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시가키 쨩~"

쿄코는 굳게 닫힌 과학실 문을 덜컥 열고 들어갔습니다. 점심을 너무 많이 먹은 탓인지 속이 매슥거렸기 때문입니다. 보통 아이라면 보건실을 찾아갔겠지만 쿄코는 보건실에 있는 선생님보단 니시가키 선생님을 좀 더 좋아하기도 했고, 상비약은 니시가키 선생님이 있는 과학실에도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에 과학실을 방문 한 것입니다..만 과학실에서 항상 음흉한 웃음을 내비치며 무언가를 뚝딱뚝딱 만들어내던 니시가키 선생님은 과학실에 없었습니다.

"니시가키 쨩~ 없어요?"

쿄코는 텅 빈 과학실을 둘러보며 니시가키 선생님을 계속해서 불렀지만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만 새어 들어올 뿐 니시가키 선생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혹시 학생회에 있는 건 아닐까? 쿄코는 학생회로 발걸음을 돌리려다 과학실 교탁에 덩그라니 놓여 있는 커다란 나침판 같은것을 보았습니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테지만 - 오늘은 왠지 호기심이 평소보다 더 강하게 발동하는 날이여서 쿄코는 교탁에 있는 그 커다란 나침판을 집었습니다.

"우와.. 드래O 레이더인가 이거?"

쿄코의 손을 가득 채운 커다란 나침판(비슷한 것)은 쿄코가 예전에 봤던 만화에서 레이더 역할을 하던 무언가랑 매우 흡사하게 생겼습니다. "뭐에 쓰는거지? 이거." 나침판 테두리에 달린 버튼을 꾹 꾹 눌러봐도 나침판은 묵묵무답이었습니다. 쿄코는 흥미를 잃고 교탁 위에 나침판을 놔두려고 했으나 - 교탁 위에 놓인 종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종이엔 팬으로 휘갈긴 듯 한 '게이 레이더[가칭] 사용설명서' 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게이 레이더?"

쿄코는 미심쩍어 하며 설명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설명서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적혀있었 습니다.



'[ 게이 레이더[가칭] 사용설명서 ]'

- 작동 순서 -

1.왼쪽 상단에 있는 [전원]버튼을 3초 이상 눌러서 전원을 킴
2.전원을 키면 근방 20m이내의 동성애자를 찾아 낼 수 있음.
3.동성애자는 검은 ●로 표시되며 동성애자 력(力)이 더 커질수록 ●표시가 더 커짐
4.동성애자가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고 있을땐 ●표시가 ♥ 표시로 바뀐다
5.이제 마츠모토한테 시험해봐야지! 그럼 이만!

".. '그럼 이만' 이라니 누구한테 말하는거야..?"

참으로 어이가 없는, 니시가키 선생님다운 발명품이었고, 니시가키 선생님다운 사용 설명서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엉뚱함은 쿄코랑 상당히 잘 맞는데가 있었기 때문에, 쿄코는 나침판.. 아니, 게이 레이더를 들고 과학실을 나섰습니다.

"자, 그럼 레이더.. 스위치 ON!"

1,2,3. 정확히 3초간 전원 버튼을 꾹 누르고 있더니 아무 반응 없던 화면에 무언가가 하나 둘 씩 뜨기 시작했습니다. 정 중앙에 ● 표시가 하나 덩그라니, 아마 이것은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겠지요. 뭐 새삼스럽지도 않았습니다. '자, 그럼 이걸로 뭘 찾아볼까?' 쿄코는 과학실 앞 복도에서 고민하다 본래의 의미를 잊은지 오래인 다도부 부실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

다도부 부실엔 쿄코의 오랜 친구, 후나미 유이밖에 없었습니다. 쿄코로서는 매우 좋은 기회였지요.

"약은 받아왔어?"
"못 받아왔어.. 니시가기 쨩, 과학실에 없더라."
"그럼 보건실에 가보지 왜?"
"보건실은 약냄새때문에 싫어 -"
"애초에 과학실에서도 그런 냄새는 나잖아.. 그런데, 손에 쥐고있는 그건 뭐야? 왠 장난감?"
"아! 이거! 과학실에서 약 대신에 이걸 받아왔.."

쿄코는 유이에게 자신이 주운 '게이 레이더[가칭]'을 자랑하려고 했다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표시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정 중앙에 하나, 그리고.. 중앙 바로 위에 하나. 

"....드어..어..음.."
"음? 그게 뭔데? 왜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쿄코는 '게이 레이더[가칭]'을 주머니에 집어 넣었습니다. 자신이 유이에게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둘이 같이 오락부를 만들 때 부터 알아 차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이가 자신에게 마음을 가지고 있을 줄은? 평소에 '나 좋아해?' 같은 말을 뜬금없이 주고받는 사이이긴 했지만 이런 사이일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아니, 이런 식으로 나마 서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한 편으론 마음이 놓이지만 한 편으론 한낱 기계따위에게 치부를 들킨 느낌이랄까요. 쿄코는 굉장히 복잡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대체 뭘 받아온거야? 줘 봐."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러니까..그러니까..그, 그거야! 그냥 평범한 드ㅇ곤 레이더야!"
"드래ㅇ볼같은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줘 보라니까!"
"시.. 싫어!"

쿄코는 부실을 박차고 나가려고 했으나 길쭉한 유이의 팔에 그만 팔을 잡히고 말았습니다. 유이의 팔은 쿄코의 팔을 휘감으며 내려가 '게이 레이더[가칭]'을 넣은 주머니 속으로 향했습니다. "안 돼 유이! 보면 안되엣..!!" 쿄코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가녀린 쿄코에게 유이를 뿌리치는 건 무리였습니다. 아아, 불쌍한 쿄코! 결국 주머니 속에 들어가있던 '게이 레이더[가칭]'은 다시 주머니 밖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뭐야? 이 다마고치 같은 인터페이스는.. 이렇게 큰 화면에 ♥표시만 두개. 뭐하는 기계야 이건?"
"그러니까.. 니시가키 쨩이 만든..건데."
"건데?"

꿀꺽, 쿄코는 침을 삼켰습니다. 자신과 몇 년이나 함깨 해 온 유이를 속이는건 불가능하겠지요. 거짓말을 하느니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게 나을 것입니다. 쿄코는 눈을 꾹 감고 입을 열었습니다.

".. 그.. 니시가키 쨩은 이걸 '게이 레이더[가칭]' 이라고 부르나봐."
"게이 레이.. 어, 뭐, 잠깐, 뭐라고?"
"동성애자를 찾아서 ● 표시하는 장치..인데.. 사랑하는 사람을 눈 앞에 두고 있으면 ● 표시가 ♥로 변한다고.."
"......"

사실상 고백이나 다름 없는 말이었습니다. 하얗던 쿄코의 얼굴이 귀까지 빨개졌습니다. 부끄러워서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있을 때 - 

"..그랬구나, 쿄코."
"엣.."

유이는 자신의 왼팔을 쿄코의 허리에 감아 쿄코를 꼬옥 끌어 안았습니다. 뭉클한 기분이 드는건 유이의 가슴이 포근하기 때문은 아니었겠죠, 쿄코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습니다. 언제나와 같이 따듯하게 웃는 유이가 보였죠.

"너도.. 날 쭉 좋아했던거구나. 그래, 쿄코, 사실 나도 너를.."
"유이.."

지긋이 교차하는 서로의 시선, 먼저 얼굴을 움직인건 유이 쪽이었습니다. 쿄코와 유이의 입술이 점점 가까이 -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딴 그림연극 인정 못한다니까요!!!"

하아, 그래. 이 쯤에서 태클이 들어 올 줄 알았어. 아아, 그림 연극에 파들파들 떠는 치나츠 쨩 귀여워~♥

"유이 선배도 조금 뭐라고 하세요! 맨날 오냐오냐 봐주니까 쿄쿄 선배가 이런 이상한 그림을 그리는 거라구요!!!"
"아아.. 그러니까.. 나는 평소에도 이런 바보같은 일을 많이 겪다보니 이정도는 그냥 일상이라고 해야하나.. 이런거로 일일히 걸고 넘어지면 피곤 한 것도 있고.."
"크으으윽..!"
"와 - 이, 아카리 쿄코의 그림연극 너무 좋아!"
"후훗, 이런 성원에 힘입어 이 '게이 레이더[가칭]' 그림 연극 2탄도 곧 그릴테니 기대하시라!"
"뭐? 쿄코, 이거 2탄도 그리는거야?"
"쿄코 선배!! 그런거 그리지 말라니까요!!"
"아하하하~ 한달정도 걸릴테니까 기다려줘☆"

유이와 연인이 된 후의 이야기를 그리려면 한 달 정도는 추억이 쌓여야 할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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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랬더니 아야노가 아무 말 안하고 전화를 끊던데, 대체 뭐였던 걸까?”
“으음.. 글쎄, 급한 일이라도 있었던 거 아니야?”

툭, 툭. 내가 손가락으로 컨트롤러의 ‘O’버튼을 누를 때 마다 내 동료들이 하나 둘씩 쓰러져갔지만 게임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쿄코가 말을 걸 때 마다 몸이 붕 뜨고, 정신이 멍해지는 게 흡사 열병에 걸린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 잠깐만. 유이, 거기서 그렇게 하면 - ”
“응?”

[- 으악! 이건 정말로 아프다. 당신은 죽었다……. 다음장으로 ->]. 게임 오버를 알려주는 대화 창을 보고 한숨이 나왔다. 아아, 세이브 언제부터 안 했더라? 거의 한 시간정도 플레이한게 날아 간 것 같은데. [- 이 파일로 로드하시겠습니까?] 라는 대화창에서 나는 Yes를 택하지도, No를 택하지도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오늘 컨디션 안 좋네? 어디 아파?”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집중이 안 되네.”
“좋아 - ! 이럴 땐 나나모리 중학교의 No.1 게이머, 토시노 쿄코한테 맡겨달라구!”
“No.1이고 자시고 이 게임 하는 사람 우리 중학교에서 너랑 나밖에 없잖아?”

“아니야 - ! 찾아보면 있을거라구!!” 라며 입이 삐죽 튀어나온 쿄코를 달래기 위해 나는 어린아이한테 과자를 건네듯 컨트롤러를 건넸다. 졸린 탓에 반 쯤 죽어있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컨트롤러를 받아 든 쿄코는 지렁이처럼 꾸물꾸물 기더니 내 옆자리에 오고 나서야 자세를 바로 잡았다.

“으음.. 레벨 28이라,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하지. 이 챕터, 보스가 어디 있었더라?”
“응? 레벨, 좀 더 올리고 가는 게 좋지 않아? 장비도 잘 못 맞췄는데. 여기 보스는 화상 공격까지 쓰니까 포션도 챙겨 가야되고..”
“그렇게 따져가면서 게임 하면 재미없지 않아? 아슬아슬 하게 보스를 격파했을 때의 그 쾌감이 얼마나 짜릿한데.”
“그거야 뭐, 개인 취향이니까.”

쿄코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화염 동굴의 중심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왠지 불안한데, 이길 수 있으려나?

