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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야? 우ㅁ...."


 [할 말이 있습니다. 부실로 와주시지 않을래요?]라는 문자를 받은 코토리는 아이돌연구부 부실의 문을 열자마자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이돌연구부 부실에, 평소와는 너무나도 다른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저기."


 평소와 똑같이 굳게 닫힌 창문, 평소와 똑같이 반짝반짝 빛날정도로 깨끗한 모니터, 평소와 똑같이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놓인 책상들. 여기까진 아무 이상 없었다. 허나 - 


"..새, 생일, 축하해요, 코, 코토리."


 평소와는 다르게, 정갈하게 놓인 책상 위에 리본으로 팔과 다리가 결박된 채 가련하게 누워있는 코토리의 소꿉친구, 소노다 우미가 평화롭다 못해 따분한 아이돌연구부 부실의 분위기를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눈을 꿈뻑거렸다. 혹시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눈을 꿈뻑여도 보고, 눈을 비벼도 보고, 허벅지 안쪽을 살짝 꼬집어 보기까지 했지만 깨끗하게 놓인 책상 위에 가련하게 누워있는 소꿉친구는 사라지지 않았다.


"저기, 우미?"

"ㄴ, ㄴ, ㄴ, 네!"

"다시 한 번 물어봐도 될까? 무슨 일로 불렀어?"


 아하하, 어색한 웃음이 곁들여진 질문에 우미는 입을 우물우물 거릴 뿐, 딱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몇 초간 가만히 있다 다시 우물우물 거리길 반복. 그러는 와중에 우미의 얼굴은 급속도로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그게, 그러니까, 그..."

"누가 장난 친거야? 일단 리본부터 풀어줄게."


 코토리가 문에서 한 발자국, 우미를 향해 다가가자 마자 우미는 "아, 안돼요! 풀지 마세요!" 라며 복도에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질렀다. 손과 발이 묶였는데도 온 몸을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며 '풀지 마세요!' 라며 온 몸으로 말하는 우미를 보며, 코토리는 방금 전과 똑같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우미의 발이 놓인 끝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사실 우미의 얼굴을 보며 이야기 하고 싶었으나 상반신이 놓인 맨 안쪽 자리에 앉으면 우미가 콩벌레처럼 몸을 뚤뚤 말아버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맨 끝자리에 자리 잡은 것이었다.


"우미, 다시 한 번 물어봐도 될까? 누구의 장난이야?"

" - 장난 같은게 아니에요!"

"응?"

"저, 저번에 코토리가 말했었잖아요! '생일선물? 우미가 좋으려나?' 라고. 그래서.."

"엑."


 기억을 되새길 필요도 없이, 우미한테 끈적하게 달라 붙으면서 '생일선물은 우미가 좋으려나?♡'하던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기억나서 코토리는 다시 한번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아니, 보통 그런건 농담으로 생각하지 않나? 우미가 고지식하다는건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젠 서로 사랑하는 사이잖아요? 그, 그만큼 특별한 걸 생일선물로 줘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


 우미의 마음은 확실히 전해졌으나, 우미의 마음이 확고한 만큼 코토리의 머리는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생각해주는 이 마음은 너무나도 고마웠으나 표현 방법이 너무나도 우미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최소한 우미가 조금 닫힌 공간에서 자신을 불러냈으면 모를까 이곳은 다른 곳도 아닌 고등학교였다. 우미의 마음을 낼름 집어먹기엔 걸리는 것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저기, 우미."

"ㄴ,네!! 뭐, 뭐든지 말씀만 하세요! 오늘 하루만큼은 저는 코토리의 생일선물이니까!!"

"우미의 마음은 고맙게 받을게, 하지만 나한텐 너무 큰 선물이라서.. 반송하고싶은데."

"네?"

"반송하고싶다고."


 저렇게 부끄러워 하는데 내가 등 한번만 밀어주면 '하긴... 제가 너무 과했죠?' 같은 말을 하면서 그만 두겠지, 코토리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 안됩니다!"

"응?"

"코토리가 저를 보며 답답해 하고 있었단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용기가 안났단 말이에요. 그래서 오늘, 특별히 용기를 내서 이렇게 다가가는 거란 말이에요. 제 마음을 거부하지 말아주세요. 코토리."

"우미의 마음은 너무나도 잘 전해졌지만.. 조금 전에도 말했듯 이렇게 커다란 선물은 받기 힘든걸. 그냥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하면서 분위기 탔지만 사실 많이 무섭잖아?"

"무, 무섭긴요! 하나도 안 무섭 - "


 우미는 자기 나름대로 맞받아치려고 했으나 코토리가 검지로 허벅지를 슬쩍 쓸어내리자 "히익?!"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꿈틀거렸다.


"무리 할 필요 없어. 이 마음은 나중에 받을게."

"...우으으으."


 우미를 위해서라지만 거절은 거절. 코토리는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런 코토리의 고개를 다시 들게 해 준건 우미의 한 마디였다.


"무섭기는 코토리가 더 무서워 하는거 아닌가요? 평소에 그렇게나 저를 답답해 하던건 사실 전부 허세였어요? 속 빈 강정같으니. 다 차려진 밥상 아닙니까."


 허세? 겉으론 웃고 있었지만 코토리의 속은 급속도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지금 누구보고 허세를 부린다고 하는거야? 댁을 위해서 이렇게 참고, 참고, 또 참고 있건만. 내 마음을 알아주기는 커녕 속 빈 강정이라고? 이가 부득부득 갈렸지만 코토리는 심호흡을 했다. 그래, 이런 실수라면 한 번 정도는 귀엽게 넘어갈 수 있어. 하지만, 이런 취급을 받고 그냥 넘어가면 이런 실수를 또 반복 할 지도 모르지.


"아무래도 서열 정리를 다시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네."

"네?"


 평소와는 다르게 낮게 깔린 목소리를 듣고, 우미는 몸을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평소와는 다른 각오로 온 것 아닙니까! 뭐, 뭘 겁먹고 있는 거에요! 소노다!' 따위의 말을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며 자신을 독려 해 봤자 움츠린 몸은 원래대로 펴지지 않았다. 꿀꺽, 우미는 마른 침을 삼켰다. 코토리가 앉았던 의자가 방금 전 코토리의 목소리보다 더욱 낮은 소리를 내며 바닥을 긁었다. 우미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부끄러워서 차마 쳐다보지 못한 코토리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코토리는 방긋, 미소 지으며 일어 서 있었다. 손에는 어느샌가 가방에서 꺼낸 두꺼운 커터칼을 하나 든 채로.


"이런 퍼포먼스는 말이야, 조금 더 본격적으로 하는 거야. 내가 알려줄게, 우미."

"자, 잠깐만요. 그 커터칼은 왜 - "


 몸을 뒤트는 우미의 몸짓에 아랑곳 않고 코토리는 커터칼을 우미의 와이셔츠 안으로 쑤욱, 집어 넣었다. 차가운 철이 우미의 몸을 휘저었고,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서늘함을 떨쳐버리기 위해 방금 전 보다 더더욱 몸을 비틀었다. 우미는 방금 전과 똑같이 바들바들 떨고 있지만 우미의 몸을 떨게 하는 건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었다. 커터칼따위가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우미가 두려워 하는 건 칼보다도 날카롭고 차갑에 식은 철보다 차가운 코토리의 웃음소리였다.


"우미, 가만히 있어야 하지 않겠어? 천을 가르는 건 자신 있지만 이렇게 까지 몸을 비틀면 실.수.로 우미의 이쁜 몸에 흉터를 남길지도 모르는데."

"코..코토리.. 미안해요."

"으응? 우미는 전혀 미안해 할 게 없는걸. 오히려 우미의 마음을 몰라 줬던 내가 미안하지."


 코토리의 커터칼은 뱀이 기어가듯 느긋하게 우미의 가슴 부근까지 올라왔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이 순간, 우미는 모든것을 느꼈다. 커터칼의 칼날이 불길한 소리를 내며 날을 내미는 것이 느껴지고, 어느새 얼어붙어서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몸이 느껴졌고, 얼어붙은 몸과는 달리 미친듯이 쿵쾅거리는 자신의 심장이 느껴졌고, 그리고 - 


"흑..흐윽, 흐으윽.. 미안해요.. 미안해요 코토리.. 제발.. 그만 해 주세요, 흐윽..흐어어엉..."


 - 울음을 채 삼키지 못한 채 코토리한테 매달리고 있는 자신이, 느껴졌다.


"어, 어라."

"저..저는 그냥.. 흑.. 흐윽... 끄윽..끅..."

"아니, 나는 이러려던게... 미,미안해! 우미 자, 잠깐만...!!"


 어느 순간부터 절대로 남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우미를 본 순간 끊어졌던 이성의 끈이 다시 돌아왔다. 코토리는 황급히 우미의 와이셔츠 안에서 유영하고 있던 커터칼을 빼내고, 우미의 손과 발을 속박하고 있었던 리본을 잘라냈다. 자신을 묶고 있던 리본이 풀리자마자 우미는 원래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코토리의 품 안에 안겼다. 


"미안해, 미안..."


 자신의 품 안에서도 서글프게 울리는 우미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코토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우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 할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우미가 입을 연 건 눈물 자국이 선명할 정도로 남은 얼굴을 꼼꼼히 세안하고 난 다음이었다. 


"사과를 해야 될 건 나인걸. 아무리 농담이라지만 맨 살에 커터칼을 대고 칼날을 세웠는데... 내가 너무 과했어, 미안해."

"코토리가 그런 짓을 한건 제가 말실수를 했기 떄문인걸요."

"... 으음, 그래. 오늘 일은 그냥 서로 잘못한걸로. 지금 일어난 일은 이 부실 안에 조용히 묻어두자."

"....."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야단을 맞는 아이마냥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못하던 우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코토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우미는 여느 때보다도 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것만은 안됩니다!"

"응?"


 '서로의 실수를 묻어두자.'는 말의 어디가 우미를 자극 한 것일까,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하며, 코토리는 머리를 바쁘게 굴렸다.


"비록 중간에 겁을 먹어서 그만두긴 했지만, 코토리한테 저를 선물하고 싶다는 그 마음만은 진심이었어요. 비록 처참한 실수로 끝났고, 이런 추한 모습을 보여버렸지만 제 마음을 이런 곳에서 묻긴 싫습니다."

"......"


 그 말을 듣고 코토리는 우미의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마주봤다. 우미의 표정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나 참, 평소엔 쑥맥이면서 가끔씩 이렇게 멋있어진단 말이야? 평소에도 이렇게 멋있으면 좋을탠데. 코토리는 간질간질한 마음을 겨우겨우 진정시키고 입을 열었다.


"실수를 묻어두자는 거지 마음까지 묻어두자는 건 아니야."

"그, 그러면...!"

"하지만 방금전에 말했잖아? 반송하겠다고."

"......"

"그 마음은, 나중에 전달 해 줬으면 좋겠어. 분위기에 취해서, 주변 사람들의 말에 혹해서 전하지 말고. 이런 일을 벌인건 아마 에리나 노조미가 부추겨서 그런거겠지?"

"켁."


 정곡을 찔렸다는 듯 헛기침을 하는 우미, 코토리는 그런 우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자신의 마음을 오롯이 자기 힘으로 전달 할 수 있을 때 즈음, 우미의 마음은 그때 받을게. 알겠지?"

"코토리가... 그렇게 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죠."

"고마워, 내 마음을 알아줘서. 이제 집에 가자. 우미, 해 떨어지겠다."

"알겠어요, 코토리. 집에 가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손을 내밀었고, 두 소녀는 '풋' 하고 웃으며 손을 붙잡았다. 


"우미의 손, 따듯하네."

"코토리의 손, 부드럽네요."

"오늘 여러 선물을 받았지만, 최고의 선물은 우미가 나에게 준 온기야. 고마워, 우미."

"아, 아닙니다. 저야 말로 고맙고, 미안하죠."

"서로의 실수는 묻어두기로 했잖아? '미안하다'는 말 금지야!"

"아, 알겠어요. 코토리."


 코토리는 우미의 손을 꼭 붙잡고 아이돌연구부 부실을 나왔다. 우미가 전달하고자 했던 달달한 마음과 '그냥 못이기는 척 받을걸 그랬나?' 하는 후회의 씁씁함을 남겨 둔 채로.

Posted by 비좀
,

되게 유명한 스레..인가 SS인가를 패러디한 글입니다. 그런데 원본이 무슨 내용이었더라.. "~~한테 ~~를 들켜버리고 말았다"는 제목이었던건 확실한데....


ㅡㅡ

쿠로사와 다이아는 매우 언짢은 표정으로 굳게 닫힌 자신의 방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방 청소는 내게 맡겨! 이정도는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으니까!' 라며 자신만만하게 말한 루비가 아직까지도 자신의 방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청소는 오래 걸리더라도 제대로 하는게 중요해요" 라고 루비에게 말을 해 놓긴 했지만 - 

'벌써 40분째야. 부엌 청소까지 다 끝내놨는데 아직까지 내 방에서 뭘 하고 있는거람?'

