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사로운 햇빛이 창문너머로 나를 비추었고, 좋은 날씨에 새들마저도 기분이 좋은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육상부원이나 야구부원만 쓰던 운동장도 오늘만큼은 시끌벅적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날이었다. 다만 이렇게 아름다운 날씨도 내 책상 위에 아무렇게 쌓여 있는 서류뭉치들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진 못했다.


"일이 안끝나잖아..."


 울고 싶다 -. 는게 솔직한 감상이었다. 그렇다고 누구한테 도와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부 학생회장씩이나 되서 이런 일도 혼자서 처리 못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 지금은 점심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점심 시간마저 학생회 업무를 보라고 하는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 아닌가. 이렇게 반은 고집으로, 반은 의무감으로 시작한 서류정리를 시작한지 20분도 되지 않았는데도 내 집중력은 이미 흐트러 질 대로 흐트러 져 있었다.


"나중에 할까..."


 이건 문예부 예산안, 이건 육상부 실적 보고, 이건 가을에 있을 체험학습 동의서... 돈 주고 섞어놓으라고 해도 이렇게 섞어놓진 못할탠데, 어쩌다가 이렇게 섞여버린 건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냥 점심시간은 쉬고 방과 후에 학생회 부원들을 모아서 처리해야 할려나. 잠시 갈등하다가 '그래! 학생회 부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것도 학생회장이 가져야 할 덕목이니까.' 라는 자기암시를 걸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여어 - 마츠모토."

"니시가키 선생님?"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던 그 순간, 굳게 닫혀있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나나모리 중학교 최고의 괴짜선생님, 니시가키 선생님이었다. 또 뭔가를 터트리고 왔는지 하얀 머리는 그슬린 흔적이 있었고, 하얀 피부, 보라색 원피스, 하얀 가운 너 나 할것 없이숯검정이 묻어있었다. 평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평소에 옆구리에 달고 다니던 학생회장님이 안보인다는 것 뿐인가.


"어라, 여기에도 없나? 어딜 간거람..."

"또 뭘 터트리고 오신 거에요?"

"오, 스기우라!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깜짝 놀랐네."

"처음부터 쭉 여기 있었거든요?"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곤란한 사람이라니까, 어떻게 선생님이 된건지 원... 


"음... 마츠모토는 어디에도 안보이고... 빨리 실험 해 보고 싶은데... 저기, 스기우라. 내 실험 잠깐만 도와주면 안될까?"

"전 지금 바쁘다구요 니시가키 선생님."

"잠깐이면 되니까 조금만 도와주라, 이번 실험은 바쁜 사람을 위한 실험이란 말이야."

"네? 대체 무슨 실험이길레..."


 아차, 나는 입을 꾹 닫았지만 이미 늦었다. 내가 어느정도 호기심을 붙혔다는 걸 알자마자 선생님은 문 앞에서 한달음에 내가 있는 자리까지 다가와 내 손을 붙잡았다.


"분신을 만드는 실험이야."

"...예?"

"일단 가면서 얘기하자고!"

"엑. 자, 잠깐만요!"


 선생님은 내 손목을 붙잡더니 그대로 학생회실 밖으로 나를 질질 끌고갔다. 뿌리 치려고 해봤지만 선생님의 손은 생각보다 억셌다. 최대한 뒷걸음질 치면서 저항했으나 이 역시 헛된 노력일 뿐이었다. 대체 무슨 실험을 하려는 걸까,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걸까, 책상에 있는 서류뭉치들은 언제 다 정리하지? 도와줘! 토시노 쿄코! 도와줘! 치토세...!



 선생님의 손에 질질 끌려서 도착한 곳은 과학실이었다. 과학실에 들어서자 마자 '헉'소리가 절로 나왔다. 과학실 바닥이 전선 투성이였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전선은 사람이 두 어명정도 들어 갈 수 있는 원반에 연결 되 있었는데, 그런 원반 두개가 나란히 놓여져 있었다.