“유이는 확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하는 편이라 가끔씩 보는 내가 답답해. 애늙은이도 아니고.”
“확실한 게 좋잖아? 실패하면 의욕이 팍, 떨어지니까 말이야. 그리고 인간관계 같은 건 실패하면 돌이킬 수 없기도 하고.”
“음? 인간관계?”
“고백했다가 차이기라도 해 봐, 그 사람이랑 친구로 어떻게 지내겠어?”

말을 뱉어놓고 아차, 싶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갑자기 뜬금없이 웬 고백? 유이,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긴거야?”
“윽. 아, 아니, 그, 그게.”

그냥 넘어가 줬으면 싶었는데, 게임에 정신 팔린 줄 알았더니.

“나도 어디서 들은 건데 말이야, 연애는 암살이 아니야. 들켜야 시작한다구.”
“들키는 거랑 고백했다 차이는 거랑은 다르.. 아, 아니, 그전에 좋아하는 사람 같은 거 없어!”
“정말로?”

컨트롤러 위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쿄코의 손가락이 멈췄다. 한숨이 나왔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는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저, 정말이라니까.”
“아니잖아.”

방금 전까지 Tv를 눈이 빠져라 보던 쿄코의 청명한 눈은 이제 나를 쳐다보았다. 저 눈에 삼켜질 것 같아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가끔씩 아무 이유 없이 얼굴이 새빨개지고, 안절부절 못하고, 멍하니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그런 것들 전부 다, 사랑에 빠진 소녀의 반응이야.”
“네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겪고 있으니까.”
“뭐? 쿄코, 너,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쉿.” 쿄코는 그렇게 말하며 검지를 쭉 펴 내 입에 가져다 대었다. 나는 엉겁결에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고민 중이야, 어떻게 고백해야할지.”
“..아, 그, 그렇구나.”
“자연스러운 게 좋겠지?”
“그..렇겠지?”

“역시 유이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라며 장난기 가득 담긴 얼굴로 키득키득 웃는 쿄코를 보며, 나는 뭔가에 취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현실은 패키지 게임이 아니지. 내가 확실하게 호감도를 쌓을 때 까지 세상이 기다려 줄 리가 없지. 입 안의 침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그런 의미에서, 유이, 나 좋아해?”
“그야 물론..”
“그래, 그럼 오늘부터 1일이야.”
“응?”

쿄코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어라, 쿄코가 지금 무슨 말을 한거지?

“저기, 잘 못 들었는데.”
“서로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오늘부터 1일. 아니야?”
“아, 아니, 농담 하지 말고.”
“농담인지 아닌지는 유이가 더 잘 알고 있는 거 아니야? 혹시.. 싫어?”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점점 더 다가오는 쿄코를, 나는 부들거리는 팔로 꼭 끌어안았다.

“아니, 그.. 싫은 건 아니지만.”
“정말이지? 그럼 오늘부터 1일인거지?”
“..그래도 고백은 다시 해 줘.”
“왜에 – 자연스러운 게 좋다면서?”
“그래도 이건 너무 자연스러웠잖아..”
“아무렴 어때 - ”

쿄코가 그렇게 말하며 엉겨붙는 바람에 나는 몸의 균형을 잃고 나자빠지고 말았다. 언제나와 똑같은,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Posted by 비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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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엔 먼지 하나 없고, 창문 깨끗하고. 창틀에 있는 먼지도 OK.. 좋아, 청소 끝!"

고된 대청소였으나 힘들긴 커녕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오늘이 누구나 기뻐할 성탄절이기 때문일까, 아니. 지금 이렇게 기분이 좋은건 역시 -

[- 띵동]

좋아하는 사람이 오기 떄문이겠지.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차임벨을 누른 사람을 확인했다. 내가 오늘 하루 종일 기다렸던 그녀였다. 그녀가 문 뒤에 있다고 생각하니 기름칠이 덜 된 탓에 '끼기긱' 거리며 열리는 현관문 소리도 지금만큼은 너무 아름답게 들렸다.

"안녕하세요. 코토리."
"안녕! 우미."

허리까지 오는 남색 코트, 목 언저리에 예쁘게 묶인 리본이 인상적인 하얀 블라우스, 체크무늬가 인상적인 빨간 치마. 그리고 치마를 입은게 부끄럽다는 듯 맨 다리를 가린 새까만 스타킹. 평소엔 못 보던 옷이었다. 특별한 날이라고 우미도 나름의 준비를 하고 온 걸까.

"초대해주셔서 고마워요, 그 답례라고 하긴 뭣하지만.. 이걸."
"어?"

뒷짐을 지고 있던 손엔 파란색 케이크 상자가 들려있었다. 

"저번에.. 드시고 싶었다고 하셨죠? OO브랜드의 치즈케이크."
"그래서 사와준거야? 고마워!"

우미를 꼭 껴안아주려고 했으나 우미는 "아, 아직 밖이라구요 코토리." 라며 나를 밀쳐냈다. 

"아, 미안해. 손님을 밖에 두는건 실례지. 자, 들어와 우미."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우미는 단화를 벗고 실내를 둘러 보았다. 

"정말 깔끔하네요, 저도 코토리를 좀 본 받아야겠어요. 돌아가면 집 안 대 청소를.."
"아하하하.. 고마워, 우미."

하지만 나 같은걸 본받으면 안 돼, 한시간 전 까지만 해도 이 거실. 엄청 더러웠으니까. 라는 말이 튀어나왔으나 그 말은 가슴 속에 묻어두기로 했다. 

"어라? 호노카는 아직 안온겁니까?"
"아아, 호노카는 오늘 일이 바쁘다고 하더라구."

사실 너 밖에 안불렀어 우미. 라고 말하면 우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갑자기 궁금해졌으나 그 말은 아껴두기로 했다. 혹시라도 호노카를 부른다면 큰일이니까.

"... 그런가요, 아쉽네요. 셋이서 성탄을 맞이하고 싶었는데요."
"하아. 그러게.. 나도 아쉬워."

한숨을 쉬며 쇼파에 앉는 우미를 뒤에 두고 부엌으로 향했다. 술 잔 두개와 어제 사 둔 짭잘한 감자칩 그리고,이 날을 위해 준비해 둔 양주를 챙겨 다시 우미에게 돌아갔다.

"뭐! 아쉬운 건 마시면서 날려버리자구♡"
"에...엑? 코토리, 그.. 그거, 술 아닙니까?"
"친구들 불러 성탄절에 망년회 한다고 했더니 아빠가 챙겨줬어! 엄마는 반대했지만."

사실 아빠 몰래 한 병 숨겨둔 거지만.. 뭐, 한 병 없어진다고 티가 나는 것도 아니고, 사정을 말하면 아빠는 이해 해 주시겠지?

"저기..그.. 코토리, 저희는 아직 학생.."
"나이 한 두살 적은사람이 술 먹는다고 안죽어! 괜찮아 괜찮아!"
"교칙도 교칙이고..뭣보다 이런건 현행법에 -"
"특별한 날이잖아? 응?"

그렇게 말하며 우미의 손을 꼭 잡은게 효과가 있었는지, 우미는 아무 말 없이 술잔 하나를 챙겼다. 사실 우미가 끝까지 안 마실까 걱정했는데.. 정말로 다행이야.

"이번..한번만 이에요. 알겠죠?"
"물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우미의 잔을 채웠고, 우미는 내 잔을 채워주었다. 짠, 유리잔이 부딫히는 소리가 너무나도 듣기 좋았다. 이제 남은 건 우미가 정신줄을 놓을 떄 까지 술을 부어주는 것 뿐이었다. 오늘이야 말로 너를 가지고 말겠어, 우미.



"후우...."
"..코토리?"

어라라아.. 이상하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아. 얼굴이 뜨거워, 숨쉬기도 힘들고.. 무릎이 아프고 허리가 쑤시네.. 왜.. 왜 이런거지?

"괜찮아요?"
"당연하지이-! 코토리는 완전히 멀쩡하답니다~"

생각 해 보면 오늘 우미한텐 거짓말만 엄청 했네, 사과해야겠다아.. 아니지, 생각 해 보면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우미가 나쁜거 아니야? 내가 그렇게 어필을 했는데도 한번도 안 받아줬잖아. 그렇다고 아예 싫다고 나를 밀어 낸 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니까 내가 이런 짓까지 하게 됐잖아, 그런데 이게 뭐야아.. 너무 힘들어, 지금 당장이라도 토하고 싶어..

"우미는.. 멀쩡해?"
"저는..조금 얼굴에 열이 올라온 것 같네요."
"그러게에 - 우미, 얼굴이 빨갛게 잘 익었네~ 먹어버리고싶게."
"..네?"

딸기같이 빨간 얼굴이니까 쪼옥, 하고 빨면 딸기맛이 나지 않을까? 

"자, 잠깐, 뭐하는거에요 코토리?!"
"히히.. 왜그래에- 우미의 볼, 짭잘한 맛이 나. 감자칩 같았어. 조금 더 맛보게 해 줘."
"하, 하지마요..!"

어라아- 우미, 왜 버둥거리는거야? 우리, 예전엔 알몸까지 본 사이였잖아. 버둥거리지 마. 그렇게 버둥거리면 손목을 잡아 채기도 어려운데..

"제.. 제발 부탁이에요, 코토리.. 자, 잠깐만 떨어져주세요..! 코토리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에요..!"
"아니라니까아? 코토리는 지금 완 전 히 멀쩡하다구우.. 애초에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끼린..이런거 많이 하잖아? 응?"
"무.. 물론 그렇긴 하지만, 이런 형태론 아니라구요! 제발.. 놔주세요 코토리..!!"
"싫지롱~ 히히."

블라우스 단추는 왜이렇게 작은거야? 아니, 내 손이 큰건가? 블라우스 단추 풀기 귀찮은데 그냥 확~! 하고 뜯어버릴까? 어라, 그런데 블라우스 단추에 무슨 버튼이라도 달렸나? 왜 갑자기 온 세상이 거꾸로 돌지이..?

"당신. 최악이에요..!"
"..얼..레?"

방금 전 까지 우미는 분명 내 밑에 있었는데.. 언제 빠져나간거람? 방금전에 세상이 거꾸로 돈게 우미가 날 밀쳐내서 그런거였나..? 어라, 그런데.. 방금전에 우미가 뭐라고..

"저, 갈게요."
"어?"

갑자기 온몸에 핏기가 싹 가셨다. 잠깐만, 간다고? 아니, 그전에.. 나, 방금 전에 무슨짓을 한거지?

"자, 잠깐만. 우미."

자리에서 일어선 우미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나를 내려다보는 우미의 눈은 흡사 벌레를 보는 것 같은 눈이었다.

"뭔가요?"
"저, 저기. 미안해. 내, 내가 잠깐 어떻게 됐었나봐. 응?"
"됐어요, 호노카가 없었을 때 부터 알아 차렸어야했어. 원래 이럴려고 부른거였죠? 당신.. 그렇게까진 안봤는데, 정말 최저에요. 실망했습니다."
".....아, 아니. 그건."