이런 상황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정말로 아직까지 청소중인걸까? 아니면 안에서 딴짓을 하는건가? 혹시 안에 들어가서 자는거 아니야? 같은 생각이 다이아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언짢은 표정으로 문과 눈싸움을 하다 '아, 그래,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가면 되잖아.' 라는 생각이 든 다이아는 문을 단숨에 열어젖혔다. 루비가 딴청을 피우고 있으면 놀래켜줄 요량이었다.

"하와와와왓?!"
"루비! 뭘 하고 있는건ㄱ..."

문을 열어젖히자 맨 처음 보인 건 루비의 휘둥그래진 눈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보인 건 - 자신이 꼭꼭 숨겨둔 만화책, 그리고 그 만화책을 꽉 쥐고 있는 루비의 조그마한 손이었다.

"그, 그 책은 어떻게..?!"
"어, 언니가 무서워..!!"

루비가 그 책을 들고있다는 걸 안 순간, 흐트러짐이라곤 찾아 볼 수 없었던 다이아가 온 몸으로 '흐트러짐'을 표현하고 있었다. 휘둥그래진 눈, 온 몸과 함께 흔들리는 동공, 미세하지만 확실하게 다닥,다닥 떨리고 있는 입. 다이아가 평소에 말하는 '쿠로사와 가(家)에 걸맞은 품위있는 행동' 하고는 거리가 너무나도 멀었다. 그도 그럴것이 - 지금 루비가 들고 있는 만화책은 말하자면 루비를 향한 새까만 감정들의 현현(顯現), 미성년자의 신분이라면 봐서도 안되고 볼 수도 없는, 그런 내용이 가득한 책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어, 언니한테.. 언니한테 범해질거야..!!!"
"아, 아니야, 자, 잠깐만. 오해입니다! 오해라구요!"
"저, 정말이야? 그, 그럼 이 책들.. 다이아 언니꺼가 아닌거야?"
"아니, 그, 그건 아니지만."
"하와와와왓...!!! 언니한테 범해질거야!!!"

루비는 쿠로사와 저택에 전부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며 앉은 자세에선 있을수 없는 속도로, 손까지 써가며 뒷걸음질 쳤다. 그 뒷걸음질을 멈춘건 고풍스러운 옷장이었다. 옷장에 부딫히는 둔탁한 소리가 다이아의 방을 가득 채울정도로 났는데도 불구하고 루비는 "언니가 무서워! 누가 좀 살려줘요!" 라는 목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마침 집에 아무도 없으니까 다행이지.' 

다이아는 지금 섣불리 다가가는 건 역효과를 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세 발자국,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루비, 이, 일단 진정을..."
"......"

차분하게 말한 게 효과가 있던 것일까, 방금 전 까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루비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그래, 하긴.. 고등학생 이니까, 그렇지. 한창 관심 가질 나이라고 생각 해."
"그, 그렇지요?"

휴, 다행이야. 이제야 좀 진정 했구나. 집에 아무도 없었기에 다행이지 부모님이 계셧으면 큰 일이 났겠어. 다이아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천천히, 한 발자국씩 루비에게 다가갔다.

"그러니..까.. 이런 책을 읽을 수도 있..고."
"그래요.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루비."

뒤로 물러 섰던 만큼 다시 천천히 다가간 다음, 다시 한 발자국 내딛으려 하는 순간. 다이아는 대지진이 일어난 루비의 동공을 마주 보았다. 지금 다가가면 다시 소리를 지를 게 분명해. 다이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앞으로 나섰던 왼발을 거두었다.

"그,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벌벌 떠는건가요? 무서워 할 필요 없잖아요..?"
"그,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걸..! 범할꺼잖아! 이 만화책.. 근친백합물이었어, 초 매니악한 방법으로 범해질거야!"
"루, 루비! 조, 조용히 하세요! 그, 그만..!"

'근친백합'이라니 그런 안좋은 말은 또 어디서 주워 들은거야? 다이아는 잠시 뜨악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저 침대 위에 나를 묶어놓고선 '그동안 가르쳐주지 못한 거.. 오늘 알려줄게♡' 따위의 대사를 하며 날 범할거잖아?!"

저 대사는 분명 저 책에서 나오는 대사였지, 정말, 쓸데없는 곳에서만 응용력이 뛰어난 아이라니까.

"지금 읽고 있는 책에서 그런 대사 인용하지 마세요! 누가 들으면 오해한다구요!"
"완전 매니악한 대사.. '지금, 루비의 안에 들어 갈거야.' 같은 말을 들으면서..!"

그 대사를 듣자 얼굴에 열이 확 오르는 것이 느껴져 다이아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나, 정말 파렴치한 책을 읽고있었구나.. 반성해야겠어.

"그, 그렇지 않다니까요! 그, 그리고 그 대사는 별로 매니악한 대사도 아니고..!"
".....뭐?"
"아."

말실수를 한 다이아의 머릿 속에서 '말은 항상 조심히 하셔야 해요. 말이라는건 화살이랑 똑같아. 주워담을 수도 없고, 한번 꽃히면 그 상흔이 계속해서 남으니까요.' 라는 말이 울려 퍼졌다. 저 말은 루비에게 조언이랍시고 자신이 해준 말이었다.

"아뇨, 그, 방금전 말은 그.. 실수로.."
"그..그정도는 기본인거야? 방금 전 대사도 엄청나게 심했는데..? 그 정도로는 만족 할 수 없는거야..?"
"아, 그, 그러니까 정말.. 실수라니까요.."
"다이아 언니가 점점 먼 곳으로 가고있어.. 아니, 내 안의 다이아 언니는 원래 머나먼 존재이긴 하지만.. 다른 의미로 멀어지고 있어..!"

안그래도 벌벌 떨고있었는데.. 이런 결정적인 말 실수까지 하다니. 이젠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걸까, 내 사랑스러운 여동생, 사랑스러운 루비는 이제 나를 거부하고 멸시하고 무시하는걸까, 그런 삶이라면 차라리 죽는게 나을지도 몰라. 아아, 이럴 줄 알았다면 이미지를 쌓는답시고 루비한테 엄격하게 대하지 말고 진즉에 루비를 꽉 안아보기라도 할걸! 후회가 물 밀듯 밀려오는 순간이었다.

"..그래.. 어쩌면 내가 잘못했던걸까.."
"네?"
"그동안 언니한테 너무 어리광만 부리고, 계속 아이인 채로만 있었던 게 문제였던 걸지도.. 몰라."

루비는 벌벌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고 다이아를 올려다보았다. 다이아는 그 눈빛을 보며 대화 화제가 바뀐 것에 대한 안도를 느끼고, 그와 동시에 저런 파렴치한 책을 읽는 언니를 아직까지 믿어주는 루비에 대한 기특함, 그리고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죄악감을 동시에 느꼈다.

"그래서.. 그런 루비를 어른으로 만들려고..그렇게.. 강압적으로... 그래, 그런 거라면.. 납득 할 수 있기도..한데.."
"아, 아니 갑자기 왜 협조적으로 변하는 건가요, 그런 건 납득하면 안 되요! 루비."
"그래도.. 거부하면 더 심한 꼴을 당하잖아..?"
"대, 대체 그 짧은 시간 동안 어디까지 읽은 거에요?! 그런 거 안할 거라니까요!"

루비는 다이아의 말을 듣고 조그맣게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가로 젓더니, 바닥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 선 다음 다이아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다 다섯 발자국 정도의 거리를 남기고 멈춰 섰다.. 벌벌 떨리던 루비의 눈은 어느샌가 굳건한 결의로 가득 차있었다. 그 기백과 결의에 밀려, 다이아는 자기도 모르게 또 한 발자국 뒤로 물러 섰다.

"그러면.. 내 눈을 보고, 똑바로 말해 줘!"
"..뭘?"
"[나는 여동생을 범하고 싶지 않고,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없습니다.] 라고..!"
"..그런 선언까지 해야 하는 건가요..?!"
"그런 말 안해주면 안심이 안되는 걸! 마루쨩이 위험할 지도 모르니까..!"

난 딱히 연하 취향이 아니라 루비, 너를 좋아했는데 마침 네가 내 동생이었을 뿐인데..

"으음..."
"..역시 거짓말로 선언 하는 건 싫은거야?!"
"아니, 그런건 아니에요! 말 하면 되잖아요, 말 하면... 그러니까.. '나는 나의 여동생을..'"

그래, 이런 대화는 단숨에 끝내버리자. 다이아는 쏟아 붙듯 루비의 선언을 따라 하려 했다가 잠시 멈칫했다.

"저기, 잠깐만."
"..응?"
"그러니까.. '범한다'의 범위는 정확히 어디까지인거죠?"
"...에?"
"서로의 기준점이 다를 수도 있잖아요. 저는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 루비한테는 범한다고 생각된다던가.."
"...그.. 그건.."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는게 서로에게 좋지 않을까 생각되는데요."
"그것..도 그렇네."
"그럼.. 루비의 기준은 어디까지죠?"
"으음.. '키스'?"
"엑."
"엣?"

동시에 터져나온 외마디 탄성, 그 탄성끼리 맞물린건지 루비와 다이아는 서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아, 아니. 친구 끼리라도 보통 친한 사이라면 할수도 있지 않나요?"
"보통은 그런거 안해! 언니 무서워!!!"
"아니, 저, 정말인가요? 저.. 한번은 마리랑 해본 적도 있었고.."
"보통은 그런거 안 한 다니까... 그, 그런데.. 나랑은 한 적 없으면서 마리 선배님이랑은 해봤다고....?"
"루, 루비는 훨씬 더 소중하고.. 두근거리는, 나한테 있어선 그런 사람이니까.. 여, 여하튼. 저 키스라는건 볼이라던가, 입술까지에요. 그런 책에 나오는 '아랫입에 키스' 같은 얘기를 하는게 아니라는 걸 알아 줬으면 해요."
"알겠어... 저기, 그런데 그러면.. 언니는 어느 정도의 범주 까지라면 그 선언, 할 수 있어? 내 기준이 불만이라면 언니가 정해도 되니까, 내가 맞춰 나갈 수도 있는 거니까.."
"으, 으음.."

다이아는 그 말을 듣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내가 루비한테 하고 싶은 것은 어디 까지일까, 방금 전엔 홧김에 말해 버릴 뻔 했지만, 루비의 그 선언을 쉽게 따라해도 되는 걸까. '약속이라는 건 함부로 깨는 게 아니에요, 신뢰의 무게란 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무겁답니다.' 라는 말도 루비한테 하지 않았던가.

"..못 정하겠네요."
"..뭐?"
"어떤식으로 정하라고 해도.. 그.. 뭐라고 해야하나, 욕심이 난달까, 포기 할 수 없는것들이 많아서."
"여. 역시 범하고 싶은거였어어어어어어!!!"

루비의 눈동자에서 불타고 있었던 결의는 사라지고, 루비는 자신의 동공이 떨리는 속도만큼이나 재빠르게 뒷걸음질 치다 옷장에 꼬리뼈를 갖다 박고 말았다.

"그.. 그래도, 역시, 오랫동안 품어왔던 감정에 거짓말을 할 순 없는 노릇이고.."
"그, 그런 감정을 품어왔다는건 전혀 듣고싶지 않아아아아아!!"

루비의 울먹이는 목소리를 계속 듣고 있자니, 다이아의 가슴 속에서 울화와 함께 여태껏 느끼지 못했던 미지의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다이아는 일부러 쿵,쿵 발소리를 내며 루비한테 다가간 후 팔을 빠르게 뻗어 옷장을 짚었다. 뒤로도, 앞으로도 도망 칠 수 없는 루비는 파들파들 떨리는 눈으로 다이아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눈물이 눈꼬리에 맺힌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루비의 모습이 다이아에게는 너무나도 귀엽게 느껴졌다. 그래, 방금 전까지 내 가슴 속에서 요동치던 감정은 다름 아닌 '가학심' 이었구나.

"조.. 조용히 하세요! 진짜로 범해버리기 전에..!"
"이, 이젠 본성이 튀어나온다아!!!!"
"시, 시끄러워요! 확 리본을 입에 물리고 범해버리기 전에 조용히 하라니까요!!"
"뭐, 뭐야 그 시츄에이션은?!!"
"흔한 시츄에이션이니까, 이런거에 일일히 놀라지 마세요."
"흔한거야!?!"
"루비의 이곳 저곳에 제 자국을 남기고 싶어요, 키스하다가 피부를 잘근잘근 꺠물어 나만의 것이라고 표시하고 싶어, 그래서 루비는 그 자국을 가리느라 여름에도 긴팔을 입고.."
"그런건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설정이야?! 오리지널 설정이야?! 평소에 나를 보면서 그런 걸 생각했던거야?!"
"다른 아이들이 없는 곳에서 루비랑 잔뜩 키스하고 싶어요! 루비도 나를 잔뜩 만져주고, 잔뜩 키스해줬으면 좋겠고! 루비의 손을 잡고 '저희, 오늘부터 1일입니다!' 라고 자랑하고싶어요!!!"
"에, 엑?!"
"..아."

