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근한 햇살, 열린 창문 틈새로 스며들어오는 바람, 그리고 그 바람에 섞여있는 약한 꽃 향기. 세상에서 제일가는 수면제는 아무도 없는 학생회실에 흘러 들어오는 이런 따사로운 공기가 아닐까. 히마와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학생회 부회장 - 스기우라 아야노에게 필요한 서류들을 열심히 정리하는 중이었다. 아니, 정리하고 있'었'다. 히마와리는 10분 전만 해도 바쁘게 서류를 정리했었지만 지금은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있으니까. '오늘은 언니랑 약속 잡은게 있어서 먼저 갈게!' 라며 멋대로 사라져버린 사쿠라코가 고맙게 느껴 질 정도로 오래간만에 평화로운 방과 후였다. 원래 히마와리에게 방과 후라는건 천방지축인 소꿉친구 사쿠라코에게 이리 저리 휘둘리는 시간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세상엔 히마와리를 평온하게 둬선 안 된다는 법칙이라도 있는 듯, 히마와리의 평화는 아무런 징조도 없이 세차게 열린 학생회실 문과 함께 깨져버리고 말았다.
"어이 - ! 스기우라!"
"꺄아아아아악?!"
"뭐야? 귀청 떨어지겠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노크 정도는 해주고 들어 와 주세요 니시가키 선생님! 가슴이 철렁 했잖아요."
빛나는 은발, 그리고 그 은발보다 더더욱 빛나는 적안. 여기저기 때가 탄 실험실 가운과 어올리지 않는 듯 하면서 어올리는 보라색 원피스. 갑자기 나타나 히마와리의 가슴을 철렁이게 한 범인은 나나모리 중학교 제일의 괴짜라고 불리는 '니시가키 나나' 선생이었다.
"많이 놀랐어? 미안해. 오오무로."
"제 이름은 후루타니 히마와리에요. 몇 번을 말했는데.."
"아, 맞다. 그랬었지.. 자꾸 햇갈린단 말이야."
히마와리는 니시가키 선생님은 마츠모토 선배님 빼면 아무도 못 알아보시잖아요? 라고 한마디 쏘아 붙히고 싶었으나 태평스럽게 웃는 선생님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스기우라는 없나? 마츠모토도 어디 갔는지 안보이고."
"스기우라 선배님은 프린트를 미제출한 학생이 있으니 프린트를 찾아오겠다고 하셨고.. 마츠모토 선배님은 '오늘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오늘 하루만 일찍 하교할게. 미안해.' 라는 문자를 남기셨어요. 아마 하교 하셨을거에요."
"흐음.. 그래..?"
니시가키는 자신을 보며 또박또박 말하는 학생을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침착한 성격에 언변도 뛰어나니 이 학생은 자신의 실험을 도와주기 제격이었다. 마츠모토 만큼은 아니겠지만.
"저기.. 후루타니."
"네?"
"선생님 좀 도와주면 안될까? 금방 끝나는 일이니까."
사쿠라코한테 이리저리 휘둘린 사람의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도망쳐야 한다.'고, 하지만 방금 전 까지만 해도 태평하게 졸고 있던 모습을 보인 사람이 '지금은 바빠서 안 될것 같은데요.' 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알앗어요, 선생님."
설마, 별 일이 생기기나 하겠어?
ㅡ
"이게 뭔가요? 선생님......"
니시가키를 따라서 온 과학실엔 번들번들 빛 나는 은빛 캡슐이 있었다. 타임캡슐이랍시고 문방구 같은 곳에서 파는 싸구려 캡슐하고 똑같이 생겼는데, 그런 캡슐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캡슐은 사람 두 어명 정도는 너끈히 들어 갈 정도로 크다는 것이었다.
"타임머신이야."
"..네?"
"타임머신, 이라고."
타임머신이라는게 가능해요? 아니, 그 전에, 타임머신을 만들 정도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이런 촌동네의 과학선생님으로 있는거에요? 선생님은 대체 맨날 과학실에 틀어 박혀서 뭘 만들고 있었던거죠? 묻고 싶은게 산더미 같았으나 물어봤자 태연자약한 너털 웃음만 들을 게 뻔하니, 히마와리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뭐, 별 건 아니고.. 3시간 전 쯤으로 돌아가서 과학실에서 쿠키 포장을 뜯으려 하는 나를 말려준 다음 다시 이 시간대로 돌아오면 돼. 맛있어 보이는 쿠키가 있어서 샀는데 맛이 완전 꽝이였거든. 환불 받고 싶어서 말이야. 과거의 내가 쿠키를 안 뜯으면 포장을 뜯어버린 쿠키가 돌아 오지 않겠나 싶어서."