아니라고 부정하려고 했지만 우미의 눈이 너무나도 따가워서 차마 거짓말을 입에 올릴 수 없었다.

"그건? 뭔가요."
"나는..그냥.. '지금은 안 돼요, 다음에' 라고 말하는 우미 때문에.. 너무 애가 타서.."
"..에."
"그..그래도 그렇잖아! 항상 키스까지 쭈욱 하고, 좋은 분위기까지 냈는데! 계속 다음에 다음에 다음에! 그 다음이라는게 오긴 오는거야?! 나, 지난 1년 내내 기다렸단 말이야. 차라리 확실하게 거절을 하면 이렇게 까진 안했을거야. 물론 내가 잘못 한 건 맞아, 정말 잘못 했지만... 나, 우미만 생각하면 몸이 달아 올라서 -"
"그, 그, 그만! 코토리가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진.. 알겠어요, 그렇다고 그걸 용서 할 마음은 없지만."
".. 미안해."

아랫 입술을 꾹 깨물고 사과에 사과를 반복했다. 눈물이 나오는걸 꾹 참고 올려다 본 우미의 눈동자는, 방금 전 보다 한결 풀려있었다. 아이를 혼낸 후 엄마가 아이를 부드럽게 보는 눈빛이었다.

"..그러니까, 다음부턴. 정중하게 부탁 해 주세요."
"우미이..."

무릎을 꿇고 나와 눈높이를 맞춰 준 우미의 품에 안겨, 나는 펑펑 울었다. 눈물로 얼룩진, 절대 잊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지나갔다.

Posted by 비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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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모가미 시즈카가 싫다.

이유 없이 싫다.

첫인상부터 안좋았느냐 - 하면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첫인상은 무척 좋은편이었다. 매사에 진중했고, 배려가 몸에 베어있었으며, 하는 행동 하나 하나에 왠지 모를 기품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아이돌'이라는 자신의 직업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몇가지만 빼면 나와 상당히 비슷하게 느껴져서 어쩌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해봤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가면 갈수록 틀어지기 시작했다. 시즈카의 행동이 점점 더 눈에 밟혔기 때문이었다. 매사에 진중한줄 알았더니 그냥 머리가 굳어서 장난을 장난으로 못받아치는 바보인거였고, 남을 배려해주느라 자신의 살을 깎아댔으며, 왠지 모를 기품은 시즈카와 몇 번 대면하고 나서 사라졌다. 그리고 '아이돌'을 그 누구보다 하고싶어하고, 그 누구보다 동경하면서 조금 있으면 도망가버린다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아니, 그것 뿐이라면 참고 지낼 수 있었을것이다. 하지만 그것 뿐만이 아닌 '뭔가'가 매우 거슬렸고, 그래서 나는 시즈카를 멀리했고, 시즈카는 그런 나를 멀리했다. 그나마 다행인건 이제부턴 시즈카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일까.

시즈카는 내일이면 시어터에서 떠나니까.

"시즈카씨.. 정말 가는거에요...?"
"시즈카아.. 가지 마..!"
"울지 말라니까 세리카.. 가끔씩 놀러 올 테니까.. 미라이! 넌 또 왜 우는거야? 어차피 학교에서 만날탠데."

오늘은 아이돌 모가미 시즈카의 송별회가 있는 날이었다. 이 날이 올때를 기다릴 떄도 있었는데, 정작 송별회 날이 오니 기분이 더 더럽기만했다. 이렇게 억울한 날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싱글벙글하고있는 시즈카를 보며 어이가 없었고, 누구보다 힘들 시즈카한테 안겨 어리광 피우는 세리카와 미라이를 보며 짜증이 치밀었고, 시즈카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고기를 구우며 웃고 떠드는 다른 동료들을 보며 울화가 치밀었다.

..이곳에 더 있으면 말 실수를 할 것 같았다.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요."
"에? 시호, 좀 더 먹고가제 왜.."
"..일이 있다니까요."

내 손목을 붙잡는 나오씨의 손을 뿌리치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멍청이, 멍청이. 멍청이들..!!"

이 근처에 택시정류장이 있었지. 택시를 잡고 최대한 빨리 집에 돌아가야겠어,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야.. 최대한 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야! 시호!"
".....?"

거친 숨소리가 섞인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나를 향해 있는 힘껏 달려오는 시즈카가 보였다.

"..무슨 일이야? 파티 주인공이."
"무슨 일 있어? 왜 그리 급하게 나가는거야?"

내 손을 꽉 붙잡고 숨을 몰아시는 시즈카를 보니 방금 전까지 부글부글 끓고있던 마음이..

폭발했다.

"..넌 바보야?"
"뭐?"
"오늘이 뭐 좋은 날이라고 그렇게 헤실헤실 웃고있어? 차라리 한껏 히스테리 부리고 짜증이라도 내면 이해라도 하지. 그리고 나는 왜 챙겨주려고 하는거야? 너, 나 싫어했잖아."
"......그랬지, 싫어 했지."
"그럼 왜 - "
"싫어했으니까. 적어도 오늘 화해하고 싶었어."
"..응?"

시즈카의 입에서 튀어나온건 의외의 말이었다. '화해'하고 싶었다고?

"..화해?"
"..그게, 그러니까... 너는 뭐가 싫다면 싫다고 바로 말하는 성격이잖아? 그런데 그동안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라는 말에는..전혀.. 얘기를 안 해줬으니까. 그래서.. 내가 뭔가, 뭔가를 정말 잘못한건가 생각했지. 그 뭔가가 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

내가 이유 없이 그냥 싫어하던 걸, 이 애는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던거구나. 성실하다고 해야할지, 바보같다고 해야 할지..

"그리고. 네가 말했었잖아. 우리는 서로 라이벌이라고. 제대로 결착을 내지도 못한 체 이렇게 떠나게 되서. 그것도 사과하고 싶었어. 너를 기다리게 하는 꼴이니까."
"그걸 아는 애가 이렇게 떠나.. 응? 잠깐. '기다려' ?"
"....그거야.. 다시 돌아 올 거니까."
"응?"

방금 전에 튀어나온 말 보다 더 의외인 말이 계속 시즈카의 입 속에서 튀어나왔다. 돌아온다고?

"돌아 온..다고?"
"아빠하고 한 약속떄문에 잠시 떠나긴 하지만.. 이번엔 반드시 아빠를 설득해서, 꼭 돌아올거야. 그 때 까지.. 기다리고 있어."
"....."

시즈카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내가 왜 그토록 시즈카를 싫어했는지, 이제 좀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뭘 기다려달라는거야? 참 나, 열심히 달릴테니까 따라 와 보던가."
"그 짤막한 다리로 뛰면 얼마나 뛴다고 젠체야?"
"나랑 1cm 차이밖에 안나는게 잘난척은.."
"그 1cm가 중요한거거든?"

매사에 진중했던건 지금 하는 일의 '다음'을 보았기 때문이었고, 남을 배려했다는 건 그만큼 동료를 잘 살펴봤다는 뜻이었고, 강요와도 같은 약속 때문에 자신의 꿈이 좌절되어도, 그 꿈을 꿋꿋히 바라 볼 줄 아는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요컨데, 시즈카는 내가 못보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질투를 했던 것 같다.

나도 참 바보라니까, 이걸 이제서야 깨닫다니. 조금만 더 일찍 알았다면 조금은 더 가까워 질 수 있었을탠데.

"..그래서, 갈꺼야?"
"......"

그 말을 듣더니 배가 꼬르륵, 울렸다. 시즈카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끌고가기 시작했다. 

시즈카가 조금 좋아지기 시작한 것 같다. 내가 못보는 걸 볼 수 있는 아이니까.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난 키타자와 시호가 마음에 안 든다.

이유없이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지만.

지금와서 생각 해 보면, 첫인상부터 마음에 안들었다. 사람이 무슨 말을 걸어도 반응이 없고, 반응을 해도 "아니" 아니면 "응" 이 전부였다. 그것만이라면 그냥 '말이 없는 애구나' 라고 받아 들일 수 있겠는데 남한테 독설을 날릴땐 신랄하게 말을 잘 하는걸로 보아 그냥 자기 곁에 있는 사람을 전부 싫어하는 것 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 아이랑은 절대로 못 친해지겠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시호를 겪어가면서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시호가 말을 안할 땐 보통 중요한 일정을 눈 앞에 두고 있었을 때였다. 아마 자신의 일을 생각하느라 남한테 신경을 못 쓴 거겠지. 마음엔 안들지만 이해는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호가 날리는 독설은 다른 사람을 유심히 관찰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이 대부분이였고, 그 독설을 듣고 자신의 부족한 점을 채워나가는 동료들이 많았기에 시호가 무척 속 깊은 사람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 다만 문제가 있다면 시호가 나를 싫어한다는 거였다. 아니, 그건 괜찮았다. 누군가가 나를 싫어한다면 나를 고쳐나가면 되니까, 문제가 되는 부분은 시호가 나를 왜 싫어하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넌 이런점은 좋더라.' 라던가 '넌 이런점은 고칠 수 없니?' 라는 말은 똑 부러지게 하는 아이인데, 유독 나만 이유없이 싫어했다. 이유를 물어봐도 침묵만이 돌아올 뿐, 하루는 그것때문에 머리까지 붙잡고 싸운적이 있었는데 "너는 그냥 싫어!" 라는 대답이 내 가슴을 찔렀었다. 

..엄청나게 고민한 끝에 내가 내놓은 대답은 '내가 시호한테 (뭔진 모르겠지만) 정말 큰 잘못을 했구나.' 였다. 이유없이 미움을 받는건 말도 안되는 일이고, 날 미워하는 아이가 시호같이 똑 부러진 애라면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유를 말 안해주는 걸 보면 아무래도 단단히 삐졌거나.. 내가 너무 미안해 할 까봐 말을 안한다거나, 둘 중 하나일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시호한테 사과를 하고 싶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른 체 사과를 하는건 너무 무성의한 일이니까, 어떻게든 내가 잘못한 걸 알아내서, 시호한테 사과하고 싶었는데 - 

내일이 아이돌 모가미 시즈카가 시어터에서 떠나야 되는 날이라니, 정말 하늘도 무심하시지. 오늘은 그 송별회가 있는 날이었다. 다 같이 고기를 구워먹던 고깃집에서.. 처음엔 약간 쳐진 분위기였지만 시간이 지나니 모두가 왁자지껄한, 시어터 특유의 그 분위기로 돌아왔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없어도 이곳은 변함 없겠구나. 

"시즈카씨.. 정말 가는거에요...?"
"시즈카아.. 가지 마..!"
"울지 말라니까 세리카.. 가끔씩 놀러 올 테니까.. 미라이! 넌 또 왜 우는거야? 어차피 학교에서 만날탠데."

나한테 매달려 울먹거리는 세리카와 미라이를 달래면서도 힐끔힐끔 시호를 쳐다 보았다. 시호는 뭐가 그렇게 기분이 나쁜지 미간을 찌뿌리며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요."
"에? 시호, 좀 더 먹고가제 왜.."
"..일이 있다니까요." 

