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시가키 쨩~"

쿄코는 굳게 닫힌 과학실 문을 덜컥 열고 들어갔습니다. 점심을 너무 많이 먹은 탓인지 속이 매슥거렸기 때문입니다. 보통 아이라면 보건실을 찾아갔겠지만 쿄코는 보건실에 있는 선생님보단 니시가키 선생님을 좀 더 좋아하기도 했고, 상비약은 니시가키 선생님이 있는 과학실에도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에 과학실을 방문 한 것입니다..만 과학실에서 항상 음흉한 웃음을 내비치며 무언가를 뚝딱뚝딱 만들어내던 니시가키 선생님은 과학실에 없었습니다.

"니시가키 쨩~ 없어요?"

쿄코는 텅 빈 과학실을 둘러보며 니시가키 선생님을 계속해서 불렀지만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만 새어 들어올 뿐 니시가키 선생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혹시 학생회에 있는 건 아닐까? 쿄코는 학생회로 발걸음을 돌리려다 과학실 교탁에 덩그라니 놓여 있는 커다란 나침판 같은것을 보았습니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테지만 - 오늘은 왠지 호기심이 평소보다 더 강하게 발동하는 날이여서 쿄코는 교탁에 있는 그 커다란 나침판을 집었습니다.

"우와.. 드래O 레이더인가 이거?"

쿄코의 손을 가득 채운 커다란 나침판(비슷한 것)은 쿄코가 예전에 봤던 만화에서 레이더 역할을 하던 무언가랑 매우 흡사하게 생겼습니다. "뭐에 쓰는거지? 이거." 나침판 테두리에 달린 버튼을 꾹 꾹 눌러봐도 나침판은 묵묵무답이었습니다. 쿄코는 흥미를 잃고 교탁 위에 나침판을 놔두려고 했으나 - 교탁 위에 놓인 종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종이엔 팬으로 휘갈긴 듯 한 '게이 레이더[가칭] 사용설명서' 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게이 레이더?"

쿄코는 미심쩍어 하며 설명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설명서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적혀있었 습니다.



'[ 게이 레이더[가칭] 사용설명서 ]'

- 작동 순서 -

1.왼쪽 상단에 있는 [전원]버튼을 3초 이상 눌러서 전원을 킴
2.전원을 키면 근방 20m이내의 동성애자를 찾아 낼 수 있음.
3.동성애자는 검은 ●로 표시되며 동성애자 력(力)이 더 커질수록 ●표시가 더 커짐
4.동성애자가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고 있을땐 ●표시가 ♥ 표시로 바뀐다
5.이제 마츠모토한테 시험해봐야지! 그럼 이만!

".. '그럼 이만' 이라니 누구한테 말하는거야..?"

참으로 어이가 없는, 니시가키 선생님다운 발명품이었고, 니시가키 선생님다운 사용 설명서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엉뚱함은 쿄코랑 상당히 잘 맞는데가 있었기 때문에, 쿄코는 나침판.. 아니, 게이 레이더를 들고 과학실을 나섰습니다.

"자, 그럼 레이더.. 스위치 ON!"

1,2,3. 정확히 3초간 전원 버튼을 꾹 누르고 있더니 아무 반응 없던 화면에 무언가가 하나 둘 씩 뜨기 시작했습니다. 정 중앙에 ● 표시가 하나 덩그라니, 아마 이것은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겠지요. 뭐 새삼스럽지도 않았습니다. '자, 그럼 이걸로 뭘 찾아볼까?' 쿄코는 과학실 앞 복도에서 고민하다 본래의 의미를 잊은지 오래인 다도부 부실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

다도부 부실엔 쿄코의 오랜 친구, 후나미 유이밖에 없었습니다. 쿄코로서는 매우 좋은 기회였지요.

"약은 받아왔어?"
"못 받아왔어.. 니시가기 쨩, 과학실에 없더라."
"그럼 보건실에 가보지 왜?"
"보건실은 약냄새때문에 싫어 -"
"애초에 과학실에서도 그런 냄새는 나잖아.. 그런데, 손에 쥐고있는 그건 뭐야? 왠 장난감?"
"아! 이거! 과학실에서 약 대신에 이걸 받아왔.."

쿄코는 유이에게 자신이 주운 '게이 레이더[가칭]'을 자랑하려고 했다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표시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정 중앙에 하나, 그리고.. 중앙 바로 위에 하나. 

