었을 뿐이라구."

마키는 고개를 돌린 채, 손가락으로 머리를 꼬며 말했다.

"푸흡, 푸하하하하."
"뭐, 뭐야, 정말. 웃지 말라고."
"아, 미안, 푸흡, 마키 쨩."

니코는 한참을 그렇게 웃었다. 마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탁 하고 내뱉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있잖아, 마키 쨩."
"응."
"우리가 졸업한 지 벌써 8년이 지났어."
"그렇네."
"시간이 참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약속했던 10년은 아직이네."

니코는 그렇게 말하며 구둣발로 땅을 그었다. 지익, 지익, 하는 소리가 저녁 공기를 타고 조용히 울려 퍼진다.

"난 지금까지 계속해서 달려왔어. 그리고, 니코니의 달리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니코 쨩…."
"마키 쨩, 잘 따라오고 있어? 뭐, 대은하 넘버원 아이돌 니코니를 따라오려면 조금 힘들겠지만, 힘내라구."

그렇게 말하는 니코의 모습은 8년 전 그대로였다. 마키는 가슴 속에서 무언가 북받쳐 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질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뭐야 그게. 의미를 모르겠어. 다리 좀 길어졌다고 우쭐해지긴. 바짝 따라잡을 테니까, 남은 2년 동안 긴장하라구."

마키는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끝자락만 남은 해가 그녀들을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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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E_Beezom)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빛은 구름 속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차디찬 겨울바람보다 달빛이 울부짖는 저 소리가 너무나도 시렸다. 

아니, 사실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달빛은 그저 구름 속에서 빛나고 있을 뿐 울부짖지는 않는다는 걸, 내 몸이 너무나도 시린 건 차디찬 겨울바람 때문도, 달빛이 내는 은은한 빛 때문에도 아닌.. 나를 바라 봐 주던 사람이 없어 졌기 때문이란 걸.

“기다리지.. 않는다고 했잖아. 왜 아직까지도.. 와주지 않는 거야..”

타임캡슐을 파다 상처 입은 손끝이 아렸다. 

“아직도, 여기 있는 거야?”

그러나 손끝의 아림은 곧 멎었다. 내가 나하고 한 약속을 어기게 한 장본인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째진 눈! 한참을 기다렸...”

왠진 모르겠지만 내가 기다리던 사람의 얼굴엔 짙은 어둠이 깔려있었다. 밝게 빛나던 보라색 눈동자도, 노을이 짙게 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 머리도 어둠 너머의 장막에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온 몸이 내뿜는 한기는 내 몸을 더더욱 시리게했다.

“난, 너를 따라가지 않아. 아직도 모르겠어? 10년이 지나고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을 탠데, 넌 아직도 멍청하구나?”

“저, 저기.. 마키?”

“......”

마키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니. 무슨 대답을 하려고 입을 벙긋벙긋 거리긴 했지만 그 대답이 내 귀에 닿지 않았다고 할까. 계속해서 입을 벙긋거리는 마키의 입술에서 나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일어나시라고요!!”

“..엉?”
“다 왔으니까.. 그만 자고 일어나시라구요..”

“..아.”

뻑뻑한 눈을 비비적거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2년 전에도 변함없던 이곳의 풍경은 2년이 지난 지금에도 하나도 변하지 않은 체 나를 맞아주고 있었다. 노을이 학교를 휘감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지 내 마음이 약해져서일까, 학교가 나를 감싸 안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포근하네.. ”

“네?”

“아, 아니, 별거 아니야. 오늘은 이만 퇴근해도 좋아. 수고 했어. 내일 제시간에 나오는 거 잊지 말고.. 알겠지?”

“알겠습니다.”

찌뿌둥한 몸을 뒤틀며 차에서 내린 다음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거리엔 아무도 없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모자도 썼고, 선글라스도 있고, 헤어스타일도 바꿨지만 안심이 안되는 건 어쩔수가 없네..

아니, 알고 있다. 안심이 안 되는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는 걸.

난 대체 왜 그런 꿈을 꾼 걸까? 2년 전에도 내 방송을 보고 이곳으로 뛰어온 아이인데, 왜 나는 그 아이를 못 믿는 거지? 아니야, 아닐거야.