자신의 손을 붙잡는 나오씨의 손도 뿌리치고 가게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미라이, 세리카, 자, 잠깐만 기다려 줘." 라는 말을 남기고 나는 시호를 따라갔다. 지금 시호를 놓친다면 평생 후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빠르게 발걸음을 놀렸더니 얼마 안되서 시호의 뒷모습이 보였다. 

"야! 시호!"
".....?"

다행히도 시호는 뒤를 돌아 보았다. 약간 놀라움이 섞인 표정이었다. 나는 어리둥절해하는 시호한테 다가가 손을 붙잡았다. 시호는 내가 손을 붙잡자 

"..무슨 일이야? 파티 주인공이."

라고 물었고, 나는 그 질문에..

"무슨 일 있어? 왜 그리 급하게 나가는거야?"

질문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그런걸까, 어리둥절해 하던 시호의 표정이 점점 더 일그러지더니 미간에 또 주름이 지기 시작했다. 무슨 말이 쏟아져 나올까 걱정했고, 그 걱정은

"..넌 바보야?"

정확히 적중했다.

"뭐?"
"오늘이 뭐 좋은 날이라고 그렇게 헤실헤실 웃고있어? 차라리 한껏 히스테리 부리고 짜증이라도 내면 이해라도 하지. 그리고 나는 왜 챙겨주려고 하는거야? 너, 나 싫어했잖아."

'너, 나 싫어했잖아.' 라는 말을 듣고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내가 시호한테 한 행동들이 너무나도 찔렸다. 시호가 나한테 한마디 툭 툭 뱉을때마다 나도 그대로 돌려주곤 했으니까. 시호와 사과를 하고 싶긴 했으나 그것과 시호한테 좋은 감정이 있는가하곤 약간 다른 문제였다.(좋은 감정도 물론 있긴 하지만 싫어하는 감정이 조금 더 컸으니까.)

"......그랬지, 싫어 했지."
"그럼 왜 - "
"싫어했으니까. 적어도 오늘 화해하고 싶었어."
"..응?" 

오늘이 지나면 시호를 한동안 볼 수 없어서일까. 마음 속에 있던 말이 튀어 나와 버리고 말았다.

"..화해?"
"..그게, 그러니까... 너는 뭐가 싫다면 싫다고 바로 말하는 성격이잖아? 그런데 그동안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라는 말에는..전혀.. 얘기를 안 해줬으니까. 그래서.. 내가 뭔가, 뭔가를 정말 잘못한건가 생각했지. 그 뭔가가 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

이 말을 듣더니 시호의 이마에 그려진 미간의 주름이 사라졌다.

"그리고. 네가 말했었잖아. 우리는 서로 라이벌이라고. 제대로 결착을 내지도 못한 체 이렇게 떠나게 되서. 그것도 사과하고 싶었어. 너를 기다리게 하는 꼴이니까."
"그걸 아는 애가 이렇게 떠나.. 응? 잠깐. '기다려' ?"
"....그거야.. 다시 돌아 올 거니까."
"응?"

....그리고 내가 그 다음 말을 하자 시호는 고개를 잠시 갸우뚱했다. 나.. 뭐 이상한 말 한 걸까?

"돌아 온..다고?"

내가 돌아 올 거라는걸 몰랐던걸까. 하긴, 그동안 '내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느니 '아이돌 시작할 떄 부터 정한 약속' 이라느니 이런 말을 했으니 돌아 올 줄 모르는게 당연하지, 나도 처음엔 3년만하고 그만 둘 생각이었으니까.

"아빠하고 한 약속떄문에 잠시 떠나긴 하지만.. 이번엔 반드시 아빠를 설득해서, 꼭 돌아올거야. 그 때 까지.. 기다리고 있어."
"....."

시호는 내 말을 듣더니 벙 찐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 표정엔.. 조금이지만 미소도 섞여있었다.

"뭘 기다려달라는거야? 참 나, 열심히 달릴테니까 따라 와 보던가."
"그 짤막한 다리로 뛰면 얼마나 뛴다고 젠체야?"
"나랑 1cm 차이밖에 안나는게 잘난척은.."
"그 1cm가 중요한거거든?"

평소와 같은 투닥거림이었지만, 평소와는 무언가가 달랐다. 

..뭐지? 뭐가 다른거지?

"..그래서, 갈꺼야?"

이대로 가버릴거냐는 질문에 시호의 배가 '꼬르륵'소리를 내는 것으로 대신 답변했다. 그 모습이 어딘가 귀여워서, 나는 푸흡. 웃으며 시호를 끌고갔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따라오는 걸 보면, 시호도 싫지는 않은거겠지.

.. 시호가 조금 좋아지기 시작한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Posted by 비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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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왜이러는건데?!"

손목을 잡혔다. 얼마나 쎄게 잡혔는지 손목이 부러질 것 같았다. 그렇게 쎄게 잡힌 손목보다 등 뒤에서 꽃히는 시선이, 내 귀에 꽃힌 목소리가 더 아팠다. 나는 천천히 몸을 뒤로 돌렸다. 그곳엔 눈 끝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있는 마키가 있었다.

"갑자기 그런말을 툭 내뱉으면 '아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왜.. 왜그러는거냐고? 내가 싫어졌어? 이젠 내가 질려? 대체 뭔데?!"

고통스럽지만 말해야겠지. 나는 한번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네가 행복해지길 바래서 그랬어.

"......"

입을 열었으나 이상하게 말은 나오지 않았다. 목이 잠긴걸까, 헛기침을 한번 해 보고 다시 입을 열어보았다. 네가 행복하길 바래서 그랬어. 또박또박 발음한 것 같은데, 입 밖으론 숨소리 빼고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사실.. 알고 있지? 너도."

"...!!"

투명했던 마키의 눈물은 피눈물이되어 마키의 볼을 따라 흐르고 있었으며, 이쁜 자주색 눈동자는 검게 물들었다. 마키의 입은 한기를 내뿜었고, 마키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손목을 뿌리치려 했지만 마키의 손은 내 손목을 잡은채로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거짓말하지 마, 사실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손목을 잡고 있던 마키의 손이 점점 위로 올라왔다. 뒷걸음질 치고 싶었으나 마키가 온 몸에서 내뿜는 한기 까닭일까,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었다.

"나는 너의 솔직함을 보고 반한거란말이야. 자. 빨리 말해, 말하라고..!! 나의 행복따윈 안중에도 없었다고..!!!!"

"칵..카흑..!!"

슬금슬금 올라오던 마키의 손이 내 목을 졸랐다. 아니야, 아니야 마키. 나는 네 앞에서 언제나 솔직했어, 네 앞에서 말한건 전부, 전부 진심이었단 말이야. 마음속으로 수백, 수천번을 외쳣으나 마키한텐 닿지 않은 듯 했다. 목을 조여오는 힘은 점점 더 강해졌고, 내 눈 앞은 점점 캄캄해졌다.

-

"칵..카흑..!! 커헉.. 컥..컥..허억..헉.."

목을 만져보았다. 내 목을 조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벌벌 떨리는 턱을 진정시키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흐린 걸 제외한다면 언제나와 똑같은 풍경이었다. 역시, 방금전의 그건 꿈이였구나. 다행이다.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상체를 일으켰다. 숨을 전부 가다듬고 나니 옷이 축축하게 젖어 몸에 들러붙은게 느껴졌다. 셔츠 속으로 손을 넣어 배를 살짝 쓸어보았다,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수건으로 몸이라도 닦을 생각으로 침대에서 일어 난 순간..

"어, 어?"

다리가 한번 휘청거리더니 나는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빨갛게 달아오른 무릎을 쓰다듬고 있었는데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위를 올려다보니 나를 내려다보는 유키호가 보였다.

"언니, 무슨일이야?"

"아, 그게.. 수건을 가지러 내려가려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런건 날 부려먹으면 되잖아, 평소엔 잘만 부려먹더니.. 수건, 가져다 줄게. 다친덴 없지?"

"응."

유키호는 방을 나가려다가 멈칫하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언니, 그런데 병원 갈 생각 진짜 없는거야? 일주일이나 앓았잖아. 단순한 감기는 아닌 거 같은데."

"아. 아니야. 괜찮아지고 있어, 정말인데.."

"괜찮아지고 있다는 사람이 걷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서 넘어져? .. 안 되겠다. 몸 닦고 옷 갈아입어. 병원, 데려다줄게."

"아, 아니야! 혼자서도 갈 수 있어."

"정말? 그럼 오늘 갈거야?"

역시, 병원에 가야하려나. 제일 가까운 병원은 마키가 있는 병원이었고, 그 다음으로 가까운 병원은 거기서 한참은 더 가야했다. 역시, 병원에 가기 싫어졌다. 마키를 만날 수도 있었으니까.

"어, 음, 그, 그게..."

"..역시 데려다줘야겠어."

"아, 아니야. 오늘 갈게. 나 혼자서."

하지만, 유키호와 같이 마키를 만날 수도 있다는건 더 싫었다.

-

"......"

진찰실의 문을 열자 만감이 교차했다. 이런것이 운명이라면 하늘에다가 침이라도 뱉고싶은 노릇이었다. 루비와도 같이 빛나는 붉은 곱슬머리, 자수정을 연상케하는 보라색 눈동자, 촉촉한 입술. 너무나도 보고싶었지만 다신 보고싶지 않았던 그녀가, 하얀 가운을 입은채 자리에 앉아있었기 떄문이었다. 어떻게 말해야하나. 그냥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을까? 아니면 오랜만이라도 인사라도 해야할까? 그냥 집에 돌아갈까? 머리는 굴러갔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내 몸을 움직인건 마키의 말 한마디였다.

"어서오세요 환자분, 어디가 불편해서오셨나요?"

"아."

새것처럼 보이는 가죽 의자에 엉덩이를 붙히고, 마키가 한 것 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감기 걸린 것 같아요."

내 얼굴을 보지 않고 종이에 뭔가를 끄적끄적, 모니터를 보며 마우스 휠을 드르륵, 소리나게 몇번 굴리고선 체온계를 집더니 내 귀에 꼽았다. 딸깍, 삐비빅, 삐이 - 마키는 체온계를 보더니 "열이 심하네요." 라고 말하며 다시 한번 종이에 뭔가를 적었다. 드디어 내 얼굴을 마주보나 싶었더니 "환자분, 입 좀 벌려주시겠어요?" 라는 말 한마디만 할 뿐이었다. 나는 조용히 입을 벌렸다. 차가운 쇠막대가 입 안을 조금씩 헤집었다. 동굴탐험하듯 입 안을 조명까지 비추며 쳐다보던 마키는 조명을 몆번 꺼봤다 켜봤다 하더니 다시 몸을 돌려 종이에 뭔가를 적었다.

"목이 심하게 부으셨네요, 언제부터 이랬었던거에요?"

"지난주요."

"약.. 3일치 처방해드릴게요, 수면제랑 해열제 포함된거라 약 드시고 나시면 좀 졸리실거에요, 주사도 처방해드릴테니까 저쪽으로 가서 맞고 가세요. 아, 그리고 약 3일치 다 드시면 경과 봐야되니까 꼭 한번 들러주시구요."

