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과 후나 점심시간엔 항상 뭔가에 홀린듯 텅 빈 음악실을 찾아간다. 조율도 채 제대로 되지 않은 싸구려 피아노와 앉으면 꼬리뼈가 아파오는 딱딱한 의자, 그리고 창문 너머로 스며들어오는 하얀 햇빛 안을 헤엄치는 하얀색 먼지들. 누가 봐도 더러워 할 법 한 풍경이었지만 나는 이 곳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내가 있었던 곳 어디보다도 불편한 곳이었지만 이 곳은 내 집에서도 찾을 수 없는 편안함이 있었다.

오늘은 어떤 곡을 칠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피아노에 앉았다. 쇼팽? 어제 쳤고.. 베토벤? 지금은 칠 기분이 아닌데. 차라리 어제 만들던 곡을 치면서 작곡이나 해 볼까, 하고 피아노의 하얀 건반에 손을 얹은 순간 낡아빠진 문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호노카?"

"..나 참, 나라구, 째진눈."

항상 내 연주를 엿듣는 사람은 호노카였는데.. 문을 열고 튀어 나온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니코? 여긴 무슨일이야?"

"아니, 그, 그냥."

질문을 받은 니코는 안절부절 못하며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데 그 꼴이 장난치다가 들킨 꼬마아이 같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 다른 목적이 있었던걸까. 하지만 이런 심증만 가지고 추궁해봤자 니코는 자기 속 마음을 털어 놓지 않을 것 같았다. 

그냥 피아노나 치자. 나는 다시 피아노 건반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슬며시 눈을 감고, 어제 했던 것과 똑같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햇빛속에 잠긴 하얀 먼지가 음표가 되어 내 주변을 떠돌아 다니는 느낌을 받았다. 음악속에서 헤엄치는, 아니, 음악과 하나가 되는 기분. 나는 완전히 눈을 감고 음악 속으로 천천히 잠겨들어갔다.

"항상 느끼는거지만 - 부럽네."

점점 더 밑으로 잠겨가던 내 의식은 니코의 말 한마디에 다시 현실 속으로 튕겨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점점 더 빨라지던 내 손가락도 멈추었고, 내 눈 앞엔 음표가 아닌 먼지만이 떠다닐 뿐이었다.

"응?"

"피아노도 잘치지 공부도 잘하지 - 사실, 니코는 뭘 하든 잘 하는 편이 아니잖아?"

"....."

평소와는 명백히 다른 태도였다. 요즘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걸까, 적당히 웃기고 넘어 갈 수도 있지만 왠지 그래선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를 잘하는건 부모님의 독촉때문이야, 피아노를 잘치는건.. 타고난 거지만."

"마키의 인생은.. 축복받은 인생이네."

"글쎄.. 난 이걸 축복이라고 생각 안해."

"응? 어째서?"

"일단, 피아노를 아무리 잘쳐도 부모님이 인정을 안해주니까, 난 그래서 어렸을 때 부터 부조리를 느꼈지. 다른 애들은 뭘 잘해도 인정받는데 내 부모님은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 봤자 성적 이외에는 인정을 안해주니까."

"....."

"그리고, 피아노를 잘친다는 이유때문에 어렸을 때 왕따도 당해봤어, 그래서 난 어렸을 때 부터 시기와 질투라는 감정을 배웠지. 피아노에 재능이 있다는 이유로 세상의 안좋은 면을 어렸을 때 부터 가까이에서 보아 온 셈이야, 이건.. 축복이라기 보단 저주에 가깝지. 꽃피지 못하는 재능은 의미가 없으니까."

"마키는 진짜 공부는 잘하는데 바보라니까?"

"무.. 뭐?!"

"네 재능은 지금도 충분히 꽃 피고 있잖아? 그리고 그 재능 덕에 이렇게 니코와.. 아니, u's의 모두와 이어 질 수 있었던 거고. 어렸을 때 세상의 어두운 면을 봤으면 어때? 지금 니코와.. 아니, 그게 아니라.. u's의 모두와 함께 세상의 기쁜 면을 보고 있잖아? 그러니까, 분명 축복이야."

"....."

나를 쳐다보며 진지하게 말하는 얼굴을 보자니 왠지 모르게 기뻐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푸.. 푸흡, 푸흐흡.."

"..니코가 웃긴말했어?"

"아니야, 분명.. 축복이네. 고마워."

나는 내 삶에 저주가 내렸다고 생각했었는데, 나한테 저주를 걸었던 건.. 나였구나. 드디어 그 저주에서 해방 된 기분이야. 고마워, 고마워. 니코.

"기분 좋아 보이니까 다행이네.. 그럼, 나 간다? 째진 눈."

"..그런데 너 말이야, 여긴 왜 온거야?"

니코는 그 말에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모기만한 목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리다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익더니 나를 두고 그대로 뛰쳐 나갔다.

.. 그렇게 중얼거리면 내가 못들었을 거라 생각한걸까, 내 귀는 니코 생각보다 훨씬 좋은데.

[ " 요즘 기분 안좋아 보여서, 고민 상담이라도 해주려고 왔지. 그런데.. 지금 그렇게 밝게 웃고있으니까. 그걸로 됐어." ]

Posted by 비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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