.. 그렇게 내 감정을 부정하는 사이에도 걸음은 어느새 속보(速步)로 바뀌고 속보(速步)는 어느새 구보(驅步)로 바뀌었다.

숨이 턱 끝 즈음까지 차올랐을 때 도착한 약속 장소에는 - 

2년 전보다 한층 더 성숙해진 네가 있었다.

향긋한 포도주를 담아 둔 듯 한 붉은 머리. 자수정을 박아놓은 듯 반짝이는 보라색 눈동자. 그것들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뭐야, 늦었잖아.”

“..하악..하악..시끄러워, 누구랑은 달리. 이몸은 항상 바빠서 말이야.”

“나도 조금 있으면 열릴 세미나 준비까지 뒤로하고 온 거거든? 나도 이제 너만큼 바빠, 그리고 의료계에서 종사하는 사람들 한정으론 너보다 인기가 많고.”

“그거.. 자랑하는 거야?”

“참나, 그, 그런 거 아니거든?”

“뭐, 여하튼.. 안심이네. 이 대 은하 No.1 아이돌 니코니 니코쨩의 뒤를 잘 따라 온 것 같아서.”

“그런 짧은 다리로 달려봤자 금방 따라 잡는다고 말하지 않았나?”

“잘난 척은.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나는 마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마키는 10년 전처럼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법 한 울적한 얼굴도, 2년 전처럼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것이 벅차다는 듯 미간을 찌뿌린 얼굴도 아니었다. 마키는.. 후련하게, 아주 후련하게 웃고 있었다. 

어렴풋이 상상만 하고 있었다. 마키랑은.. 이렇게 만났으면 좋겠다고. 

다행이야, 이런 식으로 만날 수 있어서. 라는 말을 하려 했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마키를 지나쳐 10년 전에 내가 이정표를 받아 둔 그곳으로 향했다.

“맨 손으로 팔 샘이야?”

“..아차.”

모종삽을 깜빡했구나..!

“..몇 년이 지나도 나 없으면 안 된다니까? 정말.”

“뭐?”

“자, 여기.”

항의를 할 심산으로 마키를 노려다 보았는데, 마키는 그런 내 시선은 신경도 안 쓴다는 듯 모종삽을 건네주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사실, 10년동안 너무 궁금했거든. 그 안에 대체 무슨 대단한 게 들어있을까~ 하고. 자, 빨리 파 봐.”

“그래, 조금만 기다려 봐. 금방 파낼 테니까.. 그렇게 깊게 안 묻었거든!”

삽질을 한 번, 두 번. .. 몇 번 하면 금방 파낼 줄 알았건만 몇 번을 파내도 거무튀튀한 흙이 계속해서 나올 뿐이었다. 이상하다? 나 이렇게 깊게 묻은 기억이 없는데? 혹시 여기가 아닌가? 아니, 10년 동안 오늘 이 날만을 그려왔는데 위치를 착각 할 리가...

“저기, 대체 언제쯤 나오는거야? 도와 줘?”

“아, 아니. 조, 조금만 기다려 보라니까..!”

마키랑 투닥 거리던 와중, 모종삽에 무언가가 [까앙!] 하고 부딪히는 감촉이 뼈를 타고 전해졌다. 나는 바쁘게 손을 놀려 모종삽에 부딪힌 무언가를 파냈다. 흙에 묻혀 광택을 잃었지만 저건 분명..

“찾았다!”

10년만에 다시 본 타임캡슐은 거무튀튀한 흙이 묻어있는 것 빼곤 아주 멀쩡해보였다. 나는 재빨리 타임캡슐을 꺼냈다. 10년지기 친구를 본 것 같은 반가움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올랐다. 하긴, 엄밀히 따지면 애는 10년동안 나의 비밀과 이정표를 지켜준 친구나 다를 바 없지.

“오.. 철제 캡슐이네? 어디서 구했어?”

“잡화점에서 구했었나..? 까먹었어. 여하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마키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사실 조금 더 애태우고 싶긴 하지만.. 이미 10년을 더 기다렸는데 더 애태운다면, 분명 화내겠지? 마키..
“그동안, 나랑 함께 달려와주고, 나와 함께 기다려줘서 고마워. 마키.. 이제.. 열게!”