한 순간 욕망에 못이겨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가, 이 이상은 정말로 돌이킬 수 없다는 걸 깨달아버렸다. 가슴 속에서 들끓어 오르는 간질간질함, 그리고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듯 한 얼굴.

다이아는 더 이상 루비 앞에 서 있을 수 없었다.

"그, 그런거니까.. 알겠지?! 아,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루비!!"

다이아는 저 말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방에서 도망치듯 나갔다. 주인 잃은 방에선 기운과 얼이 함께 빠져나가 털썩, 주저 앉은 루비와 이 사태의 발단이 된 책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 이야기인데,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마루쨩 선생님."
"저기, 루비."
"응?"

하나마루는 이 기나긴 이야기를 듣고, 얼이 빠진단 표정으로 루비의 말에 답했고 -

"그래서 지한테 상담을 받고 싶은거유 고백 받았다고 자랑하고 싶은거유?"

루비는 둘 중 하나, 아무것도 못 정한체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Posted by 비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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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근한 햇살, 열린 창문 틈새로 스며들어오는 바람, 그리고 그 바람에 섞여있는 약한 꽃 향기. 세상에서 제일가는 수면제는 아무도 없는 학생회실에 흘러 들어오는 이런 따사로운 공기가 아닐까. 히마와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학생회 부회장 - 스기우라 아야노에게 필요한 서류들을 열심히 정리하는 중이었다. 아니, 정리하고 있'었'다. 히마와리는 10분 전만 해도 바쁘게 서류를 정리했었지만 지금은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있으니까. '오늘은 언니랑 약속 잡은게 있어서 먼저 갈게!' 라며 멋대로 사라져버린 사쿠라코가 고맙게 느껴 질 정도로 오래간만에 평화로운 방과 후였다. 원래 히마와리에게 방과 후라는건 천방지축인 소꿉친구 사쿠라코에게 이리 저리 휘둘리는 시간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세상엔 히마와리를 평온하게 둬선 안 된다는 법칙이라도 있는 듯, 히마와리의 평화는 아무런 징조도 없이 세차게 열린 학생회실 문과 함께 깨져버리고 말았다.


"어이 - ! 스기우라!"

"꺄아아아아악?!"

"뭐야? 귀청 떨어지겠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노크 정도는 해주고 들어 와 주세요 니시가키 선생님! 가슴이 철렁 했잖아요."


 빛나는 은발, 그리고 그 은발보다 더더욱 빛나는 적안. 여기저기 때가 탄 실험실 가운과 어올리지 않는 듯 하면서 어올리는 보라색 원피스. 갑자기 나타나 히마와리의 가슴을 철렁이게 한 범인은 나나모리 중학교 제일의 괴짜라고 불리는 '니시가키 나나' 선생이었다.


"많이 놀랐어? 미안해. 오오무로."

"제 이름은 후루타니 히마와리에요. 몇 번을 말했는데.."

"아, 맞다. 그랬었지.. 자꾸 햇갈린단 말이야."


 히마와리는 니시가키 선생님은 마츠모토 선배님 빼면 아무도 못 알아보시잖아요? 라고 한마디 쏘아 붙히고 싶었으나 태평스럽게 웃는 선생님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스기우라는 없나? 마츠모토도 어디 갔는지 안보이고."

"스기우라 선배님은 프린트를 미제출한 학생이 있으니 프린트를 찾아오겠다고 하셨고.. 마츠모토 선배님은 '오늘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오늘 하루만 일찍 하교할게. 미안해.' 라는 문자를 남기셨어요. 아마 하교 하셨을거에요."

"흐음.. 그래..?"


 니시가키는 자신을 보며 또박또박 말하는 학생을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침착한 성격에 언변도 뛰어나니 이 학생은 자신의 실험을 도와주기 제격이었다. 마츠모토 만큼은 아니겠지만.


"저기.. 후루타니."

"네?"

"선생님 좀 도와주면 안될까? 금방 끝나는 일이니까."


 사쿠라코한테 이리저리 휘둘린 사람의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도망쳐야 한다.'고, 하지만 방금 전 까지만 해도 태평하게 졸고 있던 모습을 보인 사람이 '지금은 바빠서 안 될것 같은데요.' 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알앗어요, 선생님."


 설마, 별 일이 생기기나 하겠어?



"이게 뭔가요? 선생님......"


 니시가키를 따라서 온 과학실엔 번들번들 빛 나는 은빛 캡슐이 있었다. 타임캡슐이랍시고 문방구 같은 곳에서 파는 싸구려 캡슐하고 똑같이 생겼는데, 그런 캡슐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캡슐은 사람 두 어명 정도는 너끈히 들어 갈 정도로 크다는 것이었다. 


"타임머신이야."

"..네?"

"타임머신, 이라고."


 타임머신이라는게 가능해요? 아니, 그 전에, 타임머신을 만들 정도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이런 촌동네의 과학선생님으로 있는거에요? 선생님은 대체 맨날 과학실에 틀어 박혀서 뭘 만들고 있었던거죠? 묻고 싶은게 산더미 같았으나 물어봤자 태연자약한 너털 웃음만 들을 게 뻔하니, 히마와리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뭐, 별 건 아니고.. 3시간 전 쯤으로 돌아가서 과학실에서 쿠키 포장을 뜯으려 하는 나를 말려준 다음 다시 이 시간대로 돌아오면 돼. 맛있어 보이는 쿠키가 있어서 샀는데 맛이 완전 꽝이였거든. 환불 받고 싶어서 말이야. 과거의 내가 쿠키를 안 뜯으면 포장을 뜯어버린 쿠키가 돌아 오지 않겠나 싶어서."


 심지어 타임머신을 그런 좀스러운데다 쓰는 건가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머리가 지끈거려 히마와리는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탑승감에 대한 평도 들어보고 싶어. 저번에 마츠모토한테 타임머신을 태워 봤다가 '너무 덜컹거려서 허리가 쑤셧다.' 라는 평가를 받았거든. 이번 타임머신은 그 부분을 상당히 개량한 작품이야."

"아,네......"

"자, 그럼 설명은 여기까지. 한번 타 봐."

"하지만 이 캡슐, 타는 곳이 - "


 히마와리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싸구려 비프음이 들리더니 자그마한 구멍 하나 안 뚫려있던 은빛 캡슐 하나가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한 가운데가 뻥, 하고 뚫렸다. 뚫린 구멍으로 보이는 캡슐 안에서 제일 먼저 보인 것은 푹신해 보이는 메트릭스가 세로로 서 있는 모습, 그리고 그 다음으로 보이는 건 여러가지 계기판들이 쉴 새 없이 비프음을 내며 무언가를 검침하는 모습이었다.


"문이 닫혀있던거야. 리모콘으로 열 수 있어. 자, 여기."


 니시가키는 그렇게 말하며 히마와리에게 리모콘을 던졌다. 히마와리는 느닷없이 날아오는 리모콘을 놓칠 뻔 했지만 겨우겨우 붙잡았다. '타임머신'이라는 거창한 물건의 리모콘 치고는 리모콘은 아주 볼 품 없었다. 히마와리네 집 바닥에서 굴러다니는 Tv 리모콘이랑 비슷하게 생겼으니까.


"기능이 몇 가지 있지만 뭐.. 그런 건 알 필요 없고. 왼쪽 상단에 있는 전원 버튼으로 전원을 키고, 중간에 있는 초록색 버튼 긴 거 있지? 그걸로 문을 열고 닫는거야. 그리고 빨간색 버튼은 타임머신 가동 버튼이고.. 아, 가고 싶은 시간대는 하단에 있는 키 패드로 설정하면 돼. 년도를 설정하고, 월,일을 설정하고, 마지막으로 시간을 설정하는거야. 내가 딱 3시간 전으로 가게 세팅 했으니까, 지금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타기만 하면 돼. 알겠지? 그럼 재밌는 시간여행 하고 와. 거기 메트릭스에 있는 안전벨트 꼭 매고."

"에, 예?"


 자기가 할 말만 다 끝내버리고 니시가키는 히마와리를 캡슐 안에 밀어 넣었다. "꺄악?! 자, 잠깐만요! 니시가키 선생님!" 이라는 히마와리의 불평은 들리지도 않는 듯, 니시가키 선생은 콧노래를 부르며 뚫린 구멍 근처에 있는 좁쌀만한 돌기를 꾹 눌렀다. 그러자 싸구려 비프음이 나고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자, 잠깐만요!! 선생님!!"


 계기판이 미친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에 호응하듯 방금 전 까지 미동도 없던 기체가 오래된 경운기마냥 덜덜 떨었다. 마츠모토 선배님이 이 기계를 타 봤다곤 했지만, 정말 괜찮은걸까? 히마와리는 눈을 꾹 감고 니시가키가 준 리모컨을 꽉 쥐었다. 점점 더 높아지는 비프음은 히마와리의 불안을 더더욱 가속했다.


 하지만 히마와리의 불안감은 - 과학실 한복판에 있었던 거대한 타임머신이 폭음을 내며 어디론가 사라짐과 동시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쉼 없이 덜컹거리는 타임머신 속에서 히마와리는 좌, 우로 데굴데굴 굴렀다. 눈물을 찔끔 흘리며 "이게 개량된 정도면 예전엔 얼마나 더 심했던거에요?!" 같은 볼멘 소리를 하며 따졌으나 캡슐 안에서 홀로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히마와리의 질문에 대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타임머신은 그 볼멘소리를 듣고 깨달은 바가 있는 듯, 점점 진동이 잦아들더니 이내 완전히 멈추었다.


"다.. 끝난 건가요?"


 히마와리의 말을 들어주었는데도 자신을 미심쩍게보는 히마와리가 아니꼬와 보였던걸까, 교통사고 현장에서나 들어 볼 법 한 둔탁한 소리가 히마와리의 귀청을 찢었고, 타임머신 안은 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엄청나게 흔들렸다. 타임머신이 요동침에 따라 히마와리의 몸도 이리저리 요동쳤고, 영원처럼 느껴지던 격동이 끝날 때 즈음, 많이 들어본 비프음이 들리더니 스르륵, 문이 열렸다. 타임머신의 문 틈새로 들어오는 강력한 햇빛에, 히마와리는 눈을 꿈뻑거렸다.


"......뭐야?"


 강렬한 햇빛 속에 아련하게 실루엣이 비쳤다. 귀를 덮는 단발, 펄럭거리는 가운. 실루엣 밖엔 보이진 않지만 너무나도 익숙한 모양새였다. 눈이 점점 빛을 받아들이자 눈 앞에 아른거리기만 하던 주변 환경이 점점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밑단에 얼룩이 잔뜩 묻어있는 커튼이 바람을 받아 일렁이고 있는 모습, 세월의 풍파를 정통으로 맞아 모서리 부분이 깨져있는 대리석 제 책상들, 등받이가 없어 매우 불편한 둥그런 의자. 타임머신을 타기 전에 봤었던 과학실의 풍경, 그대로였다.


 제대로 도착 한 걸까? 히마와리는 핸드폰부터 꺼내 보았다. 방금 전 시간이 오후 5시 16분, 지금 시간이 2시 10분. 3시간 전으로 보낸다고 했으니 제대로 도착한 게 맞은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니시가키 선생님.. 아야야야.."


 히마와리는 욱신거리는 허리를 움켜쥐고 타임머신에서 나왔다. 나오면서 타임머신을 위, 아래로 살짝 훑어봤는데, 과학실 바닥에 '꽃혀'있는 번들거리는 은빛 캡슐의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방금전에 난 둔탁한 소리는 아마도 이것이 원인이었을까. 히마와리는 본래 시간대로 돌아가면 이런 문제가 있다고 말해줘야 겠구나. 생각했다.


"으음..그러니까, 익숙한 얼굴인데. 누구였더라..."

"후루타니 히마와리에요! 선생님! 나 참, 몇번을 말했는데. 제발 기억 해 주세요!"

"아 - ! 생각났다. 놀리는 맛이 있었지. 후루타니 학생회장."

"네?"

"학생회장쪽은 오오무로 쪽이였나? 너희 둘, 항상 붙어다녀서 워낙에 햇갈렸어야지. 아, 그런데 너 키가 좀 더 크지 않았나? 분명 내 코 근처까진 왔던 거 같은데 - "

"자, 잠깐만요. 선생님. 그게 무슨 소리에요? 학생회장이요? 제가?"

"응?"

"학생회장님은 마츠모토 선배님이잖아요? 저는 그냥 학생회 임원 - "

"학생회장이 마츠모토? 그게 언제적 얘기야? 마츠모토는 지금 고3이라구."

"...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히마와리는 어리둥절해하며 다시 핸드폰을 꺼냈다. 2시 11분, 4월 19일. 여기까지는 이상할 게 전혀 없었다. 눈을 다시 꿈뻑였다. 2시 11분, 4월 19일. 아무리 봐도 이상할 게 없었다. 