심지어 타임머신을 그런 좀스러운데다 쓰는 건가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머리가 지끈거려 히마와리는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탑승감에 대한 평도 들어보고 싶어. 저번에 마츠모토한테 타임머신을 태워 봤다가 '너무 덜컹거려서 허리가 쑤셧다.' 라는 평가를 받았거든. 이번 타임머신은 그 부분을 상당히 개량한 작품이야."
"아,네......"
"자, 그럼 설명은 여기까지. 한번 타 봐."
"하지만 이 캡슐, 타는 곳이 - "
히마와리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싸구려 비프음이 들리더니 자그마한 구멍 하나 안 뚫려있던 은빛 캡슐 하나가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한 가운데가 뻥, 하고 뚫렸다. 뚫린 구멍으로 보이는 캡슐 안에서 제일 먼저 보인 것은 푹신해 보이는 메트릭스가 세로로 서 있는 모습, 그리고 그 다음으로 보이는 건 여러가지 계기판들이 쉴 새 없이 비프음을 내며 무언가를 검침하는 모습이었다.
"문이 닫혀있던거야. 리모콘으로 열 수 있어. 자, 여기."
니시가키는 그렇게 말하며 히마와리에게 리모콘을 던졌다. 히마와리는 느닷없이 날아오는 리모콘을 놓칠 뻔 했지만 겨우겨우 붙잡았다. '타임머신'이라는 거창한 물건의 리모콘 치고는 리모콘은 아주 볼 품 없었다. 히마와리네 집 바닥에서 굴러다니는 Tv 리모콘이랑 비슷하게 생겼으니까.
"기능이 몇 가지 있지만 뭐.. 그런 건 알 필요 없고. 왼쪽 상단에 있는 전원 버튼으로 전원을 키고, 중간에 있는 초록색 버튼 긴 거 있지? 그걸로 문을 열고 닫는거야. 그리고 빨간색 버튼은 타임머신 가동 버튼이고.. 아, 가고 싶은 시간대는 하단에 있는 키 패드로 설정하면 돼. 년도를 설정하고, 월,일을 설정하고, 마지막으로 시간을 설정하는거야. 내가 딱 3시간 전으로 가게 세팅 했으니까, 지금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타기만 하면 돼. 알겠지? 그럼 재밌는 시간여행 하고 와. 거기 메트릭스에 있는 안전벨트 꼭 매고."
"에, 예?"
자기가 할 말만 다 끝내버리고 니시가키는 히마와리를 캡슐 안에 밀어 넣었다. "꺄악?! 자, 잠깐만요! 니시가키 선생님!" 이라는 히마와리의 불평은 들리지도 않는 듯, 니시가키 선생은 콧노래를 부르며 뚫린 구멍 근처에 있는 좁쌀만한 돌기를 꾹 눌렀다. 그러자 싸구려 비프음이 나고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자, 잠깐만요!! 선생님!!"
계기판이 미친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에 호응하듯 방금 전 까지 미동도 없던 기체가 오래된 경운기마냥 덜덜 떨었다. 마츠모토 선배님이 이 기계를 타 봤다곤 했지만, 정말 괜찮은걸까? 히마와리는 눈을 꾹 감고 니시가키가 준 리모컨을 꽉 쥐었다. 점점 더 높아지는 비프음은 히마와리의 불안을 더더욱 가속했다.
하지만 히마와리의 불안감은 - 과학실 한복판에 있었던 거대한 타임머신이 폭음을 내며 어디론가 사라짐과 동시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ㅡ
쉼 없이 덜컹거리는 타임머신 속에서 히마와리는 좌, 우로 데굴데굴 굴렀다. 눈물을 찔끔 흘리며 "이게 개량된 정도면 예전엔 얼마나 더 심했던거에요?!" 같은 볼멘 소리를 하며 따졌으나 캡슐 안에서 홀로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히마와리의 질문에 대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타임머신은 그 볼멘소리를 듣고 깨달은 바가 있는 듯, 점점 진동이 잦아들더니 이내 완전히 멈추었다.
"다.. 끝난 건가요?"
히마와리의 말을 들어주었는데도 자신을 미심쩍게보는 히마와리가 아니꼬와 보였던걸까, 교통사고 현장에서나 들어 볼 법 한 둔탁한 소리가 히마와리의 귀청을 찢었고, 타임머신 안은 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엄청나게 흔들렸다. 타임머신이 요동침에 따라 히마와리의 몸도 이리저리 요동쳤고, 영원처럼 느껴지던 격동이 끝날 때 즈음, 많이 들어본 비프음이 들리더니 스르륵, 문이 열렸다. 타임머신의 문 틈새로 들어오는 강력한 햇빛에, 히마와리는 눈을 꿈뻑거렸다.
"......뭐야?"