"자, 내 야심작이야. 니시가키 28호."

"에... 이게 뭐하는 건데요?"

"일단 저 원반 위에 올라가볼래?"


 "저게 뭐 하는 거냐니까요?" 라는 질문을 해도 선생님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동안 옆에서 니시가키 선생님을 봐왔던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말을 안들어주면 이 선생님도 내 말을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듣지 않을 거라는 걸. 나는 어쩔 수 없이 거치적 거리는 전선을 해쳐나가 원반 위에 올라 섰다.


"방금 전에 분신을 만드는 실험이라고 말했으니 눈치 챘을 것 같지만, 네가 지금 올라가 있는 니시가키 28호는 분신을 만드는 기계야. 내가 이제 리모컨의 스위치만 올리면 반대쪽 원반에서 분신이 만들어지는 기계지."

"...예?"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자신의 분신을 만드는 기계라고? 그런 기계를 만드는게 가능하긴 한가? 그리고, 그런 기계를 만들 정도로 능력 있는데도 왜 이런 촌구석에서 선생님을 하고 있는거지? 과학실에 틀어박혀서 대체 뭘 만드나 했더니 이런걸 만드는 중이었었나?


"만들어 지는 분신한텐 자의식은 있으나 내가 프로그래밍한 3원칙을 지켜야 해. 첫번째, 분신은 인간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되며, 위험에 처해 있는 인간을 방관해서도 안 된다. 두번째, 첫번째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분신은 자신의 원형이 된 인간에게 복종해야 한다. 세번째, 첫번째와 두번째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분신은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어때?"


 로봇의 3 원칙을 그대로 복사 붙혀넣기 한 거 아닌가요? 라는 말이 턱까지 차올랐으나 그냥 말을 아끼기로 했다. 저렇게나 뿌듯해 하고 있는 선생님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말 해 봤자 선생님의 귀에 들어가지도 않을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네 분신한테 숙제를 하라고 명령 해 놓고 너는 나가서 놀거나, 다른 일을 할 수 있는거지. 한번 쯤 상상해 본 일 아니야?"

"그, 한번 쯤 상상 해 본 일이긴 한데 그게 가능이나 한 -"

"물론!"


 선생님은 가운 주머니에서 500엔짜리 동전 크기만한 스위치를 꺼내더니 꾹 눌렀다.


"...어라."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선생님?"

"아니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됐었는데...? 이상하다."

"그러면 이제 돌아 가 봐도 될까요? 이제 슬슬 시간이..."

"잠깐만 기다려 봐."


 선생님은 원반으로 다가오더니 원반을 힘껏 발로 찼다. 하얀 가운이 무색한 행동이었다. 그렇게 세 번 정도 찼을까. 갑자기 내 발 밑이 새하얗게 빛났다.


"꺄악?! 누, 눈부셔...!"

"오, 역시 기계는 때려야 말을 듣는다니까. 하하하."

"선생님?!"

"걱정하지 마 - ! 제대로 돌아가는 중이니까."


 형광등을 몇백개는 킨 것 같은 반짝임때문에 눈을 차마 뜰 수가 없었다. 원반에선 세탁기 몇백개 정도가 동시에 돌아가는, 아주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 소리는 곧 멈추었고, 눈꺼풀 틈새로 들어오는 새하얀 빛도 어느새 점점 꺼져갔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떳다. 아무것도 변함이 없었다. 위에 아무것도 없었던 맞은편 원반 위에 '스기우라 아야노'가 나와 비슷한 자세로 서있었다는것 빼고.


"...에?"

"음! 좋아, 여기까진 정상이군. 자, 스기우라, 분신 스기우라한테 명령 해볼래?"

"어... 음 그, 그러니까..."

"그럴 필욘 없어."


 내 맞은 편에 있는 스기우라 아야노는 사뿐히 원반에서 내려왔다. 외형, 몸짓, 목소리. 그 무엇 하나 나와 다른 점이 없는 사람이 내 눈 앞에 있으니 참으로 기분이 이상해졌다.