캡슐은 내가 조금 힘을 주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동안의 침묵이 너무나도 무거웠기 때문일까.

“그래 이제 드디어 뭐가 들어있는지 - ”

아차, 지금 보면 안 되지..! 나는 캡슐 안을 쳐다보려는 마키를 급하게 몸으로 제지했다.

“뭐, 뭐야. 왜그래?”

“이 캡슐은~ 보는 순서가 있거든.”

“하아..? 의미를 모르겠어.”

“보는 순서를 안 지키면 의미가 없어. 나랑 거리를 조금만 둬 줘 마키. 안 그러면 이 타임캡슐은 다시 묻을 거야.”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멋대로 라니까..”

마키는 불만이 가득 찬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두 걸음 정도의 거리를 벌렸다. 

자기 멋대로인 사람이라 미안하네요. 그래도. 어쩔 수 없는걸. 10년을 기다려 왔으니 마지막까지 잘 장식을 해야된단 말이야.

“나는 여기에다.. 세 가지의 이정표를 넣어놨어. 첫 번째는.. 이거야.”

“그건.. 예전에 살던 집 사진인가?”

내가 집어 든 사진은 내가 예전에 살던 집 거실에서 온 가족이 싱글벙글 웃으며 찍은 사진이었다.

“내 첫 번째 이정표는.. 가난이었어. 아키하바라에 살 정도니 그리 가난하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만족 할 수 없었거든. 임대주택은 내 무대랑은 별로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어린애 투정부리는 것 같은 이유지만.. 나는 이 가난이란 놈한테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렸어.”

“......”

“그리고 두 번째로 볼 것도.. 사진인데. 알아 보겠어?”

“이건..”

u’s의 모두와 함께, 연습을 쉬는 도중에 옥상에서 찍은 사진. 사진을 찍을 때 포즈라고는 V밖에 못하는 호노카와 잔뜩 굳은 얼굴을 한 하나요도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는 모두가 녹아 있는 사진이었다.

“뒤에서 나를 밀어주는 것이 있다면 앞에서 나를 끌어 주는 것도 있어야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 너희들, 아니.. 우리들의 사진을 넣어놨지. 너희들과 함께 했던 시간은.. 그때의 나에게 있어서 최고로 빛났었던 시간이었으니까. 그 빛을 따라 갈 수 있다면, 내가 꾸는 꿈이 허황된 꿈은 아닐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근데..사진밖에 안 넣어둔거야?”

의외라는 듯 툴툴거리는 마키, 하긴.. 나 같아도 10년 동안 기다린 끝에 연 타임캡슐에서 사진밖에 없다고.. 그렇게 생각되면 힘이 빠질거야.
“그리고.. 마지막은, 내 최종 목적지를 넣어놨지. 과거의 아픔도. 현재가 가지고 있었던 빛도.. 모두 하나의 과정이었을 뿐이야.”

잠시, 눈을 감았다. 그동안 숨가쁘게 달려온 10년이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것 같았다.

그래 – 그 모든 건..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나는 타임캡슐에 담겨있는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 그동안 묻혀있어서 그런 것일까. 반지 케이스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차가웠고, 보이는 것보다 더 무거웠다.

반지 케이스를 열었다. 싸구려 큐빅이 노을빛을 흡수해 불긋불긋하게 물들었다. 

“10년 전에도, 2년 전에도.. 말했을 거야. 잘 따라오라고.”

나는 말을 이어가며 마키한테 다가갔다. 이제 머릿속에 그려오던 대로 마키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면 되는건데..

아, 역시. 그런 낯간지러운 짓은 못하겠어. 나는 반지를 포물선을 그리게 던졌고, 마키는 그것을 잘 받아내었다.

“너와, 함께하고 싶었어. 너와 함께하기엔 나란 인간이 너무 작으니까.. 그렇게 생각해서 달려온 거야. 성장하기 위해서. 그 마음을.. 계속 전하고 싶었는데. 니코도 참 멍청이지. 그렇게 말을 하면 되는걸. 남을 공격하는 방식으로밖에 얘기하지 못해.”

“..니코?”

“이제야.. 너와 마주 칠 수 있는 눈높이가 된 것 같아. 결혼하자.