강렬한 햇빛 속에 아련하게 실루엣이 비쳤다. 귀를 덮는 단발, 펄럭거리는 가운. 실루엣 밖엔 보이진 않지만 너무나도 익숙한 모양새였다. 눈이 점점 빛을 받아들이자 눈 앞에 아른거리기만 하던 주변 환경이 점점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밑단에 얼룩이 잔뜩 묻어있는 커튼이 바람을 받아 일렁이고 있는 모습, 세월의 풍파를 정통으로 맞아 모서리 부분이 깨져있는 대리석 제 책상들, 등받이가 없어 매우 불편한 둥그런 의자. 타임머신을 타기 전에 봤었던 과학실의 풍경, 그대로였다.
제대로 도착 한 걸까? 히마와리는 핸드폰부터 꺼내 보았다. 방금 전 시간이 오후 5시 16분, 지금 시간이 2시 10분. 3시간 전으로 보낸다고 했으니 제대로 도착한 게 맞은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니시가키 선생님.. 아야야야.."
히마와리는 욱신거리는 허리를 움켜쥐고 타임머신에서 나왔다. 나오면서 타임머신을 위, 아래로 살짝 훑어봤는데, 과학실 바닥에 '꽃혀'있는 번들거리는 은빛 캡슐의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방금전에 난 둔탁한 소리는 아마도 이것이 원인이었을까. 히마와리는 본래 시간대로 돌아가면 이런 문제가 있다고 말해줘야 겠구나. 생각했다.
"으음..그러니까, 익숙한 얼굴인데. 누구였더라..."
"후루타니 히마와리에요! 선생님! 나 참, 몇번을 말했는데. 제발 기억 해 주세요!"
"아 - ! 생각났다. 놀리는 맛이 있었지. 후루타니 학생회장."
"네?"
"학생회장쪽은 오오무로 쪽이였나? 너희 둘, 항상 붙어다녀서 워낙에 햇갈렸어야지. 아, 그런데 너 키가 좀 더 크지 않았나? 분명 내 코 근처까진 왔던 거 같은데 - "
"자, 잠깐만요. 선생님. 그게 무슨 소리에요? 학생회장이요? 제가?"
"응?"
"학생회장님은 마츠모토 선배님이잖아요? 저는 그냥 학생회 임원 - "
"학생회장이 마츠모토? 그게 언제적 얘기야? 마츠모토는 지금 고3이라구."
"...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히마와리는 어리둥절해하며 다시 핸드폰을 꺼냈다. 2시 11분, 4월 19일. 여기까지는 이상할 게 전혀 없었다. 눈을 다시 꿈뻑였다. 2시 11분, 4월 19일. 아무리 봐도 이상할 게 없었다.
"저기,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을 좀 해줬으면 하는데."
"저, 자, 잠시만요."
히마와리는 정확한 날짜를 알아보기위해 핸드폰에 탑재되어 있는 달력 어플을 켰다. 달력 어플은 오늘의 날짜를 정확하게 표현 해 주고 있었다. 2014년 4월 19일.
"....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히마와리는 철렁이는 심장을 애써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니시가키 선생님. 오늘이 몇 일이죠?"
"4월 19일인데, 아니, 그런데 무슨 일인지 설명을 - "
"년도는 어떻게 되요?"
"묻는 말엔 대답 안하고 계속 뚱딴지같은 질문만 하지 말아줄래? 2014년이잖아. 헤이세이 26년."
니시가키의 말투는 그 이상 태평스러울수가 없었으나 니시가키의 말은 히마와리에게 있어서 청천벽력이나 마찬가지였다. 히마와리가 원래 있던 시간대는 '2011년' 4월 19일 5시 16분이었기 때문이었다. 3시간 전의 과거로 간다고 하던 타임머신이, 자신을 3년 후의 미래로 보내버린 것이다. 히마와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째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질 않는건지!
".. 이 말을 세번째로 하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알려주지 않을래?"
"아, 죄송합니다. 너무 황당한 일을 겪어서......"
히마와리는 차근차근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했고, 니시가키는 그 말을 듣고 풉,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아.. 내가 한 짓이니 누구한테 탓 할수도 없고 이거야 원..... 3년 전의 나는 그런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구나. 바보같아."
"죄송합니다......."
"아니 뭐, 네가 죄송 할 이유는 없지."
"그, 그러면 일단.. 돌아 가 볼게요."
히마와리는 뒷통수를 긁적이며 꽉 쥐고 있었던 리모콘의 전원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ㅡ
히마와리는 2014년의 공원을 걷고있었다. '한숨을 쉬면 있던 복도 다 달아난다구요?' 라고 말하는 히마와리도 오늘만큼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 마다 한숨이 픽,픽 나왔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마 하늘에 대고 욕을 퍼부었을것이다. 눈에 닿는 모든 곳이 익숙하지만 그곳에 자신이 있을 곳은 없는 시간대로 버려졌으니 말이다.