"저기,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을 좀 해줬으면 하는데."

"저, 자, 잠시만요."


 히마와리는 정확한 날짜를 알아보기위해 핸드폰에 탑재되어 있는 달력 어플을 켰다. 달력 어플은 오늘의 날짜를 정확하게 표현 해 주고 있었다. 2014년 4월 19일. 


"....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히마와리는 철렁이는 심장을 애써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니시가키 선생님. 오늘이 몇 일이죠?"

"4월 19일인데, 아니, 그런데 무슨 일인지 설명을 - "

"년도는 어떻게 되요?"

"묻는 말엔 대답 안하고 계속 뚱딴지같은 질문만 하지 말아줄래? 2014년이잖아. 헤이세이 26년."


 니시가키의 말투는 그 이상 태평스러울수가 없었으나 니시가키의 말은 히마와리에게 있어서 청천벽력이나 마찬가지였다. 히마와리가 원래 있던 시간대는 '2011년' 4월 19일 5시 16분이었기 때문이었다. 3시간 전의 과거로 간다고 하던 타임머신이, 자신을 3년 후의 미래로 보내버린 것이다. 히마와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째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질 않는건지! 


".. 이 말을 세번째로 하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알려주지 않을래?"

"아, 죄송합니다. 너무 황당한 일을 겪어서......"


 히마와리는 차근차근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했고, 니시가키는 그 말을 듣고 풉,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아.. 내가 한 짓이니 누구한테 탓 할수도 없고 이거야 원..... 3년 전의 나는 그런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구나. 바보같아."

"죄송합니다......."

"아니 뭐, 네가 죄송 할 이유는 없지."

"그, 그러면 일단.. 돌아 가 볼게요."


 히마와리는 뒷통수를 긁적이며 꽉 쥐고 있었던 리모콘의 전원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히마와리는 2014년의 공원을 걷고있었다. '한숨을 쉬면 있던 복도 다 달아난다구요?' 라고 말하는 히마와리도 오늘만큼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 마다 한숨이 픽,픽 나왔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마 하늘에 대고 욕을 퍼부었을것이다. 눈에 닿는 모든 곳이 익숙하지만 그곳에 자신이 있을 곳은 없는 시간대로 버려졌으니 말이다.

"하아..."


 3년 전 자신이 만든 타임머신이 오작동을 한 여파로 타임머신이 아예 망가져버린것같다. 내가 한 짓이니까 책임지고 오늘까진 이 기계를 고쳐놓겠다. 자신을 이런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니시가키 선생이 히마와리에게 사과를 하며 한 말이었다.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요."

 시간여행에 관련된 소설은 공상 속의 이야기 일 줄 알았는데, 자신이 그런 상황의 주인공이 될 줄은. 히마와리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다가 한숨을 멈추었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는건 언제나 바래왔던 일이잖아요? 히마와리. 어차피 한숨을 쉬어봤자 해결되는 일은 하나도 없잖아요! SF소설의 주인공이 됐다고 생각하자구요! 히마와리는 주먹을 불끈 쥐고 방금 전하곤 다르게 사뿐, 사뿐 한걸음 내딛었다. 카에데는 잘 컸을까요? 3년 후의 나는 어떻게 지낼까요? 사쿠라코는 3년 동안 철 좀 들었을까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신의 집으로 가던 도중 - 


"... 양배추를 안샀었네."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공원에 조성되있는 수풀에 재빠르게 몸을 숨겼다. 목소리가 조금 차분하긴 하지만 한 번만 들어도 바로 알 수 있는 짜증나는 목소리. 잘못 들을래야 잘못 들을 수가 없는 목소리였다. 히마와리는 수풀 밖으로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히마와리가 생각했던 사람이 공원 한복판에 서 있었다.


"뭐, 지금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닌데."


 석양을 머금은 파도가 넘실 거리는 것 같은 웨이브 진 금발, 인형을 보는 것 같이 동그랗고 커다란 눈, 보기 좋게 마른 체형. 3년 전의 모습에서 변한 것은 그저 키 뿐이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언제나 히마와리가 챙겨줘야 했던 철부지 여동생 같았던 존재, 그리고 동시에 언제나 히마와리의 곁에 있어주었던 히마와리의 라이벌, 오오무로 사쿠라코였다.


'3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 던 걸까요...?'


 3년 뒤의 사쿠라코나 3년 전의 사쿠라코나 생긴 것은 그대로인데, 스치듯 보면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 할 정도로 분위기가 변했다. 원래 사쿠라코는 좋게 말하면 따스하고 개구쟁이 같은 분위기를, 나쁘게 말하자면 멍청해 보이는 분위기를 풀풀 내뿜고 다녔는데, 지금 히마와리가 보고 있는 사쿠라코는 딱 보기만 해도 빈틈 하나 없어보였다. 어째서 이렇게나 달라보이는걸까. 히마와리는 좀 더 고개를 내밀고 사쿠라코를 빤히 쳐다보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표정일까? 원래라면 항상 미간을 찌푸리고 있거나 방실방실 웃던 사쿠라코가, 지금은 완벽한 무표정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조금 더 달라진 것이 있을 것 같은데 - 라고 생각하며 사쿠라코의 위, 아래를 눈으로 훑던 와중.


"......"

".... 아.. 안녕 하세요? 사쿠라코."

 

 사쿠라코와 눈이 마주쳤다.


"... 약을 다시 먹어야 하려나."


 자신의 소꿉친구가 자신보다 훨씬 어린 모습으로 눈 앞에 나타났는데도 불구하고, 사쿠라코는 시큰둥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히마와리의 표정이 한순간, 펴졌다가 다시금 찌푸려졌다.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의아하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알고있는 사쿠라코라면 분명 그 자리에서 대 폭소를 하며 나를 놀렸을탠데. 뭐, 사람이 변해서 그런 일은 안한다고 쳐도 친구를 봤으면 인사는 해야 되는 것 아닌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의아함은 곧 울화로 바뀌었다. 히마와리는 쭈구렸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저기요! 사쿠라코!!"

"......."


 사쿠라코는 우뚝 멈춰서더니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무표정했던 얼굴엔 '짜증남'이라는 감정이 번져있었다. 저런 얼굴의 사쿠라코는 여태껏 살면서 수 없이 봐 왔는데도 불구하고, 사쿠라코가 내뿜는 분위기에 방금 전까지 분기탱천하던 히마와리는 입을 다물었다. 대체 3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레 그 개구장이가 이렇게나 살벌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걸까요? 히마와리는 자기 마음 속에 질문을 던져봤지만 딱히 답은 나오지 않았다.


"... 짜증나게, 뭔데? 오랜만에 나와서 무슨 말을 할 참인데?"

"오, 오랜만이라니 무슨 소리에요? 바로 옆 집 이잖아요? 서로 다른 학교에 진학했더라도 얼굴은 언제든 볼 수 있을탠데."

"...?"


 짜증으로 가득했던 얼굴이 풀렸다. 히마와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무슨 이상한 소릴 하는거람. 너는 대체 누구야?"

"후루타니 히마와리잖아요! 당신은 소꿉친구의 얼굴도 못알아보는건가요?!"

"하아... 그러니까 그게 이상한 소리인거라고, 후루타니 히마와리는 - "

"하긴, 전 3년 전의 과거에서 왔으니까. 얼굴을 못 알아 보는것도 이해 못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방금 전엔 좀 심했잖아요!"

"......"


 풀렸던 사쿠라코의 표정이 다시 찌푸려졌다. 방금 전에 짜증을 내비쳤던 분위기와는 또 다른 얼굴이었다. 생각하기 복잡한 문제가 나올 때 마다 저렇게 얼굴을 찌푸렸지. 많은 것이 변하긴 했지만 변하지 않은 모습도 있군요. 변함없는 사쿠라코의 모습을 보니 방금 전 까지 사쿠라코가 짜증냈다고 겁을 먹었던 자신이 바보같았다.


"3년 전의 과거에서 왔다고? 그 말. 계속 해 봐."

"네? 사쿠라코도 뭔가 말 하려던 것 아니었나요?"

"별로 중요한 얘기는 아니었으니까. 빨리 얘기 해 줘."

"아, 네..."


 히마와리는 오늘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했다. 얼굴을 찌푸린 체 이야기를 들었던 사쿠라코는 히마와리의 설명이 끝날때 쯤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니시가키 선생이라면 그럴 법 하지. 고생이 많네, 히마와리."

"믿어 주는건가요?"

"황당한 얘기지만 못 믿을 얘기는 아니고. 히마와리라면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진 않을테니까. 특히 나한텐."


 나한텐 거짓말을 하진 않을테니까, 라며 싱긋 웃는 사쿠라코를 보니 얼굴이 화악 달아오르는게 느껴 진 히마와리는 고개를 돌렸다. 어쩜 저렇게도 어른스러운 미소일까요, 그 개구쟁이가 이렇게 컸다니 정말 믿겨지지가 않네요. 히마와리는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킨 다음에야 다시 고개를 사쿠라코 쪽으로 돌릴 수 있었다.


"오늘까진 여기 있어야 된다는 거지? 갈 데도 없을탠데 우리 집이라도 괜찮다면 같이 갈래? 지금 장 보고 막 점심을 차리려던 참이었거든. 너도 먹은 게 없다면 같이 식사해도 괜찮고."

"아, 네! 물론이죠, 고마워요 사쿠라코."


 히마와리는 사쿠라코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방금 전에 사쿠라코는 저한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요?' 라는 의문과 함께.



"들어올 때 인사같은거 안해도 돼, 나밖에 없으니까."

"네? 나데시코 언니는 어디갔어요? 하나코는..."

"나데시코 언니는 대학때문에 도쿄에서 자취, 그 김에 '하나코는 똑똑하니까 이런 곳에 있긴 아깝다' 면서 하나코도 전학 보냈어. 아예 가족 전체가 도쿄로 갈까? 라는 말도 나왔는데 아버지 직장 문제도 있고, 나도 도쿄같이 복잡한 곳은 싫으니까 그냥 이곳에 있겠다고 했고. 오늘은 엄마랑 아빠가 오랜만에 나데시코 언니 잘 지내는지 봐야겠다고 도쿄로 올라가서 나 혼자인거야."

"아..."


 히마와리는 신발을 벗으며 집 안을 둘러보았다. 하나코도, 나데시코도 없는 거실이라니, 그동안 봐온게 있기 때문일까, 너무나도 쓸쓸해보였고, 너무나도 이상하게 다가왔다.


"외롭지 않나요?"

"가끔은 하나코나 나데시코 언니의 잔소리가 그리워 질 때가 있긴 한데... 어쩔 수 없지, 내가 선택한 거니까. 그리고 혼자 집 지키는 것도 나름의 장점이 있고."

"혼자 사는것의 장점이라 함은?"

"글쎄? 샤워한 후에 알몸으로 있어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는 거?"


 히마와리는 너무나도 사쿠라코 스러운 대답에 웃음을 참다가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마룻바닥과 입맞춤을 할 뻔 한 히마와리를 구해준 건 사쿠라코의 따듯한 팔이었다.


"조심해야지."

"아, 미, 미안해요."

"미안 할 필요는 없는데..."


 히마와리는 조심스럽게 사쿠라코의 품에 빠져나와 벗던 신발을 마주 벗어 단정하게 놓은 후 오오무로 가의 거실에 들어왔다. 사쿠라코의 신발도 단정하게 놓아줄까 싶었지만 사쿠라코는 이미 신발을 단정하게 벗어 둔 채였다. 원래라면 신발이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을탠데, 그동안 '신발은 단정하게 벗어 둬야죠!' 하고 잔소리를 한 덕분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미소가 지어졌다.


"많이 배고파?"

"아, 아뇨, 그렇게 많이 배고프진 - "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히마와리의 배가 꼬르륵, 울렸다. 사쿠라코는 그걸 듣더니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하긴, 5시쯤에 여기로 온거니까 슬슬 배고플 시간이지, 최대한 빨리 준비할게. 거실에 앉아서 쉬고있어."

"네? 그러면 제가 너무 미안한데."

"별로 미안할 거 없어, 오히려 집에 초대해 놓고 식사 준비 도와달라고 하는게 더 미안해. 간단한 거 할테니까 너무 불안해 하지 말고, 믿진 않을테지만 이제 요리 꽤나 잘하거든."

"....."


 너무나도 단호하게 말해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히마와리는 풀 죽은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한 후 쇼파에 앉았다. 부엌에서 쌀을 씻는 사쿠라코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쿠라코를 보고 있자니 방금 전에 넘어질 뻔 한 자신을 감싸준 것이 생각나 얼굴에 열이 올라왔다. 히마와리는 고개를 도리질 치고 3년 뒤의 오오무로 가(家)를 좀 더 둘러보기로 했다. 별로 바뀐 거 없는 것 같으면서도, 많은게 바뀌었구나. 체크무늬 커튼도 하얀색 실크 커튼으로 바뀌었고, TV도 좀 더 커다란 TV로 바뀌고.. 이런걸 보고 있자니 자신이 살던 집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해졌다.