"나도 '스기우라 아야노' 니까, 네가 무슨 생각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 그리고 지금은 그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

"응?"

"어라."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앞에 있는 것은 스기우라 아야노였으나 나와 똑같은 스기우라 아야노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내 맞은 편에 있는 또다른 나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 니시가키 선생님을 보자 확신으로 변했다.


"나는 할게있으니까 이만 실례할게."

"자, 잠깐만!"


 저 스기우라 아야노를 가만히 두면 돌이킬 수 없을 일이 벌어질 거라고 내 예감이 경보를 울리고 있었다. 과학실 밖으로 나가는 스기우라 아야노를 막기 위해 나는 원반에서 내려와서 달리려 했으나 원반 아래에 즐비한 전선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고, 거치적 거리는 전선에서 발을 빼는 사이 내 맞은 편에 있던 스기우라 아야노는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선생님! 대체 뭘 만드신 거에요?!"

"어라? 이상하네? 저런 식의 행동을 보이면 안되는데..."

"그렇게 느긋한 반응을 보일때가 아니잖아요! 속터져 정말!!"


 선생님한테 화풀이를 해봤자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겠지, 나는 스기우라 아야노를 쫓아 과학실 밖으로 나갔다. 스기우라 아야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최대한 빠르게 달려가며 스기우라 아야노의 뒤를 쫓았지만 차이는 좁혀지지 않은체 그저 뒤를 쫓는 것으로 벅찼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더니 왼쪽으로 꺾고, 쭉 가다가 오른쪽으로... 대체 어디로 가는걸까? 라는 의문이 들었고, 그 의문은 내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을 때 즈음 풀렸다. 스기우라 아야노는 교실에 들어갔다. 2학년 5반에.


'우리 반 이잖아...?!'


 내가 있는 반에 또 다른 스기우라 아야노가 들어간다면 일대소동정도론 안끝날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복도 쪽으로 난 창문으로 얼굴을 뺴꼼 내밀어서 교실 안을 들여다 보는것이 전부였다. 다행이도 교실 안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엎드려서 자고 있는 애 한명과 교실 중앙에서 떠들고 있는 토시노 쿄코, 후나미 씨, 그리고 치토세가 교실 안에 있는 인원의 전부였으니까.


 잠깐만, 토시노 쿄코?


"하아... 하아... 다행이다. 여기 있었네. 토시노 쿄코."

"응? 아야노, 무슨 일 있었어? 그렇게 헐떡대면서 들어오다니..."

"저기, 토시노 쿄코. 아니, 쿄코."

"에?"


 자, 잠깐만, 저게 지금 뭔 짓거리를 하는거야...?! 토시노 쿄코를 이름으로만 불러? 토시노 쿄코의 아래 턱을 붙잡아? 뭐, 뭐하는 짓이냐고...?! 평소랑 똑같이 장난스럽게 받아 쳐야지, 왜 가만히 있는거야 토시노 쿄코?! 후나미 씨는 지금 당황해서 표정관리가 제대로 안 되고 있고. 치토세! 너는 이상한 걸 알고 좀 말려줘야 되는거 아니야? 코피나 흘리고 있을때가 아니잖아! 안경 도로 쓰란 말이야!


"5시에, 학교 옥상으로 나와 줘, 할 말이 있어."

"어? 어, 어어... 으, 응. 알겠어..."

"그럼 난 이만,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알겠지? 5시에, 꼭이야!"

"아, 알겠어..."


 스기우라 아야노는 당황한 토시노 쿄코를 남겨두고 천천히 교실 밖으로 나왔다. 내가 밖에서 훔쳐보고 있었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는 듯 교실 밖으로 나오자 마자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싱긋, 웃는것을 보니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할 일, 다 끝냈어. 이제 서류 정리하러 가면 되는거지?"