"하아..."
3년 전 자신이 만든 타임머신이 오작동을 한 여파로 타임머신이 아예 망가져버린것같다. 내가 한 짓이니까 책임지고 오늘까진 이 기계를 고쳐놓겠다. 자신을 이런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니시가키 선생이 히마와리에게 사과를 하며 한 말이었다.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요."
시간여행에 관련된 소설은 공상 속의 이야기 일 줄 알았는데, 자신이 그런 상황의 주인공이 될 줄은. 히마와리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다가 한숨을 멈추었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는건 언제나 바래왔던 일이잖아요? 히마와리. 어차피 한숨을 쉬어봤자 해결되는 일은 하나도 없잖아요! SF소설의 주인공이 됐다고 생각하자구요! 히마와리는 주먹을 불끈 쥐고 방금 전하곤 다르게 사뿐, 사뿐 한걸음 내딛었다. 카에데는 잘 컸을까요? 3년 후의 나는 어떻게 지낼까요? 사쿠라코는 3년 동안 철 좀 들었을까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신의 집으로 가던 도중 -
"... 양배추를 안샀었네."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공원에 조성되있는 수풀에 재빠르게 몸을 숨겼다. 목소리가 조금 차분하긴 하지만 한 번만 들어도 바로 알 수 있는 짜증나는 목소리. 잘못 들을래야 잘못 들을 수가 없는 목소리였다. 히마와리는 수풀 밖으로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히마와리가 생각했던 사람이 공원 한복판에 서 있었다.
"뭐, 지금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닌데."
석양을 머금은 파도가 넘실 거리는 것 같은 웨이브 진 금발, 인형을 보는 것 같이 동그랗고 커다란 눈, 보기 좋게 마른 체형. 3년 전의 모습에서 변한 것은 그저 키 뿐이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언제나 히마와리가 챙겨줘야 했던 철부지 여동생 같았던 존재, 그리고 동시에 언제나 히마와리의 곁에 있어주었던 히마와리의 라이벌, 오오무로 사쿠라코였다.
'3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 던 걸까요...?'
3년 뒤의 사쿠라코나 3년 전의 사쿠라코나 생긴 것은 그대로인데, 스치듯 보면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 할 정도로 분위기가 변했다. 원래 사쿠라코는 좋게 말하면 따스하고 개구쟁이 같은 분위기를, 나쁘게 말하자면 멍청해 보이는 분위기를 풀풀 내뿜고 다녔는데, 지금 히마와리가 보고 있는 사쿠라코는 딱 보기만 해도 빈틈 하나 없어보였다. 어째서 이렇게나 달라보이는걸까. 히마와리는 좀 더 고개를 내밀고 사쿠라코를 빤히 쳐다보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표정일까? 원래라면 항상 미간을 찌푸리고 있거나 방실방실 웃던 사쿠라코가, 지금은 완벽한 무표정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조금 더 달라진 것이 있을 것 같은데 - 라고 생각하며 사쿠라코의 위, 아래를 눈으로 훑던 와중.
"......"
".... 아.. 안녕 하세요? 사쿠라코."
사쿠라코와 눈이 마주쳤다.
"... 약을 다시 먹어야 하려나."
자신의 소꿉친구가 자신보다 훨씬 어린 모습으로 눈 앞에 나타났는데도 불구하고, 사쿠라코는 시큰둥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히마와리의 표정이 한순간, 펴졌다가 다시금 찌푸려졌다.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의아하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알고있는 사쿠라코라면 분명 그 자리에서 대 폭소를 하며 나를 놀렸을탠데. 뭐, 사람이 변해서 그런 일은 안한다고 쳐도 친구를 봤으면 인사는 해야 되는 것 아닌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의아함은 곧 울화로 바뀌었다. 히마와리는 쭈구렸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저기요! 사쿠라코!!"
"......."
사쿠라코는 우뚝 멈춰서더니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무표정했던 얼굴엔 '짜증남'이라는 감정이 번져있었다. 저런 얼굴의 사쿠라코는 여태껏 살면서 수 없이 봐 왔는데도 불구하고, 사쿠라코가 내뿜는 분위기에 방금 전까지 분기탱천하던 히마와리는 입을 다물었다. 대체 3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레 그 개구장이가 이렇게나 살벌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걸까요? 히마와리는 자기 마음 속에 질문을 던져봤지만 딱히 답은 나오지 않았다.
"... 짜증나게, 뭔데? 오랜만에 나와서 무슨 말을 할 참인데?"
"오, 오랜만이라니 무슨 소리에요? 바로 옆 집 이잖아요? 서로 다른 학교에 진학했더라도 얼굴은 언제든 볼 수 있을탠데."