"사쿠라코."

"응? 왜?"

"잠시 저희 집에 다녀와도 괜찮을 - "

"안 돼."

"네?"

"... 주먹밥 같은거 할꺼라서 점심 준비는 금방 끝나."

"금방 둘러보고 올게요. 집이 어떻게 변했는지만 살짝 보고.."

"글쎄 안된다니까!"


 톤이 착 가라앉았던 차가운 목소리에 노기가 섞여있었다. 히마와리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왜,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 미안해, 너는... 이사를 갔거든. 원래 너희 집이었던 곳에선 이제 다른 사람이 살아. 그래서 안된다고 한거야. 알겠지?"

"그러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으면 됐잖아요."

"......"


 사쿠라코는 히마와리의 말을 듣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더 쏘아 붙힐까 하다가 오도가도 못하는 자신을 집에 초대까지 해 준 사람한테 그러는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저기 그런데, 지금 사쿠라코는 저보다 3살 더 먹은거 맞죠?"

"네가 3년전에 왔으니까... 따지고보면 그렇겠지."

"그럼 전 지금 사쿠라코를 언니라고 불러야 하는 건가요?"

"우리 사이에 낯간지럽게 무슨... 그냥 지금 부르는 대로 불러 줘, 너도 그쪽이 더 편하잖아?"

"그렇긴 하지만요... 그게 예의가 아닌가 싶어서 마음에 걸리거든요."

"다른 사람이라면 머리가 복잡할 상황에서 그런 걸 생각하고 있다니... 정말 너답네."

"... 무슨 뜻 인가요?!"

"너 좋을대로 생각해."


 그러면서 피식, 웃는 사쿠라코를 보니 히마와리의 가슴 속엔 울컥, 짜증이 치솟았다. 자기 머리 위에서 노는 듯 한 저런 여유로운 모습은 사쿠라코한테 어올리지 않아. 사쿠라고하면 무릇 좀 더 귀여운 모습을 - 


"아니, 지금 무슨 생각을.."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히마와리는 고개를 도리질 쳤다. 그런 천방지축 개구쟁이한테 귀엽다는 말은 전혀 어올리지 않은데, 어째서 지금 그런 생각이 든 것인지.


"무슨 생각 했는데?"

"ㄴ,네?!"

"방금전에 중얼거렸잖아."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신이 있었던 시간대의 사쿠라코를 상상하던 사이, 3년 뒤의 사쿠라코는 둥그런 모양의 주먹밥을 예쁜 그릇에 담아 거실 한복판에 있는 탁자에 내려다 놓았다. 모양도 깔끔해보였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게 겉보기에도 맛있어보였다. 히마와리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가다랑어 포, 아직도 좋아해?"

"네."

"먹어 봐."


 히마와리는 탁자 앞에 앉아 주먹밥을 쥐었다. 주먹밥의 외양은 완벽, 그 자체였으나 맛도 완벽할지 어떨지는 미지수였다. 사쿠라코의 요리실력을 알고있는 히마와리는 주먹밥을 입에 넣기 상당히 껄끄러웠다. 사쿠라코의 주먹밥은 보통 바닷물보다 짯으니까.


"... 안 먹어?"

"아, 아니요! 안 먹긴요."


 사쿠라코의 독촉이 있고 나서야 히마와리는 주먹밥을 입에 물었다. 한번 씹을 떄 마다 가다랑어 포의 감칠맛이 히마와리의 혀를 자극했다. 지금 먹고있는 주먹밥은 여태껏 자신이 먹어왔던 그 어떤 주먹밥보다 더 맛있었다. 한입, 한입 먹어치우다 보니 단숨에 반이나 먹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히마와리는 주먹밥을 다시 내려놓았다.


"어때? 맛있어?"

"네! 지금까지 먹었던 어떤 주먹밥보다 맛있어요! 많이 늘었네요! 사쿠라코."

"그래? 다행이다..."


 그렇게 말하며 사쿠라코는 눈 언저리를 검지로 훔쳐냈다. 히마와리는 그것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사쿠라코가 검지로 훔쳐낸건 눈물이었기 때문이다. 생각 해 보면 여기서 만난 사쿠라코는 이상했다. 처음 만났을때 짜증을 낸것도 그렇고, 내가 집을 찾아간다고 했을때 화를 낸 것도 그렇고, 그리고 밥을 차려주더니 눈물을 흘리질않나. 차분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후루타니 히마와리'가 엮이면 3년 전보다 더 자기 멋대로 화를 내는 일관성이 전혀 없는 모습이 히마와리에겐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저기, 사쿠라 - "


 대체 당신한테, 그리고 저한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질문하려던 찰나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이 울렸다.


"저, 죄송한데 혹시 전화를 받아도..."

"괜찮아."


 자신에게 지금 연락 할 사람은 한명 뿐이겠지. 히마와리는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자마자 예상했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 "안녕, 후루타니"

"네, 선생님"

- "별 문제는 아니여서 지금 막 타임머신을 고친 참이야. 배선 연결을 반대로 한 부분이 있더라고. 안 켜지는건 베터리가 없어서 안켜지는 거였고. 그래서 AA건전지 사서 다시 갈아끼웠다."

"... 건전지요?"

- "응, 건전지."


 타임머신같은 대단한 물건이 고작 AA 사이즈 건전지로 돌아간다구요? 이상하지 않아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으나 그 말을 침과 함께 삼켰다. 하긴, 오늘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상한 일 투성이였으니까, 이 이상 생각하면 머리만 아플 뿐이야.


- "뭐 하는거 없으면 최대한 빨리 와줘, 이걸 치워야 엉망이 된 과학실도 어떻게든 뒷정리를 할 수 있으니까. 내 잘못이긴 하지만 그래도 교장한테 깨지긴 싫다구."

"아, 알겠어요 선생님. 최대한 빨리 갈게요!"


 빨리 간다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빠르게 전화가 끊겼다. 목소리는 천하 태평이면서 성격은 엄청나게 급하다니까. 참 이상한 사람이야. 히마와리는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저기, 사쿠라코. 타임머신이 고쳐졌다는데 최대한 빨리 와주면 좋겠다고 해서 -"

"... 안돼?"

"네?"

"이것만, 이 주먹밥만 다 먹고 돌아가주면 안 될까?"

"......"


 차분한 목소리였으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히마와리는 무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사쿠라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냥 돌아간다면 사쿠라코한테도, 그리고 자신한테도 크게 후회가 남을 것 같았다.


"사쿠라코."

"... 응."

"처음 만날 때 부터 궁금했어요. 3년이란 시간 동안 그렇게나 어른스러워진 사쿠라코가 왜 저랑 관련된 일이 일어나면 짜증부터 냈는지. 방금 전엔 제가 이사를 갔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닌거죠? 대체 사쿠라코와 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거에요? 

"... 너랑 네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어."

"거짓말! 그런게 아니라면 당신이 이렇게 - "


 여태껏 사쿠라코한테 모든 감정을 실어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사쿠라코의 다음 한 마디에 히마와리의 입은 저절로 다물어졌다.


"네가 죽었어."

"... 네?"

"... 작년 겨울 즈음이었나. 휭단보도를 둘이서 건너는데 차 한대가 우리를 향해 달려왔거든. 순식간이었어. 내 등을 떠밀은 너의 손길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

"......"

"네가 그렇게 떠나니까 한동안은 아무 생각도 안들더라. 그래서 아무것도 안했었어. 하지만 이건 네가 원하는 게 아닐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네가 원하던 나'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했는데... 역시, 천성은 천성인가봐. 생각보단 말이 먼저나가. 틈만 나면 울컥하고. 그래도 나, 꽤 많이 노력했어. 이제 과자같은것도 잘 안먹고, 끼니도 잘 챙겨먹고, 청소도 열심히 하고..."


 방금 전 까지만 해도 그렇게나 무서워보이고, 그렇게나 날카로워보였던 사쿠라코가 한없이 약해보였다. 지금 자신의 눈 앞에 보이는 사쿠라코는 가면을 쓰고 있던 것이었다. 그것도 언제 꺠질지 모를 정도로 얇고, 여기저기 금 가 있는 유리같은 가면을. 히마와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탁자에서 일어서 사쿠라코의 등 뒤로 다가가 다소곳이 앉았다.


"... 고마워요, 그렇게나 쭉, 저를 생각해줘서. 많이 힘들었죠?"


 히마와리는 팔을 벌려 사쿠라코를 꼬옥 껴안았다. 사쿠라코의 등은 언제나와 똑같이 따스했다.


"마, 말을 이상하게 했는데! 벼, 별로 널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었어. 내, 내가 이상하게 사,사,살던건 맞았으니까. 그, 그래서 그냥 - "

"당신은 이상하지 않아요. 제가 사쿠라코한테 잔소리를 했던 건 조금 더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서 한 말들이었어요. 제가 바라던 사쿠라코의 모습은 언제나처럼 행복하게 웃는 모습이었어요. 이렇게 우울한 모습이 아니라."

"......"

"제 생각을 알았다면, 앞으론 밝고 행복하게 지내주세요. 3년 전에 그랬던 것 처럼."

"노력... 해볼게."

"고마워요, 사쿠라코."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히마와리는 껴안았던걸 풀고 사쿠라코의 옆자리에 반듯이 앉았다.


"사쿠라코의 말이 아니었어도 이 주먹밥은 다 먹고 갈 참이었어요. 맛있으니까요."

"... 그렇구나."

"그리고... 어차피 저한텐 타임머신이 있으니까. 여기에 좀 더 머무를수도 - "

"그건 안 돼. 히마와리."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3년 전의 나는 천방지축이었으니까. 나는 어떻게든 네가 없는 삶에 익숙해 질 수 있었지만, 3년전의 나는 그렇지 않을거야."

"... 그렇군요."


 사쿠라코는 시무룩하게 대답하는 히마와리를 보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저기, 만약에 3년 전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나한테 말 좀 전해줘."

"어떤 말이요?"

"... 차 조심하라고. 미래로 부터의 전언이니까 잘 새겨들으라고 하면 잘 들을거야. 아마도."

"미래로 부터의 전언이라..."


 어처구니 없는 실수때문에 여기 왔지만, 제법 값진 걸 얻어가네요. 히마와리는 사쿠라코의 포근한 손길을 느끼며 방긋, 웃었다.



"... 갔구나."


 히마와리가 떠난 오오무로 가의 거실은 방금 전하곤 달리 냉기가 감돌았다. 사쿠라코는 히마와리가 방금 전에 떠난 문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 그런데, 정말 뭐였을까."


 히마와리가 허무하게 죽은 날 이후부터, 사쿠라코의 곁엔 항상 환청과 환각이 맴돌았다. 히마와리는 언제나 자신의 귓가 언저리에 '당신때문이에요, 사쿠라코' 라는 말을 속삭였고, 눈을 감았다 뜨면 피칠갑을 한 채로 자신을 싸늘하게 비웃기도 했었다. 그렇게 환청과 환각으로부터 시달리다 병원에서 준 약의 힘으로 히마와리를 겨우겨우 잊어버릴 수 있었다. 오늘 까지는.


 오늘 만난 히마와리는 여태껏 만난 히마와리와는 달랐다. 자상하고, 자신한테 웃음 지어주고, 앞 뒤 꽉막힌 면이 있어서 귀여운 - 자신이 알고 있었던 히마와리였다. 그것은 환각이었을까, 꿈이였을까, 아니면 정말로 과거에서 온 히마와리였을까. 어떤 것이건 허무맹랑한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단순히 환각이나 꿈 따위로 넘어가기엔 히마와리의 품은 언제나처럼, 아니, 평소보다 더 따듯했다. 자신의 등을 떠밀던 손길을 잠시 잊어버릴 정도로. 사실 환각이건, 꿈이건, 시간 여행이건. 무엇이든 상관 없었다. 히마와리를 봤다는 사실, 사쿠라코한테 있어선 그게 전부였다.


"... 좀 더 솔직해 질 걸 그랬나."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해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네가 없는 삶에 익숙해 질 수 있다니, 히마와리도 참 둔탱이지. 그런 거짓말을 믿다니."


 사실은, 네가 여기에 있어주길 바랬어. 사쿠라코는 아랫입을 꾹 물고 눈물을 삼켰다. 문 밖으로 자신의 울음소리가 세어나가지 않게.

Posted by 비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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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부터 우라노호시 여학원엔 이상한 전단지가 나부꼇다. A4용지 양면에 우라노호시 여학원의 학생회장 '쿠로사와 다이아'를 힐난하는 내용이 가득 적혀있는 그 전단지는 이하의 내용으로 축약 할 수 있었다. - [다이아 학생회장의 바스트 사이즈는 사실 75 안팎이다. 다이아 학생회장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학교 공문서까지 위조하며 자신의 바스트 사이즈를 날조하고있다!]