"....드어..어..음.."
"음? 그게 뭔데? 왜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쿄코는 '게이 레이더[가칭]'을 주머니에 집어 넣었습니다. 자신이 유이에게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둘이 같이 오락부를 만들 때 부터 알아 차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이가 자신에게 마음을 가지고 있을 줄은? 평소에 '나 좋아해?' 같은 말을 뜬금없이 주고받는 사이이긴 했지만 이런 사이일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아니, 이런 식으로 나마 서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한 편으론 마음이 놓이지만 한 편으론 한낱 기계따위에게 치부를 들킨 느낌이랄까요. 쿄코는 굉장히 복잡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대체 뭘 받아온거야? 줘 봐."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러니까..그러니까..그, 그거야! 그냥 평범한 드ㅇ곤 레이더야!"
"드래ㅇ볼같은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줘 보라니까!"
"시.. 싫어!"

쿄코는 부실을 박차고 나가려고 했으나 길쭉한 유이의 팔에 그만 팔을 잡히고 말았습니다. 유이의 팔은 쿄코의 팔을 휘감으며 내려가 '게이 레이더[가칭]'을 넣은 주머니 속으로 향했습니다. "안 돼 유이! 보면 안되엣..!!" 쿄코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가녀린 쿄코에게 유이를 뿌리치는 건 무리였습니다. 아아, 불쌍한 쿄코! 결국 주머니 속에 들어가있던 '게이 레이더[가칭]'은 다시 주머니 밖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뭐야? 이 다마고치 같은 인터페이스는.. 이렇게 큰 화면에 ♥표시만 두개. 뭐하는 기계야 이건?"
"그러니까.. 니시가키 쨩이 만든..건데."
"건데?"

꿀꺽, 쿄코는 침을 삼켰습니다. 자신과 몇 년이나 함깨 해 온 유이를 속이는건 불가능하겠지요. 거짓말을 하느니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게 나을 것입니다. 쿄코는 눈을 꾹 감고 입을 열었습니다.

".. 그.. 니시가키 쨩은 이걸 '게이 레이더[가칭]' 이라고 부르나봐."
"게이 레이.. 어, 뭐, 잠깐, 뭐라고?"
"동성애자를 찾아서 ● 표시하는 장치..인데.. 사랑하는 사람을 눈 앞에 두고 있으면 ● 표시가 ♥로 변한다고.."
"......"

사실상 고백이나 다름 없는 말이었습니다. 하얗던 쿄코의 얼굴이 귀까지 빨개졌습니다. 부끄러워서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있을 때 - 

"..그랬구나, 쿄코."
"엣.."

유이는 자신의 왼팔을 쿄코의 허리에 감아 쿄코를 꼬옥 끌어 안았습니다. 뭉클한 기분이 드는건 유이의 가슴이 포근하기 때문은 아니었겠죠, 쿄코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습니다. 언제나와 같이 따듯하게 웃는 유이가 보였죠.

"너도.. 날 쭉 좋아했던거구나. 그래, 쿄코, 사실 나도 너를.."
"유이.."

지긋이 교차하는 서로의 시선, 먼저 얼굴을 움직인건 유이 쪽이었습니다. 쿄코와 유이의 입술이 점점 가까이 -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딴 그림연극 인정 못한다니까요!!!"

하아, 그래. 이 쯤에서 태클이 들어 올 줄 알았어. 아아, 그림 연극에 파들파들 떠는 치나츠 쨩 귀여워~♥

"유이 선배도 조금 뭐라고 하세요! 맨날 오냐오냐 봐주니까 쿄쿄 선배가 이런 이상한 그림을 그리는 거라구요!!!"
"아아.. 그러니까.. 나는 평소에도 이런 바보같은 일을 많이 겪다보니 이정도는 그냥 일상이라고 해야하나.. 이런거로 일일히 걸고 넘어지면 피곤 한 것도 있고.."
"크으으윽..!"
"와 - 이, 아카리 쿄코의 그림연극 너무 좋아!"
"후훗, 이런 성원에 힘입어 이 '게이 레이더[가칭]' 그림 연극 2탄도 곧 그릴테니 기대하시라!"
"뭐? 쿄코, 이거 2탄도 그리는거야?"
"쿄코 선배!! 그런거 그리지 말라니까요!!"
"아하하하~ 한달정도 걸릴테니까 기다려줘☆"

유이와 연인이 된 후의 이야기를 그리려면 한 달 정도는 추억이 쌓여야 할 것 같으니까.

Posted by 비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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