"...?"
짜증으로 가득했던 얼굴이 풀렸다. 히마와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무슨 이상한 소릴 하는거람. 너는 대체 누구야?"
"후루타니 히마와리잖아요! 당신은 소꿉친구의 얼굴도 못알아보는건가요?!"
"하아... 그러니까 그게 이상한 소리인거라고, 후루타니 히마와리는 - "
"하긴, 전 3년 전의 과거에서 왔으니까. 얼굴을 못 알아 보는것도 이해 못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방금 전엔 좀 심했잖아요!"
"......"
풀렸던 사쿠라코의 표정이 다시 찌푸려졌다. 방금 전에 짜증을 내비쳤던 분위기와는 또 다른 얼굴이었다. 생각하기 복잡한 문제가 나올 때 마다 저렇게 얼굴을 찌푸렸지. 많은 것이 변하긴 했지만 변하지 않은 모습도 있군요. 변함없는 사쿠라코의 모습을 보니 방금 전 까지 사쿠라코가 짜증냈다고 겁을 먹었던 자신이 바보같았다.
"3년 전의 과거에서 왔다고? 그 말. 계속 해 봐."
"네? 사쿠라코도 뭔가 말 하려던 것 아니었나요?"
"별로 중요한 얘기는 아니었으니까. 빨리 얘기 해 줘."
"아, 네..."
히마와리는 오늘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했다. 얼굴을 찌푸린 체 이야기를 들었던 사쿠라코는 히마와리의 설명이 끝날때 쯤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니시가키 선생이라면 그럴 법 하지. 고생이 많네, 히마와리."
"믿어 주는건가요?"
"황당한 얘기지만 못 믿을 얘기는 아니고. 히마와리라면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진 않을테니까. 특히 나한텐."
나한텐 거짓말을 하진 않을테니까, 라며 싱긋 웃는 사쿠라코를 보니 얼굴이 화악 달아오르는게 느껴 진 히마와리는 고개를 돌렸다. 어쩜 저렇게도 어른스러운 미소일까요, 그 개구쟁이가 이렇게 컸다니 정말 믿겨지지가 않네요. 히마와리는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킨 다음에야 다시 고개를 사쿠라코 쪽으로 돌릴 수 있었다.
"오늘까진 여기 있어야 된다는 거지? 갈 데도 없을탠데 우리 집이라도 괜찮다면 같이 갈래? 지금 장 보고 막 점심을 차리려던 참이었거든. 너도 먹은 게 없다면 같이 식사해도 괜찮고."
"아, 네! 물론이죠, 고마워요 사쿠라코."
히마와리는 사쿠라코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방금 전에 사쿠라코는 저한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요?' 라는 의문과 함께.
ㅡ
"들어올 때 인사같은거 안해도 돼, 나밖에 없으니까."
"네? 나데시코 언니는 어디갔어요? 하나코는..."
"나데시코 언니는 대학때문에 도쿄에서 자취, 그 김에 '하나코는 똑똑하니까 이런 곳에 있긴 아깝다' 면서 하나코도 전학 보냈어. 아예 가족 전체가 도쿄로 갈까? 라는 말도 나왔는데 아버지 직장 문제도 있고, 나도 도쿄같이 복잡한 곳은 싫으니까 그냥 이곳에 있겠다고 했고. 오늘은 엄마랑 아빠가 오랜만에 나데시코 언니 잘 지내는지 봐야겠다고 도쿄로 올라가서 나 혼자인거야."
"아..."
히마와리는 신발을 벗으며 집 안을 둘러보았다. 하나코도, 나데시코도 없는 거실이라니, 그동안 봐온게 있기 때문일까, 너무나도 쓸쓸해보였고, 너무나도 이상하게 다가왔다.
"외롭지 않나요?"
"가끔은 하나코나 나데시코 언니의 잔소리가 그리워 질 때가 있긴 한데... 어쩔 수 없지, 내가 선택한 거니까. 그리고 혼자 집 지키는 것도 나름의 장점이 있고."
"혼자 사는것의 장점이라 함은?"
"글쎄? 샤워한 후에 알몸으로 있어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는 거?"
히마와리는 너무나도 사쿠라코 스러운 대답에 웃음을 참다가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마룻바닥과 입맞춤을 할 뻔 한 히마와리를 구해준 건 사쿠라코의 따듯한 팔이었다.
"조심해야지."
"아, 미, 미안해요."
"미안 할 필요는 없는데..."