"....."

많은 말을 하고 싶었다. 넌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나? 나는.. 많이 힘들게 지냈어. 먼저 보지 말자고 한건 나인데, 그래도 너를 너무 보고싶더라. 정신이 아프면 몸이 아프다고했나? 평소에는 앓지도 않던 감기 이렇게 심하게 앓아본건 예전에 연습한답시고 몸 막 굴릴때 빼곤 처음이야. 그런데 병원엘 못가겠더라. 우리집 근처에 있는 병원이 이곳이잖아? 여기가 아니면 한참은 더 가야된다구, 그런데 이 병원에 오면 널 마주칠 것 같은거야. 그게 너무 무서웠어. 결국 너무 아파서 이곳에 오긴 했는데.. 이게 무슨 장난질인지, 만약에 널 본다고 해도 병원 복도에서 마주치는 거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너한테서 진찰을 받게 되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두어 시간 더 걸려도 다른 병원으로 갈 걸 그랬어. 어때. 마키? 넌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하지만..

"알겠어요. 의사 선생님."

내 입에선 저 한마디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

오랜만에 먹어본 커피는 매우 썼다. 카페라떼정도는 시럽 없이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픽, 나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왔다. 카페라떼라. 마키와 헤어질때 시킨 커피도 카페라떼였었지 아마? 아니, 잘 기억이 안난다. 프라푸치노였던가? 여하튼 커피잔이 거의 다 비어가는데도 마키는 그림자도 비추지 않았다. 많이 바쁜걸까.

- "네, 약 잘 챙겨 드셨나보네요. 열도 없고. 목 부은것도 많이 가라 앉으셨어요. 그런데.. 환자분, 혹시 7시에 시간 되시나요? 하고싶은 얘기가 있는데요..."

"..하필이면 약속장소를 이곳으로 잡다니, 악취미야. 마키."

마키와 인연이 끊긴, 아니, 인연을 끊은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다. 이 자리에 앉아 커피를 홀짝거리니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과거의 일이 생각났다. 말끔한 정장을 차려 입은 미남, 그리고 그 옆에서 방긋방긋 미소를 짓고 있었던 마키. 그걸 생각하니 커피가 아니라 술을 마시고 싶었다. 벌써 30분이나 지났는데 안 나오는 걸 보면 나올 생각이 없는 건 아닐까? 차라리 편의점에서 술이나 사서 집으로 돌아갈까?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쳐다보는 도중, 문이 열리고, 마키가 들어왔다. 마키와 나는 눈이 마주쳤고, 마키는 조용히 내 앞 자리에 앉았다.

또 한번,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까. '의사 선생님'? 아니면 '니시키노 씨'? 역시 부르던 대로 불러야하나? 눈을 아래로 내려깔며 탁자를 보던 중 자그마한 케이스와 익숙한 목걸이를 내미는게 눈에 들어왔다.

"받아, 호노카."

"응?"

목걸이는 내가 1년을 기념하며 마키에게 준 선물이었지만, 저 케이스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케이스를 손에 올리고 천천히 열어보았다. 눈꽃처럼 세공된 보석, 그리고 눈꽃 가운대엔 반짝거리는 다이아몬드가 박혀있었다.

"..목걸이는 말 안해도 알 거고, 그 귀걸이는.. 너한테 주려고 했던 선물이었어, 처음엔..그냥 내가 쓰려고 했는데, 볼 떄 마다 네 생각이 나는거야. 그래서.."

"..안 돼 마키, 난.. 나는.. 이런 거 받을 수도 없고, 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인걸."

"받지 않으면 버릴 예정이야. 이젠 의미가 없는 것들이니까."

나는 케이스를 닫고 탁자에 내려 놓았다. 마키는 그걸 쓸쓸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왜 불렀을것같아?"

"글쎄.. 잘 모르겠어."

"..그래, 너를 부른 이유가 그거야.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왜 너를 보자고 한건지. 그리고.. 우리가 왜 헤어졌어야만 했는지."

"......"

그 말을 들으니 마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볼 수 없었다. 나는 탁자를 향해 눈을 내리 깔았다.

"우리가 헤어진지 한 달이 지났어, 그런데 아직까지 헤어진 이유조차 알 수 없단말이야. 그게 날 더 힘들게 만들어."

"..나는.. 전부 얘기했어. 그 자리에서."

얼마 전에 꾼 악몽이 생각났다. 내가 그 악몽 속에서 말하려고 했던 건 - 

"나는, 네가 행복해지길 바랬어. 그래서 헤어진거야."

"..아직도 그 말을 하는거야?"

"나는 네 앞에서 언제나 솔직했어. 정말이야. 마키."

"내가 행복하길 바랬다면 그러질 말았어야지. 정말로 그게 다일리가 없잖아..!!!"

..사실, 이 이상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떄문에 마키가 괴로워하고 있었다면 말 해야겠지.

"남자를 봤어."

"뭐?"

"길을 걷다가, 우연히 너를 본거야. 그래서..그래서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네 옆엔 남자가 있었어. 말끔히 차려입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너랑 팔짱을 끼고, 너와 같이 웃는. 남자가."

"......"

"네가 바람을 폈네.. 하면서 너를 탓하려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 남자 옆에서 너는 행복해보였고, 그 남자가 손목에 찬 시계를 보면서 생각해봤어.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건 무엇이 있을까, 그 남자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건 무엇이 있을까. 나는.. 나는.. 네가 행복해지길 바랬어. 그래서.. 그래서 그런거야."

"....하아."

무언가에 읊조리듯 말을 끝낸 나는 마키를 힐끔 쳐다보았다. 마키는 곱슬머리를 격렬하게 꼬고있었다.

"그 남자는 원장님.. 아니, 파파의 소개로 안 남자야. 맞아, 그 사람.. 좋은 사람이었어, 똑똑하고, 유머감각 있고, 겸손할 줄 알고, 나를 챙겨주는 좋은 사람이었지. 처음엔 둘 다 만나기를 꺼려했는데, 한번 두번 만나다보니 친해지더라, 그 남자랑 나는.. 잘 맞았던 것 같아."

"그래, 그러니까 나는 - "

"그런데 헤어졌어. 이주 전 쯤인가? 그 남자 눈에선 눈물이 나왔고, 파파한텐 욕을 먹었지. 파파한테 혼날 땐 좀 억울하긴 했지만, 그 남자를 보면선 아무 생각 안들었어. 어차피 헤어질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거든. 널 위해서."

"...뭐?"

"너랑 헤어지고 나선 이 남자와 결혼해버릴까..하는 생각도 하긴 했었지,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잘 안되더라. 그 사람한테서 너의 모습을 찾고 있는 내가 너무 쓰레기같았어. 그래서 그냥 헤어져버렸지. 물건이야 뭐로든 대신 할 수 있는데, 사람을 대신 할 건 아무것도 없더라."

"......"

"이렇게 말을 뱉어놓고 보니 너를 만나고 싶었던 이유를 알것같아. 나는.. 마지막으로 푸념을 하고 싶었던거야. 네가 그렇게 떠나버려서,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마키."

뭐라도 말하고 싶었으나 마키의 말이 내 입을 틀어 막았다.

"참 이상하네. 그렇게나 만나고 싶었던 너였는데, 한번만 더 만나면 내 가슴속에 있던 게 풀릴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쌓여만 가는 것 같아."

"......"

그렇게 말하는 마키의 눈 끝엔,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그 물방울이 탁자에 한방울 떨어지는 것을 시작으로, 마키는 울기 시작했다. 한달 전 그날처럼.

"..이게.. 이게 뭐야...나는.. 나한테는 너만 있으면 됐었단 말이야, 누가..누가 언제 내 생각 해 달랬냐고."

질척질척한 울음소리 속에 섞이는 마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에겐 절규로 들렸다.

"나한테 있어서 너는 나의 전부였어.. 그런데.. 너한테 있어서 나는 뭐였어?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얼마나 힘들었는데,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너를 찾아 헤매. 네 손길이 닿은 물건 하나 하나 볼 떄마다 네 생각이 나.. 이게.. 이게 뭐냐고. 너는 나의 전부였고, 그래서 네가 세상에서 제일 좋았는데..이제는..이제는.. 네가 제일 미워."

그 울음의 무게 앞에서,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고, 목소리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하였다.

"..목걸이랑 귀걸이는..두고 갈거야. 버리던지, 끼고 다니던지. 네 마음대로 해. 그래.. 그래도, 그동안 고마웠어, 네가 행복하길 바랄게."

쏟아지는 눈물을 필사적으로 참으면서 마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 잘 가, 네가 행복하길 바랄게."

마키는 그 말을 듣고 잠시 가만히 서 있더니, 아무 말 안하고 자리를 떳다. 테이블에 남은건 지난 세월의 흔적과 내가 망쳐버린 미래, 그리고 네가 없는 자리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한줄기 폭포가 되어 탁자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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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얏!"
"카, 카요찡?! 무, 무슨일이냥?!"

쓰레기 더미를 뒤지던 손을 거두고 손가락을 쳐다 보았다. 차가운 바람을 맞아 빨갛게 불어오른 검지 끝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데려다 손톱에 귤 껍질처럼 보이는 것들이 껴있는 것을 보고 그만 두었다. 

"우으으으..."
"카, 카요찡! 피, 피 나잖아! 이, 이제 그만 돌아가자냐.."
"어떻게 그냥 돌아가! 그 인형은.. 그 인형은.."

소리를 질러놓고 아차, 싶었다. 내 인형을 버린 건 린이 아니라 아빠인데, 린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아니, 오히려 린은 나 떄문에 한 겨울에 불려 나와서 손을 더럽혀 가면서 고생하고 있는데..

"미, 미안해 린, 나.. 나는.."
"미안 할 거 없다냐.. 카요찡이 그 인형을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 알면서 이런 말을 꺼낸 내가 잘못했다냐, 카요찡.."
"..우으.. 우으으, 미안, 미안해... 린."
"...해가 지고있다냐, 카요찡의 손가락도 걱정되고.. 인형은.. 내일 찾자냐. 카요찡."
"....."

알고 있었다, 이제 곧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언제 샀는지도 모를 낡은 인형에 이렇게 집착하는 내가 너무나 한심하다는 걸, 그리고 그 인형은 버린지 반나절이나 더 되서 이미 수거해 갔을 거란 걸. 내가 잠을 잘 때 마다 꼬옥 안고 자던 그 인형은, 이제 쓰레기 매립지에 처박혀 있을거라는 걸.

"흑..흐윽..."
"카, 카요찡...."

쓰레기 장에 묻혀있던 정체 모를 날붙이 하나가 애써 부정하고 있었던 현실을 깨우쳐주었다. 턱과 다리가 후들거렸고, 눈물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안녕, 안녕, 이젠 안녕. 미안해, 정말 미안해. 오늘은 내가 마구 헝클어트렸던 볏과 같던 머리를 빗어 줄 생각이었는데.. 내 말을 들어줄 인형은 이젠 없는데도, 나는 길 한복판에서 그렇게 되뇌였다. 

