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랬더니 아야노가 아무 말 안하고 전화를 끊던데, 대체 뭐였던 걸까?”
“으음.. 글쎄, 급한 일이라도 있었던 거 아니야?”
툭, 툭. 내가 손가락으로 컨트롤러의 ‘O’버튼을 누를 때 마다 내 동료들이 하나 둘씩 쓰러져갔지만 게임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쿄코가 말을 걸 때 마다 몸이 붕 뜨고, 정신이 멍해지는 게 흡사 열병에 걸린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 잠깐만. 유이, 거기서 그렇게 하면 - ”
“응?”
[- 으악! 이건 정말로 아프다. 당신은 죽었다……. 다음장으로 ->]. 게임 오버를 알려주는 대화 창을 보고 한숨이 나왔다. 아아, 세이브 언제부터 안 했더라? 거의 한 시간정도 플레이한게 날아 간 것 같은데. [- 이 파일로 로드하시겠습니까?] 라는 대화창에서 나는 Yes를 택하지도, No를 택하지도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오늘 컨디션 안 좋네? 어디 아파?”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집중이 안 되네.”
“좋아 - ! 이럴 땐 나나모리 중학교의 No.1 게이머, 토시노 쿄코한테 맡겨달라구!”
“No.1이고 자시고 이 게임 하는 사람 우리 중학교에서 너랑 나밖에 없잖아?”
“아니야 - ! 찾아보면 있을거라구!!” 라며 입이 삐죽 튀어나온 쿄코를 달래기 위해 나는 어린아이한테 과자를 건네듯 컨트롤러를 건넸다. 졸린 탓에 반 쯤 죽어있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컨트롤러를 받아 든 쿄코는 지렁이처럼 꾸물꾸물 기더니 내 옆자리에 오고 나서야 자세를 바로 잡았다.
“으음.. 레벨 28이라,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하지. 이 챕터, 보스가 어디 있었더라?”
“응? 레벨, 좀 더 올리고 가는 게 좋지 않아? 장비도 잘 못 맞췄는데. 여기 보스는 화상 공격까지 쓰니까 포션도 챙겨 가야되고..”
“그렇게 따져가면서 게임 하면 재미없지 않아? 아슬아슬 하게 보스를 격파했을 때의 그 쾌감이 얼마나 짜릿한데.”
“그거야 뭐, 개인 취향이니까.”
쿄코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화염 동굴의 중심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왠지 불안한데, 이길 수 있으려나?
“유이는 확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하는 편이라 가끔씩 보는 내가 답답해. 애늙은이도 아니고.”
“확실한 게 좋잖아? 실패하면 의욕이 팍, 떨어지니까 말이야. 그리고 인간관계 같은 건 실패하면 돌이킬 수 없기도 하고.”
“음? 인간관계?”
“고백했다가 차이기라도 해 봐, 그 사람이랑 친구로 어떻게 지내겠어?”
말을 뱉어놓고 아차, 싶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갑자기 뜬금없이 웬 고백? 유이,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긴거야?”
“윽. 아, 아니, 그, 그게.”
그냥 넘어가 줬으면 싶었는데, 게임에 정신 팔린 줄 알았더니.
“나도 어디서 들은 건데 말이야, 연애는 암살이 아니야. 들켜야 시작한다구.”
“들키는 거랑 고백했다 차이는 거랑은 다르.. 아, 아니, 그전에 좋아하는 사람 같은 거 없어!”
“정말로?”
컨트롤러 위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쿄코의 손가락이 멈췄다. 한숨이 나왔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는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저, 정말이라니까.”
“아니잖아.”
방금 전까지 Tv를 눈이 빠져라 보던 쿄코의 청명한 눈은 이제 나를 쳐다보았다. 저 눈에 삼켜질 것 같아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가끔씩 아무 이유 없이 얼굴이 새빨개지고, 안절부절 못하고, 멍하니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그런 것들 전부 다, 사랑에 빠진 소녀의 반응이야.”
“네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겪고 있으니까.”
“뭐? 쿄코, 너,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쉿.” 쿄코는 그렇게 말하며 검지를 쭉 펴 내 입에 가져다 대었다. 나는 엉겁결에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고민 중이야, 어떻게 고백해야할지.”
“..아, 그, 그렇구나.”
“자연스러운 게 좋겠지?”
“그..렇겠지?”
“역시 유이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라며 장난기 가득 담긴 얼굴로 키득키득 웃는 쿄코를 보며, 나는 뭔가에 취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현실은 패키지 게임이 아니지. 내가 확실하게 호감도를 쌓을 때 까지 세상이 기다려 줄 리가 없지. 입 안의 침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그런 의미에서, 유이, 나 좋아해?”
“그야 물론..”
“그래, 그럼 오늘부터 1일이야.”
“응?”
쿄코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어라, 쿄코가 지금 무슨 말을 한거지?
“저기, 잘 못 들었는데.”
“서로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오늘부터 1일. 아니야?”
“아, 아니, 농담 하지 말고.”
“농담인지 아닌지는 유이가 더 잘 알고 있는 거 아니야? 혹시.. 싫어?”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점점 더 다가오는 쿄코를, 나는 부들거리는 팔로 꼭 끌어안았다.
“아니, 그.. 싫은 건 아니지만.”
“정말이지? 그럼 오늘부터 1일인거지?”
“..그래도 고백은 다시 해 줘.”
“왜에 – 자연스러운 게 좋다면서?”
“그래도 이건 너무 자연스러웠잖아..”
“아무렴 어때 - ”
쿄코가 그렇게 말하며 엉겨붙는 바람에 나는 몸의 균형을 잃고 나자빠지고 말았다. 언제나와 똑같은,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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