.. 는 말은 안 할거지만. 적어도. 나와 영원을 함께해주지 않을래?“

“정말, 니코도.. 바보 같아.”

마키는 그렇게 말하더니 싸구려 반지를 아주 조심스럽게 오른 약지에 끼웠다. 
어라? 잠깐, 약지?

“나는, 니코를 한번도 [작다]고 생각 해 본 적 없는걸?”

그렇게 말하는 마키의 얼굴은, 노을빛을 머금은 큐빅 반지와 함께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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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XX년 6월 4일

- 코토리가 돌아왔어! 우미와 나의.. 아니, 모두의 마음이 코토리한테 닿은 걸까. 그 결과로 라이브는 대 성공! u's는 이제 앞으로 전진할 일 만 남은거야!

20XX년 6월 4일

[정말.. 다행이야. 호노카가 내 생각대로 움직여줘서♡ 갑작스러운 유학 제의는 상당히 당황스러웠지만 이런 그림도 나쁘지 않아. 그냥 평생, 셋이서 소꿉친구인채로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을 했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마음이 바뀌었어♡]

20XX년 6월 6일

- 내 욕심인건 알지만, 나와 함께하면서 코토리가 언제나 행복하길 바랬어. 그런데 돌아오고 나서 코토리가 멍하니 하늘을 보는 시간이 늘어 난 것 같아. 코토리.. 사실 유학 가기를 바랬겠지? 나.. 괜한 일을 한 걸까?

20XX년 6월 6일

[호노카가 날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는게 느껴져.. 그 시선 때문에 뒷목이 너무나도 간지럽달까..? 밝던 눈빛이 죄책감으로 찬 시선을 무시하기란 정말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야. 그래도.. 참아야 돼, 내가 스케치 한 그림을 성공적으로 완성하려면.]

20XX년 6월 8일

- 갑자기.. 모든게 덧 없이 느껴져. 코토리가 이대로 멀리 사라 질 것만 같아서.. 우리 셋이 영원히 있을 수 없다는 건 이번 사건으로 잘 알았어.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준비를 해야하는게 맞는걸까? 상처 받지 않으려면.. 그게 옳은거겠지?

20XX년 6월 10일

[호노카가 날 일부러 멀리 하는 것 같아. 확실해, 호노카의 말투에서 너무나도 거리감이 느껴져. 이건 예상 밖인데...
뭐, 괜찮아. 스케치를 약간 잘못 그린 것 뿐이니, 다시 고쳐 그리면 그만이야.]

20XX년 6월 12일

- 코토리의 말을 듣고 마음을 바꿨어. 우리 셋이 영원히 함깨 할 수는 없으니까, 지금 이 순간을 더 즐겨야 된다는 걸. 그 말을 듣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 코토리는 나 때문에 자신의 꿈을 펼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를 보고 있던거야. 정말.. 정말로 기뻐.

20XX년 6월 12일

[날 대하는 태도가 훨씬 더 끈적해졌어. 좋아. 완벽해, 다음으로 넘어가볼까?]

20XX년 6월 15일

- 코토리가 나를 좀 멀리하는 것 같달까.. 왜? 어째서? 함께 하는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셋이서 함께 즐겁게, 즐겁게 시간을 보내자고.. 그렇게 말했잖아. 그런데.. 왜? 

20XX년 6월 15일

[아.. 니코한테 조금 살갑게 대해줬더니 너무 달라붙네. 애정결핍이니 조금 잘해주면 달라붙을 거란건 계산했지만.. 이정도로 달라붙을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그래도 이 모든건.. 내 그림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니까.. 조금만 참자.]

20XX년 6월 24일

- 분명 니코가 코토리한테 무슨 말을 한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코토리의 태도가 저렇게 돌변 할 리 없어. 코토리.. 나랑 단 둘이서 있을땐 내 눈을 피하지 않는다구.

20XX년 6월 25일

[부실 분위기가 슬슬 험악해지기 시작하네~♡ 이렇게 눈치싸움하는것도 좋지만, 난 좀 더 화끈한걸 원한다구.. 자해하는 취미는 없지만, 어쩔 수 없나?]