그런 전단서가 나부끼니 쿠로사와 다이아에게 전단서의 진의를 물어보는 사람이 늘어만 갔다. 다이아의 절친한 친구부터 '사건' 냄새를 잘 맡는걸로 유명한 우라노호시 여학원의 신문부까지. 다이아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 마다 침묵을 지켰다. 그러면서 학생회 임원들과 자신의 '수하'까지 동원하여 그런 전단서를 뿌리는 사람을 찾으려 안간힘을 썻다.

ㅡ 그도 그럴것이, 그 전단서에 적힌 내용은 전부 사실이었으니까.

전단서를 뿌리는 사람을 찾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쉽게 걸리지 않으려고 전단서를 뿌리는 시간을 절묘하게 조절했던 데다가 전단서를 뿌리는 일도 이중, 삼중으로 지시를 내린 것 이었으니까. 하지만 다이아 밑에 있는 '수하'의 유능함 덕분에 다이아는 겨우겨우 범인을 찾을 수 있었다. 범인을 어떻게 잡을까 고민하던 때였다. [내일 모래, 방과 후에 옥상에서.] 라는 쪽지가 자신의 사물함에 들어와 있던 것은.

다이아는 본래라면 꽉 잠겨있을 문 손잡이를 돌렸다. 문 손잡이는 아주 부드럽게 돌아갔다. 

"..후우."

다이아는 결의를 굳게 다지고 문을 밀었다. 경첩이 다 녹슬은 문은 불길한 소리를 내며 밀렸다. 문을 열자마자 파도가 넘실거리듯 노을빛이 문 틈새로 새어들어왔다. 그렇게 빛나는 노을 속에서, 전단지를 뿌린 범인은 평소와 똑같이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었다.

"Halo."
"역시.. 당신이었군요."

노을의 역광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 속에서도 반짝이는 금발, 느긋하게 축 늘어진 눈동자. 옥상에서 다이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범인은 항상 엉뚱한 짓을 하며 다이아의 화를 돋구었던 '오하라 마리'였다.

"장난이 지나쳤어요. 마리."
"joke는 다이아의 bust size가 아닐까? 나 참, 학생회장의 권한을 이용해서 그런 짓을 할거라곤~ 그 누가 predict 했겠어?"

다이아는 자신을 놀리는 듯 한 마리의 억양을 듣고 순간 욱해서 소리를 지를 뻔 했지만, 자신이 오늘 마리를 찾은 이유는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며 화를 억눌렀다. 다이아는 심호흡을 하고 평정을 유지하며, 마리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 제가 오늘 여기에 온 건, 당신하고 싸우려고 온 게 아닙니다. 저는 당신의 능력을 높이 사요, 그래서 제안을 하러 온 거에요. 저와 손을 잡고 -."
"Stop! Dia, Don't Move!"
"...!"

하지만 마리의 품 속에서 예상치도 못한 물건이 튀어 나오자, 다이아는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아니, 다이아가 아니라도 누군들 멈출 수 밖에 없었으리라. 그도 그럴것이 - 

"..총이라니, 굉장히 험악한 물건을 준비하셨군요."

마리의 품에서 튀어 나온건, 권총이었기 때문이었다.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쏠거야."
"당신이 정말 저를 쏠 수 있을까요? 그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당신은 살인자가 될탠데?"
"시험 해 보고 싶으면 움직여 보시던지."

다이아는 피식, 코웃음을 치며 아주 당당하게 한 발자국 나아갔다. 다이아에겐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마리가 자신을 절대로 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하지만 마리는 다이아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끼릭, 방아쇠를 당기는 소릴 듣고 '아차.' 라는 생각을 했을 땐 이미 총신에서 나간 총알이 다이아의 이마를 강타한 뒤였다.

"아야!"
"See? Gun이 아니라 Airsoft Gun. But! 그렇기 때문에 더 망설임 없이 쏠 수 있지."
"끝까지 장난질입니까..?!"
"말했을 탠데? Don't Move! 라고."

그 말을 시작으로 마리는 사정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BB탄총의 총신이 맹렬하게 BB탄을 뿜었고, 다이아는 제자리에 서서 BB탄총을 맞을 뿐, 아무것도 하지 못하였다.

"아야! 아야! 아야!! 그, 그만하세요 마리!!"
"Nope."

마리의 BB탄총알 세례는 BB탄총의 탄창이 빌 때 까지 계속되었다. 다이아는 재장전 할 때가 기회라고 생각해 마리를 향해 달렸지만 마리의 재장전 속도는 다이아의 느린 뜀박질 속도를 가볍게 능가했다. 마리는 재빠르게 재장전 한 후 다이아의 이마를 겨누었고, 다이아는 뜀박질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Understand? 움직이면 많이 아플거야."
"저기.. 마리 씨? 협상하죠? 제 권한이라면 이 학교에서 할 수 없는건 없으니까."
"Oh.. Poor Dia, 저기, 다이아? 협상이란건 서로 아쉬울 게 있을 때 하는 게 협상이야. 나는 아쉬울 게 아무것도 없다구."

다이아는 이를 부득, 갈며 흘끔흘끔 뒤를 쳐다보았다. 계단 층계참의 그늘 속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와 준 건가요. 다이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리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초조해 하던 다이아가 갑자기 마음을 놓는 것을 보고 BB탄총을 바짝 쥐었다.

"..그래.. 협상이란건 아쉬운 게 있는 사람이 하는거죠. 당신의 말이 맞아요. 마리 씨."
"다이아, 너.. 뭘 숨기고 있는거야?"
"마리 씨? 다시 한 번 말하겠습니다. 협상하죠. 제 밑으로 들어 오세요. 그렇지 않으면 험한 꼴을 당하게 될 거에요."
"다이아..!!!"
"지금이에요! 카난!!!"

다이아의 신호가 떨어지자 마자 계단의 어둠 속에 숨어있던 카난이 어디서 구해온 건 지 모를 죽창(竹槍) 끝을 마리를 향해 겨누며 돌진했다. 마리는 사격연습장에서 갈고 닦은 실력으로 카난을 향해 BB탄총을 쐈지만 그것으론 죽창을 빙글빙글 휘두르며 방패삼아 돌진하는 카난을 막을 수 없었다. 카난은 전광석화와도 같은 몸놀림으로 마리의 배후를 잡았다. 등 뒤에서 자신의 목을 향해 죽창을 겨누는 카난에게 마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무기 내려 놔, 찔리기 싫으면. 움직여도 찔린다."
"크윽..!"

카난의 살기어린 한마디에 마리는 권총을 내려놓았고, 다이아는 무방비 상태의 마리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이런 것을 보고 [외통수]라고들 하죠? 쓸만한 수하가 없어서 혼자 움직였던 것이 당신의 패인입니다. 마리 씨."
"저기.. 카난?"

목이 죽창으로 겨누어 지고 있는데도 입을 나불대다니, 정말 대단한 정신력이야. 

"내가 쏴놓고 이런 말 하긴 좀 뭣한데.. Are you Alright?"
"하! 카난한테 있어서 그런 BB탄총따윈 멈춘 것 처럼 보였을 겁니다. 죽창으로 당신의 총탄을 막아 낸 것이 그 증거죠!"
"다 맞췄는데."
"네?"
"거짓말이야 다이아! 하, 하나도 안맞았어!"

그렇게 말하는 카난의 이마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카난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까 눈 끝에 살짝 눈물이 맺혀 있었다. 정말 다 맞아 준건가? 그럴거면 죽창은 왜 그렇게 빙글빙글 휘두른거야! 사람 햇갈리게! 다이아는 카난에게 한마디 하려다 여하튼 마리를 잡았으니 상관 없지. 라는 생각을 하며 그 말을 삼켰다.

"봤죠? 카난도 제 밑으로 들어 왔어요. 지금이라도 항복하고 제 밑으로 들어 오세요."
"니 밑으로 들어갔다니 그게 무슨소리야?! 난 그냥 수행평가 점수 올려준다는 말에 니 말좀 들어주는 것 뿐이구만. 이런 관계는 쌍무적 계약관계라고 하는거야."
"That's right! 다이아는 모든 사람을 자기보다 한 수 아래라고 생각하는 그 못 된 버릇을 고칠 필요가 있어!"
"시.. 시끄러워요! 여하튼, 마리! 선택하세요! 제 밑으로 들어 올건지, 아니면 징계를 받을 것인지!"
"......"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느긋한 빛을 품었던 마리의 눈이 그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 싸움은 내 승리구나, 언제나 처럼. 그래도 이번엔 종이 한 끝 차이였어. 다이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저기.. 다이아,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뭔가요?"
"넌.. 어째서, 공문서인 신체검사표까지 위조해 가며 자신의 bust size를 속인거야? 그게 그렇게 중요했어?"
"....."

다이아는 잠시 고민했다. 아무리 친한 친구여도 답하지 않았던 질문이었지만 자신을 끝까지 몰아 붙혔던 숙적이 하는 질문은 답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말할까, 말까. 말할까, 말까.. 

"...저는 루비에게 완벽 해 지라고 강요한 못된 언니에요. 그리고 그 강요가 루비를 나약하게 만들어버렸죠."

자신이 인정한 숙적에겐, 솔직한 모습을 보여줘야 겠지. 다이아는 그렇게 마음 먹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루비를 그렇게 망쳐버린 제 자신이 루비보다 떨어지는 점이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언어도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루비한테 있어서 완벽한 언니여야 해요. 그래서..."
"그래서 이런 소동을 벌였다니.. 다이아는 정말 요령이 부족한 언니네, 그렇지? 루비."
"뭐..라구..요..?"

다이아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없었던 귀여운 여동생, 루비가 서 있었다.

"루..루비..?"
"언니..! 저, 저기..! 그, 그런 짓 안해도.. 루, 루비는 언니가.. 너무 좋은걸...! 이, 이렇게 모자란 동생이라서 하, 항상 미안하다고 생각하는걸..! 그,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 생각이 맞았네, 루비 때문에 그런 짓을 한 거라면 이젠 Checkmate야. Dia, 쓸만한 수하가 없어서 혼자 움직였던게 내 패인이라고 했지? 틀렸어. 나는 처음부터 루비랑 같이 움직이고 있었거든, 물론 주종관계가 아니라 파트너 관계였지만."
"저기, 다이아랑 나도 주종관계가 아닌데, 쌍무적 계약관계라니까?"

마리의 말에 발끈한 카난이 태클을 걸었지만 마리는 그 말을 무시했다.

"언니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게 싫었데. 하지만 그걸 직접 말 할 용기는 없었고.. 그래서, 나도 이런 소동을 벌인거야. 언니 쪽도, 동생 쪽도.. 요령이 부족하다니까."

다이아는 그 말을 듣고 얼어 붙은 듯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얼어붙은 다이아를 녹인 건 루비의 포옹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짓은, 그만 두자.. 응? 언니."
"...... 죄송해요, 루비. 저는 정말 추한 언니군요. 이런 모습밖에 보여주지 못하다니."

다이아와 루비의 뜨거운 포옹을 보며 마리는 눈시울을 붉혔다.

"Oh.. 정말 감동적인 관경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카난? 마치.."

그리고 카난은 마리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그냥 가슴 사이즈 속인 것 가지고 별 병신같은 이야기가 다 나오네.. 아오.. 진짜 이 병신같은 동네.. 빨리 떠나던가 해야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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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푸르다 236화 - 본질에 대한 탐구 << 이거 보고 뭔가 마리가 할법 할 이야기라 파쿠리 해봤습니다. 다이아는 저딴 질문도 자존심 세워가면서 잘 대답해 줄것 같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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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다이아. 질문이 있는데."


"네? 뭔가요."


"만약에 먹게된다면 curry맛 poo? 아니면 poo맛 curry야?"


"하?"


다이아는 노골적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엉뚱한 말을 하는 마리를 쳐다보았다. 마리는 자기가 이상한 말을 했다는 자각도 못한채 그녀 특유의 고양이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늘 연습하는 내내 조용하나 싶더니 옷 갈아입으면서 물어보는게 저런 질문이라니. 다이아는 질색했다. 외국에선 저런 질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 아니면 역시, 오하라 마리라는 인간은 지구의 자전축을 따라 돌아버린 것 아닐까? 다이아는 마리의 말을 무시하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다이아, 혹시 curry를 모르는 건 아닐테고.. poo라는건 말이야. 그러니까. 똥이야. 똥. 다른 말로는 - "


"알거든요!? poo! shit! dung!! number two!! 사람을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쿠로사와 가에 걸맞은 삶을 살거라.' 라는 부모님의 말에 따라 다이아는 어떤 일이 있어도 품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어렷을 때 부터 그런 노력을 한 덕분에 다이아는 그 나이에 걸맞지 않은 품격과 고고함,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 누구를 만나건, 그 누구와 말하건 다이아의 품격은 깨지지 않았다.


'오하라 마리'라는 인간을 만나기 전 까지는.


"뭐야, 잘 알잖아. 그런데 왜 못 들은 척 하는거야."