-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그렇게나 꿈에 그리고 동경하던 '아이돌' 생활을 조그맣게나마 시작 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에 맞춰서 수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 중 제일 크나큰 변화는 교우 관계의 변화일까. 친구라고는 린 밖에 없었던 나에게 또다른 친구가 생기고, 나를 따듯하게 지켜 봐 주는 선배님들이 생겼다. 차가워보이지만 사실 속마음은 누구보다도 따듯한 마키. 모두를 포근하게 껴안아주는 호노카 선배님, 가끔은 무섭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 뼈가 있는 우미 선배님, 그리고 - 

"하나요!"
"네, 네?!"

볏 머리가 인상적인, 지금 내 앞에 있는 코토리 선배님.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 아뇨.. 그, 아, 아무것도."

말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도 따듯하고, 곁에 가면 마카롱 같은 달콤한 냄새가 나고, 윤기가 흐르는 회갈색 머리가 아름다운, 코토리 선배님.

"..생각 해 보니까, 하나요는 처음 만났을 떄 부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곤 했었지."
"에, 제, 제가요?, 그, 그랬었나요.."
"응! 연습할때도 그랬고, 계속 날 쳐다봤었는데.. 하나요도 역시 -"

코토리 선배님은 그 말을 하며 내 손을 덥석 잡더니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에, 에?"
"내 머리 위에 달려있는 이 벼슬같은게 신경쓰이는거야?"
"아뇨, 그, 그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황급히 손을 빼내며 뒤로 돌았다. 왠지 모를 부끄러움이 느껴져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냥.. 날 처음 보는 사람들은 전부 다 이 머리 모양에 대해서 한마디 씩 하니까 - 하나요도 혹시 궁금해 하지 않을까, 했던 거였어. 당황하게 했다면 미안, 하나요."
"그, 그게.. 코토리 선배님의 머리를 볼 떄마다.."
" - 예전에 자기가 아끼던 인형이 생각나서 날 쳐다봤다. 맞지?"
"에?"

인형에 대해선 아무한테도 이야기 한 적 없었는데?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돌렸다. 어디에서 나온걸까 - 볏 머리가 인상적인, 귀여운 새 인형이 코토리 선배님의 손에 들려있었다.

"그게, 사실 처음에 나를 계속 쳐다보니까, 내가 마음에 안드는 걸 까 하고, 린이랑 잠깐 상담해봤거든... 그랬더니 린이 그런 얘길 해주더라. '아직까지 우울해 하고 있다.'라는 말을 듣고 힘을 내서 만들어봤어."
"...코토리.. 선배님..."
"린의 설명을 듣고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어 봤지만.. 린은 그 인형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더라.. 아하하, 어때? 하나요. 그 인형이랑 비슷해?"
"..네.. 네에."

코토리 선배님의 손에 들린 인형을 잡아 꼬옥 안아보았다. 푹신푹신 했다. 예전에 내가 안았던 그 인형만큼이나, 아니, 그 인형 이상으로, 푹신푹신하고, 달콤한 향기가 났다.

"비슷하다니 다행이네 -. 그 인형을 대신 할 순 없겠지만, 내가 만들어준 인형이랑 새로운 추억들을 쌓아갔으면 좋겠어. 앞으로 사이 좋게 지낼 우리들처럼."
"....."

그 말을 하며 나를 향해 눈웃음 짓는 코토리 선배님의 얼굴은, 너무나도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갑자기 가슴이 쿵쾅쿵쾅 뛰며 얼굴이 달아 올라서, 나는 인형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제야 조금 알것같아, 내가 코토리 선배님을 계속해서 봐 왔던건, 내가 가지고 있던 인형이랑 비슷하게 생겨서 그런게 아니었다는걸, 이건 바로 - 

"고마워요, 코토리 선배님. 그리고.. 좋아해요."
"응! 나도 좋아해! 하나요."

좋아한다는 감정, 일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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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_RYEON님이 쓰신 글(http://www.twitlonger.com/show/n_1slsj1t) 이 너무 좋아서 무임승차 한번 해봤습니다. 마키의 시점에서 쓰인 글을 니코의 시점으로 본 글입니다. 역시 원판이 좋으니까 글이 술술 잘써지네요 대문호 류련님 찬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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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왠진 모르겠지만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든다. 너와 나의 거리는 얼마정도일까. 아니, 너와 나 사이의 온도는 어느 정도일까. 내 가슴은 널 생각하면 끓어오르는데, 너도 그럴까. 확인하고 싶지만 섣불리 확인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확인을 안 하자니 너무 신경 쓰여 견딜 수 없는 이런 미적지근한 관계가 이어진지 몇 개월이나 된 걸까? 너는 지금, 단 둘 뿐인 부실에서, 나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마키 쨩.”

마키는 내가 이름을 부르자 화들짝 놀라며 내 쪽을 쳐다보았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뭐야, 니코 쨩” 하며 불퉁하게 대답하는 모습이 상당히 귀여웠다.

“저기, 있잖아.”

‘나, 어떻게 생각해?’ 아니, 이건 너무 뻔 한 말이고.. ‘영화라도 보러 갈래?’ .. 라고 말하면 정말로 영화만 보고 올 것 같은데, 어떻게.. 마키랑 진솔하게 대화 할 수 있을, 그런 자리 없을까? 라며 머리를 굴리던 도중, 머리가 아닌 가슴 속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오늘, 우리 집에 오지 않을래?”
“뭐, 뭐?”

약간 뒤로 물러서는 듯 한 제스처, 그리고 멍청하게 벌린 입. 이건 정말로 당황했구나, 하긴.. 말을 뱉어놓고 나도 순간 엄청 당황했으니까 저런 반응이 당연한 건가. 어이가 없어서 픽, 하고 코웃음이 나왔다. 대뜸 ‘우리 집에 오지 않을래?’ 라니, 거절할게 뻔하잖아.

“안될, 까나? 하긴, 마키 쨩은 바쁜 사람이니까.”
“따, 딱히 바쁘지 않은데.. 내일 주말이고, 오늘은 한가하니까..”
“..와주는 거야? 고마워.”

생각 없이 던진 말이 최고의 기회를 가져왔다. 오늘에야 말로 확인 해 보는 거야. 너와 나의 거리를. 너와 나의 온도를.
- 너와 나의 거리는 책상 하나 정도의 거리, 너와 나의 온도는 차갑지도 않고 그렇다고 뜨겁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온도.. 약 30‘c

***

“미안해, 저번에도 와봐서 알겠지만 집이 좁아서.”
“따, 딱히 신경 쓰거나 하지 않으니까.”

아침에 싸구려 방향제라도 뿌려놔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키는 이런 냄새가 나는 집을 어떻게 생각할까, 머리가 아프거나 하진 않을까? 부잣집 아가씨는 방향제도 좋은 것만 골라서 쓸탠데..

“어라? 그러고 보니, 동생들은?”

“아, 음. 집안에 조금, 일이 있어서.”

코코아와 코코로는 수련회 갔어. 그런데 코타로는 열이 심해서 잠깐 병원에 입원을 조금.. 이라고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으나 걱정 해 봤자 코타로의 상태가 회복되는 것도 아니고, 괜히 마키한테 무거운 짐만 던져줄 것 같아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어쨌든, 와줘서 고마워 감사하는 마음으로 특별히 니코니가 음식을 만들어 줄 테니까. 잠깐 저기 소파에라도 앉아 기다리라구.”
“으.응.”

나는 그렇게 말하며 신발을 대충 벗고 부엌으로 향했다. 메뉴는.. 그래, 카레로 할까. 오래 써서 무딘 식칼을 꺼내 감자를 썰고, 당근을 썰고, 양파를 썰고, 코타로를 위해 준비했던 햄과 사과도 꺼내 예쁘게 썰었고, 쌀을 씻어서 밥솥 안에 집어 넣었다. 마키 같은 부잣집 아가씨한테 이런 음식이 입에 맞을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노력해봐야지.

큼직한 냄비를 선반에서 꺼내 기름을 두르고 방금 전에 썰어 넣었던 야채들과 햄을 (사과를 제외하면) 모두 쏟아 넣었다. [치이익- ].. 야채가 익어가는 소리가 식욕을 돋구었다.

‘그런데.. 방금 전에는 너무 힘없이 말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에 날 보던 마키의 눈빛은 나를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둘러댄다는 게 오히려 마키의 걱정을 산 것 아닐까. 이럴 땐 ‘별 일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라고 말하며 웃어줘야 하는 걸까? 그런데 오히려 그렇게 행동하는 쪽이 나를 더더욱 비극의 여주인공처럼 보이게 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야채는 맛있는 소리를 내며 익어가고 있었다. 그래, 이정도 볶았으면 됐지, 나는 물을 붓고 카레가루를 뿌리고, 썰어두었던 사과를 냄비 안에 넣었다.

슬슬 배고픔 때문에 속이 쓰려올 때 즈음, 카레가 보글보글 끓었고, 밥솥에서도 다 됐다는 의미의 김이 세어나오고 있었다.

“마키~ 다 됐어!”

내가 부르자 마키는 기다렸다는 듯 쇼파에서 일어나 내가 상 차리는 것을 도와줬다. 하긴, 상 차리는 걸 도와줬다고 해 봤자 접시에다 밥 푸고 하얀 쌀밥 위에 카레를 얹는 게 전부지만.

“어때?”
“..... 맛있어.”

마키의 말엔 진심이 서려있었다. 내가 만든 카레를 진심으로 먹는 마키를 보니 마음이 따듯해졌다.

- 너와 나의 거리는 우리가 앉은 작은 식탁 정도의 거리, 너와 나의 온도는 아직은 미적지근한 30‘c

***

“저기, 밥은 니코가 해 줬으니까. 설거지는 내가 할게.”
“흐응? 부잣집 아가씨가 설거지를 할 수 있겠어? 그릇 다 깨먹는 거 아닙니코?”
“무, 무시하지 마. 설거지정도는 누구나 다 할 수 있잖아. 니코는 쇼파에 앉아서 Tv나 보고 있으라구.”

도와주려고 했지만 마키의 의지는 너무나도 확고했다. 결국 난 부엌에서 쫓겨나 멍하니 Tv나 보게 되었다.
달그락, 달그락.. 부엌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너무나도 안정적이었다. 아무래도 난 괜한 걱정을 한 것 같다. 어느새 수돗물 흐르는 소리가 멈추고 그 소리 대신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렸다. 커피라도 내오려는 걸까.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다니, 기특하네~ 라고 칭찬하려 부엌에 들어간 순간, 마키와 눈이 마주쳤다.

.. 맞아, 난 오늘 이런 시시한 농담이나 하려고 마키를 부른 게 아니잖아. 오늘이야 말로, 마키의 마음은 어떤지 알아보려 온 거라구.

“저기.”
“음? 무슨 일이야?”

말을 하려 했지만 순수하게 빛나는 자수정 같은 눈동자가 내 입을 틀어막았다. 수많은 말이 목구멍에서 올라왔지만 그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말이 안 나올땐, 행동으로 보여주라고 누가 그랬었나. 나는 비틀비틀 걸어가 마키의 품에 안겼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마키는 아무 말 없이 나를 토닥일 뿐이었다. 마키의 손은 너무나도 상냥했지만, 그저 상냥할 뿐이었다.