20XX년 6월 26일

- 그 쪼그만 땅꼬맹이년이.. 이제 모든게 다 밝혀졌어. 코토리가 날 피한것도, 괜히 그 땅꼬맹이한테 잘해 준 이유도.. 우미한테 말해봤자 "이, 일단 참고 선생님한테 말을 해보는게.." 같은 말이나 하겠지. 용서못해. 그 땅꼬맹이는 내 손으로...

20XX년 6월 27일

[꺄~♡ 니코랑 호노카랑 싸웠다. 니코, 코가 완전 내려 앉았던데 괜찮으려나?♡ 싸워봤자 머리 끄덩이 붙잡고 싸울 줄 알았는데 호노카가 이렇게 화끈하게 해줄줄은 꿈에도 몰랐네. 하긴, 호노카는 검도로 우미까지 꺾은 적 있으니까.. 오히려 그정도로 끝난게 다행이려나??]

20XX년 7월 4일

- 이제 조금있으면 여름방학이네.. 코토리랑 좀 더 같이 있고 싶은데... 일단 하교부터 같이 해 볼까?

20XX년 7월 8일

[호노카, 날 집에 데려다주고 전봇대 뒤에 숨어서 날 지켜보는거. 다 티난다구♡ 확 말해버리고 싶네.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 귀엽잖아..]

20XX년 7월 12일

- 이 마음.. 확실히 알 것 같아. 이건 분명.....

20XX년 7월 15일

-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ㄹ....

20XX년 7월 19일

- 코토리가 나랑 안만나주네.. 주기적으로 외출도 하는 것 같은데. 혹시 누구 만나는 사람이라도 있는걸까.. 

20XX년 7월 20일

[매일매일 일기를 쓴다는 사실을 살짝 흘렸는데, 이제 나한테 비밀이 있을거라고 착각하는 호노카는 분명.. 내 생각대로 행동하겠지?]

20XX년 7월 21일

- 오늘, 코토리 집에 다녀왔어.

20XX년 7월 21일

[물건 배치가 바뀌어져있네, 호노카가 다녀간거겠지?]

20XX년 7월 22일

- 오늘도, 코토리의 집에 다녀왔어.

20XX년 7월 22일

[이제는 내 방을 뒤져놓고 물건을 정리할 마음의 여유마저 없는걸까? 손 끝에서 다급함이 느껴져. 호노카]

20XX년 7월 23일

- ..뒤질곳은 다 뒤져 본 것 같은데... 이렇게 된 이상 내일은..

20XX년 7월 23일

[아, 호노카의 머리카락. 발견!♡ 이제 슬슬 몸도, 마음도 한계가 왔겠지? 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빨리.. 나를 너의 새장으로 나를 데려다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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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 후나 점심시간엔 항상 뭔가에 홀린듯 텅 빈 음악실을 찾아간다. 조율도 채 제대로 되지 않은 싸구려 피아노와 앉으면 꼬리뼈가 아파오는 딱딱한 의자, 그리고 창문 너머로 스며들어오는 하얀 햇빛 안을 헤엄치는 하얀색 먼지들. 누가 봐도 더러워 할 법 한 풍경이었지만 나는 이 곳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내가 있었던 곳 어디보다도 불편한 곳이었지만 이 곳은 내 집에서도 찾을 수 없는 편안함이 있었다.

오늘은 어떤 곡을 칠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피아노에 앉았다. 쇼팽? 어제 쳤고.. 베토벤? 지금은 칠 기분이 아닌데. 차라리 어제 만들던 곡을 치면서 작곡이나 해 볼까, 하고 피아노의 하얀 건반에 손을 얹은 순간 낡아빠진 문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호노카?"

"..나 참, 나라구, 째진눈."

항상 내 연주를 엿듣는 사람은 호노카였는데.. 문을 열고 튀어 나온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니코? 여긴 무슨일이야?"

"아니, 그, 그냥."

질문을 받은 니코는 안절부절 못하며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데 그 꼴이 장난치다가 들킨 꼬마아이 같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 다른 목적이 있었던걸까. 하지만 이런 심증만 가지고 추궁해봤자 니코는 자기 속 마음을 털어 놓지 않을 것 같았다. 