"그딴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이아는 목소리에 날을 세워 대답한 다음 뒤로 돌았다. 다이아의 냉랭한 목소리를 들으면 웃어른들 마저도 풀이 죽기 마련인데도, 마리는 생글생글 웃으며 다이아의 어깨를 붙잡았다.


"oh.. 다이아, 이 question은 curry가 나온 이후부터 인류를 괴롭혀 왔던 난제라구, 혹시나 '그' 쿠로사와 다이아라면 answer를 알까 했는데, '역시' 다이아라도 이 문제는 무리인거야? 그냥 솔직하게 말하면 되는 걸, 다이아도 참."


"......"


다이아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있는 끈적끈적한 마리의 손, 자신을 비웃는 듯 위로 꺾였다 아래로 꺾였다 하는 악센트. 그리고 노골적으로 자신의 자존심을 시험하는 듯 한 저 화법까지. 다이아는 지난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이것은 마리의 함정이라는 걸, 이 진창같은 대화를 끝내는 법은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 마리의 손을 때내고 옷을 갈아입는 것이라는 걸. 


하지만 - 


"누, 누가 모른데요?! 참나. 그런 쉬운 문제. 지금이라도 답을 낼 수 있거든요?!"


언제나와 똑같이, 다이아의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다이아는 어깨 위에 얹혀있는 마리의 손을 쳐 낸 다음 뒤로 돌았다. 미묘하게 오른쪽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마리가 보였다. '오늘도 계획대로야.' 라는 듯한 웃음이었다.


흥, 누가 언제나 처럼 휘둘릴까봐? 그 웃음. 박살을 내 주겠어.


"Wow! 정말이야? 나도 내 나름대로의 answer가 있긴 한데. 그럼 셋, 둘, 하나 하면 동시에 말해볼까?"


"후우.. 정말이지, 이런 질 떨어지고 쉬운 질문을 난제라느니 뭐니.. 반성 하도록 하세요. 마리."


마리는 다이아가 투덜거리는 걸 무시하고 "Three,two.." 하며 카운트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One!" 이라는 말이 나오자, 두 사람의 입이 동시에 열렸다.


"당연히 카레 맛 똥이죠!" / "당연히 똥 맛 카레지?"


두 사람은 동시에 답 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 반대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Huh?"


"하아~?"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 다이아와 마리는 코웃음을 치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아니, 다이아는 책 많이 읽었다면서 Harry potter series 도 안 읽어본거야? 귀지맛 젤리는 젤리이기 때문에 먹을 수 있는거지, 만약 젤리맛 귀지가 있다면 그걸 먹을 수 있겠어?따져보면 이건 아주 당연한 답 아니야?"


"하아.. 당신, 이 문제의 본질부터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네요. 일단 해리 포터 시리즈는 잘 읽어봤구요. 젤리맛 귀지냐 귀지맛 젤리냐를 묻는다면 저는 젤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둘 다 안먹을거에요. 잘 생각 해 보세요. 똥 맛 카레면 그건 똥이나 다를 바 없어요. 다르게 말하자면 카레 맛 똥도 카레랑 다를 게 없다는 소리죠."


"But.. 다이아, 똥이라구? 그런걸 먹다가 똥독에 오를지도 모르는데."


"애초에 '맛'을 결정하는건 그 안에 든 성분이니까. 카레 맛 똥의 성분이라면 그냥 카레와 일치하겠죠. 만약에 90%는 카레맛인데 끝맛이 똥맛이다.. 라고 한다면 그건 또 모르겠지만."


"..풉, 크큭. 푸흐흐흡.."


마리는 입을 가리고 킥킥 대더니 부실에 놓여 있는 책상 위에 앉았다. 그리고 또 한참을 킥킥댔다. 다이아는 저년이 진짜로 실성한건가. 라고 생각했다가 '하긴, 쟤는 원래부터 실성해있었지.' 라고 생각하며 마리를 (자기 멋대로) 이해하였다. 마리는 그렇게 큭큭대다가 갑자기 정색하며 다리를 꼬았다.


"Oh.. 다이아, 역시 제가 인정한 Arch nemesis군요. 이 문제를 이렇게나 진지하게 고민 하고 있었다니."


아니, 딱히 진지하게 고민 한 건 아니고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은 것 뿐인데.


"But, 다이아. 생각을 해보라구요. 똥 맛 카레라면 '그래, 그래도 내가 먹는건 카레니까.' 라며 생각하고 먹을 수 있을거에요. 하지만, 하지만 말이죠. 카레 맛 똥을 먹으면 어떨 것 같아요? 뭐, 눈을 감고 먹으며 자기최면을 걸면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머릿 속 한 켠에선 '나는 지금 똥을 먹고 있어' 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을걸요?"


"만약 맛과 냄새가 카레라면.. 똥이라고 불리는 건 이름일 뿐, 본질적으론 카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한 질문은 그대로 돌려드릴 수 있어요. 만약 똥의 향과 똥의 냄새가 나는 카레라고 한다면. 그것을 과연 카레라고 생각하며 먹을 수 있을까요? 서로의 '성질'이 뒤바뀌고 남아있는 건 겉모습과 이름이라면, 거기에 의미가 있는 걸까요? 이름의 무게는 범인(凡人)들이 상상하는 것 보다 훨씬 가볍 - "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 올리며 자신의 논지를 당당하게 말하던 쿠로사와 다이아는 등 뒤에서 날아온 발차기를 맞고 "푸헙! 컥!" 따위의 괴성을 지르며 부실 바닥을 구르다가 엎어지고 말았다. 다이아는 욱신거리는 허리를 쓰다듬으며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 뒤를 쳐다보았다.


"그런 얘기는 집에 가서 해, 이 미친년들아. 바다에 공구리쳐서 빠뜨려버리기 전에."


다이아가 쳐다본 곳엔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 보는 미츠우라 카난과 카난 발치에 떨어져 있는 카레맛 고로케가 있었다. 다이아는 한 마디 하려고 했으나 카난의 몸을 휘감고 있는 살기를 느끼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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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잘거리는 소리가 귀를 자꾸 찔렀다. 수업 시간일탠데 누가 이렇게 떠드는거야. 나는 엎드린채로 눈을 꿈뻑꿈뻑 뜨며 교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10시 23분, 2교시가 끝난 시간이었다. 어라, 벌써 2교시가 끝난건가.. 그렇다면 조금 더 자도 되겠지?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를 깨우려는듯 햇살이 내 눈꺼풀 위로 아른거렸지만 나는 눈을 더 꾸욱 감고 몸을 뒤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햇살은 내 눈꺼풀 위를 떠나지 않았다. 그것도 짜증나는데 재잘거리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걔 뭐냐 그... 야, 왜 있잖아. 존댓말 쓰고 가식 쩌는 애."
"아, 후루타니?"
"응, 걔 말이야. 진짜 재수없지 않냐?"

히마와리 얘기를 하는건가? 잠깐, 지금 재수없다고? 그래, 히마와리가 재수가 없긴 하지. 시도 때도 없이 잔소리에, 맨날 나를 깔보기나 하고, 항상 어른인 척. 그것도 모자라서 커다란 가슴을 흔들고 다니는 그 꼴이란.

"맞아 걔 진짜 재수없어.. 말하는거 X나 싸가지 없다니까?"
"지가 선생인줄알아 X친년 완장 찼다고 나대는거 진짜 꼴보기 싫어"

히마와리.. 학생회에 들어갔다고 좋아하더니 여기저기 잔소리 하고 다녔던 건가.. 잔소리는 나한테 하는 거로 충분하지 않아? 완장 차고 우리한테 뭐라고 하는건 머리 벗겨진 학생 주임으로도 충분 하잖아. 너까지 학생들한테 잔소리를 할 필욘 없었다구.

"그리고 은근히 잘난척 쩐다니까? 저번애 체육복 입은거 봤냐?"
"아 그거? 난 무슨 체육관에 젖소가 있는가 했다. 괜히 쫄티입고와서 뭘 그렇게 흔드는지 진짜"

..그 체육복은 내가 빌려준 건데, 쫄티라서 미안하게 됐네요. 나는 귀를 닫고 잠을 청하려 했지만 녀석들이 낄낄거리는 소리가 귓 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재잘거리는 걸 계속 듣고 있자니 속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걸 멈출 수 없었고, 그래서 나는 눈을 번쩍 뜨고 상체를 일으켰다.

"야."

눈에 낀 눈꼽을 때고 내 책상 앞에서 재잘거리던 녀석들을 바라봤다. 아, 이녀석들. 저번에 어떤 애들 삥 뜯다가 히마와리한테 걸려서 벌점받은 애들 아니야?

"응?"

녀석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뭐 떄문에 자기들을 부른지도 모르는걸까,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끓어 오던게 폭발했다.

"그렇게 히마와리가 재수 없으면 걔 앞에서 말해, 뒤에서 재잘대지 말고, 시끄러워서 못살겠네 진짜."
"아니 내가 뒷담을 까건 니가 뭔 상관인데?"
"야, 쟤도 학생회 애잖아. 자기 친구 까이니까 저러는거 아니야? 아주 우정이 눈부셔서 빛이 난다 빛이 나."
"그냥 자는거 깨워서 짜증난건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거야.. 걔 재수없는거 맞아. 누가 뭐래? 그런데 왜 자는 사람 앞에서 시끄럽게 떠드냐고."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왼쪽에 있는 녀석을 밀쳤다. 잠깐 주춤하면서 눈이 동그래 지더니 동그래진 눈은 이내 짜증때문에 잔뜩 찌푸려졌다.

"뭔.. 어이가 없네? 야. 교실 니가 전세냈냐? 떠들어도 그냥 자는 애들 많은데 괜히 X랄이야.."
"걔들 책상 앞에서 떠들어 봐. 걔들은 안 그러나. 그것도 남 뒷담이나 까놓고 뻔뻔하게.."

이렇게 말하자 더 할 말이 없었는지, 나한테 밀쳐진 녀석은 나를 밀치려고 손을 뻗었고, 나는 그 손목을 낚아챘다.

"아! 야! 이거 안 놔?!"
"사과 해."
"뭔 사과를 하라는거야 이게 진짜 미쳤나..?!"
"내 잠 깨운거랑, 그리고 덤으로 히마와리한테도."
"이게...!"

끝까지 앵앵대는 목소리로 나한테 욕을 뱉어대는 그 입이 너무나도 짜증났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얼굴에 한 방...

..을 날리려고 했으나 공중에 뜬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주먹을 날리려고 했으나 움직이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내 팔뚝을 잡은 온기가 느껴져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히마와리가 험악한 표정을 짓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교실에 없었던 것 같은데, 화장실이라도 다녀온걸까?

"사쿠라코.. 엄연히 학생회 임원씩이나 되서 이런 주먹다툼이나 하다니.. 이제 당신이 애도 아니지 않습니까!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말로 해결을.."
"시끄러워! 지금 내가 누구떄문에 화를 내고 있는건데..!"

나는 히마와리를 밀쳤다. 끽, 끼익. 마룻바닥에 신발이 거칠게 끌리는 소리가 나다가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사물함을 등진채 눈을 찡그리고 뒷통수를 쓰다듬는 걸 보면 사물함이 머리라도 박은걸까.

"사쿠라코..!"
"아니, 저기, 그게.."

변명, 아니, 최소한의 사과라도 하려 했으나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히마와리의 손이 내 뺨을 때렸기 때문이다. 처음엔 어이가 없었고, 그 다음엔 화가 났다. 지금 내가 누구 때문에 화를 내고 있는건데, 나쁜 건 쟤들인데, 왜 내가 맞아야 돼? 그렇게 생각하자 머릿속이 하얘졌고, 나는 히마와리에게 달려들었다.

-

2

안 닫힌 창문 틈새로 거센 바람이 불자 관자놀이의 상처가 따끔거렸다. "아얏." 하는 신음소리가 새어 나가자 종이 한장 너머로 사쿠라코의 시선이 느껴졌다. 사쿠라코에게 하고 싶은 말은 너무나도 많았지만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최소한 무슨 일때문에 싸우는 거냐고 물어라도 봤어야 했는데, 다짜고짜 사쿠라코를 몰아 새운것도 모자라서 한번 밀쳐졌다고 이성을 잃고 사쿠라코한테 뺨따귀를 날린 꼴이란.. 자신의 행동이 너무 부끄러웠다.

툭,툭, 학생회 부실에선 서류가 쌓이는 소리와 숨소리만 쌓일 뿐이었다. 차라리 선배님들이 있다면 이렇게 분위기가 무겁진 않을탠데 하필이면 선배님들도 자리를 비운 상황이라 정적이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이럴 땐 사쿠라코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어줬었는데, 내가 한 일 때문에 단단히 삐진걸까, 사쿠라코는 자기 혼자 멋대로 삐졌다가 금방 기분을 풀고 혼자 멋대로 다가오는 아이라서 이럴 떈 어떻게 해야하는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럴 땐 역시 먼저 말을 붙이는 게 맞겠지.