히마와리는 조심스럽게 사쿠라코의 품에 빠져나와 벗던 신발을 마주 벗어 단정하게 놓은 후 오오무로 가의 거실에 들어왔다. 사쿠라코의 신발도 단정하게 놓아줄까 싶었지만 사쿠라코는 이미 신발을 단정하게 벗어 둔 채였다. 원래라면 신발이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을탠데, 그동안 '신발은 단정하게 벗어 둬야죠!' 하고 잔소리를 한 덕분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미소가 지어졌다.
"많이 배고파?"
"아, 아뇨, 그렇게 많이 배고프진 - "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히마와리의 배가 꼬르륵, 울렸다. 사쿠라코는 그걸 듣더니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하긴, 5시쯤에 여기로 온거니까 슬슬 배고플 시간이지, 최대한 빨리 준비할게. 거실에 앉아서 쉬고있어."
"네? 그러면 제가 너무 미안한데."
"별로 미안할 거 없어, 오히려 집에 초대해 놓고 식사 준비 도와달라고 하는게 더 미안해. 간단한 거 할테니까 너무 불안해 하지 말고, 믿진 않을테지만 이제 요리 꽤나 잘하거든."
"....."
너무나도 단호하게 말해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히마와리는 풀 죽은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한 후 쇼파에 앉았다. 부엌에서 쌀을 씻는 사쿠라코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쿠라코를 보고 있자니 방금 전에 넘어질 뻔 한 자신을 감싸준 것이 생각나 얼굴에 열이 올라왔다. 히마와리는 고개를 도리질 치고 3년 뒤의 오오무로 가(家)를 좀 더 둘러보기로 했다. 별로 바뀐 거 없는 것 같으면서도, 많은게 바뀌었구나. 체크무늬 커튼도 하얀색 실크 커튼으로 바뀌었고, TV도 좀 더 커다란 TV로 바뀌고.. 이런걸 보고 있자니 자신이 살던 집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해졌다.
"사쿠라코."
"응? 왜?"
"잠시 저희 집에 다녀와도 괜찮을 - "
"안 돼."
"네?"
"... 주먹밥 같은거 할꺼라서 점심 준비는 금방 끝나."
"금방 둘러보고 올게요. 집이 어떻게 변했는지만 살짝 보고.."
"글쎄 안된다니까!"
톤이 착 가라앉았던 차가운 목소리에 노기가 섞여있었다. 히마와리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왜,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 미안해, 너는... 이사를 갔거든. 원래 너희 집이었던 곳에선 이제 다른 사람이 살아. 그래서 안된다고 한거야. 알겠지?"
"그러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으면 됐잖아요."
"......"
사쿠라코는 히마와리의 말을 듣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더 쏘아 붙힐까 하다가 오도가도 못하는 자신을 집에 초대까지 해 준 사람한테 그러는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저기 그런데, 지금 사쿠라코는 저보다 3살 더 먹은거 맞죠?"
"네가 3년전에 왔으니까... 따지고보면 그렇겠지."
"그럼 전 지금 사쿠라코를 언니라고 불러야 하는 건가요?"
"우리 사이에 낯간지럽게 무슨... 그냥 지금 부르는 대로 불러 줘, 너도 그쪽이 더 편하잖아?"
"그렇긴 하지만요... 그게 예의가 아닌가 싶어서 마음에 걸리거든요."
"다른 사람이라면 머리가 복잡할 상황에서 그런 걸 생각하고 있다니... 정말 너답네."
"... 무슨 뜻 인가요?!"
"너 좋을대로 생각해."
그러면서 피식, 웃는 사쿠라코를 보니 히마와리의 가슴 속엔 울컥, 짜증이 치솟았다. 자기 머리 위에서 노는 듯 한 저런 여유로운 모습은 사쿠라코한테 어올리지 않아. 사쿠라고하면 무릇 좀 더 귀여운 모습을 -
"아니, 지금 무슨 생각을.."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히마와리는 고개를 도리질 쳤다. 그런 천방지축 개구쟁이한테 귀엽다는 말은 전혀 어올리지 않은데, 어째서 지금 그런 생각이 든 것인지.
"무슨 생각 했는데?"
"ㄴ,네?!"
"방금전에 중얼거렸잖아."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신이 있었던 시간대의 사쿠라코를 상상하던 사이, 3년 뒤의 사쿠라코는 둥그런 모양의 주먹밥을 예쁜 그릇에 담아 거실 한복판에 있는 탁자에 내려다 놓았다. 모양도 깔끔해보였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게 겉보기에도 맛있어보였다. 히마와리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가다랑어 포, 아직도 좋아해?"
"네."
"먹어 봐."
히마와리는 탁자 앞에 앉아 주먹밥을 쥐었다. 주먹밥의 외양은 완벽, 그 자체였으나 맛도 완벽할지 어떨지는 미지수였다. 사쿠라코의 요리실력을 알고있는 히마와리는 주먹밥을 입에 넣기 상당히 껄끄러웠다. 사쿠라코의 주먹밥은 보통 바닷물보다 짯으니까.