그냥 피아노나 치자. 나는 다시 피아노 건반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슬며시 눈을 감고, 어제 했던 것과 똑같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햇빛속에 잠긴 하얀 먼지가 음표가 되어 내 주변을 떠돌아 다니는 느낌을 받았다. 음악속에서 헤엄치는, 아니, 음악과 하나가 되는 기분. 나는 완전히 눈을 감고 음악 속으로 천천히 잠겨들어갔다.

"항상 느끼는거지만 - 부럽네."

점점 더 밑으로 잠겨가던 내 의식은 니코의 말 한마디에 다시 현실 속으로 튕겨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점점 더 빨라지던 내 손가락도 멈추었고, 내 눈 앞엔 음표가 아닌 먼지만이 떠다닐 뿐이었다.

"응?"

"피아노도 잘치지 공부도 잘하지 - 사실, 니코는 뭘 하든 잘 하는 편이 아니잖아?"

"....."

평소와는 명백히 다른 태도였다. 요즘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걸까, 적당히 웃기고 넘어 갈 수도 있지만 왠지 그래선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를 잘하는건 부모님의 독촉때문이야, 피아노를 잘치는건.. 타고난 거지만."

"마키의 인생은.. 축복받은 인생이네."

"글쎄.. 난 이걸 축복이라고 생각 안해."

"응? 어째서?"

"일단, 피아노를 아무리 잘쳐도 부모님이 인정을 안해주니까, 난 그래서 어렸을 때 부터 부조리를 느꼈지. 다른 애들은 뭘 잘해도 인정받는데 내 부모님은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 봤자 성적 이외에는 인정을 안해주니까."

"....."

"그리고, 피아노를 잘친다는 이유때문에 어렸을 때 왕따도 당해봤어, 그래서 난 어렸을 때 부터 시기와 질투라는 감정을 배웠지. 피아노에 재능이 있다는 이유로 세상의 안좋은 면을 어렸을 때 부터 가까이에서 보아 온 셈이야, 이건.. 축복이라기 보단 저주에 가깝지. 꽃피지 못하는 재능은 의미가 없으니까."

"마키는 진짜 공부는 잘하는데 바보라니까?"

"무.. 뭐?!"

"네 재능은 지금도 충분히 꽃 피고 있잖아? 그리고 그 재능 덕에 이렇게 니코와.. 아니, u's의 모두와 이어 질 수 있었던 거고. 어렸을 때 세상의 어두운 면을 봤으면 어때? 지금 니코와.. 아니, 그게 아니라.. u's의 모두와 함께 세상의 기쁜 면을 보고 있잖아? 그러니까, 분명 축복이야."

"....."

나를 쳐다보며 진지하게 말하는 얼굴을 보자니 왠지 모르게 기뻐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푸.. 푸흡, 푸흐흡.."

"..니코가 웃긴말했어?"

"아니야, 분명.. 축복이네. 고마워."

나는 내 삶에 저주가 내렸다고 생각했었는데, 나한테 저주를 걸었던 건.. 나였구나. 드디어 그 저주에서 해방 된 기분이야. 고마워, 고마워. 니코.

"기분 좋아 보이니까 다행이네.. 그럼, 나 간다? 째진 눈."

"..그런데 너 말이야, 여긴 왜 온거야?"

니코는 그 말에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모기만한 목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리다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익더니 나를 두고 그대로 뛰쳐 나갔다.

.. 그렇게 중얼거리면 내가 못들었을 거라 생각한걸까, 내 귀는 니코 생각보다 훨씬 좋은데.

[ " 요즘 기분 안좋아 보여서, 고민 상담이라도 해주려고 왔지. 그런데.. 지금 그렇게 밝게 웃고있으니까. 그걸로 됐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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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남지 않을 3년을 보내왔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졸업하고 나니 후회와 함께 허무함이 물 밀듯 닥쳐왔다. 아둥바둥,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든 알려보려 노력했지만 결국 내 이름을 널리 퍼트린건 나의 노력이 아니라 나를 이끌어주는 친구들 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니코, 우는거야?"

"..무, 무슨. 오히려 속이 후련한걸."

"눈가가 젖어있어."

"속눈썹이 들어가서 그런거야..!"

만약 내 곁에 아무도 없었으면 나는 이렇게 태평하게 걸을 수 있었을까. 그렇게 마음속으로 질문을 던졌으나 만족 할 만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인정하긴 싫지만 내 삶에서 u's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모두가 떠나간 학교에서 홀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내 친구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맑은 햇살 사이로 청명하게 빛나는 파란색 눈 때문에 눈이 부셨다.