"아, 아니, 이렇게..."

"할 말이 있으면 빨리 해줬으면 좋겠는데, 아직 정리할 서류가 산더미잖아?"


 이렇게 감당 안 될 상황을 만들어놓고 그렇게 말하면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내 분신은 매우 착실했다. 내가 수업을 듣는 동안 그 많던 서류를 혼자서 다 정리해버렸으니까. 수업을 마치고 도와주려고 학생회실에 들렀다가 놀라서 탄성이 절로 나왔다. 니시가키 선생님의 기계(니시가키 28호라고 했던가)는 내가 바라던 바를 완벽하게 처리 해 준 샘이다. 그래, 정말로 완벽했다. 사고를 하나, 그것도 대형사고를 하나 터트린 것 만 빼면.


"아 ㅡ 개운하다. 드디어 다 끝냈네! 약속시간 못 맞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끝냈어."

"약속... 이라니, 설마?"

"오늘이야말로 토시노 쿄코, 아니, 쿄코한테 내 마음을 전하는거야."

"마,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


 토시노 쿄코한테 고백한다는 분신의 의지는 아직도 꺾이지 않은 것 같았다. 지금 시각 4시 30분, 30분 안에 이 분신을 설득하고 토시노 쿄코한테 지금 일어난 일을 얼버무려야했다. 니시가키 선생님에게 잠깐이나마 휘둘린 댓가치고는 너무나도 가혹했다.


"말도 안된다니, 왜?"

"왜냐니?! 너도 '스기우라 아야노' 니까 알고 있잖아. 토시노 쿄코한테 고백하는게 얼마나 터무니 없는 일인진...!!"

"너도 '스기우라 아야노' 니까 잘 알고 있잖아? 토시노 쿄코한테 고백하는건 늦으면 늦을수록 안좋을 거란거."

"그, 그건..."


 토시노 쿄코는 언제, 어디서, 누구랑 있건 항상 중심에 있는 사람이였다. 활발하고 붙임성 있는 성격 덕에 인기도 많았고, 항상 농담만 하는 것 같아도 곤경에 처한 반 친구가 있다면 먼저 나서서 도와주는 상냥함도 가지고 있었다. 알고 있다. 토시노 쿄코를 좋아 하는 사람이 나 하나가 아니라는 것 쯤은, 하지만, 그래도...


"...고백에 실패하면, 전부 끝이잖아. 거절당하면 무슨 낯으로 토시노 쿄코랑 같이 있을 수 있겠어?"

"하지만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 쿄코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면? 혹은 쿄코가 다른 곳으로 이사라도 가서 더 이상 못보게 된다면? 이런 시간이 언제까지고 이어질거라고 생각하진 않잖아?"

"그, 그래도...!"

"물론 부끄럽겠지, 하지만 부끄럽다고 도망만 친다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도망친다면 남는 건 후회뿐이야. 그리고 고백할 때 생기는 부끄러움 마저 내가 대신 뒤집어 쓰는데, 왜 이렇게 지레 겁을 먹는거야?"

"겁을 먹은게 아니라...!!"

"그러면? 그러면 뭔데? 응?"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웃음꽃이 만발했던 분신의 얼굴엔 어느새 험악한 표정만 남아있었다. 분신에게서 느껴지는 기백에 질려 주춤, 주춤 몸을 움직이다 중심을 잃고 의자와 함께 쓰러졌다. 신음소리를 내며 엉덩이를 쓰다듬는 나를 보니 분신의 험악한 표정은 어느새 경멸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유약해선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보다 보다 못참겠어서 내가 나온거고."


 토시노 쿄코한테 내 마음을 전하는 건 확실히 겁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분신을 막아서려는건 단순히 그것때문이 아니다. 생각을 좀 더 정리하고 싶지만 이대로 또 다른 나한테 한심한 취급을 받는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땅을 박차고 일어서 학생회실 밖으로 나가려는 분신의 팔을 붙잡았다.