"... 안 먹어?"
"아, 아니요! 안 먹긴요."
사쿠라코의 독촉이 있고 나서야 히마와리는 주먹밥을 입에 물었다. 한번 씹을 떄 마다 가다랑어 포의 감칠맛이 히마와리의 혀를 자극했다. 지금 먹고있는 주먹밥은 여태껏 자신이 먹어왔던 그 어떤 주먹밥보다 더 맛있었다. 한입, 한입 먹어치우다 보니 단숨에 반이나 먹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히마와리는 주먹밥을 다시 내려놓았다.
"어때? 맛있어?"
"네! 지금까지 먹었던 어떤 주먹밥보다 맛있어요! 많이 늘었네요! 사쿠라코."
"그래? 다행이다..."
그렇게 말하며 사쿠라코는 눈 언저리를 검지로 훔쳐냈다. 히마와리는 그것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사쿠라코가 검지로 훔쳐낸건 눈물이었기 때문이다. 생각 해 보면 여기서 만난 사쿠라코는 이상했다. 처음 만났을때 짜증을 낸것도 그렇고, 내가 집을 찾아간다고 했을때 화를 낸 것도 그렇고, 그리고 밥을 차려주더니 눈물을 흘리질않나. 차분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후루타니 히마와리'가 엮이면 3년 전보다 더 자기 멋대로 화를 내는 일관성이 전혀 없는 모습이 히마와리에겐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저기, 사쿠라 - "
대체 당신한테, 그리고 저한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질문하려던 찰나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이 울렸다.
"저, 죄송한데 혹시 전화를 받아도..."
"괜찮아."
자신에게 지금 연락 할 사람은 한명 뿐이겠지. 히마와리는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자마자 예상했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 "안녕, 후루타니"
"네, 선생님"
- "별 문제는 아니여서 지금 막 타임머신을 고친 참이야. 배선 연결을 반대로 한 부분이 있더라고. 안 켜지는건 베터리가 없어서 안켜지는 거였고. 그래서 AA건전지 사서 다시 갈아끼웠다."
"... 건전지요?"
- "응, 건전지."
타임머신같은 대단한 물건이 고작 AA 사이즈 건전지로 돌아간다구요? 이상하지 않아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으나 그 말을 침과 함께 삼켰다. 하긴, 오늘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상한 일 투성이였으니까, 이 이상 생각하면 머리만 아플 뿐이야.
- "뭐 하는거 없으면 최대한 빨리 와줘, 이걸 치워야 엉망이 된 과학실도 어떻게든 뒷정리를 할 수 있으니까. 내 잘못이긴 하지만 그래도 교장한테 깨지긴 싫다구."
"아, 알겠어요 선생님. 최대한 빨리 갈게요!"
빨리 간다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빠르게 전화가 끊겼다. 목소리는 천하 태평이면서 성격은 엄청나게 급하다니까. 참 이상한 사람이야. 히마와리는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저기, 사쿠라코. 타임머신이 고쳐졌다는데 최대한 빨리 와주면 좋겠다고 해서 -"
"... 안돼?"
"네?"
"이것만, 이 주먹밥만 다 먹고 돌아가주면 안 될까?"
"......"
차분한 목소리였으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히마와리는 무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사쿠라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냥 돌아간다면 사쿠라코한테도, 그리고 자신한테도 크게 후회가 남을 것 같았다.
"사쿠라코."
"... 응."
"처음 만날 때 부터 궁금했어요. 3년이란 시간 동안 그렇게나 어른스러워진 사쿠라코가 왜 저랑 관련된 일이 일어나면 짜증부터 냈는지. 방금 전엔 제가 이사를 갔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닌거죠? 대체 사쿠라코와 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거에요?
"... 너랑 네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어."
"거짓말! 그런게 아니라면 당신이 이렇게 - "
여태껏 사쿠라코한테 모든 감정을 실어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사쿠라코의 다음 한 마디에 히마와리의 입은 저절로 다물어졌다.
"네가 죽었어."
"... 네?"
"... 작년 겨울 즈음이었나. 휭단보도를 둘이서 건너는데 차 한대가 우리를 향해 달려왔거든. 순식간이었어. 내 등을 떠밀은 너의 손길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
"......"
"네가 그렇게 떠나니까 한동안은 아무 생각도 안들더라. 그래서 아무것도 안했었어. 하지만 이건 네가 원하는 게 아닐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네가 원하던 나'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했는데... 역시, 천성은 천성인가봐. 생각보단 말이 먼저나가. 틈만 나면 울컥하고. 그래도 나, 꽤 많이 노력했어. 이제 과자같은것도 잘 안먹고, 끼니도 잘 챙겨먹고, 청소도 열심히 하고..."