- 너와 나의 거리는 내가 입은 티셔츠 한 장 만큼의 거리, 너와 나의 온도는 너의 상냥하지만 차가운 손길에 식어 29‘c

***

“마키 쨩, 다 씼었어?”
“응.”

‘집에서 할 일도 없으니, 오늘 하루는 여기에서 보낼게, 그래도 괜찮지? 어차피 니코 혼자니까.’ 라는 말에 나는 방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마키의 마음은 어느 정도 확인 했지만, 아직 아쉬움이 남아서일까.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바보 같은 사람이었다.

“이리 와 봐.”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대충 닦아내는 마키를 보니, 마키의 머릿결이 걱정돼 마키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마키는 군 말 없이 내 앞에 앉았고, 나는 헤어 드라이기를 켜고 코코로의 머릿결을 만지듯, 상냥하게 마키의 머리를 어루 만졌다.

이렇게 머리 말리는 게 지루해서일까? 마키의 손은 어느새 자신의 머리카락을 베베 꼬고있었다.

“마키 쨩은 손가락으로 머리 꼬는 거 정말 좋아한다니까. 머릿결 상한다구.”

- 너와 나의 거리는 내 손에 들린 헤어 드라이기 정도의 거리, 너와 나의 온도는 아직까지, 변하지 않은채 그대로.

***

“둘 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내일을 위해선 슬슬 자야겠지.”

자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일은 주말 연습이 있는 날이니까. 1분이라도 늦는다면 우미의 불호령이 떨어질테니.. 정말로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키 쨩은 침대에서 자, 나는 거실에서 잘게.”

나는 배게를 집어들고 거실로 향했다, 그런데, 나가려는 나를 마키가 붙잡았다.

“쇼파에서 잘 생각이야? 그렇게 자면 제대로 잘 수 없다구.”
“음, 베개가 있으니까. 그래도.”
“안 돼. 거기서 자면 나도 거기서 잘 거야. 아니면.. 니코 쨩은 나랑 같이 자기 싫은거야?”

평소의 마키 답지 않은 발언 때문에 가슴이 또 한번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 알겠어.”

- 너와 나의 거리는 우리가 덮은 이불 한 장 만큼의 거리, 너와 나의 온도는 내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라 34‘c

***
“그럼, 이제 불 끌게.”
“응.”

나는 스위치를 눌렀다. 순식간에 방이 어두워졌다.

“...언제나 고마워, 마키 쨩”

시간이 늦어져서 일까, 아니면 방이 컴컴해져서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너를 이렇게 보내기 싫어서일까. 가슴 속에 있는 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 말을, 이 감정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나 있지, 마키 쨩이랑 함께 할 수 있어서 무지 행복해.”

이렇게 말을 던지는 나도 낯이 간지러운데, 이런 말을 듣는 마키의 기분은 어떨까.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려 마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보이는 건 자수정같이 빛나는 눈 밖에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마키의 기분을 대충 파악 할 수 있었다. 싫지는 않은거구나. 분명.

“그래서 언제나 고마워.”
"…나, 나도. 나도 너와, 함께 있을 수 있어서, 그 뭐야……. 행복해.
"……고마워, 마키 쨩.“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몸을 옆으로 돌려 마키를 꼬옥 껴안았다.

"우우웅, 마키 쨩, 좋아해."
"자, 자자자잠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드, 들러붙지 마!“

사실은 ‘좋아해’가 아니라 ‘사랑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랑해’라는 말은 결국 나오지 않았다. ‘좋아해, 친구니까’ 라는 말은 허용이 되지만 ‘사랑해, 친구니까.’ 라는 말은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마 지금 내가 여기서 ‘사랑해’라는 말을 하면 서로가 상처받겠지. 사실은 이런 상처를 입을 각오쯤은 해야 되는 건데, 나는 겁쟁이라 그러지 못했어. 미안해, 마키.

역시.. ‘좋아해’. 나, 야자와 니코는, 너, 니시키노 마키를 좋아해.

"……잘 자, 니코 쨩."
"마키 쨩도, 잘 자.“

- 너와 나의 거리는 지금 꼭 맞잡고 있는 조그마한 손바닥 정도의 거리, 너와 나의 온도는.. 남이보기엔 미적지근 하지만 우리에게는 용암과도 같은 온도. 36.5’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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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좋네..”

평소라면 학교에 있을 시간이었으나, 어제 그 ‘학교’를 졸업했으니까. 오늘부터 대학에 입학 할 때 까지는 시간이 너무나도 텅텅 비었다. 그 시간의 공백이 너무나도 커서, 나는 그 공백을 어떻게든 메꾸기 위해 아무런 목적지도 없이, 발걸음 가는대로 정처 없이 아키하바라를 방황했다. 
이제 봄인데도 바람이 너무 강하게 불어 옆구리가 시렸다. 아니, 이건 바람이 너무 강하게 부는 탓이 아닐 것이다. 그동안 내 옆에 있던 사람이 이젠 없으니까, 이제야 그 빈자리를 느끼는 거겠지.

“.....”

벚꽃 잎을 휘감은 산들바람이 너무도 아름다워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익숙한 거리였다. 아니, 익숙해 질 수 밖에 없는 거리였다. 그녀와 함께 수십 번을 걸었던 길이고, 어제 그녀와 작별했던 길이었으니까.

- “그럼, 이제 한동안 못 보는 건가?”
- “그릏지 않겠나? 이제 내는 내대로, 에리치는 에리치대로 바쁠탠디.”
- “..그런가.”

어제도 이렇게 벚꽃이 휘날리고 있었지.

“정말, 바보야. 바보 아야세.”

그녀와 나의 관계는 단순한 ‘친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제 이 관계가 어떻게 될 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연락은 점점 끊어지고, 관계도 점점 희미해져서, 몇 년이 지나고 나면 ‘아, 그런 애도 있었지. 정말 친했었는데.’ 같이 희미한, 이어진 듯 이어진 게 아닌 그런 관계가 되겠지.

“하아...”

그녀와는 고등학생 생활 내내 붙어있었다. 말하려고만 했다면 언제든지 말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말하지 못했다. 그녀와의 관계가 그만 깨져버릴까 불안해서, 그녀가 나를 보는 눈이 달라 질 것 같아서.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 산들바람에 벚꽃이 휘날리고 있었다. 꽃으로 된 비가 내렸다. 아니, 어제 만났던 네가 내렸다.

아니.

오늘은 만날 수 없는, 네가 내렸다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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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네 - ”

실로 오랜만이었다. 아키하바라에 찾아온 건 1년만인가. 매캐한 매연냄새도, 항상 흐릿흐릿한 하늘도,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건물과 지금 당장이라도 태풍에 날아 갈 듯 한 허름한 건물이 공존하는 이 거리가, 너무나도 오랜만이라 웃음이 절로 세어나왔다. 정말로 포근했다. 

“포근하다..고.”

이렇게 콘크리트 투성이인 건물 숲에서, 나한테 하나도 관심 없는 인파 속에서, 숨이 턱턱 막히는 매연이 가득 섞인 바람 속에서. 포근함을 느끼다니, 고작 1년 동안 자취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약해진 걸까. 대학생활에 적응 못해서 도망치기나 하고.

“엄마한테 말도 안하고 내려온 건데.. 이제 어쩐다..”

지금 당장 집에 돌아가자니 두려워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 엄마라면 “그래.. 너라면 무슨 이유가 있으니 이렇게 내려온 거겠지.” 하며 이해 해 주실 테지만.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걸.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초조함이 가득 담긴 발걸음을 옮기며 발이 가는 대로 나아갔다.

내 발은 나를 익숙한 곳으로 데려왔다. 벚꽃이 만개한 학교,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마키의 저택.

그리고 - 

수많은 계단을 오르고 나서야 겨우겨우 들를 수 있는, 그녀가 있었던 신사.

“반갑습니데이 - !”

그래, 이런 괴상한 사투리로 손님을 맞아주는 그녀가 있던..

“..어?”
“어?”
“..에리치?”
“노..조미?”

추억 속에 잠겨 발걸음을 옮겼건만, 그 추억 속에만 있어야 할 그녀가 지금 내 눈 앞에 멀쩡히 서 있었다. 평소에 입던 정갈한 무녀 복을 입고, 손때 묻은 빗자루로 느긋하게 신사 정원을 쓸었던 그녀, 토죠 노조미가.

“실제로 얼굴 보는 건 정말 오래간만이구마!”

오랜만에 본 그녀는 달라진 곳이 없었다. 윤기가 흐르는 보라색 머리, 에메랄드 같이 반짝이는 눈동자. 그리고. 나를 숨 막히게 하는 달달함까지도.

“응,그,그러게. 정말 오랜만이네.”
“여긴 무슨 일? 힘들지 않았나? 통화 할 때마다 엄청 힘든 것 같았는데.”
“힘들어 보였어?”
“응! 호노카한테 애먹었을 때 보다 몇 십배정도는 더 힘든 것 같았데이. 그래서 걱정 많이 했는데. 무사 한 것 같아 다행이구마.”

힘든 티 안내려고 노력했는데.. 역시, 너한텐 통하지 않는구나. 나는 애써 웃음 지으며 “에이, 아니야. 힘들긴 무슨, 그러는 노조미야 말로 여긴 무슨일?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라며 화재를 돌렸다.

“아 그게.. 내 말이다, 대학, 휴학했데이.”
“어? 정말? 왜..?”
“약간.. 집중이 안 돼서.. 아, 여튼. 오랜만에 만났으니 차라도 한잔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나?”
“..흐음, 글쎄.”

너와 만나는걸 몇 번이나 머릿속에서 그렸지만,. 이런 상황은 생각 해 보지도 않았는데.

“예전에 다녔던 카페에서 만나자. 지금 신사 일 도와주고있는거지? 언제끝나?”
“아, 금방 끝날탠디.. 잠깐만 기달리봐라. 한 30분정도면 되니께!”

나는 지금, 잘 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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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두 냄새와 함께 맡는 너의 달달한 향기, 실로 오랜만에 맡는 향기였다. 다만 그동안 떨어져 지냈었기 때문일까, 노조미 특유의 편안하고도 포근한 분위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노조미도 우리 사이에 흐르는 이 기류에 먹혀버린 건지, 자신 앞에 놓인 커피만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안 돼, 내가 불러서 온 거잖아. 이런 분위기가 계속 되면 안된다구..! 생각 해 봐 아야세, 지금 여기에 딱 걸맞은 주제를 -

“1년..만인가?”
“졸업 하고서는 둘이 본적도 없다 아이가. 전화 통화만 몇 번 했었제.”
“그렇..지?”

.. 어떻게든 길게 대화를 이끌어 갈 소재를 찾으려고 했지만 입 밖으로 튀어 나온 말은 내가 생각지도 않은 말이었다. 여기서 더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커피 잔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다행스럽게도 노조미가 말을 다시 시작하자마자 멎기는 했지만.