"저기, 사쿠라코" / "저기, 히마와리."

서로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말이 튀어나오자 나는 입을 틀어 막았다. 이러면 더 말 걸기 어려운 분위기가 되잖아. 조금 더 빨리말하거나 조금 더 느리게 말할걸.

"머, 먼저 말해. 히마와리."
"아, 아닙니다. 사쿠라코부터 할 말이 있으면 하세요."
"....그게... 으음."
"......"

사쿠라코는 제자리에 앉아 서류 귀퉁이를 만져댈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역시, 내가 먼저 입을 열어야 하려나.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사쿠라코."
"으, 으, 으응?"
"왜 싸운건가요? 저 보고 학생들이랑 트러블을 만들지 말라고 한건 당신이면서."
"......"

뒷 말은 빼는게 나았으려나. 후회했으나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말은 되돌릴 수 없으니 조심하라고 사쿠라코한테 그렇게 신신당부를 한 게 나인데, 내가 말 실수를 할줄이야. 나는 속으로 자기 자신한테 꿀밤을 수십번 먹였다. 바보, 바보, 당신은 바보에요! 히마와리.

"벼, 별거 아니야. 그냥 자는 사람 앞에서 시끄럽게 떠들길레 그냥 몇마디 한 것 뿐이야."
"......"

나를 똑바로 보지 못하는 눈, 점점 더 빨라지는 서류 귀퉁이에 비비적 거리는 손길.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사쿠라코, 제가 말했잖아요? 당신은 거짓말하면 티가 엄청 나니까, 거짓말은 안하는게 좋다고."
"거,거, 거짓말 같은거 아니야! 진짜라구!"
"그런 일로 싸울리가 없잖아요. 사쿠라코의 잠귀가 어두운건 제가 제일 잘 알아요. 설령 떠드는게 들렸다고 해도 그냥 다시 잤을탠데."

그러다가 문득, 사쿠라코와 싸우고 있던 애들이 생각났다. 그 애들은.. 선생님들은 물론이고 선배님들도 예의주시하고 있던 불량학생들이었지. 그리고 그 예의주시에 걸맞은 언행을 보여주는 아이들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그 아이들이 당신 욕 하는걸 들은건가요?"
"아니. 그건 아니고.."
"그건 아니고? 욕하는걸 들은건 맞다는 건가요?"
"아, 아니. 그. 그게."

사쿠라코의 얼굴이 점점 더 붉어졌다. 

"그렇다면 당신의 친구가 욕을 들었다던지."
"......그, 그러니까. 자, 잠깐만."

저렇게 당황하는 사쿠라코를 보니 갑자기 사쿠라코가 날 밀치면서 한 말이 생각났다. 

-[시끄러워!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화를 내고 있는건데!]. 

"....아."
"자, 잠깐만. 아니야!"

내가 눈치 챘다는 걸 알아 차린걸까, 사쿠라코는 팔을 뻗더니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뭐가 아닌가요."
"그, 그러니까.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런가요, 그렇다면 아침에 누구 때문에 화를 내고 있던건지 알려주시지 않겠어요?"
"가. 갑자기 그 얘기는 왜나와? 히마와리 바보!"
"고마워요, 사쿠라코. 하지만 다음부턴 그런 얘기는 그냥 흘려들으세요. 저는 그런 저급한 이야기에 상처 입지 않으니까요."

부인하기도 지친걸까, 사쿠라코는 고개를 숙인 체 아무말도 안하고 있었다. 꾸깃꾸깃해진 서류 하나가 사쿠라코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쿠라코 옆 자리에 앉았다.

"..미안해요, 당신의 이야기를 먼저 들었어야 했는데. 앞으론 덮어놓고 당신만을 탓하지 않을게요."

부들부들 떨리는 사쿠라코의 등을 두들겼다. 그것이 무언가의 버튼이라도 된 걸까, 고개를 숙였던 사쿠라코가 고개를 들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얼굴에 남았네, 손톱 자국."
"아.. 걱정 마세요, 금방 낫겠죠 뭐."

상처 부근을 살짝살짝 긁었다. 사쿠라코의 손톱에 긁힌 것 치곤 별로 티가 안나기도 했고, 방금 전보다 따끔 거리는것도 덜해졌으니 금방 낫겠지.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해도 사쿠라코는 내 얼굴에서 눈을 때지 않았다.

"저기.. 사쿠라코?"
"......"

점점 더 가까워 지는 시선, 나는 몸을 뒤로 물렀지만 사쿠라코가 내 어깨를 붙잡는 바람에 그것도 못하게 되버렸다. 이내 얼굴과 얼굴이 맞닿았고, 사쿠라코는 입을 벌리더니 - 

내 관자놀이 부근을 햝기 시작하였다.

"자, 잠깐, 아윽. 사쿠라코! 뭐하는 짓인가요..?!"

사쿠라코의 혀는 부드러웠으나 상처때문에 관자놀이 부근이 너무나도 쓰라렸다. 낼름, 낼름, 낼름. 사쿠라코의 혀는 열번 정도 상처를 햝더니 그제서야 떨어졌다.

"맞아, 이런건 침 바르면 금방 낫지! 나도 미안해, 히마와리."

다짜고짜 침을 바르면 어쩌란건가요?! 라는 말을 하려고 했으나 사쿠라코의 미소때문에 그 말은 쏙 들어가버렸다. 

상처의 따끔거림이 방금 전의 잔소리와 함께 가슴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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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참 특이한 날이었다. 쿄쿄와 나, 단 둘이 내 자취방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묵묵하게 게임을 하고 있는 나한테 쿄코가 달라 붙지도 않고, 그렇다고 집안을 헤집어 놓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쿄코가 얌전하니 오히려 그게 더 불안했다. 폭풍이 치기 전 맨몸으로 밖에 떨어져 버린 기분이랄까. 하지만 게임을 하며 계속 흘끗흘끗 쳐다봐도 쿄코는 누운채로 핸드폰만 붙잡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신경쓰여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저기, 쿄코."
"응?"
"뭐 하는거야?"
"트위터."
"트위터?"

아, 생각났다. 쿄코가 '유이! 나랑 같이 트위터 하자? 응??' 하면서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바람에 같이 계정을 만들었었지. 나는 몇 일 하다가 내팽겨쳤는데 쿄코는 아직까지 트위터를 하고 있었구나.

"요 근래 핸드폰이 고장나서 잘 못했었으니까, 그동안 못한 트윗 전부 올려야지!"
"에.. 트위터, 재밌어?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던데."
"재밌어! 트위터 하고 나서 동인 활동하는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다른 사람들 그림도 더 빨리 볼수있고.."
"그런가..? 난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던데..."
"어라? 유이, 트위터 계정 있었어?"
"네가 같이 하자고 해놓고선 새까맣게 까먹은거야?!"
"아아.. 그..랬었나?"
"나 참.."

트위터라, 지금 내 계정은 어떻게 됐으려나. 혹시 해킹같은거 당한 거 아니겠지? 신경쓰여서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주머니에 넣어뒀던 핸드폰을 켰다. 트위터 어플을 깔았었던 것도 같은데 지운 것 같기도 하고.. 

"아, 찾았다."
"뭐를?"
"트위터 어플, 너 때문에 생각나서 한 번 들어가 보려구."
"...어... 유이, 혹시 내 계정 팔로우 하고 있..나?"
"아마 그럴껄? 트위터 계정 만들고 나서 제일 처음 한게 서로 팔로우 하는 거였으니까."
"유이, 자, 잠깐만. 트위터에 굳이 들어가 볼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유이는 트위터 안하잖아?"

어라? 왜 이러지? 이렇게 당황하는 쿄코는 엄청 오랜만에 보는데.

"그냥 생각나서 좀 들러보는 것 뿐인걸,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지고선.."
"아, 아니, 그게 그러니까.. 여, 여하튼 유이,다, 다른걸 하는게 더 재밌지 않을까? 트, 트위터같은건 하나도 재미 없다구."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웃는 얼굴로 트위터가 재밌다고 한건 너잖아.."

파들파들 떨리는 쿄코의 손이 내 핸드폰 쪽으로 다가오길레 나는 단숨에 트위터 아이콘을 터치하고 쿄코의 계정을 찾아갔다. 팔로잉 목록엔 계정이 하나밖에 없었기 떄문에 쿄코의 계정을 찾는건 무척 쉬운 일이었다.

"럼레이즌 애호가 연맹 럼코@원고해라? 계정명이 굉장히 기네.."
"아악, 자, 잠깐만 유이! 보, 보지 마..!"

핸드폰을 뺏으려는 쿄코의 손을 이리저리 피하며 화면을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팔로워 수가 1천명..?? 아니, 그것보다.. 미라쿠룽 라이바룽 가위치기 기원.. 미라쿠룽이랑 메차쿠차하고 싶... 쿄코, 뭐야 이게?"
"......아, 아니, 그, 거 , 그게.. 그..."

하얗게 질렸던 쿄코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내가 너무 짓궃었나.

"..미안해."
"아, 아니, 그런 걸로 미안할 필요는 없지.. 으응..음.."
"..이것들, 전부 쿄코가 그린 그림이야? 이쁘네."
"정말?! 고마워!!"

그림을 칭찬하자 쿄코는 자기가 언제 그렇게 쑥스러웠냐는 푹 숙였던 고개를 쳐들고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그런데..

"...어떤 글을 봐도 미라쿠룽 얘기 뿐이구나. 조금 질투나네."
"응?"
"..아, 아니, 잊어 줘."

내가 무슨 말을 한거람. 사람도 아니고 그냥 캐릭터한테 질투 난다는 표현까지 쓰고.

"지금 '질투 난다'고 한거지? 맞지?"
"아, 아니라니까 글쎄."
"유이도 참 -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은데~ 히히."
"시. 시끄러워 바보야."

손날을 세워 쿄코의 이마를 가볍게 쳤다. 쿄코는 언제나처럼 과장되게 벌러덩, 넘어지며 "여자애한테 정말 너무해, 유이." 라며 우는 소리를 내었고, 나도 언제나처럼 그 말을 무시하고 다시 게임 컨트롤러를 붙잡았다.

"유이 -."
"왜?"
"핸드폰에 진동 울리지 않았어? 문자 온 거 아니야?"
"그래? 못들었는데.."

쿄코의 말을 듣고 핸드폰을 켜보니 푸쉬 알람이 와있었다. 트위터 떄문에 울린 푸쉬 알람이었는데, 알람에 뜬 내용은 이러하였다 - [럼레이즌 애호가 연맹@럼코 : @Funami_yui 사랑해! 유이 ♡]

"뭐, 므 뭐, 무슨 , 뭐, 뭘 보낸거야?!"
"평소에도 이런말은 자주 하잖아. 왜 부끄러워 하고 그래?"
"아니 그.. 그게.."

활자로 보니까 더 부끄럽다고 해야하나,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는다고 해야하나. 뭐, 뭐라고 설명을 못하겠는데 왠지 부끄러워..!

"아, 유이."
"왜?"
"방금 전에 내가 쓴 트윗이 10만번째 트윗이었어."
"..그래서?"
"그래서? 라니 그렇게 뚱해? 그냥 아무 생각없이 쓴건데 10만번째 트윗이 너한테, 그것도 너를 사랑한다는 내용으로 갔다니 뭔가 특별해보이지 않아?"

나는 한숨을 쉬고 다시 일시정지 버튼을 눌렀다. 이 바보한텐 뭐가 정말로 특별한건지 알려줘야겠구나. 마침 쿄코가 먼저 나를 부끄럽게 만들기도 했고.

"쿄코, 이리 와봐."
"응? 왜그래?"

쿄코는 아기처럼 나를향해 기어왔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어느덧 쿄코가 내뱉는 숨결까지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졌고, 나는 재빠르게 고개를 돌려 쿄코와 입을 맞췄다. 쿄코가 방금 전에 뚝딱 해치운 럼레이즌 향이 코에 들어왔고, 쿄코가 바른 립케어의 촉촉함이 느껴졌다. 점점 입술과 입술이 하나로 합쳐진다는 느낌을 받을 떄 즈음, 쿄코가 뒤로 물러섰다.

"뭐, 뭐한거야..?"

귀까지 새빨갛게 물든 얼굴, 조금이지만 떨리고 있는 입술. 저런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내가 무엇을 했는지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우와, 나.. 잘도 이런 생각을 했구나. 부끄럽게..

"특별하다는 건 이런거야. 그.. 10만번째 트윗이란게 얼마나 대단한건진 모르겠지만, 그런 대단한걸 줬으니.. 보답으로."
"그냥 솔직하게 '나한테 10만트윗을 주다니! 고마워 쿄코! 나한텐 너밖에 없어!' 라고 말하면 안되는거야?"

쿄코는 그렇게 말하며 등 뒤에서 나를 끌어 안았고, 나는 쿄코한테 꿀밤을 먹이고 "시끄러워. 바보야." 라며 그 추근거림을 일축했다.

오늘도, 언제나와 똑같은 하루였다.

Posted by 비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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