"겁을 먹은게 아니야!"

"똑같은 말만 반복하려고? 듣기 싫어, 놔."

"못 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손의 떨림은 이내 전신의 떨림으로 변했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아랫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째서 눈물이 나오려는걸까, 목이 먹먹해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먹먹함을 침과 함께 내 가슴 깊숙한 곳으로 삼켰다.


"겁을 먹은게 아니라... 내 마음은... 그러니까... 조금 더, 조금 더 정리 한 다음에 말하고 싶단 말이야."

"그게 '저는 겁을 먹어서 고백을 못하겠습니다.' 라는 말이랑 뭐가 다른건지 도저히 모르겠다고, 나는."

"누군가를 이렇게나 좋아 해 본건 처음이야, 그래서, 이 마음을 전할땐 확실하게 전하고 싶어. 나는 왜 너를 좋아하게 됐는지, 그렇게나 좋아하는 너와 함께 무엇을 하고 싶은지. 이렇게 무엇에 쫓기듯이 내 마음을 전달하는건... 싫어!"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다가 누가 고백이라도 해서 쿄코를 채가면?"

"기다릴거야, 토시노 쿄코가 다시 혼자가 될 떄 까지."

"만약에 다른곳으로 이사라도 가서, 영영 못보게 된다면?"

"반드시 찾아갈거야. 어디에 있건간에."

"......"


 방금 전 까지만 해도 거침없이 말하던 분신의 입이 멈추었다. 기나 긴, 너무나도 기나 긴 침묵이었다.


"...네 마음은 잘 알겠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우유부단 한 건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나 봐."

"그, 그럼...!"

"나는 이제 니시가키 선생님한테 가서 지금 일어난 상황을 원래대로 돌려 달라고 할거야, 쿄코한테는 무슨 말을 하건... 알아서 해."

"....."


 안도의 한숨이 절로 쉬어졌다. 그 한숨을 기점으로 온 몸의 힘이 풀려서 나는 털썩,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었다. 분신은 그런 나를 보더니 싱긋, 웃으며 나를 향해 손을 내밀어 주었다.


"5시 5분 전이야, 쿄코, 아니, 토시노 쿄코를 바람 맞힐 생각이 아니라면 서둘러 움직여야 해."

"고, 고마워..."


 힘이 풀린 다리에 다시 힘을 주고,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토시노 쿄코가 기다리고 있을 옥상으로.



 깔끔하게 정리 된 학생회실에 들어올 때 마다 니시가키 선생님이 만든 분신과 보냈던 시간들이 떠오르곤 한다. 선생님은 내 분신이 보여주었던 이상한 태도와 말을 전해듣고선 "기계가 오작동한걸까? 마츠모토랑할땐 멀쩡했었는데." 라는 말만 할 뿐, 어째서 그런 분신이 나왔는지는 잘 모르는 눈치였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생각해 볼 수록 이상했다. 과연 그 분신은 단순히 기계의 오작동때문에 나타난 것이었을까? 어쩌면 도망치고 부끄러워 하는 데 지친, 내 가슴 속 깊은 곳에 숨어있었던 마음이 우연한 기회로 튀어 나온것은 아니었을까?  


"스기우라 아야노~!"

"토, 토시노 쿄코?!"

"에어컨 쐬러 왔지롱~"

"여긴 학생부 부실이거든?! 부외자는 입장 금지야!"

"에이, 우리 사이에 쫀쫀하게 왜그래?"

"다, 달라 붙지마. 덥단 말이야..."


 뭐, 더 이상 내 마음을 숨기거나 하는 일은 없으니 확인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확인 할 수 없는 일에 머리를 굴려봤자 나오는 것도 없으니 그저 부질없는 추측일뿐, 확실한 건 니시가키 선생님이 만들어준 기계 덕에 조금은 더 내 마음에 확실해 질 수 있다는 사실, 그것 하나 뿐이다.

Posted by 비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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