방금 전 까지만 해도 그렇게나 무서워보이고, 그렇게나 날카로워보였던 사쿠라코가 한없이 약해보였다. 지금 자신의 눈 앞에 보이는 사쿠라코는 가면을 쓰고 있던 것이었다. 그것도 언제 꺠질지 모를 정도로 얇고, 여기저기 금 가 있는 유리같은 가면을. 히마와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탁자에서 일어서 사쿠라코의 등 뒤로 다가가 다소곳이 앉았다.
"... 고마워요, 그렇게나 쭉, 저를 생각해줘서. 많이 힘들었죠?"
히마와리는 팔을 벌려 사쿠라코를 꼬옥 껴안았다. 사쿠라코의 등은 언제나와 똑같이 따스했다.
"마, 말을 이상하게 했는데! 벼, 별로 널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었어. 내, 내가 이상하게 사,사,살던건 맞았으니까. 그, 그래서 그냥 - "
"당신은 이상하지 않아요. 제가 사쿠라코한테 잔소리를 했던 건 조금 더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서 한 말들이었어요. 제가 바라던 사쿠라코의 모습은 언제나처럼 행복하게 웃는 모습이었어요. 이렇게 우울한 모습이 아니라."
"......"
"제 생각을 알았다면, 앞으론 밝고 행복하게 지내주세요. 3년 전에 그랬던 것 처럼."
"노력... 해볼게."
"고마워요, 사쿠라코."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히마와리는 껴안았던걸 풀고 사쿠라코의 옆자리에 반듯이 앉았다.
"사쿠라코의 말이 아니었어도 이 주먹밥은 다 먹고 갈 참이었어요. 맛있으니까요."
"... 그렇구나."
"그리고... 어차피 저한텐 타임머신이 있으니까. 여기에 좀 더 머무를수도 - "
"그건 안 돼. 히마와리."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3년 전의 나는 천방지축이었으니까. 나는 어떻게든 네가 없는 삶에 익숙해 질 수 있었지만, 3년전의 나는 그렇지 않을거야."
"... 그렇군요."
사쿠라코는 시무룩하게 대답하는 히마와리를 보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저기, 만약에 3년 전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나한테 말 좀 전해줘."
"어떤 말이요?"
"... 차 조심하라고. 미래로 부터의 전언이니까 잘 새겨들으라고 하면 잘 들을거야. 아마도."
"미래로 부터의 전언이라..."
어처구니 없는 실수때문에 여기 왔지만, 제법 값진 걸 얻어가네요. 히마와리는 사쿠라코의 포근한 손길을 느끼며 방긋, 웃었다.
ㅡ
"... 갔구나."
히마와리가 떠난 오오무로 가의 거실은 방금 전하곤 달리 냉기가 감돌았다. 사쿠라코는 히마와리가 방금 전에 떠난 문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 그런데, 정말 뭐였을까."
히마와리가 허무하게 죽은 날 이후부터, 사쿠라코의 곁엔 항상 환청과 환각이 맴돌았다. 히마와리는 언제나 자신의 귓가 언저리에 '당신때문이에요, 사쿠라코' 라는 말을 속삭였고, 눈을 감았다 뜨면 피칠갑을 한 채로 자신을 싸늘하게 비웃기도 했었다. 그렇게 환청과 환각으로부터 시달리다 병원에서 준 약의 힘으로 히마와리를 겨우겨우 잊어버릴 수 있었다. 오늘 까지는.
오늘 만난 히마와리는 여태껏 만난 히마와리와는 달랐다. 자상하고, 자신한테 웃음 지어주고, 앞 뒤 꽉막힌 면이 있어서 귀여운 - 자신이 알고 있었던 히마와리였다. 그것은 환각이었을까, 꿈이였을까, 아니면 정말로 과거에서 온 히마와리였을까. 어떤 것이건 허무맹랑한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단순히 환각이나 꿈 따위로 넘어가기엔 히마와리의 품은 언제나처럼, 아니, 평소보다 더 따듯했다. 자신의 등을 떠밀던 손길을 잠시 잊어버릴 정도로. 사실 환각이건, 꿈이건, 시간 여행이건. 무엇이든 상관 없었다. 히마와리를 봤다는 사실, 사쿠라코한테 있어선 그게 전부였다.
"... 좀 더 솔직해 질 걸 그랬나."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해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네가 없는 삶에 익숙해 질 수 있다니, 히마와리도 참 둔탱이지. 그런 거짓말을 믿다니."
사실은, 네가 여기에 있어주길 바랬어. 사쿠라코는 아랫입을 꾹 물고 눈물을 삼켰다. 문 밖으로 자신의 울음소리가 세어나가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