"근데.. 노조미는? 항상 붙어다녔잖아 너희들."

"오늘은 바쁜일이 있다면서. 미안하지만 먼저 가라고 하더라.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물어볼 틈도 안주고 그냥 뛰어가던데?"

"그래..?"

에리와 함께 단 둘이 걷는 길이라.. 평소에 에리랑 같이 있을때는 9명 모두 모여있을 때라 잘 몰랐는데, 에리.. 의외로 말이 없구나. 나는 입을 굳게 다문 에리의 옆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차가 굴러가는 소리와 몇 몇 사람들이 걷는 소리만 들리는 아키하바라 외곽의 오전. 입을 열려고 해도 이 조용한 분위기가 내 입을 틀어 막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기, 니코는.. 졸업하면 뭐할거야?"

"오디션 봐야지."

"한결같구나. 니코는."

"예전에는 그냥 허황된 꿈이었지만.. 지금은 나름의 커리어도 있고. 자신도 생겼어. 이런 말 하긴 좀 낯간지럽지만.. 아주 약간, 아 ~ 주 약간은 너희들의 도움덕이라고 생각해. 물론 대부분은 이 우주 No.1 아이돌 니코님의 노력덕분이지만!"

"..이런 면 까지 한결같은건 조금 고쳐줬으면 싶지만, 뭐.. 니코다워서 보기 좋네."

"그러는 넌, 졸업하면 뭐할거야?"

"나? 진학할거야, 전에 대학 합격했다고 말했지 않았나..?"

"아.. 현대무용과., 랬나? 고민된다고 말하더니 결심을 굳힌 모양이네."

"생각 났거든, 오래전에 접은 꿈이. 지금은 몸이 굳어서 잘 움직일진 모르겠지만.. 다시 도전해보려고."

"..그래."

좋아하는 친구가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간다 - 분명 축하해주어야 할 일일터인데,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내가 있는 미래에, 너도 있기를 바랬는데.

"표정이 왜그래? 사랑스러운 후배들을 등 뒤에 놓고 가자니 마음이 안좋아?"

"무..무슨.. 그런거 아니야..! "

내가 아무렇게나 쏘아붙히고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니 에리는 그걸 보고 내 어깨를 움켜쥐고 나한테 찰싹 달라 붙었다.

"아니면, 나한테 삐진게 있는거야?"

"삐지다니.. 네가 나한테 뭘 했다고."

"그래? 니코라면 분명 삐졌거나 실망한게 있을 줄 알았는데."

"무슨 뜻이야?"

" [내가 있는 미래에, 너도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는거 아니야?"

"......"

너무나도 정확한 한마디에, 나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고개를 돌린 곳엔 - 모든것을 알고 있다는 듯 싱긋, 미소짓고있는 에리가 있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니코는..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내가 있는 곳에, 너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다행이네, 그래서 니코.. 삐졌어?"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 너는 너의 꿈을, 나는 나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것 뿐이니까. 가는 길이 약간 갈렸을 뿐, 결국 함께니까. 너무 실망하지 않아줬으면 좋겠어."

".. 치사해 에리, 자기 혼자만 뭐든지 알고있다는 투로 어린애 달래듯 그런 말을.."

"그래?"

에리는 그렇게 말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입술을 가져갔다. 에리의 입술을 통해 에리의 열이 내 얼굴로 스며들어 오는 것 만 같았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얼이 빠져있다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뒤로 빼냈다.

"...?! 가, 갑자기 무슨 짓이야..! 기, 길거리라고 여기..!"

"이걸로, 내 마음도.. 조금은 전해 졌을까?"

에리는 여태껏 보아왔던 것 보다 훨씬 밝은 얼굴로 웃고있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있을 미래에 저렇게 방긋 웃는 에리의 얼굴이 있다 생각하니 마음속에 있던 후회와 허무함, 그리고 에리에 대한 실망이 전부 다 눈 녹듯 사라졌다.

"..그래, 이정도로 됐지 뭐."

"뭐가?"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언젠가 있을 미래를 그리기 위해, 나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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