“그런데, 에리치. 학기 시작하지 않았나?”
“어? 으, 응. 시작했지.”
“그런데 왜 여기있는기가? 한창 수업중일 시간인디”
“아, 그게.. 휴학했거든.”
“정말이가? 와 휴학했나?”
“너랑 비슷한 이유일까.. 수업을 못 따라가겠다고 해야 하나? 여하튼 집중이 안 되더라. 그래서 아무한테도 말 안하고 도망 왔어, 집에도 말 안하고 온 건데 이제 어째야 될지 모르겠다. 아하하하..”
“오~ 우등생 에리치가 웬일이가? 드디어 사춘기가 온기가? 낄낄낄.”
“그.. 그런 거 아니야.”

남의 마음도 모르고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웃다니.. 한마디 쏘아 붙이고 싶었으나 너의 웃음을 보자 불만은 눈 녹듯 사라졌다. 그래, 나는 지난 1년 동안 이 웃음을 그렸었다.

“흐음.. 그래, 집에도 말 안하고 왔다 그거제?”
“이제 슬슬 말하러 가야지.. 엄마가 날 혼낼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그럼, 오늘 하루만 미루는 건 어떻나?”
“응? 뭐라고?”
“집에다가 오늘 왔다고 말하는 거, 오늘 하루만 미루는 건 어떻냐는기다. 내는 누구랑 달리 부모님한테 말하고 올라와서 이 근처에 자취방도 구해놨거든. 좋은 생각 아니가?”
“좋은 생각..인가?”
“내일의 일은 내일의 에리치가 알아서 할기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지금 이렇게 헤어지긴 아쉽지 않나?”
“그렇..긴 하지.”

대화가 대충 끝내고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을 때,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나.. 지금 노조미내 집에 초대받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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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누추하지만, 들어오레이.”
“오늘 하루만 신세질게, 노조미.”

노조미의 집은 위치만 바뀌었다 뿐이지 예전이랑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예전 그대로였다. 마치 이곳만 1년 전 그대로 시간이 멈춘 듯..

“집 위치만 바뀌었지 1년 전 그대로네?”
“아.. 그게, 어찌어찌 꾸미다 보니 그렇게 되드마. 나도 처음엔 바꿀까 했다가 다시 꾸미기도 귀찮고.. 그리고, 추억하기도 이게 더 좋으니까 내비뒀다.”
“추억.. 그래, 하긴, 재밌었지. 1년간.”
“아 뭐, 1년은 특히 재밌었지만, 내한텐.. 고등학교에서 다닌 3년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추억이었데이.”
“아, 그, 그렇지. 나도 마찬가지야.”
“일단 앉아 있으레이~ 저녁 차려줄테니께.”
“나도 도와줄게.”
“그냥 앉아 있으레니께.. 내가 초대한 건데 손님 대접은 해줘야하지 않겠나?”
“그렇게 까지 말한다면.. 알겠어.”

머쓱함에 뒷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 앉았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살펴보았지만 정말로 이 집은 1년 전 그대로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책장 안에 ‘오토노키자카 고등학교 졸업앨범‘ 이 꽂혀있다는 점일까. 너도 지난 1년간 나를 그리워하며 살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갑자기 두근거렸다. 부엌에서 요리를 하는 노조미의 뒷모습을 보니 가슴이 두근거리는 소리는 점점 더 커져갔다. 

‘진정.. 진정하자, 아야세. 그리워하는 거랑 연심이랑은 다른 거야.’ 라고 수없이 속으로 되뇌어도 가슴은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주방에서 나는 식칼 소리에 맞춰 심장소리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점점 두근거리고, 점점 가슴 속이 근질거리고, 점점 진정이 안되서 – 이 자리에서 터져버릴 것 같았다. 이럴 땐 어떤 방식으로 진정시키는 거지?

“에리치.”
“ㄴ,네,네,네?”
“뭐꼬? 그 반응은, 밥 다 됐다고 부른건디.. 졸았나?”
“아, 아니야, 그..그러니까, 자, 잠깐 딴 생각을 하느라.”

방금 전 내 모습, 어떻게 비췄을까. 부끄러워, 노조미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흐응...”

노조미는 나를 미심쩍게 쳐다보며 쟁반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하얀 쌀밥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된장찌개, 그리고 마른 멸치를 비롯한 각종 찬거리들, 정성이 느껴지는 식탁이었다.

“지난 3년간 이런 반응을 하는 에리치를 본적이 읎었는디.”
“..응?”
“에리치, 혹시 ‘이거’ 생긴 거 아이가?”

장난스럽게 말을 건네며 새끼손가락을 노조미를 보니, 안 그래도 뜨거운 머리에 더더욱 열이 올라왔다. 부끄러움에 아랫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이 뻘겋게 익은게 보기 좋구마, 생겼제? 생긴거제?”
“그, 그런 거 아니야..”
“비밀로 할테니께 좀만 말해주믄 안되나?”
“생긴..건 아니지만, 그런 사이가 됐으면 좋겠다는 사람이 있어.”
“오, 어떤 사람인디?”

머리는 입을 멈추라고 하지만 가슴이 입을 움직였다. 지금 이 순간 말하지 않는다면 영영 너를 놓쳐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고개를 들어 노조미를 마주 보고, 계속해서 입을 움직였다.

“누구보다도 속이 깊고, 성격도 착해 빠져선 남을 배려하지만 자신이 상처 입는 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야, 그래서 한 없이 걱정되는 사람이고.”
“흐응... 그리고?
“그리고.. 남한테 일어나는 일은 귀신같이 눈치를 채지만 정작 자기 일에는 너무나도 눈치가 없는 사람이야.”
“답답허네~ 에리치, 그런 취향이었나?”
“마지막으로, 이상한 사투리를 쓰지만 그 말투마저 너무나 사랑스러운, 그런 사람이야.”
“...에리치?”
“내가 생각하던 사람은.. 너였어, 노조미.”
“......”

그 무엇보다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으나 노조미의 굳게 다문 입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미안하구마.”
“그래...”

그래, 이게.. 정상인거겠지. 그래도, 1년 전하곤 다르게, 오늘은 내 마음을 전했으니까, 그걸로 됐어, 그걸로.. 된거야.

“사실.. 에리치의 마음은, 예전부터.. 어느정도 알고 있었데이.”
“그래? 너무 티냈나..”
“..그리고, 내 마음도.. 에리치랑 비슷했지만, 만약에 내가 잘못 생각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앞서서, 차마 입이 안떨어지드마.”
“..응?”
“에리치가 했던 말은, 내가 먼저 했어야 맞는 거였다..고, 내는 그렇게 생각한데이. 미안하구마, 에리치. 내가 겁쟁이라, 에리치한테 이런 역까지 떠맡겼구마.”
“노조미...”
“오늘부터, 잘 부탁한데이.”
“......”

‘그래’ 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그 말은 갑자기 왈칵 쏟아져 나오는 눈물에 삼켜져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에, 에리치. 내가 뭐 잘못 말했나? 그, 그동안 서운했던기가?”
“아, 아니야.. 그런게 아니고.. 너, 너무 기뻐서..”

고개를 옆으로 돌려 눈물을 훔쳐내었다. 창 밖에서 벚꽃잎 하나가 노을빛에 젖어 천천히, 그리고 아주 고요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벚꽃이 내렸다, 아니, 어제는 못 만났던 네가 내렸다.

아니.

오늘을 함께할 네가 내렸다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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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벌써 시간이.. 그럼, 이제 슬슬 일어나볼까요?”

“너랑 있으면 시간이 정말 빨리 가네. 그래, 이제 슬슬 가자.”

에리와 나는 먹은 자리를 대충 정리한 뒤 카페에서 나왔다. 여느 때와 똑같은 데이트 코스였다. 누군가의 집 앞에서 만나서, 영화를 한편 보고, 밥을 한 끼 먹은 뒤 카페에 가서 시시한 잡담을 나눈 뒤에 헤어지는. 그런 데이트 코스.
하지만 오늘은 여느 때와는 달랐다. 우리가 카페를 나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굵은 비가 후두둑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도화지에 회색 물감을 칠한 것 마냥 칙칙한 하늘을 보며 “이제 곧 비가 오려나요?” 라는 말을 하긴 했는데 그 예감이 하필이면 지금 적중할 줄이야. 나는 한숨을 쉬었다.

“어머, 낭패네.”

“그러게요.”

아키하바라 시내를 웃고 떠들며 활보하는 학생들도, 업무에 짓눌려 찌푸린 표정으로 자신이 있을 톱니바퀴 속으로 굴러가는 회사원도, 시내 한복판에 떡하니 누워 한 푼의 동정을 구걸하던 거지들도 갑작스럽게 통곡하는 하늘에 당황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아, 맞다. 오늘 일기예보에서 소나기가 내릴 수도 있다고 그랬어. 그래서 우산 챙길까 말 까 하다가 그냥 말았는데.”

“아, 그, 그런가요..”

[소나기가 내릴 수 있으니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라는 일기예보는 나도 얼핏 들었던 것 같긴 했다. ‘에이, 설마.’ 하는 마음으로 가져오지 않았는데. 이렇게 낭패를 볼 줄이야..

“이 주변에.. 니코가 살지 않았나요? 전화를 한 번 해봐야겠어요.”

“......”

핸드백에서 전화기를 꺼내 니코의 전화번호를 누르는 순간, 에리가 내 손목을 잡았다. 약간 저릿저릿 할 정도로 꽉 쥐어서, 나는 당황한 나머지 손목을 비틀어 빼냈다. 그 서슬에 내 손목을 꽉 쥐려했던 에리는 약간 비틀거리다 겨우겨우 중심을 잡았다.

“에, 에리?”

“...그래, 전화 하건 뭘 하건, 마음대로 해.”

방금 전과는 다르게 날카롭게 날이 선 시선이 내 가슴을 향해 꽂혔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나는 잠시 생각해 봤지만 별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가 무슨 실수를 했더라?

“아, 저, 저기. 미안해요.”

“뭐가?”

“순간 너무 놀라서, 그래서 손을 뿌리 쳤어요.”

“...그게 다야?”

“그리고, 에리의 마음을 눈치 채지 못한 것도.”

“그래, 알면 됐어.”

그래도, 그냥 그렇게 손목을 왈칵 잡는 것 보다는 [조금이라도 너랑 같이 있고 싶어] 라고 말했으면 조금 더 좋았을탠데요, 라는 말은 아껴두기로 했다.

“어. 우미.”

“네? 왜 그러시나요?”

“비, 그쳤다.”

그 말을 듣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더니, 후두둑 떨어지던 비는 어느새 그치고, 매캐한 매연이 뒤덮여있던 하늘의 중심엔 밝은 태양이 나와 에리를 비추고 있었다.

“정말, 변덕스럽네요. 에리처럼.”

“날 이렇게 애태우게 만드는, 네가 나쁜거야.”

“그런가요..”

그렇게 별 영양가 없는 잡담을 하며 우리 둘은 카페를 나섰다. 약간의 불협화음이 있었던 것 빼고는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이었다.

이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이, 여느 때처럼 이어졌으면..

Posted by 비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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